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길성 (노동운동가)
등록일 : 2024.04.23

조국-1.jpg

 

1. 문제 제기

 

모든 사물은 현상을 통해  본질을 드러낸다. 따라서 한국 사회의 정치 지형에 대해 알고 싶다면, 이번 22대 총선에서 가장 특징적 현상인 ‘조국 열풍’은 좋은 연구 대상이 된다. 


이번 22대 총선 승패에 영향을 미친 요인은 많이 있다. 예컨대 채상병 사건과 이종섭 호주대사 임명, 대파 사건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그중 민주당의 ‘대승’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요인을 꼽으라면 단연 ‘조국 열풍’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비록 윤석열 정권에 대한 유권자들의 분노가 컸을지라도, 공천 파동과 사법 리스크 등으로 인해 이재명이 이끄는 민주당에 대한 거부감 역시 컸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윤석열 정권을 심판하기 위해 투표장까지 갈 마음이 생기지 않았을 터인데, 만약 투표율이 낮았다면 일반적으로는 좀 더 강고한 고정표를 많이 갖고 있는 보수세력에게 유리하다.


실망한 유권자들을 투표장까지 이끌어 내는 데는 다른 요인들보다도 ‘조국 열풍’이 가장 큰 역할을 하였다.  대중들은 조국이 나와  바람을 일으키자 그때서야 다시 윤석열 정권을 심판해야겠다는 의욕을 되찾게 되었고, 그제서야 많은 사람이 투표장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물론 ‘조국 열풍’은 반대로 경쟁자인 국민의힘 지지자들의 적극성을 이끌어 내는데도 기여했다. 왜냐하면 혁명은 ‘반혁명’에 의해 추동되는 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22대 총선 결과를 이해하고 싶다면 ‘조국 현상’에 대해서 깊이 있게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ㅡ 전반적인 ‘반윤석열 정서’ 속에서도 견고한 보수 지지층

 

그렇다면 이렇듯 전 사회적으로 윤석열 정권에 대한 불만과 ‘정권 심판’ 열기가 높았음에도, 국민의힘이 획득한 45%의 득표율은 무엇을 의미할까? 경쟁상대인 민주당과 비교할 때 의석수에선 80%의 격차가 났지만, 득표율에선 5.4%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즉 국민의힘은 전국에서 45.1%를 득표하고도 지역구에서 90석을 확보하는 데 그쳤지만, 더불어민주당은 50.5% 득표를 가지고 161석을 가져갔다. 과연 이것을 ‘참패’라고 할 수 있을까?*

 

* 지난 21대 총선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났다. 민주당은 163석을 얻어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 84석 대비 두 배 가까운 의석을 점유했다. 하지만 총득표 점유율에선 민주당이 49.9%, 미래통합당이 41.5%로 8.4%포인트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이번 선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비록 윤석열 정권은 심판을 받았지만, 보수세력은 결코 와해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서울에선 11석을 얻어 지난 21대 총선 때보다도 2석이 증가하였다. 전체 수도권으로 보자면 3석이 늘어났다. 낙동강 벨트 또한 훌륭히 사수해 냈다. 득표율에서 볼 때도 지난 21대 때(당시 미래통합당) 득표율 41.5%보다 많은 45.1%를 득표했다. 많은 경합지역이 있었으며, 근소한 표차로 낙선한 곳도 많았다. 이점은 사회 전반적으로 ‘반윤석열 정서’가 팽배한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국민의힘은 어떻게 ‘최악의 분위기’ 속에서도 이처럼 견고한 지지율을 확보할 수 있었을까? 

 

22대 총선 개표 장면.png
22대 총선 개표 장면


이 점은 대통령과 정당에 대한 지지도가 다를 수 있다거나, 국회의원 선거와 대통령 선거의 차이로만 설명하기엔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 든다.  좀 더 설득력 있는 해석은 현행 소선거구제 하에서 ‘승자독식’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문제의 초점은 의석수가 아니라,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와 그가 속한 여당인 국민의힘 지지도 간의 ‘미약한 상관성’이다. 이렇듯 보수세력에 대한 지지가 현 대통령에 대한 사회 전반의 혐오 분위기 속에서도 견고하다는 사실은, 민주당의 차기 대선 가도가 만만치 않을 것임을 예고한다.  보수세력은 언제든지 주변 여건이 변화할 경우 판세를 뒤집을 수 있는 저력을 갖고 있다.


