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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밑바닥 생활과 독학으로 공산주의를 각성
프랑수아-노엘 바뵈프(François-Noël Babeuf, 1760~1797)는 세금행정을 담당하는 임시직의 하위직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원래 프랑스인이었지만 청년 시절 오스트리아 군대의 소령으로 근무하다가 26살에 전투 중 탈영했다. 그의 아버지는 탈영 후 17년 동안 이곳저곳을 다니다가 탈영에 대한 사면을 받고 고향인 프랑스 북부의 생캉탱(Saint-Quentin)으로 돌아왔다.
그의 아버지는 교사 등 여러 임시직을 전전했기 때문에 바뵈프는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바뵈프의 형제자매는 원래 13명이었지만 4명만 남기고 다 죽었으며, 그는 장남이 됐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가정교육을 받았는데, 약간의 독일어와 라틴어 학습도 받았다. 바뵈프는 아버지의 엄한 교육을 받았으며, 어렸을 때부터 글씨를 아름답게 쓰는 서예 솜씨를 인정받았다. 그는 12살부터 귀족의 하인으로 일하면서 주로 책들을 필사하는 일을 담당했다.
또한 그는 16살까지 고향에서 운하를 건설하는 노동자로 일하기도 했으며, 이러한 경험으로 빈부격차와 신분차별에 대한 저항의식이 생겼다. 그는 17살에 국가의 토지를 관리하는 공증인을 돕는 사무직 직원으로 일하다가 19살에 직접 토지 공증인이 되기 위해 수습직원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일 년 동안 무급으로 일한 후 3프랑의 저임금을 받으며 생활했다. 그는 21살에 토지행정을 담당하는 공증인의 자격을 얻고 독립했다.
그는 22살에 철물상의 딸과 결혼했고 지역에서 공증에 관한 업무능력을 인정받았다. 바뵈프의 부인은 거의 문맹 수준이었으며 바뵈프가 사형당할 때까지 5명의 아이를 낳았으나 3명만 살아남았다. 바뵈프는 여러 귀족들의 토지행정을 맡으며 전문가로서 성공하고 가난에서도 벗어났다. 그는 1785년 파리에서 북쪽으로 100킬로 떨어진 후와(Roye) 시(Commune) 내의 철물점을 임대해 그 일부를 토지행정을 담당하는 자신의 공증사무실로 개업했다.
그는 25살부터 지역의 정치클럽에 참여했으며 파드칼레(Pas-de-Calais)도(Department)의 수도인 아라스시의 아카데미(Academy of Arras)에 가입하기 위해 이 아카데미가 공모하는 학술제에 몇 차례 응모하기도 했다. 이때부터 뒤부아(Dubois de Fosseux, 1742~1817)는 바뵈프와 교류하면서 바뵈프의 아카데미 가입을 위해 학술적인 도움을 제공했다.
뒤부아는 아라스 아카데미의 총무(secretary)로서 볼테르, 디드로, 루소의 사상을 널리 알렸으며, 프랑스혁명 시기에 아라스의 시장이 됐다. 그는 아라스 아카데미에서 로베스피에르, 바뵈프 등과 교류하면서 이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 당시 로베스피에르 역시 아라스 아카데미의 총무를 역임했기 때문에 바뵈프와 교류했다. 양자는 모두 루소의 사상을 신봉하고 자신들과 같은 정치사상가가 덕치를 실현해야 한다고 믿었다.
바뵈프의 관심은 점차 사회혁명으로 옮겨져 갔고 아라스시에서 180킬로 떨어진 파리를 오가며 급진적인 공화주의적 인사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바뵈프는 1786년 4월 "영주의 토지재산권과 봉토사상에 대한 언급"이라는 팸플릿을 발행했다. 1787년 바뵈프는 자신이 관리하던 토지의 소유주들과 금전적인 소송에 휘말리기 시작했으며, 토지행정 사업도 거의 파산에 이르게 됐다.
1789년 3월, 바뵈프는 봉건 잔재와 소금세에 반대하고 단일한 누진세를 도입하려는 후와 주민들의 청원운동에 앞장섰으며 9월부터 런던에서 발행하는 ≪유럽의 우편(Courrier de l'Europe)≫의 특파원을 하면서 여러 신문에 봉건제의 특권 폐지를 주장하는 내용의 기고를 했다. 그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직전 파리와 후와를 왕래하면서 파리의 좌파 정치인들과 교류했다.
