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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29일은 일제 식민지로 전락한 망국의 경술국치(庚戌國恥) 115주년이었다.
원래 본 기고는 국치일 당일 기고되어야 했지만, 필자가 몸담은 사월혁명회 전 황건 상임의장의 작고로 장례준비와 <사월혁명회장(葬)>을 치르느라 제때 게재되지 못해 아쉬움이 많다.
나라와 민(民)이 국치일을 잊고 지내는 동안 “역사 정의”는 지연되어 갔다.
특히 종일(從日) 종미(從美) 수구 정당은 그렇다 치더라도 역대 민주당 정부조차 “역사 정의”보다 ‘실용 외교’라는 명분으로 일제 청산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지난 8월 23일 도쿄에서 민주당 출신 이재명 대통령과 일본 이시바 시게루 총리의 한일정상회담도 마찬가지였다.
‘실용주의’란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이 말하기를 ‘기업 철학’이라고 했다. ‘기업 철학’은 오직 약육강식의 논리로 이윤만 남기면 좋은 기업이 되는 자본주의의 철학이다.
『철학대사전』(한국철학사상연구회 편, 동녘, 1989)에서 ‘실용주의’를 정의한 일부이다.
“미제국주의의 모든 정책은 그것이 자신들에게 이익과 성과를 약속해 주는 한, 실용주의의 이름하에 참되고 도덕적인 것으로 치정될 수 있다. 즉 대내적으로 부르주아 민주적 제 권리를 실시하고, 대외적으로는 다른 국가들에 대해 공격을 가하고 다른 민족들에 대한 억압적 정책을 수행하면서도, 이를 실용주의의 이름하에 참되고 도덕적인 것으로 미화되는 것이다.”
“빛의 광장”에서 응원봉을 든 민(民)이 절대적으로 이재명 정부에게 요구한 사항은 “역사 정의”와 “일제 청산”이었다.
미국의 아시아 군사정책 희생양 1965년 「한일기본조약」
이번 한일정상회담의 공동언론발표문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1965년 「한일기본조약」에 대한 일본의 이해를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그 일부이다.
“양 정상은 올해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을 맞아, 1965년 국교정상화 이래 지금까지 축적되어 온 한일관계의 기반에 입각하여 양국 관계를 미래지향적이며 안정적으로 발전시켜 나가자는 데 의견을 같이하였다.”
1965년 6월 22일에 체결된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한일기본조약」의 문제가 되는 내용 일부이다.
“대한민국과 일본국은, 양국 국민관계의 역사적 배경과, 선린관계와 주권 상호존중의 원칙에 입각한 양국 관계의 정상화에 대한 상호 희망을 고려하며, 양국의 상호 복지와 공통 이익을 증진하고 국제 평화와 안전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양국이 국제연합 헌장의 원칙에 합당하게 긴밀히 협력함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며, 또한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시에서 서명된 일본국과의 평화조약의 관계 규정과 1948년 12월 12일 국제연합 총회에서 채택된 결의 제195호(III)을 상기하며, 본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하여...”
한국과 일본은 그동안 1965년 「한일기본조약」 제2조와 「한일청구권협정」 제2조를 정반대로 해석해 왔다.
「한일기본조약」 제2조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 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are already null and void)”에 대해서 한국은 체결 “당초부터 무효”라고 해석하는 데 반해, 일본은 ‘시대가 변했기 때문에 지금은 무효가 되었으나, 과거에는 합법으로 유효’라고 해석한다. 즉 한국은 “식민지 불법 강점”을, 일본은 ‘합법 지배’에 대한 것으로 주장했다.
또한 「한일청구권협정」 제2조 “양 체약국은 양 체약국 및 그 국민(법인을 포함함)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그 국민 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1951년 9월 8일에 샌프런시스코우시에서 서명된 일본국과의 평화조약 제4조 (a)에 규정된 것을 포함하여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 대해서도 한국은 “불법 강점 문제는 청구권 협정의 대상이 아니다”로, 일본은 ‘모든 것이 대상’이므로 이 협정으로 ‘모든 것이 해결됐다’라고 주장해 왔다.