이점은 현 보수세력을 뿌리까지 응징하길 바라는 노동자계급과 민중의 입장에선 결코 달갑지 않은 소식이다. 우리가 근본적인 사회변혁을 바란다면 객관 현실부터 냉정하게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이번 22대 총선에서 출현한 이 같은 언뜻 모순되는 현상을 이해하려면, 한국 정치 지형의 변천사부터 이해할 필요가 있다. 


2. 선거로 보는 한국 ‘정치 지형’ 변천사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먹고사는 문제를 우선 해결해야 한다.  그리하여 배고픈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고 나면,  대중들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빈부격차 해소, 공정과 같은 가치 추구로 향해지면서 정치·이념적 문제가 사회의 주요한 이슈로 된다. 정치·이념적 대립의 초기 형태(1단계)는 ‘민주 대 독재’이며, 좀 더 성숙한 형태(2단계)에 진입하면 자본주의사회의 양대 계급인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 간의 계급대립에 기초한 보혁대결 즉 ‘보수 대 진보’ 구도가 나타난다. 한국의 정치 지형 역시 대체로 이 같은 발전 경로를 밟아 왔다.

 

1)  보혁대결의 전사(前史)

 

(1)  ‘여촌야도(與村野都)’ 현상 (1948년 정부 수립 후~1960년대) 

 

5대 유세장면.png.jpg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유세하고 있는 박정희 후보(위)와 윤보선 후보(아래)

 

1960년대까지 한국에선 ‘농촌 대 도시’의 정치 지형이 출현했다. 그에 더해 분단된 한반도의 적대적 대결 상황으로 인해 ‘반공 이념’이 보조 축으로 작용했다. 해방 후 남한 단독정부가 성립된 이래 대체로 1960년대까지의 상황이 그러하였다. 


이는 저개발국가에서 나타나는 보편적 현상으로, 한국이 아직 본격적인 경제개발이 이루어지기 전에 농업 중심의 국가로 남아 있던 사정과 관련이 있다. 농경 중심의 사회일수록 도농 간의 격차가 매우 크다. 도시는 비교적 지식층과 화이트칼라 계층이 많고, 정치·경제·문화적 중심지답게 상대적으로 높은 정치의식이 형성되어 정권의 무능과 부패에 대한 비판의식이 강하다. 하지만 농촌은 이들 요소가 상대적으로 낙후되어 친정부적 성향이 강했으며, 이에 더해 관권 선거와 금권 선거 등 부정선거가 널리 횡행한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1960년대까지 한국의 대통령 선거나 총선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여촌야도’라 불리는 ‘농촌 대 도시’의 구도였다.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1963년 제5대 대통령 선거 때 야당 후보인 윤보선은 영남 지역의 부산, 대구, 진주, 충무, 진해, 삼천포, 울산과 전남 순천을 제외한 대부분 도시에서 박정희보다 많은 지지를 받았다. 여당 후보 박정희는 이에 비해 농촌에서 지지를 많이 받았다. 이는 6.25전쟁의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 무렵인 1958년 5.2총선 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농촌은 여당표, 도시는 야당표라는 전형적인 ‘여촌야도’ 현상이었다.


1967년 6대 대통령 선거 때도 양상은 기본적으로 비슷했다. 이 무렵 한국은 본격적인 경제개발에 착수하여 1차 경제개발이 비교적 성공을 거둔 상황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조국 근대화를 완수하자” “기왕 착수한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손댄 그 사람들로 하여금 밀고 나가게” 하자 (1967.4.15. 박정희 제1회 방송 선거 연설)는 등의 호소가 유권자에게 먹혀들었다. 그 결과 박정희는 1963년 선거에선 사상 가장 표 차가 적은 15만 표로 승리했지만, 1967년 선거 때는 무려 100만 표가 넘는 차이로 여유있게 승리를 거뒀다.