그는 1789년 7월부터 10월까지 파리에 있으면서 자신이 목격한 대혁명을 찬양했다. 그는 1790년 후와에서 주민들의 청원운동을 지지하는 팸플릿을 출판했다. 또한 그는 간접세를 폐지하려는 청원운동과 주민들의 집회를 주도했으며 시의회에서 연설을 하면서 정치적 인물로 부상했다. 하지만 그는 반란선동 혐의로 5월에 체포돼 파리로 압송됐다. 그는 혁명정부의 장 폴 마라(Jean-Paul Marat)의 도움으로 선동행위를 중단한다는 조건으로 7월에 가석방됐다.
그는 파리에서 돌아와 10월 정치저널 ≪피카르 특파원(Correspondant Picard)≫을 창간했으며, 이 저널은 이후 몇 달 동안 40호까지 발행됐다. 그는 이 저널을 통해 사회적 지위에 따라 가중치를 두는 차등선거에 반대하고 주민들의 청원운동을 지지했다.
그는 1790년 11월 후와 시의원으로 선출됐다. 하지만 곧바로 반대파는 바뵈프가 가석방 조건을 위반했다고 항의했으며 그 결과 바뵈프는 시의원에서 제명됐다. 하지만 후와시의 행정당국은 반대파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바뵈프를 시의 유권자들의 구성체인 선거인단의 의장으로 임명했다. 바뵈프는 1791년 3월 후와시의 행정당국에 의해 시의 국가재산을 감독하는 위원으로 임명됐다. 바뵈프는 국유토지와 임야에 대한 인민들의 사용권한을 보호하고 인민들에게 불리한 조세제도를 개혁하는 운동을 주도했다.
1791년 4월 바뵈프는 시청사 앞에서 주민들의 집회를 주도하고 연설했는데, 다시 선동 혐의로 체포됐다. 그는 재판에서 증거불충분으로 인정돼 8일 만에 석방됐다. 1791년 9월 혁명정부의 대사면령에 따라 바뵈프도 시민권을 회복했다. 그는 1792년 9월 후와시를 포괄하고 있는 상급 지방자치단체인 도인 솜(Somme)의 지방의원 36명 중의 한명으로 선출됐다. 다만 그는 377표를 얻은 티이에리(Thierry) 다음으로 225표를 얻어 의장에 당선되지 못했다. 그는 솜도의 군사문제를 다루는 상임위원회의 위원으로 선출됐으며, 이를 계기로 군인들과 교류할 수 있었다.
ㅡ 무장봉기로 사유재산을 몰수해 재산공동체 건설
바뵈프는 1792년 10월에는 상업과 농업, 공유재산, 주민지원 등 주민들의 복지를 담당하는 집행부에 배치됐으며 11월에는 범죄와 재판을 다루는 위원회의 부의장이 됐다. 그는 솜도의 몽디디에(Montdidier) 구역에서 주민들의 복지를 위해 경제와 국유재산을 관리하는 업무을 하다가 국유지 양도증서를 변조한 혐의로 직무정지를 당했다. 그는 처벌을 피해 1793년 2월 피리로 피신했다. 솜도의 법원은 8월 궐석재판을 통해 바뵈프에게 20년 형을 선고했다.
바뵈프는 1793년 5월 파리에서 피신 중에 파리코뮌에서 빈민을 구제하는 위원회의 비서로 일하면서 파리의 민중인 생퀼로트를 대변했고 그의 급진적인 태도 때문에 파리코뮌과 충돌했다. 그는 몽디디에의 문서변조 혐의로 1793년 11월 체포돼 다시 재판을 받았고 1794년 7월 18일 만 프랑의 보석금을 내고 가석방됐다. 그가 석방된 후 10일 만에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되고 반동적인 5인의 총재정부가 들어섰다.
그는 파리에서 ≪언론의 자유에 대한 저널(Journal de la Liberté de la Presse)≫의 첫 번째 호를 발행했고, 그 제목은 1794년 10월 5일에 ≪인민의 호민관(Tribun du Peuple)≫으로 변경되었다. 이 신문은 파리의 노동자와 빈민들을 옹호했으며 많은 지지자를 얻었다. 이런 인기 탓에 바뵈프는 생퀼로트들의 정치클럽에 가입했다.
