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김남기(《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 역사의 진실》 저자)
등록일 : 2024.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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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엔비엔푸 전투 승전 70주년을  기념 하는 베트남군대의 최근 열병식 장면.


올해 5월은 베트남에게 있어 아주 특별한 해다. 왜냐하면 베트남 현대사에 있어서 한 획을 그은 디엔비엔푸 전투(Chiến dịch Điện Biên Phủ, Battle of Dien Bien Phu) 승전 70주년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디엔비엔푸 전투는 1954년 3월 13일에 시작되어 5월 7일 베트남의 승리로 끝난 전투다. 서구 제국주의 열강이던 프랑스가 식민지 지배를 당하던 나라에게 전쟁에서 패전한 전무후무했던 사건이었다. 그 당시 대다수의 서구의 지배계층들은 이 전투가 베트남의 승리로 끝날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준 사건이기도 하다. 반면에 베트남에게 있어 이 전투는 영광스러운 승리 그 자체였다. 디엔비엔푸 전투를 통해 100년간의 프랑스 식민지 지배를 종결시켰기 때문이다.

1. 디엔비엔푸 지역에 대한 설명

 

디엔비엔푸 시내 야경

 

디엔비엔푸는 베트남 북쪽 디엔비엔 성의 성도로 길이 20km, 폭 6km 분지 지형인 므엉타인(Mường Thanh) 계곡에 자리하고 있으며, 라오스 국경이랑 워낙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 디엔비엔푸 시내는 라오스 국경이랑 대략 20km 정도 떨어져 있다. 인구는 대략 8만 명 정도며, 베트남 주 민족인 킨족은 전체 인구의 1/3 정도다. 즉, 베트남 소수민족이 주로 거주한 지역으로 타이(Thai)족과 몽족(Hmong), 시라(SiLa)족 등이 거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쉽게 말해 디엔비엔푸는 베트남의 시골이며, 관광지로 알려진 곳은 전혀 아니다. 지난 2023년 1월 글쓴이는 디엔비엔푸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숙소와 공항의 거리가 말 그대로 얼마 차이가 나지 않아서 놀랐다. 

디엔비엔푸로 가는 교통은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10~12시간 이상 버스나 봉고차를 수도 하노이에서 타고 가는 법이다. 두 번째는 그것보다 비용이 조금 들더라도 하노이에서 출발하는 디엔비엔푸 국내선 비행기를 예매하여 비행기를 타고 가는 법이다. 비행기로 가는 경우 대략 1시간 정도 걸리며, 운항편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감안해야할 것이다.

이 곳이 유명한 이유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베트남 현대사에서 빠질 수 없는 상징적인 역사적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미국이 베트남을 침략하기 이전 프랑스가 자신들의 식민지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 벌인 전쟁 과정에서 일어났다. 디엔비엔푸 전투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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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프랑스의 가혹한 식민지 지배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베트남의 근현대사를 보면,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싸운 저항의 역사다. 

1850년대 프랑스는 베트남의 항구도시 다낭에 상륙하면서 베트남을 식민지 지배했고, 대략 100년간 이 지역을 지배했다. 인도차이나라 불린 지역을 북부 통킹, 북부와 중부 안남, 남부 코친차이나, 라오스, 캄보디아로 나누어 지배했다.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는 말 그대로 그 지역 민중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1941년 통계에 의하면 베트남의 문맹률은 90% 이상이었고, 병원이나 학교가 매우 부족했으며, 그와 반대로 술집과 아편 흡인장소 그리고 매춘이 프랑스 식민권력에 의해 창궐했다.

프랑스는 베트남의 독립운동을 탄압하는 것에도 열정을 다했다. 1930년 베트남 북부와 중부에서 반프랑스 봉기가 일어나자, 프랑스는 강력한 군대를 동원하여 이를 진압했다. 심지어 프랑스는 전투기도 동원했다. 적잖은 독립운동가들과 민중들이 체포되고 죽었으며, 베트남 공산당이 봉기를 주도했던 응에안 성 소비에트의 경우 프랑스군 전투기의 폭격으로 200명이 죽는 참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베트남 측 시위대를 전투기로 진압했다는 사실에서 프랑스 식민주의의 지배 및 통치가 얼마나 가혹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일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프랑스는 나치 독일에 의해 점령당했는데, 이 과정에서 일본이 인도차이나를 접수했다. 일본은 나치가 앞세운 비시 프랑스 정권과 함께 인도차이나를 통치했다. 이들의 통치도 매우 가혹했다. 1945년 일본의 공출로 베트남에선 기근이 발생하여 최소 40만 명에서 많게는 200만 명이나 되는 베트남인이 아사했다. 

