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찬욱의 총반격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등록일 : 2025.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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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피해자 박창희 전 한국외대 교수(오른쪽부터 네번째)가 27일 오전 국가보안법 연내폐지 촉구 기자회견에서 고문피해 사례를 증언하고 있다.   출처 : 오마이뉴스   2004.12.27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명칭 개정 운동을 주도한 사월혁명회 회원이자 전 한국외국어대학교 한국사 전공 박창희 교수가 7월 8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2세.

 

박창희 교수는 1995년 4월 26일 일명 ‘외국어대 교수 간첩’ 사건으로 안기부에 체포 구속됐다.

고인은 6·25전쟁 시 행방불명된 친형 박윤희의 생사가 항상 궁금했다. 당시 형은 서울의 대학에 재학 중이었기에 살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 1990년대 초반 당시 재일동포 선배 역사학자에게 부탁해 조선에 혹시 형이 생존해 있는가를 알아보려 한다. 실제로 형은 살아 있어서 그 선배의 주선으로 조선의 형과 한 통의 안부 편지를 주고받은 것이 국가보안법의 반국가단체 구성원과의 회합·통신 조항에 저촉되어 구속된다.  

 

남산 안기부 지하실에서 95년 4월 27일부터 20일 동안 6명의 수사관에게 둘러싸인 채 고인은 구타와 가혹행위 그리고 강제로 술 먹여 자백을 강요당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뒤집어썼다. 특히, 검찰에 송치될 즈음 안기부는 피의사실을 사전 공표함으로써 재판 결과와 관계없이 박창희는 ‘간첩’으로 낙인찍혔다.

 

고인은 1996년 징역 3년 6월을 선고받은 뒤 1998년 3월, 형 집행 정지로 출소한다. 이후 박창희는 보안관찰을 받아오다 2004년 6월 법무부가 ‘과거 범행을 부인하는 데다 해외 출장이 잦아 북한 인사들과 접촉할 가능성이 있다’라는 이유로 보안관찰 기간을 2년 더 연장하자 2005년 소송을 냈다.

 

그리고 대법원 3부는 “재범의 우려가 없는데도 보안관찰 기간을 연장한 것은 부당하다”라며 고인이 낸 보안관찰처분취소 청구 소송에서 원고 승소한 원심판결 확정을 받았다.

 

이후 조선사가 전공자인 박창희 교수는, 세종은 『훈민정음』으로 모든 신분·계급을 초월한 통일적 문화공동체 만들어간 민족, 민족국가를 세운 분으로 여긴다. 그리고 박창희는 세종을 더 깊이 연구하면서, 민족국가의 이념을 노래한 가장 오래된 시가 『용비어천가』를 원문과 번역문을 한눈에 대조하며 살필 수 있는 대역본을 저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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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비어천가』는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리니, 꽃 좋고 열매 많나니 /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아니 그치니, 내(川)가 되어 바다에 가나니”라는 구절로 한국인에게 익숙한 한글 최초의 시가집이다.

 

박창희 교수의 삶은 “민족은 나에게 무엇이냐”를 알기 위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학자를 넘어 실천하는 지식인으로 살아왔다.

 

 8·15해방과 남과 북 정부 수립의 정세 속에 민족문제를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다.

 

박창희 교수는 1932년 밀양 출신이다. 

고인의 밀양 고향 마을 학교 옆에는 지금은 없는 구 표충사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인 사명당(四溟堂) 송운대사(松雲大師, 1544~1610)의 비각이 있었다. 그리고 이 비각은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 땀을 흘린다고 하여 민족정기가 있는 유명한 곳이었다. 또한 의열단 단장인 약산(若山) 김원봉(1898~1958)의 전설 “김원봉이 독립운동을 하다가도 제삿날이면 꼭 오는데, 일본 헌병대가 닥치면 새가 돼서 날아가 버려서 잡지를 못 한다”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고인은 고향에서 소년기를 보낸다.

 

그러나 박창희는 뒷날, 당시에는 일제강점기 일본제국에 충성하는 ‘고쿠민가코(國民學校) 생도(生徒)’였다고 고백한다. 그런 고인의 전 인생을 바꾼 것은 대사변 8·15해방이었다. 

 

구술서 『원로 역사학자들의 학문과 기억』(한울, 동녘, 2021)에 나오는 박창희의 충격적인 고백이다.