지역별 지지 경향을 보면 이른바 남북에서 ‘동서’로 바뀌었다. 박정희는 부산과 경남·경북에서 크게 이기고 강원, 충북 두 도에서 역전승해 대체로 한반도를 동서로 양분하는 모양세를 이루었다. 이처럼 표의 ‘동서 현상’을 초래한 가장 큰 원인은 “부산과 경남북 및 강원도 등 광공업과 대기업 발달의 요소를 비교적 많이 갖춘 동부지역에 있어선, 공업 입국론으로 설명되듯 중공업 정책에 의해 비교적 큰 혜택을 받았기 때문에 박정희에 대한 지지가 큰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비해 “경기·충남·전남북 등 보다 농산 지대라 일컬어지는 서부 지역 특히 중소기업이 집결해 있는 경기 지방 등은 그 반대 결과로 비교적 큰 혜택을 받지 못한 채 소외됐기 때문”이었다. (<동아일보>, 1967년 5월 5일)


이러한 ‘동서 현상’은 박정희가 전체적으로 큰 표차로 승리한 가운데서 나타난 부차적 현상이다. 따라서 ‘여촌야대’가 여전히 주요한 측면이라 할 수 있다.

 

(2)  ‘민주 대 독재’ 구도의 형성 (1970~1980년대)

 

김대중 후보.jpg
유세중인 김대중 후보

 

이 시기에 들어서자 ‘민주 대 독재’ 구도를 주요한 축으로 하고, 영호남 간의 ‘지역감정’을 보조 축으로 하는 정치 지형이 형성되었다.


1971년 1월 23일 야당 후보인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가 연두 기자회견을 열었다. 김대중 후보는 이 자리에서 ‘총통제 음모’의 분쇄를 주장했다. 얼마 후 3월 2일 기자회견에서 다시 “이번 선거는 단순한 정당 간의 집권 경쟁이 아니라 3선 개헌 반대 제2단계 투쟁이요, 한 사람의 총통제적 영구 집권 획책에 대한 국민적 반대 투쟁이다”라며 3선 개헌 문제를 전면에 제기했다. 이때부터 박정희의 ‘3선 개헌’ 반대라는  ‘민주 대 독재’ 구도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후 ‘유신독재 반대’, ‘군부독재 철폐’ 구호로 이어지면서 이 대립 구도는 1987년 6월 항쟁을 거쳐 1990년대 민주화가 어느 정도 정착되기까지 지속되었다.


1971년 7대 대통령 선거 결과는 박정희 후보가 53.2%를 얻어 45.3%를 얻은 김대중 후보를 눌렀다. 박정희가 승리를 거둔 원인에 대해 미국 언론인 <워싱턴 포스트>는 선거 전날 발표한 “1975년에는 다시 출마하지 않겠다”는 박정희의 공약이 크게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뉴욕타임스>도 “4선 불출마를 약속한 박정희의 발표가 한몫했다”고 평가했다. "한 번만 더 하고 물러나겠다"는 박정희의 호소가 유권자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7대 대선에서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지역주의’의 대두다. 당시 지역별 지지율을 보면 서울·부산 등 대도시에서 박정희에 대한 지지율은 크게 내려갔다. 이는 ‘여촌야도’의 투표 행태보다도 후보자의 연고지역에서 지지가 집중되는 ‘지역주의 투표 행태’가 주요한 원인으로 지적되었다. 


한국의 통치세력은  ‘민주 대 독재’ 구도에서 승리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지역감정을 부추겼다. 이 때문에 이 시기 ‘민주 대 독재’에 더해 ‘지역주의’라는 한국의 새로운 정치 지형이 형성되었으며, 이는 1987년 6월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이루어지기까지 기본적으로 유지되었다.