이렇게 첨예하게 대립한 「한일기본조약」이 급조 굴욕적으로 체결된 근본 원인은 미국이 베트남전쟁을 위해 한일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재명 대통령은 이번 한일정상회담에서 1965년 「한일기본조약」에 대해 ‘실용 외교’란 명분으로 ‘1965년 국교정상화 이래 지금까지 축적되어 온 한일관계의 기반에 입각하여’라고 일본 주장을 받아들였다.
미국의 베트남전쟁 수행을 위해 일본에는 돈을, 한국에는 군대 파병을 요구
1960년대 초, 국제 정세는 동남·북아시아를 중심으로 급변한다. 1964년 1월 27일 중국·프랑스 국교 수립과 8월 4일 미국의 북베트남 폭격 그리고 10월 16일 중국의 핵실험 성공으로 요동치는 상황이었다.
미국은 이런 정세를 반전시키기 위해 1964년 8월 소위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여 베트남전쟁을 일으켰으나, 막대한 전비와 전쟁 명분을 위해 외국 군대의 참전이 필요했다.
또한 미국은 베트남전쟁뿐만 아니라 아시아 안보 군사정책의 일환으로 한국과 일본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중요했다.
그러나 미국이 원하는 한일관계는 일본의 36년 일제 강점 청산 문제로 교착상태에 빠져, 양국 국교정상화는 요원한 상황이었다.
이승만 정부는 한일 국교정상화협상을 시도했으나, 주요 쟁점인 식민지배 배상 문제와 재일 한국·조선인의 법적 지위 그리고 동해상의 어업권 등으로 지지부진하였다. 그러나 1961년 5·16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의 등장으로 한일 국교정상화 논의는 급물살을 탄다. 박정희의 한일 국교정상화 논의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필요한 재원 조달과 일본 안보 보급기지 등이 명분이었지만, 실제로는 5.16쿠데타에 대한 미국의 쿠데타 승인이었다.
일본은 미국이 이미 6·25전쟁 도중에 미 국방성의 특별조달령으로 일본의 무기 제조를 허가하였고, 1954년 자위대 창설로 재무장에 이르게 하면서 일본을 충견으로 만들어 놓았다. 특히 일본은 오키나와의 가데나 공군기지(嘉手納飛行場)를 비롯해 많은 미군기지가 베트남전쟁의 전선 기지로 활용되었고, 네이팜탄 제조 등 전쟁 특수로 막대한 돈을 벌었다.
그러나 한일의 대립은 미국의 전쟁 수행에 어려움을 조성했고 미국은 한일관계 개선을 더욱 집요하게 압박했다. 결국 「한일기본조약」 체결로 미국은 평화헌법 때문에 군대를 파견할 수 없는 일본에는 베트남전쟁 군비를, 한국에는 군대 파병을 요구해 미국 단독 전쟁이 아닌 국제전이라는 명분을 얻었다.
미국은 한일 두 나라의 약점을 이용해 일본 돈으로 한국 청구권과 맞바꾸게 강요한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압박으로 한국과 일본이 급조 체결한 「한일기본조약」은 조약 해석 차이로 한일관계는 제대로 정리되지 못하고 양국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특히 일본은 태평양전쟁 패전 이후 처음부터 일본의 조선 등 아시아 지배는 식민지 착취가 아니라 오히려 공헌했다는 제국주의 논리로 전후 처리에 임했다. 문명화된 일본이 산업 발전과 생산력을 증대시키기 위해 뒤처진 아시아 지역을 점령한 것은 당연하다는 일본의 주장을 같은 제국인 미국은 그대로 인정했다.
「한일기본조약」의 체결 원흉은 1951년 미국이 주도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다. 미국은 조선을 강탈하고 일말의 사과와 반성도 하지 않은 전쟁 범죄자들이자 민족 분단의 원흉인 일본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부활시켰기 때문이다.
「극동국제군사재판」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그리고 일본의 부활
1943년 11월 27일 ‘카이로 선언’은 “조선을 자유독립하는 것으로 결의를 가진다”라고 선언했다. 이어 일본이 항복하고 수락한 ‘포츠담선언’에서는 일본의 주권은 홋카이도, 혼슈 등 현재의 영토에 국한하고 일본의 전쟁 범죄를 엄히 다스리며 배상금을 지불할 것 등이 결정됐다. 그리고 이 선언의 조문을 근거로 일본의 침략 전쟁에 대한 「극동국제군사재판」을 진행했다.
