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정호 (편집위원)
등록일 : 2024.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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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말 스탈린은 다시 부하린 집단에 반대하는 투쟁을 주도했다. 투쟁의 결말은 심각했는데, 많은 ‘우파’를 낳았을 뿐만 아니라 신경제정책(NEP)의 중단, 스탈린 모델의 확립을 가져왔다. 그 과정에서의 우여곡절과 부침은  이후 소련 사회에 수십 년에 걸쳐  영향을  미쳤으며, 마침내 소련의 해체를 초래했다.


부하린은 사람을 상냥하고 진실하게 대하고 겉보기에도 점잖아 보였다.  그는 1888년 지식인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부모가 모두 교사였다. 어릴 때부터 취미가 다양해서 자연사, 문학사 및 각종 고전 작품을 좋아했다. 어린 시절부터 딱정벌레와 나비 표본을 수집하는 데 열중했으며, 이런 그의 취미는 평생 유지되었다.  또 그는 그림을 좋아하고 조예가 깊어, 1912년 청년 화가로 레닌에게 소개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가장 큰 공적은 역시 경제학 방면이었다.


부하린은 모스크바대학 법학과 경제학과 학생이었지만, 격동의 시대에 안정적으로 학업에 열중할 수 없었다. 그는 1906년에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당원이 되었는데, 그는 학교에서 공부할 때 노동운동에 종사하여 1908년 당의 모스크바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909년부터 1911년 기간 중 세 차례 체포된 뒤, 그는 결국 유배지에서 탈출해 국외로 망명하여 볼셰비키 기관지인  [프라우다]와 [계몽]지에 기고자로 활동했다. 1912년부터 1913년까지 비엔나에 거주하면서, 그는 정치경제학을 연구하여 E. 봄바비크, 스튜어트 루웨이, 두강 바라노프스키 등의 경제 이론을 비판하는 <무가치한 정치경제학>, <금리생활자의 정치경제학> 등과 같은 저서를 썼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스위스로 추방된 그는 <세계경제와 제국주의>를 썼다. 레닌은 이 책을 위해 서문을 써주고 호평을 했다. 곧 이어 스웨덴·노르웨이 등지에서 거주하다가, 1916년 미국으로 밀입국해 뉴욕에서 러시아어로 [신세계]를 편집했다. 여기서 그는 트로츠키를 만났다. 종종 이론과 정치적 견해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거의 10년 동안 매우 밀접한 개인적 관계를 유지했다. 


부하린은 뉴욕에서 러시아 2월 혁명 소식을 듣고 일본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러시아로 돌아왔다. 제6차 당대회에서 부하린은 10월 모스크바 무장봉기의 핵심 멤버 중 한 명으로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그해 12월 그는 [프라우다]를 편집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키 평화회담에서 ‘좌파 공산주의자 그룹’을 이끌며 혁명전쟁을 주장하면서 독일과의 평화조약에 반대했다가, 나중에 공개적으로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였다. 8차 당대회 이후 1924년에 정치국 후보위원(1924년 정치국 위원), 코민테른 설립 후에는 그 집행위원과 의장단 위원(1926년)을 지낸 후, 1926년 정치서기처 서기로 코민테른 사업을 주재했다.


부하린은 10월 혁명 후 일련의 비중있는 저작을 썼다.  프레오브라진스키와 공저한 <공산주의 ABC>는 인기 있는 공산주의 계몽서적이 되었다. 1920년 출간된 <과도기 경제학>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법칙을 이론적으로 탐구한 책이었는데, 당연히 이 책은 당시 ‘전시공산주의’ 정책의 산물이기도 했다. 레닌이 신경제정책(NEP)을 선언한 후, 그는 소련 사회주의 건설의 이론과 실천 문제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신경제정책의 열렬한 옹호자가 되었으며, 레닌의 신경제정책 이론을 발전시켰다.


박학다식하고 친근감이 있는 그를 레닌이 유언장에서 “당의 가장 귀중하고 큰 이론가일 뿐만 아니라, 당연히 당 전체가 좋아하는 인물”이라고 평한 것도 그의 이러한 공적 때문이다.