 

2)  ‘보수 대 진보’ 구도 (1990년대 이후~ 현재)

 

(1) 전환의 과도기 (1990년대)

 

14대 대선 포스터.jpg
14대 대통령선거 포스터

 

1987년 6월 항쟁 이후 민주주의가 점차 정착되면서 1990년대를 거쳐  ‘민주 대 독재’ 구도는 점차 퇴색되어 갔다. 2000년대 들어 노무현 정권(2002년)이 들어서면서 ‘지역구도’ 또한 약화 되는 양상을 보였다. 그 대신 이 무렵 ‘보수 대 진보’ 구도가 점차 이것들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전반적으로 1990년대는 ‘민주 대 독재’, ‘지역감정’ 중심의 정치 지형에서 점차 ‘보수 대 진보’ 구도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특색을 보여준다. 이러한 과도기적 성격 때문에 제반 요소들이 혼재되는 복잡한 양상이 나타났다. 인물 자질론(‘3김’ 비교), 강한 지역 감정적 요소, 색깔 논쟁 등이 그것이다. ‘TK+부울경 연합’이 이 시기에 탄생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선거의 주요 이슈가 '정치문제'에서 ‘경제문제’로 옮겨가는 추세를 보인 것이다. 물론 이는 당시 ‘IMF 외환 위기’라는 우연적인 요소가 개입되었지만,  그 본질에는 이미 정치문제가 6.29 선언과 문민정부의 성립, ‘하나회 청산’ ‘전노 심판’ 등을 통해 일정 해소된 사정이 작용하였다.  다른 한편 1990년대 들어 재벌체제가 공고화하고, 또한 전세계적인 신자유주의 사조와 맞물려 국내에선 ‘신경영’이란 명분 속에 노동유연화, 파견법 등 비정규직 문제가 차츰 사회문제로 등장하는 등의 배경이 깔려 있다. 즉 빈부격차, 고용불안 등 계급대립이 본격화하면서 ‘보수 대 진보’ 구도가 차츰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 시기에 두 번의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1992년 14대 대선에서는 ‘3당 합당’으로 정치적 기반을 넓힌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되어 최초의 ‘문민정부’가 출현했다. 뒤이어 1997년 15대 대선에서는 ‘국민의 정부’를 표방한 김대중 정부가 출현했다. 이렇듯 2차례 연속으로 과거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던 유력 야당 정치인이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오랜 ‘민주 대 독재’ 구도는 사실상 종식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볼 필요가 있는 사건은 1990년 ‘3당 합당’과 1997년 ‘DJP연합’이다. 1990년 2월에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신민주공화당의 김종필이 3당 통합을 발표하고 민주자유당(민자당)이라는 거대 여당을 출현시켰다. 14대 대선에서 김영삼은 이를 기반으로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 15대 대선에서 김대중은 충청도를 기반으로 한 자유민주연합과의 공조 덕분에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 유신 잔재로 분류되는 김종필은  ‘3당 합당’ 때는 민자당에 합류했다가, 15대 대선 때는 김대중과 연합한 것이다. 


이처럼 1990년대 발생한 두 차례의 정치연합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자유주의세력과 보수반동세력 간의 절대적 구분은 이미 이 시기에 약화 되어 상호침투가 가능해졌다. 이는 1990년대 들어 나타난 한국 정치 지형의 새로운 변화인데, 정치적으로는 민주화의 달성과 경제적으로는 재벌체제의 확립과 관련이 있다. 재벌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들 두 정치세력 간의 구분은 큰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모두 재벌체제를 인정하고 있으며 그 기반 위에서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2) ‘보혁구도’의 초기적 성립 (2000년대)

 

노무현.jpg
16대 대선에서 유세중인 노무현

 

2002년 치러진 16대 대통령선거는 여러 측면에서 색다른 의미를 가졌다. 지금까지 민주화 시대를 상징했던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의 ‘3김 시대’가 종식되고 새로운 인물이 대통령 후보로 나섰기 때문이다.


