연재
김정호 (편집위원)
등록일 : 2024.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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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의 시베리아 방식은 비록 식량 수매 사업에서  단기간 큰 성과를 거두도록 하였지만, 다른 한편 농촌 정세를 긴장시켰다.  스탈린이 나중에 인정한 바와 같이, 비상조치를 통해서 수매한 것은 농민 수중의 여유 식량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농민의 기동 식량(机动粮), 기근 대비 식량도 수매를 강요하였으며, 수매 과정에서 "명령 강요, 혁명 법제의 파괴, 호별 순시, 불법 수색 등의 현상이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농민의 불만을 초래하여 파종 면적이 떨어지고 정세는 불안해졌다. 각지에서는 신경제정책(NEP)을 취소하고 잉여곡물 수집제를 복원함으로써 전시공산주의로 돌아갈 것이라는 소문이 분분했다. 스탈린은 2월 13일 전국 각지의 당 조직에 보낸 지시에서 "신경제정책은 우리 경제정책의 근간이며, 상당한 역사 기간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소문을 반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스탈린전집>11권, 178, 15쪽)


1928년 3월, 소련 게페우가 샤흐트와 돈바스 광산에서 자본가계급 전문가들의 반혁명 파괴사건이 적발되어 53명이 반역·파괴죄로 기소됐다고 밝히자 국내 분위기는 급랭했다. 나중에 이 사건은 계급적 적대감을 선동키 위해 의도적으로 조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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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이 "샤흐트사건" (1928년)을 심리하고 있다

 

4월 6일~11일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와 중앙감찰위원회는 식량 문제와 샤흐트 사건을 논의하기 위한 합동 전원회의를 열었다. 스탈린과 부하린이 각각 회의에서 발언을 했는데, 무슨 말을 했는지 오늘날까지 분명하지가 않다. 그러나 4월 13일 그들이 회의 정신을 지방 당 조직에 전달한 보고서를 보면, 식량 수매 문제와 해결 방법에 있어 두 사람이 심각한 의견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의 모스크바 조직 활동가들에게 보고하면서 스탈린은 식량 수매 위기의 원인은 공업 발전 속도가 너무 느리며, 사회주의 축적이 너무 적어 농촌에 상품 공급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농촌은 여전히 소농 경제 위주이고, 이 같은 소농 경제는 “가장 신뢰성 없고 원시적이며, 가장 발달하지 못한 생산량이 적은 경제”라고 주장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3년 연속 풍작을 통해서 부농이 성장하기 시작했으며 농촌 전체, 특히 부농은 이 시기 식량을 축적하고 식량 수급을 조작하려고 시도할 가능성을 갖게 되었다. 이들은 투기꾼들의 지지를 얻었으며, 이러한 투기꾼들은 곡물 가격을 인상해서 물가를 높였다.

 

스탈린은 이로부터 식량 수매 위기가 보여주는 것은 국내의 “농촌 자본주의자들이 신경제정책 하에서 우리나라 건설의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인 식량 수매 문제에 있어 소비에트 정권에 대한  첫 심각한 공격을 감행”한 것이라 결론지었다. 샤흐트 사건에 대해서도 스탈린은 이 사건은 “국제자본과 우리나라에 있는 그 대리인들이 소비에트 정권에 대해 가한 또 다른 심각한 공격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식량 수매 위기와 샤흐트 사건을 내적인 연관성이 있는 사건으로 보았으며, 국내외 자본주의에 의한 연합공격으로 간주했다.(<스탈린전집>11권, 35-39, 54쪽) 여기서 스탈린은 계급투쟁의 신호를 보낸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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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구세주 대성당 폭파 (1931년 12월 5일)

 