 

“해방이 되는 날에, 저의 형이 셋인데, 그날은 형들이 집 마당에서 팔을 저어가면서 ‘조오타, 조오타’하고 춤을 추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나라가 망했는데, 전쟁에 졌다는데 무슨 춤을 추나, 어찌 저렇게 좋아할까’ 그래 생각을 했지요. 그런데 이제 우리 마을은 분위기가 확 달라졌어요. 면사무소가 있는 그런 마을인데, 독립투사와 애국자가 사람이고, 매국노와 친일파, 민족반역자는 모두 죽일 놈으로 돼버렸죠. 

‘아, 나는 이대로 커가면 매국노가 되고 민족반역자가 되는, 민족을 등지는 그러한 자로 되겠구나’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는데 누구한테도 이거 말할 수가 없었죠.”

 

해방은 고인에게 모순된 이면성과 자기분열 그리고 자아가 없어진 날이었다.

하지만 해방공간에서 대구 경북중학교에 다니면서 일본 제국주의와 민족말살정책을 깨닫게 되면서 10월 항쟁을 경험하게 된다.

 

앞의 책에서 나오는 고인의 10월 항쟁 기억이다.

 

“대구 경찰서 앞까지 이래 가니까, 경찰서 정문 양쪽에 죽은 노동자의 시체를 의과대학생들이 짊어지고 있는 거예요. 네명이. 그런 속에서 경찰서에서는 서류를 막 바깥으로 던지고 이렇게 하더라구요. 데모대가 경찰서를 점령을 했던 거예요.

몇 시간 있으니까 미군 탱크가 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막 달아나요. 나도 물론 거기서 달아났죠. 달아나다가 홱 뒤돌아보니 사람들은 모두 없고 텅 빈 공터에 하얀 여자 고무신 한 켤레가 눈에 띄더라구요. 휜 고무신하고 노동자 시체, 미군의 전차, 이것이 지금도 지금도 기억에 남는 거예요. 그것이 제가 겪은 10·1사건이에요”

 

이후 박창희는 남과 북이 따로 정부 수립을 하는 것을 보면서, 민족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나는 민족에 있어서 어떤 존재냐. 민족은 나에게 무엇이냐. 우리 전체에 있어서 민족은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됐기에 오늘날 이렇게 됐으며 우리는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떤 길로 나아가야 하는가.’ 

민족문제가 내게는 제일 중요해졌어요.”

 

박창희는 대구에서 6·25전쟁을 겪으면서 한의사인 아버지의 권유로 둘째 형 박권희가 있는 일본 동경으로 가게 된다.

 

 일본 유학을 통해 지식인의 자의식을 깨닫고, 고려문관 이규보를 연구한다.

 

박창희는 일본에 유학을 왔지만, 이제는 철저한 반일 감정을 갖게 된다. 그런 가운데 형의 권유로 히토쓰바시대학(一橋大学)에 입학한다. 그리고 고인은 배움을 받을 양심과 양식을 가진 학자를 찾던 중 일본의 전후 의식을 가진 비판적 지식인 우에하라 센로쿠(上原專祿, 1899~1975) 교수를 알게 되어 지도를 받는다.

 

우에하라 교수는 박창희에게 “한국, 조선도 세계사 속의 나라인데, 몽골의 세계적인 제패가 현대 세계사의 전개로 이어지는데, 몽골이 고려를 침략할 1231년부터 1270년대 고려의 지식인은 어떻게 대응했는가?”라는 질문으로 고인에게 지식인으로서 자의식을 일깨워준다.

 

이후 박창희는 학사 논문을 “역사 교과서에 나타난 고려 지식인들의 반응”으로 준비하면서 이규보(李奎報, 1169~1241)를 알게 된다.

 

이규보는 고려 중기의 문관으로 한국 문학사에 빼놓을 수 없는 걸출한 문인인 동시에, 몽골과의 외교에서도 큰 역할을 한 인물이다. 또한 어려서부터 시와 문장에 뛰어나 영웅서사시 “동명왕편” 등을 썼다.

 

그리고 박창희는 석사과정을 동경도립대학(東京都立大学)의 하타다 다카시(旗田巍, 1908~1994) 교수에게서 받는다. 하타다 교수는 일본의 전쟁범죄를 자각하고, 전후 일본에서 식민사관에서 벗어난 조선사 연구의 기초를 닦은 세계적으로 이름난 조선사 전공 교수였다. 

 

한겨레 도쿄 전 특파원 김효순 저서 『역사가에게 묻다』(서해문집, 동녘, 2011)에 나오는 1950년대 조선사 강좌가 있는 대학 소개이다.