스탈린과 부하린은 원래 사적인 관계가 좋았다. 1913년부터 그들은 알고 지냈다. 그해 스탈린은 <맑스주의와 민족문제>를 집필하기 위해서 오스트리아 수도인 빈에 가서 자료를 수집했다, 스탈린은 서구 언어를 몰랐기에, 당시 빈에 있던 부하린은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번역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부하린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스탈린은 자신의 그 유명한 작품을 쓰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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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의 외동 딸 스베틀라나(가운데)


10월 혁명 후, 특히 1920년대에 스탈린은 부하린과 대단히 가깝게 지냈다. 부하린의 두 번째 아내인 에필리아 굴비치는 여름이면 딸을 데리고 스탈린의 시골 별장으로 휴가를 떠나곤 했으며, 부하린도 거기에 자주 갔다. 부하린의 딸과 스탈린의 딸은 모두 '스베틀라나'라고 이름을 지었다. 두 스베틀라나는 주바로보에 있는 별장에서 시소, 그네, 심지어는 이국적인 '루빈슨 하우스'라는 작은 세계를  소유했다. 그녀들은 이곳에서 즐거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모두가 부하린을 좋아했고, 특히 아이들이 그를 따랐다. 나중에 스탈린의 딸은 이렇게 회상했다.

 

집에는 항상 많은 손님들이 있었는데, 부하린도 우리 주바로보에 살고 있었다. 그는 모두가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각종 동물을 매우 좋아해서 우리 집에는 그가 가져온 동물들로 가득찼다. 고슴도치가 베란다에서 뛰어다녔으며, 풀뱀은 병 속에서 굼틀대고, 난쟁이 여우는 정원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상처입은 큰 독수리가 새장에 갇혀 있었다. 나는 부하린이 톨스토이 복장에 굵은 베 바지를 입고 샌들을 신은 것을 어렴풋이 기억한다. 그는 항상 아이들과 함께 놀면서, 나의 보모(保姆)와도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녀에게 자전거 타는 법과 공기총 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모두들 매우 즐거워 했다. (스베틀라나 알리루예바, <친구에게 보내는 스무 통의 편지>, 34쪽.)

 

스탈린도 자주 부하린을 찾아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1925년 당시 부하린과 경제학자 유리 라임은 같은 건물에 살고 있었다. 라임은 아래층에 살고 부하린은 위층에 살았다. 어느 날 스탈린이 부하린을 찾아갈 때, 위층에서 우연히 라임의 딸인 라린나를 만났다. 그때 라린나는 겨우 열세 살이었는데, 이 소녀는 부하린을 몰래 사랑하고 있었다. 그날 그녀는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는 시적인 편지를 직접 부하린에게 건네려고 용기를 냈다. 위층에서 우연히 스탈린을 만나자, 편지를 부하린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하고는 쏜살같이 위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이렇게 해서 스탈린은 부하린과 라린나 사이에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는 첫 번째 인물이 되었다. 7, 8년 후 부하린과 라린나는 마침내 함께 살게 되지만, 그 무렵은 마침 부하린의 생애에 있어 가장 순탄치 않은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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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하린의 세번째 아내 라린나와  그의 어린 딸


부하린은 1927년 스탈린의 집요한 요구로 크렘린궁에 들어갔다. 그 무렵만 해도 그들은 정말로 친밀하고 우호적이었다. 그들은 항상 서로를 '너'라고 불렀다. 스탈린은 부하린을 니콜라이, 부하린은 스탈린을 코바라고 호칭했다. 1924년부터 1928년까지 스탈린은 부하린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 "레닌이 그의 이론적 두뇌를 높이 평가했다"라면서, 당이 타고난 인재를 소중히 여긴다는 점을 공개적으로 강조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와의 싸움에서 부하린은 사실상 스탈린을  보조했다. 


정치국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였는데, 스탈린은 모든 조직 문제와 정치 문제를 책임졌으며, 부하린은 당 정책의 이론과 원칙을 탐구하고 논술했다. 부하린은 스탈린이 '일국 사회주의'에 관한 이론적 토대를 세우고, 신경제정책(NEP)의 생명력을 천명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 레닌>(1924년), <사회주의로 가는 길과 노·농 동맹>(1925년), <과도기의 법칙성에 관한 문제>(1926) 등 많은 저서를 잇달아 저술함을 통해 신경제정책(NEP)을 이론적으로 논증하고 발전시켰으며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등의 좌파적 관점을 반박했다. 부하린 덕택에 스탈린은 당내의 각종 반대파를 이론적으로 이길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신경제정책이 몇 년간 순조롭게 발전한 데는 부하린의 공로가 가장 컸다.