부하린은 레닌그라드에서 당의 열성분자들에게 4월 전원회의 정신을 전달할 때 이와는 다른 분석을 했다. 부하린은 식량 수매 위기가 발생한 것은 경제 지도기관의 오산으로  인해 국민경제 비율 상의 불균형을 초래한 “일상적 지도상의 잘못, 일시적인 잘못”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구체적으로는 (1) 부정확한 가격 정책. 곡물 가격은 너무 낮고 해마다 떨어지는데, 경제작물과 축산물에 대한 국가의 수매가격은 너무 높고 해마다 높아지면서 농업내부의 협상가격차*가 끊임없이 확대되고 있다. (2) 불합리한 세수정책은 곡물업의 발전에 불리하다. 밭작물은 농민의 순수입에서 39.5%를 차지하지만, 조세에서 차지하는 몫은 66.59%에 달한다. 그에 비해 비농업소득(부농경제의 비근로소득 포함) 비중은 27.8%인데, 조세에서 차지하는 몫은 5.2%에 불과하다. (3) 공산품의 공급이 부족하고 화폐가 불안정하여 농민들은 아직 화폐를 축적 수단으로 안심하고 사용할 수 없다. 농민은 가을에 농산물을 판매할 때 일정 금액의 화폐를 얻지만, 이때 공산품은 농민의 요구를 충족시켜줄 만큼 시장에 출시되지 않는다. 농민은 할 수 없이 화폐를 유통 수단으로 사용해서 다른 상품을 구매해 버린다. 이것은 시장의 균형을 심각하게 파괴하고, 농민들로 하여금 수중의 식량을 팔기를 원하지 않게끔 만든다.

 

*협상가격차(鋏狀價格差)ㅡ 독점 가격과 비독점 가격과의 차가 가위를 벌린 것처럼 증대해지는 현상. 농산물과 공업 제품과의 가격 차이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따라서 부하린은 식량 위기를 해결하는 방법은 비상조치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공산품 공급을 늘리고 농산물 및 축산품 가격을 조정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자본 건설 투자의 활용률을 높이고, 정책을 조정하여 경제의 다양한 기본요소 간의 균형을 유지토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경제정책(NEP)은 어떤 식으로든 취소하지 말고 비상조치를 폐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이상  <부하린문선>中권, 214-217, 224, 230쪽)


일부 다른 정치국원들도 비상조치로 인한 농촌 정세에 대해 불안해 했다. 리코프는 4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중농과의 관계가 깨질 위험이 있다"며 "부농에 대한 억압이 경작지를 축소시키도록  하고 있다. 이는 우리가 만회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프룸킨 재정인민위원도 동일한 견해를 갖고 있었다.


논쟁 과정에서 점차 두 파가 형성되었다. 한 파는 스탈린을 위주로 하고 몰로토프, 카가노비치, 보로실로프 등이 성원이었다. 또 다른 한파는 부하린을 필두로 리코프, 톰스키 (소련노동조합 중앙이사회 의장), 우그라노프 (모스크바시당 서기), 프롬킨 등이 성원이었다. 그들은 각자 신문과 잡지에 글을 발표하였으며, 각종 회의에서 연설을 하고 이름을 거명하지 않은 채 상대방의 관점을 비판했다. 그러나 이때 누구도 중앙위원회에서 다수를 획득하지 못하였으며, 각 파벌은 자신들의 관점을 비교적 소상히 설명할 수 있었다. 스탈린도 종종 타협과 양보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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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초의 톰스키(사진 앞줄에서 키가 가장 작은 사람), 당시 전소련노동조합 중앙위원회 의장, 정치국 위원.

 

5월 6일 부하린은 제8차 소련공산당청년단 대표자대회에서 보고하면서 “계급투쟁을 진행하자” 혹은 농업에서 “돌격, 약진”과 같은 구호를 신랄하게 비난했다. 스탈린은 지난 16일 대회 폐막식에서 "자류"론, "운에 맡겨라"론, 자연히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이론을 비판하며 "노동자계급의 전투준비태세를 강화하여 그 계급적 적에 대항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스탈린전집> 11권 57, 59쪽)


5월 27일 [프라우다]에 기고한 글에서 부하린은 '공업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면서, 농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공업주의는 기생적"이라고 말했다. 아스트로프, 드 말레츠키 등과 같은 부하린을 지지하는 적색교수학원(레드칼리지) 일부 경제학자들은 스탈린 정책을 시행하는 간부들의 이름을 거론하며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농민들과 노점을 선동하고 개인 농업을 부정하며, 농업 파괴를 기반으로 한 집단화를 추구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 사람들이 비상조치를 일종의 정책으로 간주하고, 형법 제107조를 통해 사회주의로 나갈려고 한다고 비난했다.