이와 같은 현실 속에서 한 베트남 독립운동 단체가 구세주 역할을 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베트남독립동맹 즉 베트민(Viet Minh)이다.

 

보응우옌 지압 장군 

 

베트민은 1941년 초 중월국경지대에서 창설된 독립운동 단체였다. 단체를 창설한 인물이 바로 베트남의 국부인 호찌민(Ho Chi Minh)이었고, 그 군대를 지휘한 장군이 바로 보응우옌지압(Vo Nguyen Giap)이었다. 

베트민은 창설시점부터 프랑스 제국주의와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저항할 것을 촉구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1945년 베트남 북부 지역에서 기근이 발생하자 베트민은 일본군의 곡식창고를 습격하여 이를 농민들에게 분배했다. 따라서 베트민은 민중의 대대적인 지원 및 지지를 얻을 수 있었고,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자 전국적인 총 봉기를 일으켜 정권을 잡을 수 있었다. 1945년 9월 2일 하노이 바딘광장에서 호찌민은 이른바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며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선포했다.

그러나 이미 베트남은 강대국들에 의해 분단이 결정된 상황이었다. 베트남에는 장제스가 지휘하는 중국 국민당군과 더글라스 그레이시(Douglas Gracey)가 지휘하는 영국군이 주둔하게 됐다. 이건 1945년 얄타 회담과 포츠담 회담에 따른 결과였다. 물론 영국군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인도차이나를 프랑스 측에게 양도했다. 반면에 국민당은 1946년 초 자국 내의 내전을 대비하여 철수했다. 인도차이나에 다시 들어온 프랑스는 베트남을 다시 식민지 지배할 궁리를 했다.  호찌민이 독립을 선포하기가 무섭게 베트남에는 옛 지배자인 프랑스가 다시 베트남에 입성했다. 프랑스는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자로써, 베트남을 다시 식민지화 하고자 했다. 베트남과 프랑스의 충돌은 사실상 예고된 것이었고, 여기서 발발한 전쟁이 바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항불전쟁)이었다.

1946년 11월 프랑스는 하이퐁을 포격 및 폭격하여 당일 6,000명의 민간인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포격 및 폭격으로 발생한 민간인 부상자는 25,000명 정도에 달한다. 하이퐁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한 프랑스군은 베트남민주공화국의 수도 하노이를 그해 12월에 점령했다. 

이것이 바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즉, 항불전쟁의 시작이었다. 전쟁은 주로 베트남 북부와 통킹 지역에서 치러졌다. 어쨌든 전쟁 초기 프랑스는 최신식 탱크와 비행기 그리고 군함과 대포로 무장했고, 게릴라전을 전개하는 베트민을 상대로 압도적인 화력 우세를 보였다. 그러나 베트민은 항불항전 전략을 1·2·3단계로 이론화했다. 당시 인도차이나 공산당의 총비서인 쯔엉찐은 1947년에 쓴 글에서 방어에 치중해야 하는 1단계, 아군과 적군이 대등하게 겨룰 수 있는 2단계, 아군이 총반격에 나서는 3단계로 설정했다.

 

베트남의 국부 호찌민

 

실제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전투는 그렇게 전개됐다. 프랑스는 전쟁을 단기간에 승리로 이끌기 위한 계획을 세워 이른바 레아 작전(Operation Léa, Chiến dịch Việt Bắc)을 실행했다. 이들은 공수부대까지 투입하여 수천 명의 베트민군을 사살하거나 생포했다. 그러나 작전에서 목표로 했던 호찌민을 생포하는 데 실패했다. 그리고 이 전투 이후 프랑스는 1950년까지 전선이 교착되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반면에 보 응우옌 지압 장군이 지휘하는 베트민은 민중들의 지지를 얻으며 해방구를 확장했고, 1950년에는 중월 국경지대에서 대대적인 반격을 하기에 이른다. 거기다 1949년 중국 공산당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하고, 소련이 핵개발을 하면서 미소냉전이 보다 격화됐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중국과 소련이 호찌민의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지원하게 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반면 프랑스는 반공을 내세우는 미국의 지원을 받았으며. 자신들의 꼭두각시인 바오다이 황제를 내세워 식민지 전쟁을 반공주의 이념전쟁으로 포장하려고 획책했다. 이 부분에 대해선 아래 4장을 통해 보도록 하겠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 전쟁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베트남인들의 독립을 위한 전쟁이었다. 그리고 이 전쟁은 너무나도 압도적으로 베트민이 대중적 지지를 받을 수밖에 없던 전쟁이었다. 베트남인들 대다수는 프랑스의 군사적 행동을 식민지 지배라고 생각했다. 당시 호찌민의 연설을 보면, 이 전쟁의 성격은 너무나도 분명해진다.