 

“1950년대 대학원에 조선사 강좌가 있었던 곳은 도쿄 도립대학과 메이지 대학뿐이었다. 메이지 대학 문학부에는 아오야마 고료靑山公亮, 도립대학 인문학부에는 하타다 다카시가 있었다.
하타다는 조선사 강의를 하려 해도 학생이 모이지 않아 수업을 못 했다. 식민 통치하의 조선에서 경성제대나 조선사편수회에 있던 사람이 많았지만 전후 일본에 들어와서는 취직이 안 됐고, 일부는 덴리天理 대학(나라 현 덴리 시 소재)과 가쿠슈인으로 갔다.”

 

박창희는 이규보 문집을 혼자 공부하면서 연구한다. 앞의 구술서에 나오는 고인의 이규보 연구와 민족의식이다.

 

“석사과정을 지내는 동안에 내가 했던 것은 「몽골의 고려침략과 민족의 자기 형성」이라는 제목이 됐어요. 이 이규보가 그 몽골에 국서를 보내는 마음하고, 쓸 때의 마음하고, 「동명왕편」 시가 이래 있는데, 이런 것들이 결국 민족의식에서 나온 거 아닌가. 그러면 몽골의 고려 침략하고 고려의 대응하는 것은 고려에 있어서 민족 형성하고 관계가 있지 않느냐, 이런 테마(thema)로 썼어요. 그거는 어쩔 수 없이 내 혼자 공부해야 하고.”

 

앞의 구술서에서 고인은 이규보 연구를 통해 국내 학계의 ‘고려의 귀족제 사회’를 반박한다.

 

“이규보의 시 작품이 귀족제 사회에는 맞지 않기 때문이었지요. 비유하자면 김지하의 시 「오적」 있잖아요. 만일에 대한민국이 민주화 사회라면 「오적」 시가 나올 리가 없지 않습니까. 현실 사회를 반영한 의식화가 작품으로 나오는 법일 텐데. 김지하의 「오적」시는 그 사회가 민주 사회가 아니었다는 방증이 되지 않을까요.”

 

고인은 이미 논문뿐만 아니라 민족문제에 대해서도 실천적 지식인으로 뛰어든다.

 

 고마쓰카와 사건과 이진우 구명 운동

 

일본 『요미우리신문』 1958년 9월 1일 자 악의적 기사 일부이다.

 

“고마쓰가와 수사본부는 1일 오전 5시, 에도가와 가미시노 차키초 1300 조선인 부락 내 막노동꾼 이인룡 씨(59)의 차남, 고마쓰가와 고등학교 정시제 1학년 가네코 시즈오, 즉 이진우(18)(자칭 자전거 벨 공장 직공)를 살해 용의자로 자택에서 체포해 수사본부에 신병을 넘겨 취조했다. 같은 날 7시 반 피의자는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 (중략) 완전범죄라 절대로 체포되지 않는다고 큰소리치던 살인마도 결국 사체 발견 후 12일째, 새 학기가 시작되는 날 아침에 경찰 수사에 백기를 든 것이다.”

 

박창희는 1960년 정월 3일에 하타다 다카시 교수를 혼자서 세배차 방문하는데, 교수가 “고마쓰카와 사건, 이진우가 가와이소니네(かわいそうにね, 가엽다)”라고 한다. 이때 고인은 처음으로 일본인으로 이진우에 대해 동정하는 말을 듣게 된다.

 

이후 박창희는 이진우가 수용된 형무소를 찾아가는데, 그날이 최고재판소에 상고하는 마감일이었다. 이진우를 만난 박창희는 일단 무엇보다 상고해야 한다고 그를 설득하지만 안 한다고 해 부친을 설득해 상고한다.

 

앞의 구술서에 나오는 당시 일본 사회의 분위기와 박창희의 생각이다.

 

“나는 그때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냐면, 이 재판이 그 일제시대에 강제로 막 끌려오고, 못살아서 일본에 오고, 그런 사람의 범죄에 속하는 거야. 그거는 짐작으로 충분히…. 그리고 툭별히 아이큐도 높고 이러면 생각하는 게 복잡하고 심각한데, 무슨 어쩔 수 없는 그런, 그야말로 자기도 설명 못 하는 사건으로 여성을 그렇게 죽인 거면, 그대로 그 진상 조사를 재판부에서 충분히 해야죠. 그게 재판이지 않겠어요? 

근데 이게 없는 상태에서, 일반 사회 여론의 분위기를 바탕으로 하여 죽일 놈으로만 단죄해 가지고 내려치고 있으니, 이 재판을 다시 해야 한다. 그러니까 이거는 상고는 꼭 해야 되는 거예요. 무엇보다 사형을 시켜서는 안 된다. 목숨을 살려놓고 재심을 해줘야 한다.”