스탈린도 5월 28일 적색교수학원에 들러 그곳 및 공산주의과학원, 스베르들로프대학, 러시아사회과학연구소협회 학생과 과학자들에게 <식량 전선에서>라는 보고를 했다. 그는 지금 “식량난의 근원은 우리나라의 상품 식량 생산량이 식량 수요량보다 느리게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탈출구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1) 농업 측면에서 개인 농민 경제에서 집단 공공경제(집단농장)로 전환하는것 (2) 기존 국유 농장을 확장 통합하고 새로운 대규모 국유 농장을 설립하고 발전시키는 것 (3) 중소 개인 농민 경제의 단위 면적당 생산량을 지속적으로 높이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스탈린은 집단농장은 “레닌의 협동조합 계획의 필수적인 일부”이며, 이 둘을 대립시킬 수 없다. 이제 “대중적인 집단농장운동의 여건이 성숙되었다”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소비에트 정권이 부농과 노동자계급이라는 두 개의 대립하는 계급에 동시에 의존할 수 있다는 이론은 “반동파만이 할 수 있는 속임수”라면서, 노농동맹은 농촌의 자본주의자들 및 부농과 싸워야 실현될 수 있다고 말했다. (<스탈린전집> 11권, 72-82쪽)

 

스탈린과 부하린의 갈등이 아직 표면화되지는 않았지만, 사실 그들 관계는 이미 매우 긴장되었다. 부하린은 6월 12일 스탈린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에서 우리는 노선도 공통된 시각도 없고, 중앙 최상층부에서 최소한의 범위 내에서라도 총체적으로 정책문제를 논의한 적이 한 번도 없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문제는 "우선 우리와 전체 당이 어떤 완전한 계획도 갖고 있지 않다. 우리는 가장 섣부른 초경험주의자보다 더 엉망이다. 그 다음 우리는 사상적으로도 당이 길을 잃게 했다.....우리의 비상조치는 (필요하지만) 사상적으로 이미 제15차 당대회의 결의와는 다른 새로운 정치노선으로 변모 발전하고 있다.....물론 필요하다면 당대회 결의를 떠나는 것은 전혀 두렵지 않다. 하지만 그럴 필요성은 어디에 있는가? 모든 것이 부농의 문제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이 9억이란 수자는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이제 그것이 신화적인 숫자임을 인정한다. 만약 우리의 식량이 본래부터 적다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부농이 우리를 통제했다’라고 말할 수 있나?  만약 모든 해결책이 집단농장에 있다면, 그렇다면 기계화에 필요한 돈을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 빈곤과 분산의 바탕위에서 집단농장을 발전시켜야 하는데, 이것이 과연 일반적으로 옳은 방법인가? 소액 저축의 흡수 방침은 계속 유효한가, 아니면 이미 낡았는가? 자영업 활성화 방침은 여전히 유효한가, 아니면 이미 낡았는가?”


부하린은 스탈린에게 "나는 다투지 않고, 싸우고 싶지도 않다. 나는 특히 우리 국가 전체와 우리 당이 현재 처해 있는 이처럼 어려운 상황에서, 싸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다."라며 보증조로 말했다. 코민테른 제6차 대회가 눈앞에 다가온 것을 감안하여 부하린은 스탈린에게 "대회를 차분하게 개최하고, 불필요한 균열을 만들지 말며, 시끄러운 분위기를 만들지 말자"고 요구했다. ( <부하린논고>, 중앙편역출판사, 339-340쪽)


프롬킨도 6월 15일 정치국에 보낸 편지에서 "농촌의 일부 빈농을 제외하고는 모두 우리를 반대하는 정서들이 있다"면서 "제15차 당대회 이후 농촌에 대한 새로운 방침이 우리 경제의 악화를 심화시켰다", "최근의 방침으로 인해 중농 기본 대중은 희망과 비전이 없다고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부농에 대한 수탈로는 대응할 수 없다고 지적하고, 시장과 곡물 시장을 개방하고 곡물 가격을 인상할 것을 권고하였다. "국영농장을 기습적이고 초기습적인 방법으로 확장하지 말라"고 하면서, "집단경제에 가입한 가난한 농민들을 최대한 도와야 한다"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제14차, 제15차 당대회로 돌아가자”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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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할린 (왼쪽에서 첫번째) 과 부브노프 (오른쪽에서 첫번째), 고리키 (오른쪽에서 두번째) 가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체육 행사에 참석했다 (1928년 6월 10일)

 

스탈린은 편지를 읽은 후 재빨리 대응하였다. 6월 20일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프롬킨의 편지를 "부농에게 관대하고, 규제를 철폐하라는 신청서"라고 규정한 후, "부농에 대한 단호한 투쟁을 벌여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스탈린전집> 11권, 101-110쪽)