「극동국제군사재판」은 영국‧미국‧네덜란드‧프랑스의 식민지, 중화인민공화국(중국)에 대한 일본군의 침략은 재판했지만, 조선‧중화민국(대만)의 식민지 지배는 심의하지 않았다.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과 그리고 추궁되지 않은 전쟁 범죄 재판은 향후 일본의 조선에 대한 인식을 크게 왜곡시켰다. 설상가상으로 전승국에 대한 배상 지불은 6·25전쟁으로 미 국무성이 ‘대일강화 7원칙(1950년 11월 24일)’을 적용해 모든 교전국의 일본에 대한 배상청구권을 포기하게 했다.
이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는 중국과 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조선)과 대한민국(한국)은 초청되지 않았다. 그리고 한국의 참가는 일본의 요시다 시게루 내각이 반대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1951년 9월 8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연합국 48개국이 일본과 태평양전쟁 전후 처리에 서명하고, 1952년 4월 28일에 발효된다. 그러나 소련은 조약에 일본의 군대 창설을 막을 장치가 없다는 점,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이 일본 침략의 주요 피해자임에도 초대받지 못했다는 점, 조약에서 일본을 미군 기지로 삼았다는 점, 일본을 소련에 대항할 미군의 연합국으로 삼았다는 점 등을 들어 반대했다.
결국 소련과 중국을 참가시키지 않고,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방측 진영만 참가한 편면강화(⽚⾯講和-교전 상태에 있던 모든 나라들과 맺은 전면강화가 아닌, 일부 나라들하고만 체결했다는 의미)를 체결한다.
또한 불행하게도 조선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 어디를 전체 조선의 대표로 하는 문제와 6·25전쟁 중이어서 초청 대상국이 아니었다.
애초 조약의 배상 조항 14조는 일본이 배상을 지불할 것을 명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금전으로 지불해야 할 배상을 생산물이나 공장, 다리, 호텔 건설 등으로 둔갑하고 그 공사도 일본기업이 수주했다. 그 결과 일본은 동남아시아에 진출하여 경제 부흥을 이룬다. 그러다 보니 일본인에게 배상이라는 인식은 없게 되고 배상은 흐지부지 끝난다.
그런데 이 배상 지불 방식이 「한일기본조약」에도 적용된 것이다. 반성과 사과 없는 일본 전범국가와 손을 잡은 것이다.
완전히 미국 주도하에 일본 전후 처리 문제가 정리되면서 미국의 정치적 위상과 이익만 극대화된다.
6·3 비상계엄령과 ‘김종필‧오히라 메모’ 그리고 졸속·굴욕 「한일기본조약」 체결
친일사대독재자 박정희는 1964년 봄부터 본격적으로 한일회담을 추진하나, 학생들은 격렬하게 “매국(賣國)”이라 반대하였고 언론은 그 투쟁을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그뿐 아니라 고등학생과 일반 시민이 참가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된다.
마침내 박정희는 군대를 동원해, 6·3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반대운동을 폭력 진압하면서 한일국교 정상화를 밀어붙인다. 일본도 이에 발맞추어 과거 만주국 군인인 박정희와 청구권 문제를 해결하는 게 기회라고 판단하고 속도를 낸다.
그런 와중에 1962년 11월 12일에 작성된 소위 ‘김종필‧오히라 메모’가 공개된다. 메모 핵심 내용은 대일청구권 해결 규모를 ‘무상공여 3억 달러, 유상공여 2억 달러, 상업차관 1억 달러’ 등이었다. 이 메모는 기본적으로 한국이 요구해 온 대일청구권과 일본이 주장한 ‘평화선 철폐’를 합의한 것으로, 결국 협상이 ‘정치적 흥정’이었음을 보여줬다.
일본은 ‘청구권’ 개념을 인정하지 않고 그 돈을 ‘독립축하금’으로 해석했다. 즉 돈으로 과거사를 맞바꾼 ‘흥정’으로 사실상 대일청구권 타결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결국 1965년 6월 22일 일본에서 양국 외무장관이 서명함으로써 「한일기본조약」은 한국과 일본이 견해가 일치하지 않은 상태에서 미국의 압박으로 졸속, 굴욕적으로 체결된다.
