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태규 (전 한겨레 논설실장)
등록일 : 2023.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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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진보적인 생각을 지녔던 인사들이, 어느 날 눈을 떠보니 갑자기 보수 진영의 전사로 바뀌어 있는 것을 목도하는 경우가 많다. 구체적으로는 이재오, 김문수, 김영호 같은 사람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한때 민주화운동, 노동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다가 그와 대척적인 진영으로 옮겨갔다. 이른바 '전향'이다. 

전향이란 무엇일까? 무엇이 좌파들을 우파로 전향하게 만들까? 나는 쉽게 말해, 전향이란 바리케이드의 이쪽 편에 있던 사람들이 저쪽으로 넘어가는 현상이라고 본다. 그들이 바리케이드를 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터이다. 출세를 위해, 경제난을 벗어나기 위해, 또는 자신의 이념을 더 잘 실현하기 위해서  등등.

한 인물이 자신이 그동안 가졌던 생각을 바꾸는 것은, 그 한 사람만의 일로 끝나지 않는다. 그와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에게도 큰 영향을 준다. 그를 추종해 함께하는 사람도 있고, 배신감에 치를 떠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떤 경우엔 사회의 세력 관계에도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이쪽 편에 있던 그가 저쪽으로 갔으니 저쪽 세력이 더욱 강해졌다거나 대세라는 식의 해석을 낳으면서 말이다.

한 사람이 긴 생을 살면서 처음의 생각을 끝까지 유지하는 것은, 바꾸는 것만큼이나 어려울지 모른다. 그래서 '한 사람에 대한 평가는 그가 죽어서 관 뚜껑에 못질할 때에 정확하게 내릴 수 있다"라는 옛말도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 말에는 그렇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변함없이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뜻도 담겨 있다. 더구나 오랫동안 군사독재 정권의 폭압 정치 아래서 지식인들의 전향 공작을 경험한 우리 사회에서는 부지불식간에 '전향은 악, 전향 거부는 선'이라는 의식이 자연스레 형성돼왔다. 

정권 교체기마다 '누가 전향했네' 하는 소리가 심심찮게 들리고 술자리의 화제가 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과문한 탓인지 전향에 관해 본격적으로 연구한 책은 별로 보지 못했다. <전향>(논형, 쓰루미 슌스케 지음, 최영호 옮김, 2005년 8월)은 일본의 작가 쓰루미 슌스케가 쓴 책이다. 제목이 전향이어서, 얼른 읽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부제 '전시기 일본정신사 강의 1931-1945'가 말하듯이, 전향에만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전쟁 시기 일본정신사를 다루고 있다. 물론 '전향'이란 단어가 핵심 열쇳말 노릇을 한다. 쓰루미는 비판적인 지식인 중 한 사람으로, 그가 1979년부터 2년간 캐나다 맥길대학에서 영어로 강의한 내용을 모아 책으로 냈다. 일본어가 아니라 영어로 한 강의이기 때문에, 외국 사람들이 쉽게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쓰루미는, 우선 일본이 1931년 만주사변부터 1945년 태평양전쟁까지를 하나의 전쟁으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은 학교에서 만주사변, 상해사변, 지나사변, 태평양전쟁 등으로 전혀 별개의 전쟁이 몇 차례 일어난 것으로 배웠는데, 이렇게 해서는 일본이 그때 벌인 전쟁의 전모를 파악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즉, 1931년부터 1945년까지 15년 동안 진행된 하나의 전쟁으로 봐야 이때의 일본 지도층의 사상이 어떻게 형성됐고 변화했는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전향을 "국가 권력 아래에서 일어난 사상의 변화"라고 정의하면서, 전향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국가가 강제력을 사용한다는 것, 또 하나는 개인 혹은 집단이 압력에 대해 스스로 선택에 따라 반응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은 이 강의를 하면서 '무엇이 사람들을 전향으로 유도한 것일까?, 그들 자신은 전향을 어떻게 정당화한 것일까?, 전쟁 후 전향을 돌이켜 봤을 때 어떠한 생각을 했을까? 오랜 인생을 살면서 전향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를 되풀이해서 반문해 봤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에서 전향이란 말은 1920년대 들어 나오기 시작해 1930년대에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특히, 옥중에 있던 두 명의 일본공산당 지도자(사노 마사부와 나베야마 사다치카)가 1933년 공동 전향 성명을 냈는데, 그 뒤 한 달 안에 투옥된 공산당원 중 미결수 30%, 기결수 34%가 전향했다.

그는 이렇게 쉽게 전향이 이뤄진 원인을 일본 고유의 쇄국 풍토에서 찾는다. 그는 도쿄대학의 공산주의 서클 '신인회' 출신들이 대거 공산당 간부가 됐고 이들이 전향을 선도했다면서 그 배경을 설명한다. 초엘리트의 이들 학생들은 1917년 러시아 혁명에 영향을 받아 1918년 신인회를 결성했다. 그러나 이들은 일본의 현실에서가 아니라 이론으로 공산당 이론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국가의 압력에 저항 다운 저항도 하지 못하고 쉽게 전향을 했다. "그때까지 급진파 혹은 진보적인 사상을 실현했던 도쿄대학 '신인회'의 스타일은 너무 쉽게 굴복했으며, 자신들의 사상을 군국주의와 초국가주의의 국책 선전으로 태도를 바꾸어 버렸다"라는 것이다.

그는 "일본에서 형식이 갖추어진 문화는 어쩔 수 없이 수입 문화이며 형식에서 벗어난 일상문화는 토착문화"라고 말했는데, 나는 그 말이 수입 문화를 고민 없이 받아들인 사람이 쉽게 전향했고, 일상에 충실한 사람들이 그렇지 않았다는 걸로 들렸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민중의 삶 속으로 깊숙히 들어가 운동을 한 사람들보다 관념적으로 운동을 했던 사람이 쉽게 변절한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저자는 일본 사람들이 아시아를 멸시하는 이유로, '문명의 사다리'라는 개념을 사용했다고 말했다. 문명이 높은 단계로 올라가려고 하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데, 일본보다 사다리 밑에 있는 사람들이 아시아 사람들이니까 멸시해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총 13강으로 돼 있는 이 책 중 7강의 제목이 '일본 속의 조선인'인데, 일본의 조선인 멸시관을 깊게 알려면 꼭 읽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조선과 조선인에 대한 태도"가 "일본의 사상을 분석해 볼 수 있는 분광기"라면서 "좌우익을 막론하고 정치생활에 참여한 사람들은 조선 정부에 대하여 이 문명의 사다리를 한 단계 오르도록 강요하기 위해서 무력을 사용해도 된다고 믿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이런 사고가 지금의 일본 지식인들에게 남아 있지 않다고 장담할 수 없다.      

역시 이 책의 묘미는 일본의 전향과 사상사를 통해, 한국의 친일파 문제, 일부 민주화운동가 들의 전향 문제를 비교하며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는 "국가의 강제력 사용이 있고 또한 개인의 자발성이 동시에 존재하는 한, 이 두 힘의 상호작용은 좋은 결과든 나쁜 결과든 다양한 종류의 전향을 만들어낸다"라면서 "이런 사례 연구가 우리들 자신에게 걸림돌이 되는 여러 가지 일들을 예측하고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라고 말했다. 전향이 일본만의 독특한 현상이 아닐진대, 우리도 구체적인 사례를 포함해 전향에 관해 더욱 깊게 연구할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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