6월 27일  정치국 회의에서 부하린은 리코프, 톰스키, 우글라노프의 동의 하에 성명을 낭독했다. 노동동맹이 파탄의 언저리에 처해있음을 경고하면서 자유로운 교역과 시장관계를 위한 조건을 창출할 것, 개인경제를 발전시킬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그러자 몰로토프는 이를 반 레닌주의, 반당적인 문서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그중 10분의 9는 받아들일 수 있다라고 말했다. 회의에서 스탈린, 부하린, 리코프, 미코얀, 바우만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설립하여 전체 경제 상황과 관련된 곡물 구매 정책을 수립키로 결정했다. 곧이어 위원회는 기본적으로 부하린의 관점을 반영하는 요강(개요)을 작성했다. 7월 2일 정치국은 이 요강을 통과시키고, 7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 제출하여 검토키로 결정했다.


7월 4일부터 12일까지 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개최되었다. 전원회의는 코민테른 문제 외에도 국내 경제 상황 특히 곡물 구매 정책에 중점을 두었다.


회의에서 격렬한 논쟁이 발생했다. 오신스키, 안드레예프, 소콜리니코프, 우글라노프, 톰스키, 리코프 등이 모두 발언에 나섰다. 그들은 농민들 사이에 만연한 불만을 거론하면서 비상조치를 제도화하지 말고, 농민들에게 계속 양보를 해 노농동맹이 깨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몰로토프는 우리는 과거에도 미래에도 부농을 타격해야 하고, 중농도 손상을 입혀야 한다고 단호하게 주장했다. 카가노비치는 발언할 때 비상조치를 강력히 지지하면서, 양곡수매운동의 속도를 다그쳐야 한다고 했다.


7월 9일, 논쟁은 절정에 달했다. 스탈린은 <공업화와 식량 문제에 관하여>라는 장문의 발언을 했다. 그는 발언에서 몇 가지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며 의견 차이를 더욱 확대했다. 스탈린은 사회주의 공업화를 위한 자금의 출처가 두 가지 있다고 했다. 하나는 가치를 창출하는 노동자이고, 다른 하나는 농민이다. 소련은 식민지와 다른 나라를 약탈하거나, 노예적인 외채를 빌려 자금을 조달할 수 없다. 따라서 노동자 스스로 가치를 창출하고 산업을 발전시키는 것 이외에도, 자금의 주요 공급원은 농부들로부터 가져와야 한다. 이를 위해 농민들은 일반세 즉 직접세와 간접세를 국가에 납부해야 할 뿐만 아니라, 농산물을 비싸게 사고 싸게 팔아야 하는 협상가격차가 일종의 '추가세'이자  '공금(贡款)' 같은 것이다. “이것은 사람을 불쾌하게 한다”. 하지만 “공업 발전의 기존 속도를 유지 가속화 하고, 공업이 국가의 요구를 충족시키고 농촌의 물질적 생활 수준을 지속적으로 향상시키기 위해” 서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스탈린전집> 11권, 138-1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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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공업화 선전 포스터


스탈린은 발언에서 '계급투쟁 첨예화' 이론도 처음으로 제시하고 논증했다. 신경제정책(NEP) 원칙은 전시공산주의 이후가 아닌 전시공산주의 이전인 1918년 초에 제시됐다는 것이다. 레닌이 수립한 이 정책은 퇴각이 아닌 공격이며, 부농과 네프만에 대한 공격이고, 농업 집단화를 위한 공격이라는 것이다. 이런 공격은 필연적으로 투쟁을 의미한다. 이어서 "우리의 모든 전진과 사회주의 건설 방면의 작지만 중대한 성과 하나하나는 우리 내부의 계급투쟁의 표현이자 결과"라면서 "이를 통해서 우리의 전진에 따라 자본주의자들의 반발이 더욱 강해지고, 계급투쟁은 더욱 첨예해질 것이라는 결론을 내려야 한다"고 했다. "죽어가는 계급들이 자기 진지를 자진해서 포기하고, 반란을 일으키려 하지 않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정반대로 사회주의를 향하여 전진하는 것은 착취 분자들의 이러한 전진에 대한 반발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고, 착취분자들의 반항은 계급투쟁의 필연적 첨예화를 일으키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위 책,  144-150쪽)