 

솔직히 말해, 스탈린의 신경제정책에 관한 이해는 천박하고 때로는 틀리기도 했다. 그 주요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레닌은 신경제정책이 실시되던 과도기 전반에 걸친 기본 문제는 농민 문제라 인식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농민문제가 기본 문제가 아니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강화해야만 농민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사회주의 건설의 총노선을 제정하는 출발점은 국가의 중공업화라고 생각했다. 그는 신경제를 두 시기로 나누었는데, 1921년부터 시작된 첫 번째 시기에는 농업에서 공업을 발전시켜야 한다면, 1926년부터는 '직접 공업화의 시기'에 들어가야 한다. 이 시기에는 국민경제와 생활의 모든 문제가 이 문제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스탈린 전집>제8권, 109~113쪽)


(2) 사회주의 축적과 관련하여, 스탈린은 이를 주로 공업화를 위한 자본 축적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는 새로운 시기에서 축적은 7가지 원천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이미 국유로 귀속된 토지/공장 상환할 필요가 없는 제정 러시아의 외채와 그 이자 회복되고 발전하기 시작한 국유 공업 국영의 대외 무역과 대내 무역 및 그 은행이 창출한 이윤 강력한 국가권력이 지배하는 국가 재정 등이다. 그러나 이러한 원천 중 처음 6개의 축적은 당시 1920년대 말까지는 매우 허술하거나 대단히 제한적이었으며, 주요한 축적은 여전히 맨 마지막인 '국가 재정'에 의존하였다. 그리고 국가 재정의 출처는 주로 국내 시장 그중에서도 첫 번째가 농민 시장이었다. (<스탈린 전집>제8권, 115~124쪽)


(3) 농업에 대한 공업의 간섭, 국내 시장 특히 곡물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강조하면서, 이러한 개입의 목적은 “농산물 가격을 제멋대로 올리는 부농 및 기타 곡물 투기꾼과 싸우는 것”이라고 간주했다. (<스탈린 전집>제8권, 118쪽)


(4) 레닌은 소농이 지배하는 국가에서의 사회주의 건설은 반드시 일련의 중간 단계를 거쳐 국가의 지도하에서 민간 자본주의의 발전을 통해 사회주의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오히려 개인 자본의 소멸을 우선 순위에 올려놓았다. 스탈린은 가능한 한 빨리 산업을 발전시키고 공업화를 실현하며, 흩어져 있는 소농 경제를 대규모 집단으로 통합하고 집단화를 구현함으로써, 공업과 농업의 사회주의 발전을 동시에 추진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렇게 하면 민간 자본을 가능한 한 빨리 경제생활에서 제거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관점들이 1920년대 후반에 스탈린과 부하린의 신경제정책(NEP)에 있어 중요한 불일치를 초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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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트로그라드 노동거래소 근처의 실업자들 (1920년대)

 

ㅡ 시베리아 방식

 

신경제정책을 실행한 지 몇년 간 소련 경제의 회복 및 발전 속도는 확실히 대단히 빨랐다. 1927년 말까지 농업 총생산액은 전쟁(1차 대전) 전 수준의 평균 108.3%에 달했으며, 공업생산지수도 1926년에 이미 이 수준에 도달했다. 그러나 1927년 말부터 1928년 초까지 소련은 심각한 식량 수매 위기를 겪었다. 1926년 말 4억 2,800만 푸트의 곡물을 구매하였는데, 1927년 말에는 겨우 3억 푸트만이 구매되었다.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스탈린은 1927년 12월 14일, 24일, 그리고 1928년 1월 6일 3차례에 걸쳐 공산당 중앙위원회 명의로 지방 당 조직에 긴급 지시를 내렸다. 식량 수매 계획을 기한 내에 완료하고, 부농과 농산물 가격을 파괴하는 투기꾼들을 진압하고, 식량 수매를 완수하지 못한 지도자는 처벌토록 했다.


1928년 1월 5일 정치국은 식량 수매를 책임지는 중앙위원회 특별위원회를 설립했다.  1928년 1월 15일부터 2월 6일까지 스탈린은 비밀리에 시베리아의 주요 곡물 생산지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각지역 당 조직 회의를 열고 현지 간부들의 '비관주의'를 엄중히 질책하는 한편, 식량 수매에 부적당한 간부들을 해임시킬 것을 지시했다. 식량이 없는 것이 아니라 부농들이 식량을 내놓기를 꺼리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부농들은 국가가 정한 가격에 즉시 잉여 곡식을 모두 내놓아야 하며, 인도를 거부하는 자는 형법 제107조에 따라 처벌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형법 107조는 "상품을 구매, 은닉하거나 시장에 내놓지 않는 등의 방법으로 고의로 상품 가격을 인상한 자는 1년 이하   자유를 박탈하고, 모든 재산 혹은 그 일부를 몰수하거나 자유를 박탈한다. 위의 행위가 만약 상인과 결탁한 것으로 판명될 경우에는 3년 이하의 자유를 박탈하고, 재산 일부를 몰수한다."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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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식량위기


스탈린이 시찰하는 동안 많은 지역 직원들이 '유약한 태도', '타협적인 감정', 부농과의 '유착' 등의 이유로 해고되었다. 동시에 폭력적 수단을 동원하여 집집마다 식량을 수색하고, 여분의 식량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법정에 세우기 시작했다.