그러나 「한일기본조약」의 상대는 한국뿐이었다.
아직 일본의 식민지 지배 피해자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재일동포 문제가 남아 있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일제 식민지배에 대한 과거사 처리와 보상은 조선민족 전체가 공조로 해결해야만 한다.
특히 일본은 식민지 지배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입장이기에 「한일기본조약」 체결 때 사죄하지 않았다. 또한 한국에 지불한 돈은 어디까지나 한국의 ‘독립축하금’이라는 경제협력자금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당연히 보상 문제는 아직 남아 있었다.
「극동국제군사재판」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이어 「한일기본조약」 체결 또한 배후는 미국으로, 일제 과거사 청산을 가로막은 민족의 원흉이다.
미국은 한국과 일본을 베트남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해 돈으로 대일청구권과 과거사를 맞바꾸게 한 ‘흥정꾼’이자, 졸속·굴욕 조약을 강요한 ‘무뢰배’였다.
조선의 근대사가 일본의 식민 지배라면, 현대사는 남북분단을 고착화해온 미국의 신식민지이다.
일본의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총리 담화」 그리고 「김대중 오부치 선언」
일본은 역사적인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총리 담화」 그리고 「김대중 오부치 선언」을 통해 위안부 존재와 식민지 지배 그리고 침략에 대해 사죄했다.
1993년 8월 4일, 미야자와 내각 당시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이 1년 8개월 동안의 조사를 걸쳐 발표한, “위안부 관계 조사결과 발표에 관한 고노 내각관방장관 담화(慰安婦関係調査結果発表に関する河野内閣官房長官談話)” 약칭 「고노 담화」를 발표했다. 주요내용은 ▲ 위안소와 위안부가 존재했다. ▲ 위안소의 설치, 관리 등에 군이 관여했다. ▲ 위안부가 되는 과정에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강제성이 있었다. ▲ 위안소에서 강제 사역이 이루어졌다. ▲ 모집, 이송, 관리 등은 본인들의 의사에 반해 진행된 강제성이 있었다. 담화는 이상의 5개 사실을 확인하고 “마음으로부터 사죄와 반성의 말씀을 올린다”라고 표명했다. 2007년 미국 하원에서도 일본 정부의 공식적이고 분명한 인정과 사과, 역사적 책임을 요구하는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이후 일본은 1995년 8월 15, “전후 50주년의 종전기념일을 맞아(戦後50周年の終戦記念日にあたって)” 약칭 「무라야마 총리 담화」에서 최초로 현직 일본 총리가 과거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대해 사죄했다. 「무라야마 총리 담화」는 일본의 군국주의 과거 식민 통치에 대해 “진심 어린 사과”를 하고 “깊은 반성”을 표함으로써 과거에 대한 반성의 새로운 기준을 세웠다.
또한 1998년 10월 8일 일본 도쿄를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총리가 한일 양국 간 불행한 역사를 극복하고 미래 지향적인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과거사 인식을 포함한 11개 항의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21世紀に向けた新たな日韓パートナーシップ共同宣言)” 약칭 「김대중 오부치 선언」에서 “한국 국민에게 식민지 지배로 인해 큰 손해와 고통 (중략) 통절한 반성과 진심 어린 사과”의 뜻을 밝혔다.
월트 F 해치는 저서 『전후 일본과 독일이 이웃 국가들과 맺은 관계는 왜 달랐는가』(책과 함께, 2024)에서 당시 한일관계를 기술했다.
“김 대통령은 한국의 IMF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일본으로부터 30억 달러의 원조를 제공받기로 했다. 그리고 오부치 총리는 한국 정부가 오랫동안 유지해온 일본 문화 상품(영화나 음악 등)에 대한 수입 금지 조치를 점진적으로 완화할 것이라는 약속을 확보했다. 이어진 회담에서 한일 양국은 심지어 2002년 월드컵축구대회를 공동개최하기로 합의했다.
(중략)
이 기간에 양국 사이에 경제 및 인적교류가 빠르게 증가했다. 2005년 일본과 한국 간의 상품 무역은 720억 달러에 달했는데, 이는 10년 전보다 거의 두배 수준이었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화해의 시간은 오래 가지 않았다.