부하린은 스탈린의 ‘공금’이론에 놀랐다. 그는 7월 10일자 장문의 발언에서 트로츠키주의 이론과 플레오브라진스키의 “사회주의 원시적 축적 법칙”을 떠올리게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 법칙에서 출발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농부들에게서 "기술적으로 가져갈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져가는 것이 트로츠키주의 슬로건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개인경제를 발전시키고, 농산물 가격을 인상해 '협상가격차'를 없애야 하며, 개인 농민 경제의 발전과 집단 농장의 설립을 대립시켜서는 안 되고, “집단화 자체는 개인경제의 발전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스탈린의 이름을 직접 거명하지는 않고 "미코얀 동지를 비롯한 일부 동지들이 개인 농업의 성장 가능성이 닫혔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 이것은 완전히 헛소리다"고 말했다. 개인 농민 경제의 발전 가능성을 열어 주지 않으면, 그러면 "궁극적으로 공업(식량을 통해서, 원자재를 통해서, 시장을 통해서)에 타격을 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사회주의 공업의 축적은 농업의 축적에 달려 있는 함수”라고 강조했다.


그는 비상조치와 관련해 현재 이 조치는 "역사적으로 낡았으며 경제적으로 더 이상 우리에게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반대로 그것은 과거에 구매 작업을 완료할 때 다음과 같은 엄중한 후유증을 남겼다.  (1) 부농을 타격할 뿐만 아니라 중농을 다치게 하여 노농동맹을 위협하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다. 부농은 박탈당해야 하지만, 몰수나 탄압과 같은 수단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조세정책을 사용하여 조정해야 하며, 조세정책과 같은 지렛대는 우리가 중농을 해치지 않고 부농을 거의 박탈할 수 있도록 해준다. (2) 비상조치는 대다수 농민의 이익을 심각하게 훼손시켰다. 농민들을 극도로 불만스럽게 만들고, 현재 전국 일부 지역에서 과거에 볼 수 없었던 농민들의 대중적 행동과 도시 시위까지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 비상조치를 용납할 수 없다."  "우리의 정책 중심은 동맹에 대한 어떠한 위협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레닌의 기본 유언을 실현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부하린논고>, 344-350쪽; <부하린문선>中권, 267-2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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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에서의 강제적인 양곡수매 


전원회의는 격론 끝에 7월 10일 <전체 경제 상황에 입각한 식량 수매 정책>을 결의했다. 결의안은 사회주의 공업화를 진행시켜야 할뿐만 아니라 “개인 소농경제를 연합하여 개조해 대규모 집단경제로 전환"하는 임무를 확고하게 완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다른 한편, 식량수매 위기의 원인과 그 대책 등에 대해서는 부하린의 표현을 채택해서 스탈린의 '공금'이론 등은 결의에 반영되지 않았다.


이는 논쟁 쌍방이 아직까지 누구도 다수를 얻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결의안이 채택된 후 스탈린은 7월 11일 회의에서 결의안에 포함시키지 않은 '공금'론을 변호하기 위해 <공업과 농업의 결합과 국영농장에 대하여>라는 발언을 했다. 그의 발언은 부하린의 실명을 거론하지 않았지만 분명히 부하린과 그의 지지자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스탈린은 어제 어떤 사람이 농민에게 '공금'을 내게끔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발언을 했다면서, 협상가격차를 즉시 없애야 한다면서 농산물 가격 조정을 요구했다. "이 요구는 현재 국가 공업화의 이익에 반하는 것이며, 우리나라의 이익에 반하는 것"이라 했다. 어떤 사람은 곡물 구매와 관련한 농업 발전 방법에 대해 이야기할 때 집단 농장과 국영농장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는데,  “이것은 비정상적이고 이상한 현상이다”. 어떤 사람은 또중농과의 동맹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오늘날의 조건에서 이 동맹을 공고히 하려면 부농 즉 농촌의 자본주의자들과 단호히 투쟁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일부 '천박한 관찰자'들이라는 것이다. (<스탈린전집> 11권, 164-170쪽)


