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 ㅡ 오늘의 미국 시리즈 3/3
이경렬(전 주앙골라 대사)
등록일 : 2026.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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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고트왕 알라리크 1세.

 

로마가 점령당했다. 서고트족의 왕 알라리크 1세가 로마에 입성한 410년의 일이다. 흔히 이 사건을 ‘서로마 멸망의 서막’이라 부르지만 알라리크는 로마를 물리적으로 파괴하지 않았다. 황제는 건재했고 원로원도, 로마법도, 행정 체계도 그대로였다. 제국이라는 외형은 유지되었고 서로마는 그 후로도 66년을 더 버텼다. 그럼에도 410년이 결정적 분기점인 이유는 단 하나다. 로마가 더 이상 ‘침범 불가능한 절대 수도’가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영원한 제국은 신화가 되어버렸다.

 

워싱턴이 점령당했다. 외부세력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대선 결과에 불복한 낙선자 도널드 트럼프의 추종자들이 의회를 짓밟았다. 트럼프가 미국을 전복한 것은 아니다. 헌법은 살아있고 연방 정부도 건재하다. 그러나 2021년 1월 캐피톨 힐 폭력 난입사태는 미국 정치의 단단한 금기를 깨뜨렸다. 국가의 수도이자 제도의 심장부를 향한 직접적인 타격이었다. 워싱턴은 로마처럼 단순한 행정 공간이 아니라 제도적 정당성이 응축된 상징의 무대다. 트럼프는 그 공간을 침탈함으로써 “수도 또한 도전받을 수 있다”는 위험한 선례를 남겼다.

 

알라리크 이후 서로마 제국이 보인 가장 큰 변화는 대외 정책의 일관성 상실이다. 장기적인 전략은 사라졌고 눈앞의 위기를 회피하기 위한 무리한 군사 동원과 동맹 남용이 일상이 됐다. 주변 부족들에겐 무차별적인 보조금과 영토를 뿌렸고 제국의 군대는 외부 용병들로 채워졌다. 통제력을 잃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로마는 이전보다 더 공격적으로 움직였지만 기저엔 불안이 깔려 있었다. 제국은 외연을 확장하기보다 내부 균열을 가속하는 쪽으로 침몰하고 있었다.

 

애당초 로마는 군사력만으로 버틴 국가가 아니다. “로마는 건드릴 수 없다”는 신화와 상징 그리고 그 위엄이 주는 공포 위에 세워진 체제였다. 아버지는 힘이 강하기 때문에만 가장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알라리크의 점령은 이 거대한 상징을 단숨에 무너뜨렸다. 로마는 협상의 인질이자 압박의 대상으로 전락했고 질서의 최종 보증자라는 지위를 잃었다. 제국이라는 기계는 돌아가고 있었지만 그것을 떠받치던 심리적, 정치적 자동 장치는 멈춰버린 것이다.

 

트럼프 시대의 미국 외교는 알라리크 점령 이후 로마의 행태와 무서울 정도로 닮아 있다. 동맹을 비용으로 환산하고, 국제 규범 무시를 협박의 도구로 쓰며, 관세와 제재를 단기적 정치 효과를 위해 남용한다. 로마는 주었고 트럼프는 빼앗는 정반대의 행태를 취하고 있지만 질서유지를 거래로 전환한다는 구조면에서는 완전히 동일하다. 이는 패권의 확장을 도모하는 행보가 아니라 패권이 더 이상 자동으로 존중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나오는 과잉 반응이다.

 

제국이 자신감을 잃을수록 외교적 소음은 커지고 행동은 즉흥적으로 변하며 동맹은 소모품 취급을 받는다. 후기 로마가 국경지대의 소모적인 분쟁 속에서 스스로 마모되었듯 트럼프식 제국주의 역시 미국의 지배력을 강화하기보다 제국이 가진 ‘신뢰 자본’을 갉아먹고 있다. 이것은 몰락 그 자체는 아니더라도 몰락이 이미 진행 중임을 알리는 전형적인 징후다. 정치이론가요 혁명가인 안토니오 그람시의 표현을 빌리면, 상대국들의 동의를 상실한 제국은 더 이상 정당성을 갖춘 힘을 행사할 수 없다. 미국이 지금 행사하는 힘은 자기통제가 안 되는 발작이다.