당시 월드컵 개최를 계기로 대한축구협회 회장이던 정몽준의 인기가 갑자기 오르면서 삼자 대결 구도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민통합 21의 정몽준과 새천년민주당의 노무현이 단일화에 합의했다. 그 결과 노무현이 단일 후보로 추대되었으며, 이후 노무현의 지지율은 22.1%(11월 10일)에서 43.5%(11월 25일)로 보름 만에 21.4% 급상승했다. 이 덕택에 노무현-정몽준 연합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제압할 수 있었다.


이처럼 재벌 후보와 민주당 후보 간의 연합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민주당이 겉으로는 자유주의세력을 대변하지만, 사실상 재벌의 이해를 대변하는 당으로 성격이 바뀌었음을 말해준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재벌의 오른쪽에 선 반동보수정당(민자당, 한나라당, 그리고 현재의 국민의힘)과 민주당은 이미 본질적으로는 대립 관계에 있지 않다. 이번 22대 총선에서도 민주당 중진인 이상민, 김영주 의원은 공천에서 탈락하자 손쉽게 평소 으르렁거리던 국민의힘으로 당적을 옮겼다.


실제 노무현 정권은 김대중 정권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이어받아  파견 근로제를  진일보  악화시킨 '기간제법'을 제정하여 노동의 유연화를 한층 고도화했다.  그 결과 사회를 지탱하는 중산층이 줄어들고, 대신에 양극화가 심해졌다. 이로인해 시간이 갈수록 한국의 정치 지형은 한층 더  ‘보수 대 진보’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 정치 지형에 있어서 사회 양극화는 주요한 사회적 배경이 된다.


제16대 대선의 또 다른 특징은 ‘국민 참여 후보 경선제’가 도입된 것이다. 이 제도는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는 과정에서 당원이 아닌 일반 유권자들의 참여를 허용하는 것으로, 미국의 ‘예비 선거’를 참고해서 만들었다. 노무현은 선거과정에서 당 조직뿐만이 아니라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과 같은 조직을 적극 활용했다. 이 같은 조직은 지금은 이재명을 지지하는 ‘개혁의 딸(개딸)’로 이어지고 있다. 이 제도를 통해 장외 대중의 급진적인 목소리를 보수 야당인 민주당이 일정 수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민주당은 정치적 스펙트럼을 좌측으로 얼마간 확장하는 효과를 얻게 되었으며, 한국의 진보 세력이 힘이 약한 틈을 타서 ‘진보’ 아이콘을 어느 정도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국민 참여 후보 경선제’와 장외 급진 지지자들의 존재가 민주당에 얼마간 진보정당적 요소를 가미시키기는 했지만, 이미 재벌의 왼쪽 당으로 전락한 민주당의 주류적 색깔을 바꿀 정도는 아니었다. 심지어는 엔엘계의 상징적 존재인 전대협, 한총련 계의 대거 입당조차도 민주당의 기본적인 색깔을 바꾸지는 못했다는 점을 우리는 참고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정치 지형 변화에 있어 노무현의 당선이 갖는 또 다른 의미는 '지역주의의 약화'에 기여한 점이다.  노무현은 호남 지역에서 90%가 넘는 득표율을 올렸을 뿐만 아니라 부산, 대구, 울산, 경남에서도 일정한 지지를 받았다. 이로써 강고한 ‘지역감정’ 또한 약화 되기 시작했으며, 민주당은 ‘호남당’이 아닌 영남 쪽 기반을 갖게 되었다.

 

2000년대 들어 초기적으로 성립한 이 같은 ‘보수 대 진보’ 구도는 이명박-박근혜 2기에 걸친 보수정권의 성립, 그리고 문재인 정권을 거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선거에서 사람들을 사로잡은 구호는 “대박 나세요”였다. 이는 신자유주의 말기에 ‘한탕’에 대한 기대가 아직 남아 있던 당시 상황을 반영한다. 박근혜가 당선되던 18대 대선(2012년)에서는 ‘복지논쟁’도 있었다. 이 역시 신자유주의의 끝물적 현상이며, 그것이 가져온 폐단에 대한 일종의 보상적 심리가 작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한 환상은 ‘세월호 대형참사’와 박근혜 정부하에서 더욱 확대된 빈부격차, 비정규직 증가, 경제위기, 측근정치, 부정부패 등으로 깨졌다.