종일(從日) 종미(從美) 사대 박근혜, 윤석열과 아베의 등장으로 앞서 정권들이 힘들게 이루어 놓은 한일관계를 급속대로 뒤집어 놓았다.
‘빛의 광장’ 요구는 역사 정의와 일제 청산
2015년 12월 28일 박근혜 정부와 아베 정부는 그동안 진전되어온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뒤바꾸는 한일합의를 전격적으로 발표했다. 당시 합의 내용은 ▲일본 정부 예산으로 피해자들의 상처 치유 사업 ▲최종적·불가역적 문제 해결에 따라 상호 비난·비판 자제 ▲주한 일본 대사관 앞 소녀상 문제의 적절한 해결 등이다. 그리고 아베는 10억 엔(약 108억 원)을 출연하는 대신, 한국은 그 대가로 위안부 문제를 ‘최종적·불가역적으로 해결’한다는 굴욕적 문구를 넣었다.
그러나 이 합의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동의 없이 이루어진 합의로 국가적·법적 사죄와 배상 문제를 도외시한 야합으로 반역사적 폭거였다. 피해 할머니들은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 인정, 배상 등 명예회복 조치가 포함되지 않은 12·28 합의는 무효라고 했다. 또한 소녀상에 대해 ‘관련 단체와 협의해 적절히 해결’하기로 함으로써 사실상 철거에 합의한 굴욕적 외교였다.
다행히 박근혜 탄핵 구속으로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2017년 12월 28일 박근혜 정부에서 체결된 12·28 합의에 대해 “2015년 한일 정부 간 위안부 협상은 절차적으로나 내용으로나 중대한 흠결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검찰공화국의 윤석열은 강제징용 제3자 변제 굴욕 합의를 함으로써 1999년부터 25년 넘게 싸워온 강제동원 피해자들과 한·일 시민사회의 노력을 무참히 짓밟았다. 일본 아베 정부의 책임 일부 인정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지원을 위한 재단(화해와 치유 재단)의 기금 참여는 있었지만, 피해자 동의 없이 좌초한 박근혜의 12·28 한일 위안부합의보다도 훨씬 후퇴한 외교 참사였다. 아니 전범국가 일본의 사죄 및 가해 기업의 배상을 단 하나도 받아내지 못한 최악의 굴욕 협상이었다. 또한 우리나라 대법원의 판결을 무시하고 사법주권을 훼손한 합의이며, 피해자의 의견과 민중들의 염원, “역사 정의”를 짓밟은 매국‧졸속 합의였다.
전면 폐기되어야 마땅하다.
당시 민족의 양심 양금덕 할머니는 “무엇보다 일본으로부터 잘못했다고 사죄받는 게 내 소원이다. (중략) 우리나라가 무엇이 아쉬워서 벌벌대고 있는지 이해가 안 된다”라고 분노했다.
일본의 40년간 조선 점령과 36년간 식민지배에서 저항·투쟁해온 선열 열사들이 피를 토할 노릇이다. 일제 40년은 지배와 피지배, 가해자와 피해자의 분명한 관계임을 모른단 말인가.
미국 또한 1965년 한일협정 체결과 2015년 위안부합의 그리고 2023년 강제징용 제3자변제의 배후임을 민(民)은 똑똑히 알아야 한다.
일본은 오래전부터 불천지 원수요 숙적이었다.
무릇 축구나 야구 등 한일전에서 패하면 바로 감독은 경질이다!
이재명 국민주권정부 또한 마찬가지임을 명심해야 한다!
올해는 을사늑약 120년, 한일기본조약 60년, 광복 80년이 되는 역사적인 해이다.
국민주권정부는 일본의 조선 불법강점, 반인도적 범죄행위에 대한 책임을 묻고 “역사 정의”와 “일제 청산”을 바로 세워야 한다.
“빛의 광장”에 응원봉을 들고 나온 민(民)의 요구이다.
▶ 일본 정부는 식민지·전쟁 범죄 인정하고 공식 사죄하고 법적 배상하라!
▶ 일본 정부는 역사왜곡 중단하고 올바른 역사교육과 재발 방지를 위해 노력하라!
▶ 이재명 정부는 ‘2015 한일합의’ 완전히 폐기하고 피해자 명예회복을 위해 나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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