동시에 스탈린은 미코얀, 카가노비치, 지다노프, 슈베르니크, 안드레예프 등 중앙 지도자들을 전국 각지로 보내 식량 수매 작업을 지휘했다.


스탈린 등이 이 같은 비상조치를 취했기에 수매 작업은 크게 진척되었다. 스탈린 자신이 중앙에 보낸 암호 전문에 따르면, 북코카서스는 원래 5일마다 50만~60만 푸트의 식량을 수매했지만 지금은 100만~150만 푸트로 증가했다. 러시아 중부의 4개 주는 기존 60만~70만 푸트였으나 지금은 150만 푸트로 늘어났다. 스탈린은 1월 27일 중앙위원회에 보낸 전보에서 "나의 간여로 밤낮으로 서쪽으로 중부에 360차량의 가죽을, 한 달에 거의 1100만 (푸트)을 선적하는 계획을 통과시켰다"라고 보고했다. 실제로 1월 26일에는 367차량의 가죽을, 27일에는 423차량의 가죽, 28일에는 433 차량의 가죽을 운송했다. 2월에는 서부로 1240만 푸트를 선적하기로 결정했는데, 2월 2일 스탈린은 전보에서 1800만 푸트로 늘렸으며, 2월 4일 중앙위원회에 보낸 암호 전보에서는 이 숫자를 2200만 푸트로 올렸다. 이와 더불어 "중앙이 1월에 8000만 푸트의 인수 임무를 완수한 것을 축하한다"면서 "이것은 당의 중대한 승리"라고 말했다.*

 

* <스탈린 연구> 1993년 1집, 29~67쪽; <스탈린 연구> (1993년) 2집, 17~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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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초의 지다노프

 

이것이 바로 스탈린의 '시베리아 방식'이었다. 스탈린의 '시베리아 방식'은 식량 문제를 해결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농업 발전의 길에 있어 새로운 선택을 하는 것을 의미했다. 스탈린은 곡물 구매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조치들을 취해야 한다고 간주했다. 즉 농촌 지역에서 “인적·물적 자원을 아끼지 않고, 집단농장과 국영농장을 적극적으로 건설해야 한다”라고 믿었다.


스탈린은 집단농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렸다.

 

"집단농장이란 무엇인가? 집단농장은 개별 농민의 생산 컨소시엄(연합체)으로서, 소비자협동조합처럼 판매하거나 농업협동조합처럼 공급하지 않고, 직접 생산에 종사하는 ‘생산 컨소시엄’이다. 3개 혹은 심지어 4개의 협동조합이 있다. 즉 신용협동조합, 공급협동조합, 판매협동조합, 생산협동조합이다. 집단농장은 그중 생산협동조합이며, 따라서 집단농장은 협동조합의 구성 요소 중 하나이다. 집단농장과 협동조합을 대립시켜서는 안 된다. 정반대로 협동조합에서 집단농장을 발견하는 데 능숙해야 한다."


스탈린의 생각은 이러했다.  "현재 소비에트 제도는 두 가지 서로 다른 기반 위에 세워져 있다.  즉  연합한 사회주의화 공업과, 생산수단의 사유제를 기반으로 한 개인 소농 경제다. 소비에트 제도가 이처럼 서로 다른 토대 위에서 오래도록 세워질 수 있을까? " 대답은  부정적이다. 따라서 “가장 적은 상품을 생산하는 개인 농민 경제를 점진적으로 확고하게 연합시켜 가장 많은 상품을 생산하는 집단 경제, 집단농장으로 만들어야 한다”.  “필히 우리나라의 모든 지역을 예외 없이 집단 농장(및 국영 농장)으로 채워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공업 사회주의화에서 전체 농업의 사회주의화로 나아갈 수 있다” 그리하여 식량문제를 철저히 해결하고 최종적으로 부농을 몰아낼 수 있다. *

 

* <스탈린 전집> 제11권, 6~8쪽;  <스탈린 연구>( 1993년) 1집, 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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