 

알라리크의 침탈을 서로마의 멸망과 직접 연결해야 하는 이유는 제국을 떠받치던 정치적 자동 장치가 멈춰버렸다는 것이다. 이후 로마가 겪은 수많은 약탈과 분열은 결국 410년이 열어젖힌 문 안에서 벌어진 후속 작업일 뿐이다. 수도가 점령될 수 있다는 선례는 제국 전체에 “이 체제는 영원하지 않다”는 신호를 보냈고, 이는 충성과 복종에 들어가는 비용 구조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었다. 명성은 한 순간에 무너지는 법이다. 트럼프는 무도한 위협과 공격으로 국제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무고한 시민을 살해함으로써 국내외의 신의를 뿌리째 뒤흔들고 있다.

 

독일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 ‘트리움비라트(Triumvirat)’가 1975년에 발표한 〈영원한 도시로의 행군>(March to the Eternal City)은 이 비극을 음악으로 그려냈다. 곡은 개선의 환희 대신 피할 수 없는 행진의 무게감을 강조한다. 승리를 노래하기보다 중심이 더 이상 중심으로 기능하지 못할 때 발생하는 팽팽한 긴장을 반복한다. 알라리크가 로마를 밟았을 때의 정서와 정확히 일치하는 대목이다. 하루아침에 세워지지 않은 로마가 이토록 쉽게 문을 열다니! 

 

주목할 점은 알라리크가 외부의 야만인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로마의 동맹군이었고 제국의 체제 안에서 보상과 지위를 요구하던 철저한 내부자였다. 그런 내부자를 로마는 수용할 능력과 의사가 없었고 그렇게 내쳐진 ‘외부자’는 자신의 근거지로 진군의 기수를 돌렸던 것이다. 인정받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었음은 물론이다. 결국 로마의 멸망은 외부의 침략이 아니라 내부에서 균열을 일으킨 행위자에 의해 앞당겨진 것이다. 트럼프 역시 미국 국민들의 인정과 존중을 간절히 원하겠지만 결국 알라리크처럼 차갑게 내쳐지고 말 것이다.

 

미국의 멸망을 당장 단정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역사가 말해주는 제국의 종말은 늘 같은 경로를 밟는다. 알라리크 이후 로마는 더 많은 군대와 보조금을 쏟아 부어야 했고 더 비굴한 타협을 강요받았다. 트럼프 이후의 미국도 비슷한 지점에 서 있다. 국제사회의 미국 행동에 대한 불신, 동맹들의 미국에 대한 조건부 복종, 미국 위협에 대한 보복 의지 대두는 모두 체제 유지비용을 치솟게 만드는 요인들이다. 이런 현상이 반복된다면 미국은 형식적으로 존속할지언정 제국으로서의 구심력은 잃어갈 수밖에 없다. 멸망은 단일 사건이 아니라 긴 과정이다.

 

로마의 멸망은 476년에 기록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410년에 시작되었다. 미국의 미래가 언제 종말로 기록될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어느 시점에 되돌릴 수 없는 국면에 진입했는지는 이미 역사의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의사당 난입의 장면일 수도 있고, 미니애폴리스에서의 무고한 시민 사살 상황일 수도 있고, 베네수엘라 침공의 순간일 수도 있다. 물론 이란의 전쟁을 이기지 못하고 슬그머니 전장에서 빠져나오는 시점일 수도 있다. 제국은 무너질 때 대단히 요란한 소리를 내지 않는다. 그저 어느 날부터 예전처럼 돌아가지 않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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