총재정부의 반동적인 정책에 항의하는 노동자와 빈민들의 소요가 빈번해지자 총재정부는 폭력적인 백색공포정치로 대응했다. 이에 바뵈프는 총재정부를 비난하고 스스로를 인민들을 보호하는 “호민관 그라쿠스”로 자처했다. 또한 바뵈프는 우파의 공포정치에 대항하여 좌파의 공포정치를 주장했고,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를 비난했던 과거의 입장을 수정했다. 바뵈프의 이러한 급진적인 활동은 총재정부에 분노하던 파리의 빈민들과 노동자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바뵈프는 자신의 신문을 통해 국민공회를 모독했다는 이유로 1795년 2월 다시 체포되고 그의 잡지들은 자코뱅을 혐오하는 우익청년에 의해 소각 당했다. 그는 아라스 감옥에 수감됐으며, 그곳에서 자코뱅당에 가입한 혐의로 수감된 사이먼 뒤플레이(Simon Duplay), 오귀스탱 다르테(Augustin Darthé), 필립 부오나로티(Philippe Buonarroti) 등을 만났다.
그들은 정세와 사회변혁에 대한 토론을 통해 혁명적 동지관계를 맺었다. 그들은 사상적 공유뿐만 아니라 반란을 실행하기 위한 구체적인 로드맵까지 감옥에서 논의했다. 특히 부오나로티는 “평등주의자들의 음모”, “경제칙령초안”(Draft Economic Decree) 등을 작성하며 바뵈프의 이론적인 참모역할을 했다. 바뵈프는 자코뱅의 과격파를 흡수하여 ‘평등사회’(Societé des égaux)를 만들었으며 이들은 팡테옹(Panthéon)클럽에서 자주 모임을 갖고 혁명방안을 논의했다.
바뵈프는 1795년 10월 18일 사면법에 의해 석방됐으며 ≪인민의 호민관≫을 다시 발행했다. 1795년 11월 바뵈프와 평등사회를 감시하던 경찰들은 평등사회가 공개적으로 무장반란을 선동하고 있으며 시행하지도 못하고 폐지된 1793년 헌법의 복원을 주장한다고 총재정부에 보고했다. 1796년 1월 바뵈프는 경찰에 체포되기 직전에 탈출하여 이후 비밀활동으로 전환했다.
총재정부는 1796년 2월 20일에 빵과 고기에 대한 가격통제를 폐지하고 정부가 정해진 가격으로 식료품을 공급하는 정책도 중단했다. 총재정부는 식료품에 대한 가격통제가 식량을 생산하는 농촌을 파리와 같은 도시를 위해 희생시킨다고 봤다. 그 당시 도시의 빈민들과 노동자들은 가격통제의 혜택을 보고 있었으며, 토지를 잃은 유랑민들도 값싼 가격으로 식량을 구하기 위해 파리와 같은 도시로 몰려들었다. 또한 당시의 ‘아시냐(Assignat)’ 화폐로 월급을 받는 노동자, 하위직 공무원, 군인, 연금자와 임대인들도 식료품 가격 폭등으로 식량난에 처했다.
바뵈프는 다르테, 제르망(Charles Germain), 부로나로티, 실뱅 마레샬, 펠릭스 르펠레티에, 피에르 앙투안 안토넬, 드봉, 조르주 그리셀. 장 앙투안 로시뇰 등과 함께 ‘평등주의자들의 음모’(Conjuration des Egaux)라는 무장봉기를 추진했다. 파리뿐만 아니라 다른 지방의 도시에서도 수백 명의 무장반란군이 비밀단체에 소속돼 있었다. 이들은 각 지역에서 반란에 참여할 무장병력을 모으고 연락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바뵈프의 중앙지도부는 소수로 비밀을 엄수해 말단 회원들은 그 존재를 알 수 없었다.
총재정부는 2월 27일 팡테옹클럽을 폐쇄한 후 3월에 화폐개혁을 추진했지만 실패했다. 총재정부는 4월 4일 파리에서만 50여만 명이 긴급하게 구호를 받아야 할 빈민이라고 보고를 받았다. 바뵈프의 평등주의자들은 파리에서 공공연하게 무장반란을 선동했다. 국가파산이 임박해지자,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바뵈프의 선동에 환호했다. 1796년 4월 11일부터 파리에는 "바뵈프의 가르침 분석"이라는 제목의 포스터가 게시되었는데, 이 포스터는 "자연은 모든 사람에게 모든 재산에 대한 동등한 몫을 누릴 권리를 주었다."는 문장으로 시작하여 1793년 혁명헌법의 복원을 주장했다. 바뵈프의 노래 "굶어 죽고 추위에 죽다"가 대중적인 곡조로 편곡되어 카페에서 제창됐다.