 

박창희는 그때 처음으로 재일동포의 삶이 얼마나 심각한가를 실감한다. 특히 민족을 이루고 있는 민중의 현실이 어떻다는 거를 학생 신분이 아닌 민족 지식인으로 알게 된다.

 

이후 고인은 이진우 구명 탄원운동을 한다. 그리고 1960년 4·19혁명 이후 일시 귀국해서 한국일보에 “죄와 벌”이라는 표제로 언론인 조덕송(1926~1997)의 도움으로 연재한다. 이때 형 박권희는 경남 밀양에서 사회대중당으로 민참의원 선거에 당선돼 5대 국회의원이 된다.

 

박창희는 이진우 구명 탄원운동을 하면서 재일동포 2세로 나중에 위안부 문제 등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유명한 박수남이란 여성을 알게 된다.

 

동경경제대학교 현대법학부 교수였던 서경식(1951~2023)은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돌베개, 2007)에서 이진우의 삶을 기록한다. 

 

“이진우는 3남 3녀 중 차남으로, 모두 여덟 식구가 비좁은 판잣집에서 매일 새우잠을 청하는 나날을 보내야 햇다. 중학교 때는 ‘밥을 먹지 못해서’ 100일 가까이 학교를 쉬었다고 한다. 
(중략)
자전거 절도 경력 2회, 여섯 군데 도서관에서 도스토옙스키 등 세계문학 고전을 52권 훔친 전력이 있지만, ‘훔친 자전거를 팔아치운 돈으로 놀러 다닌 것이 아니라, 그저 책만 샀다. 또 훔친 책도 집에 쌓아놓고 공장의 점심시간은 물론 틈만 나면 탐독했다.’. 중학교 졸업 때 히타치제작소日立製作所와 세이코샤精工社에 취직을 희망했지만, 성적이 우수했음에도 불구하고 국적차별 때문에 채용되지 못하고 동네의 작은 공장들을 전전했다.”

 

위의 같은 책에서 서경식은 무죄를 주장하는 견해를  밝힌다.

 

“...적어도 검찰의 입증과 법원의 심리 등 모든 것이 불충분했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할 것이다. 실제로 변호사의 정밀한 정신감정 요구도 시종일관 거부되었고, 소년범죄임에도 이례적으로 사형이 선고되었다. ‘조선인 부락’의 어둠에서 나타난 ‘괴물’을 한시바삐 처지해버리려는 일본 사회의 민족차별 감정이 그 배경에서 작동하고 있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나는 그 두 명의 여성을 살해함으로써 일본 사회에 보복한 것이다’라고 이진우는 주장했어야 했다. 그에게는 그렇게 주장할 ‘권리’가 있었다. 그렇게 주장했더라면 만사가 얼마나 명쾌했으랴.”

 

이진우는 1962년 11월 16일 오전 10시, 미야기 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당한다.

 

 학자를 넘어 실천하는 민족 지식인

 

박창희는 1968년에 귀국해서, 70년도에 이화대학 법정대학 전임으로 경제원론, 재정학 등을 강의한다. 그러면서 학생들과 봄·겨울방학 동안 2주일씩 4년간 약 100일을 한 마을에서 농촌봉사활동 지도교수를 한다.

 

이때 앞의 구술서에서 나오는 박창희의 생각이다.

 

“4년 동안 계속하니까 마을이 그 변하는 걸 나대로 봤거든요. 이게 ‘잘살아 보세’하는 새마을운동은 확실히 박정희가 농촌에서 성공적으로 정책 효과를 내고 있는데, 도시에서는 데모가 끊이지 않고, 정권은 가혹하게 탄압하고 있었지요.
이런 모순된 현실은 민족의 문제에서 볼 때, 그거는 박정희의 정치 목적으로 해서 정책을 펼치고 있기 때문으로 생각되었지요. 이게 민족의 농촌의 문제를 해야 되는데 농촌 문제를 정권 장악자로서 더 잘 살도록 정책을 펴고, 도시에 오면 막 데모가 나고 이렇게 매질을 한단 말이야. 민족의 문제는 모순되는 상대 간에 협의가 있고 통일성을 이뤄가야 하는데, 박정희는 일방적으로 제지하려고만 했지요. 
(중략)
김구, 여운형 선생이 하자 했던 거는 남북협상이지 적화통일을 우리가 바란 건 아니었단 말이에요. 협의를 하는 가운데서 다양성이 보존되고, 이질적이라도 공생·공존이 가능한 사회공동체가 이루어져야 민족성을 찾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에요. 동과 신분을 넘어서요.
한데 박정희의 민족은 그게 아니었어요. 농촌에 가서는 ‘잘살아보자, 잘살아보자’하고 도시에 와가지고는 데모 막고 사람죽이고, 이거는 정권 입장이라는 말이야. 자치에서의 민족주의는 반드시 협의하고 통일성이 이루어져야 돼요.”