부하린은 스탈린의 관점이 이미 트로츠키-지노비예프 동맹 반대파의 그것과 매우 가깝다고 보았다. 그는 스탈린이 트로츠키파에게 포로가 될 것을 우려했다. 그리하여 7월 11일 소콜리니코프의 주선으로 카메네프를 찾아 자신의 견해와 이번 전원회의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부하린의 모습은 매우 고민스러웠으며, 한 시간 동안 매우 격동하여 이야기했다. 그는 "스탈린의 노선은 총체적으로 혁명에 대한 재앙이며, 이 노선은 우리에게 파멸을 가져올 것"이라면서 정세에 대한 깊은 불안감을 느꼈다. 그는 스탈린의 노선을 세 가지로 요약했다: (1) 공금론. “이것은 플레오브라진스키의 이론과 똑같다.” (2) "사회주의가 앞으로 나아갈수록 저항은 더욱 거세진다. 이것은 정말 어리석고 무지하다."  (3) "기왕 공금 납부가 필요하고, 이에 따라 반항 또한 강화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는 강력한 리더십을 필요로 한다. 자기비판은 지도자를 가르켜선 안 되고, 단지 정책을 집행하는 사람만 건드릴 수 있다. 사실상 자기비판은 이미 톰스키와 우그라노프에게로 향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결국 경찰국가가 된다.”


부할린의 말 속에는 그가 이미 스탈린과 결별했고, 심지어는 스탈린의 경질 문제까지 언급했음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의 경질에 관한 일은 지금 정치국에선 아직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지도층 내의 일부 상황에 대해 거론했지만, 이런 정황을 공개적으로 밝힐 것인지에 대해선 "우리가 그렇게 하면 분열 활동을 금지하는 조례를 꺼내 우리를 목 졸라 죽일 것이다. 또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은 작은 꼼수로 우리를 죽일 것"이라며 망설였다. "스탈린은 권력을 잡는 것 외에는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다. 그는 우리에게 양보해서 권력이란 열쇠를 손에 쥐었다. 그는 이 열쇠를 움켜쥐었으며, 앞으로 우리를  쉽게 제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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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하린


부할린은 말을 할 때면 입술이 때때로 신경질적으로 경련을 일으키면서 액운이 닥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는 스탈린은 복수하기 좋아하는 사람이고 이랬다저랬다 한다고 말했다. 그는 다음의 예를 들었다. 그가 스탈린에게 두 번째 편지를 쓴 후에, 스탈린은 그를 사무실로 불러 말했다: "니콜라, 당신과 나는 히말라야산이다. 다른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아."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정치국 회의에서 부할린은 스탈린의 이 말을 인용했지만, 스탈린은 이렇게 소리쳤다: "당신은 거짓말을 하고 있어! 당신은 거짓말을 해! 당신은 거짓말을 해! 당신은 정치국원을 이간질해 나에게 반대하게 하려고 해."


부할린이 말할 때 카메네프는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 않은 채 가끔 문제를 제기했다. 면담 후 그는 간단한 요지를 작성했다. 부할린은 카메네프에게 그들 사이의 만남은 비밀이며, 아무도 모르게 하라고 거듭 당부했다. 하지만 1929년 1월, 트로츠키파는 이 요지를 전단지로 인쇄해 모스크바에서 뿌렸다. 이 일은 이후 스탈린이 부할린을 상대하는 데 있어 중요한 빌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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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춘란(16) ㅡ 제3지대장 남도부에 대한 허위사실과 진실 ②

ㅡ 사람을 찾아서

2024.04.30

연재

초보자를 위한 시창작 강의(7)ㅡ 비논리적 논리

2024.04.29

연재

요셉 스탈린(제24회) ㅡ 스탈린과 부하린 논쟁 (1)

2024.04.28

교양

법이야기 ⑥

타인간의 대화를 몰래 녹음하면 의외로 강한 처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

2024.04.25

교양

나는 사장님이 아니로소이다

2024.04.22

연재

지춘란(15)ㅡ 제3지대장 남도부에 대한 허위사실과 진실 ①

ㅡ 사람을 찾아서

2024.04.16

교양

[허영구의 산길순례] 이성계와 남이장군의 전설이 있는 축령산의 봄

2024.04.15

교양

초보자를 위한 시창작 강의(6)ㅡ 착상과 포착

2024.04.15

연재

[민병래의 사수만보] '내가 귀한 우리 아들 죽였다' 아내마저 떠나버리고

ㅡ 87년 9월 8일 7327부대에서 숨진 최우혁 이병의 아버지 최봉규, 형 최종순 ②

2024.04.14

연재

요셉 스탈린(제23회) ㅡ후유증은 여기서부터 시작되다

2024.0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