대혁명 당시 창설된 혁명군들이 파리 제15구인 그르넬(Grenelle)의 군진영에서 탈영하여 반동정부에 대한 바뵈프의 반란에 가담할 것이라는 소문이 확산됐다. 총재 카르노(Lazare Carnot)는 4월 16일 1793년 헌법의 시행이나 반란을 선동하는 것에 대해 사형을 처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ㅡ 부오나로티를 통해 공산주의를 맑스 시대에 물려줌
바뵈프는 4월 24일 마지막 ≪인민의 호민관≫(40호)을 통해 혁명을 완수하여 모든 사람들을 위한 민주주의와 행복을 영원히 실현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또한 신문은 토지와 생산수단의 집산화를 통해 완전한 평등과 공동의 행복을 실현할 것을 선언했다. 바뵈프는 혁명이 성공하면 화폐제도를 폐지하고 부자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그 재산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거와 식량 등 필수품을 무료로 분배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바뵈프는 이 신문에서 과거 혁명정부가 1792년 9월 2일 외국의 침략에 직면해 전국에서 수천 명의 반혁명분자를 학살한 사건을 옹호하며 "굶주림, 흡혈귀, 폭군, 사형 집행인, 사기꾼, 광대"로 구성된 반동정부를 몰살시키기 위해 더 완전한 "9월 2일"이 필요하다고 선언했다.
1796년 5월 8일 바뵈프 세력, 자코뱅 당원, 일부 군인들이 모여 무장반란을 논의했다. 이들의 계획은 1만7천명을 모아 봉기를 일으키고 1793년의 혁명헌법을 시행하는 것이었다. 반동정부가 파악한 반란군 규모는 파리 혁명가 4,000명, 구 혁명정부 구성원 1,500명, 민주 포병대 1,000명, 해산된 장교 500명, 각 지방 혁명가 1,000명, 의회 척탄병 1,500명, 구금된 군인 500명, 경찰 6,100명, 보훈처 1,000명 등이었다.
혁명에 앞서 부오나로티는 평등주의 공화국을 선포하는 포고령 초안을 공개적으로 낭독하면서 "인민이 전진했고, 폭정은 더 이상 없습니다. 여러분은 자유롭습니다."라고 선언했다. 포고령에 따르면 혁명 후 공화국은 대규모 국가공동체로 전환될 것이며, 부자가 사망하면 그 사유재산은 상속되지 않고 국가공동체의 소유로 집산화될 것이다. 또한 국가공동체의 재산은 모든 구성원에 의해 관리되고 이용될 수 있다. 또한 국가공동체는 그 재산으로 영리활동을 하지 못하며 모든 사람에게 의식주와 의료서비스를 제공한다.
바뵈프가 반란을 계획하고 있을 당시 경제난과 무질서로 인해 파리에서 여러 단체들이 무장반란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평등주의자들은 파리의 경찰군단과도 내통하고 있었는데, 정부는 5월 2일 경찰 군단을 무장 해제하고 해산시켰다. 평등주의자들은 경찰군단의 해산 이후에는 그르넬에 주둔하는 병사들 일부를 반란에 동원하고자 했다.
하지만 정부가 평등주의자 조직에 비밀리에 잠입시킨 정부군 대위 조르주 그리젤(Georges Grisel)이 현상금을 노리고 경찰에 반란계획에 대해 밀고했다. 카르노 총재는 245명에 대해 체포 영장을 발부했고 5월 10일 바뵈프와 그 동료들은 체포됐다. 바뵈프의 동료들은 6월 수감자들을 구출하려는 폭동을 일으켰으나 진압됐다. 정부는 8월 27일 수감자들의 탈출과 이들을 지원하는 폭동을 방지하기 위해 바뵈프와 그 동료들을 파리에서 방돔(Vendôme)의 감옥으로 이송했다. 이송 직후 9월 초 그르넬의 군인들과 500명에서 600명의 자코뱅당원들이 동료들을 구출하려고 폭동을 일으켰으나 약 20명이 사망하고 132명이 포로가 됐다.
1797년 2월부터 방돔의 고등법원에서 재판이 시작됐으며 5월 26일 지도자인 바뵈프와 반란계획의 초안을 작성한 다르테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바뵈프와 다르테는 사형선고를 받은 법정에서 단검으로 자살을 시도했으나 중상을 입은 채 다음날 단두대에서 처형됐다. 부오나로티와 제르망은 5명의 다른 주요가담자와 함께 프랑스에서 추방됐으며, 나머지 56명의 피고인들은 국회의원들의 탄원과 증거불충분으로 무죄판결을 받아 석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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