“베트남 혁명의 주요한 과업은 제국주의 침략을 분쇄하는 것이며, 완전한 독립을 이룩하고 베트남을 재통일하는 것이며, 모든 형태의 봉건적 착취를 일소하고, 논을 경작자에게 돌려주고, 사회주의로 향하는 것입니다.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은 봉건주의에 대한 투쟁과 유사합니다. 그러나 현 단계에서 혁명의 주요한 목적은 우리 조국을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우리 혁명의 적들은 제국주의 침략자들과 그 앞잡이들입니다. 혁명의 창끝은 그들을 겨냥해야 합니다.”


1950년부터는 국제정세 및 전황이 베트민에게 유리하게 전개됐다. 우선 1950년 1월 중국과 소련이 베트남민주공화국과 수교를 맺었다. 마오쩌둥은 베트민을 위해 군사고문단 파견과 장비 및 물자를 지원했고, 이에 따라 베트민의 무장력도 강해졌다. 1950년 가을 베트민은 중월국경지대에서 프랑스 정예군 1만 명을 격퇴했으며, 이를 통해 프랑스군을 향한 공세를 강화하게 됐다. 중월국경지대에서 벌어진 동케 전투의 경우 프랑스 최정예 부대인 외인부대를 포함하여, 프랑스군 300명이 전사하고 적잖은 탄약과 무기를 확보했었다. 베트민이 전개한 중월국경지대에서의 총 반격으로 프랑스군은 수천 명이 전사하고, 또 다른 수천 명이 포로로 붙잡혔다.

 

동케 전투를 지휘하고 있는 호찌민

 

이와 같은 중월국경지대 전투가 있은 직후인 1951년 초 베트민은 홍강 삼각주와 하노이를 향해 공세를 가했다. 즉, 앞서 언급한 3단계 작전을 실행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으로부터 물자지원을 받은 프랑스군의 네이팜탄 폭격으로 큰 전투에서 네 차례나 패전했다. 결국 베트민은 이 방어선에 철저히 막혀 도리어 수천 명 이상의 큰 사상자만 남긴 채 하노이 함락에 실패했다. 그러나 베트민은 그 이후 다시 승기를 잡았다. 1951년 10월 초 프랑스군 15개 연대가 두옌하, 훙난 그리고 띠엔 훙 지구에서 베트민과 대규모 전투를 시작하여 격렬한 전투를 치렀고, 여기서 베트민이 승리했다. 꽁호와 안미 그리고 안빈 이 세 지역에선 500명의 프랑스군이 전사하기도 했었다. 1952년 베트민은 호아빈에서 벌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정규전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1952년 겨울 라오스 쟈로 평원과 1953년 삼네우아 해방, 1953년 나산 전투에서의 승리 등으로 다시 승기를 잡았다. 또한 베트민은 베트남의 중부지대와 중부 고원지대 그리고 남부에서도 승리를 이룩했다.

1953년으로 접어들면서, 서구 열강들은 교착상태에 빠진 한국전쟁을 휴전회담을 통해 합의를 보려고 했으며, 인도차이나 또한 그러했다. 1953년 5월 앙리 나바르 장군이 프랑스극동원정군의 새로운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을 때 프랑스 측의 전황은 암울했다. 베트남민주공화국은 라오스의 저항조직 파테트라오를 지원했고, 보 응우옌 지압 장군은 프랑스가 세운 괴뢰국의 수도 사이공을 함락시키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프랑스는 이를 막기 위해 라오스 국경지대에 대규모 요새를 세웠고, 이게 바로 디엔비엔푸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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