 

이후 고인은 한국외국어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독도연구회 지도교수와 마쓰시로 대본영 지하호 조사연구회장 그리고 국민학교 명칭개정 협의회 공동대표 등 주로 일제강점하 진상규명과 민족문제에 헌신한다.

 

또한 박창희는 민족사상의 문제, 역사를 제대로 살피는 연구에 집중한다.

 

앞의 구술서에서 나오는 박창희의 주장이다.

 

“우리한테 민족사상이. 신채호, 전봉준, 정다산(정약용) 또 이퇴계(이황), 물론 부분적이겠지만, 나름대로 이게 민족사상이 어떤가라는 기준에서 보았는데, 아닌 거 같았어요. 민족사상이 있기는 하지만 전체성을 띠고 체계적인 사상으로 민족사상은 없단 말이지요.

그래, 쭉 더 올라가니까 『용비어천가』 그리고 『훈민정음』이 나와. 그래 ‘『훈민정음』하고 『용비어천가』 이거 민족사상하고 관계가 깊은 거 아닌가’ 그때 1980년에 처음으로 카우츠키(Kautsky) 생각이 났어요. 카우츠키가 언어야말로 민족을 식별하는 데 가장 중요한 지표라고. 카우츠키 다음에 스탈린도, 레닌도 그래 했지만, 이게 민족사상과 민족주의의 문제라는 것을 일반 학파가 잘 다루지 않고, 마르크시즘 계통의 사람들이 그거를 해온 거예요, 그래 이 카우츠키의 문제가 제게는 있어가지고 『훈민정음』을 생각하고, 『용비어천가』를 살펴보게 되었죠.

그래서 나로서는 전체적 범위에서의 세종사상과 정책이 이 원리와 연계되고 합치는 것을 보게 된 겁니다. 처음, 『용비어천가』가 바로 국가의 이념을 노래한 거다.
(중략)
세종은 나라를 자강·자존으로 명나라와의 책봉 체제를 형해화(形骸化)하고 『훈민정음』으로 모든 신분·계급을 초월한 통일적 문화공동체를 만들어갔지요. 세종은 군사 주권을 튼튼히 장악하여 영토를 보존하고 국가를 당시의 세계사의 보편국가로 승화시키고, 사람의 생명을 중시하는 사상 원리로서의 불교를 가치로 삼았죠. 세종의 하늘, 조상에의 숭배, 백성·유교에의 포용 등 세종사상과 그 정책들을 민족사상의 자기 전개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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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박창희 교수님!

선생의 학자를 넘어 실천하는 민족 지식인으로 살았던 삶은, 우리들의 가슴속에 살아있고 영원히 불타오를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선생이 못다 한 조국과 민족 그리고 민족 통일의 꿈을 우리는 반드시 쟁취할 것입니다.

조국은 기억하리라!

선생의 이름과 걸어온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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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희 (1932-2025)

▶ 학력
히토쓰바시 대학교 박사
도쿄 도립대학교 석사
경북중학교
무안초등학교
▶경력
한국외국어대학교 사학과 교수
독도연구회 지도교수
마쓰시로 대본영 지하호 조사연구회장
국민학교 명칭개정 협의회 공동대표
오사카경제법과대학교 아세아연구소 객원연구원

 

▶기사·논문·저서
“죄와벌, 이진우 사건”(≪한국일보≫, 1960), 「최충헌 소고」(1969), 「이규보의 ‘동명왕편’ 시」(1969), 「고려의 ‘양반공음전시법’의 해석에 대한 재검토」(1973), 「『한인전』 논에 대한 재검토」(1975), 「고려시대 『귀족제』설에 대한 재검토」(1977), 「이규보의 본질에 대한 연구」(1989, 1990), 「『용비어천가』에서의 ‘천’과 ‘민’의 관념」(1991), 『주해 사료국사』(1981), 『한국사의 시각』(1984), 『야스쿠니 신사와 그 현주소』(2007), 『역주 용비어천가』 상·하(2015) 고인은 1940년 옛 영산현 현재의 창녕 도천에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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