 

이명박-박근혜 보수 반동 정권을 거치면서 한국 사회의 양극 분화와 계급 적대감은 극도로 치솟았다. 이로 인해 정치적 대결 분위기는 이제 화해할 수 없을 정도로 강화되었으며, 이는 대체로 30년 주기를 갖는 한국 자본주의의 축적운동과 궤를 같이한다. 이 무렵 한국의 재벌체제는 전반적인 재생산 위기에 접어든 상황이었다. 재벌들은 날로 악화되는 국제경쟁과 축적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거침없이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하청 노동자들을 가혹하게 착취했다. 이 시기 들어 비정규직과 하청 부품사 투쟁은 기존 대공장의 정규직 투쟁을 대신하여 한국 노동운동의 흐름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이 같은 사회모순은 2016년 ‘촛불항쟁’으로 분출되었다.

 

박근혜.jpg
18대 대통령선거에서  박근혜 후보의 유세 장면

 
3. ‘혁명과 반혁명’의 변증법

 

한국 사회에서 ‘보수:진보’의 정치 지형은 시간이 갈수록 분명해지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과거에 존재했던 정치 지형이 새로운 구도의 출현에 의해 일거에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세대’ 가 공존하는 것처럼 과거 존재했던 구도의 잔재는 새로운 구도 속에서도 상당 기간 존속하는 특징을 보인다. 예컨대 지금의 ‘보수:진보’ 구도에는 과거에 나타났던 ‘농촌 대 도시’, 반공이데올로기, 지역감정 등의 요소들이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보존되어 있다. 


이것들은 보수층이 누리는 25%~30%대 고정 지지층의 기반을 이룬다. 이런 고정 지지층에 대한 비율 추정은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할 수 있다. 윤석열의 지지도가 가장 밑으로 내려갔을 때는 지난 22대 총선 후인 4월 16일 여론조사 전문기관 미디어토마토가 조사한 26.3%이며, 대략 30%대 언저리에서 머물고 있다. 윤석열은 역사상 가장 ‘인기 없는’ 보수 출신 대통령이라는 점에서, 이 같은 지지율은 한국 사회에서 핵심 보수층의 최소 지지 비율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민주당의 기본 지지층은 어느 정도일까? 대략 30%~35% 정도이다. 그것은 문재인 정권 인기가 가장 나빴을 때인 2021년 4월 첫 주를 근거로 한 것인데, 당시 33.4%를 기록했다. 그 무렵 문재인 정권은 부동산 가격 급등과 보유세 문제로 인해 인기가 하락하여 재보궐선거에서 참패했다. 당시 부정평가는 62.9%에 달했다.


이들 고정 지지층의 특색은 위기가 닥칠수록 결집력이 강해진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양당 지지세력 모두 마찬가지다. 소위 ‘혁명과 반혁명의 변증법’을 여기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과거 노무현과 문재인 지지 세력이 위기 때면 결집했던 사실을 회상하면 알 수 있다. 이번에도 윤석열 정권이 ‘정권 심판’ 분위기 속에서 특히 조국당 열풍으로 “탄핵/개헌 지지선이 무너질지 모른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코너에 몰리자, 반사적으로 이들 보수세력도 자신의 보수정권을 보호하기 위해 결집했다. 


여기에 총선이 지역구 후보, 조직 및 그 지역 주민의 구성, 그리고 그 지역의 역사성 등 제반 요소가 영향을 미치는 선거라는 특성을 감안할 경우, 사회 전체적으로 ‘반윤 정서’가 팽배한 속에서도 국민의힘이 45% 득표율을 올릴 수 있었던 이유를 대략 이해할 수 있다.

 
이들 각 당의 기본 지지층은 독자적인 언로를 가지고 있으며, 그들만의 소통구조와 주변 세계를 인식하는 인식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그것들은 외부와 긴밀히 소통하는 개방적이기 보다는, 일방적이며 ‘폐쇄적’인 경우가 많다. 오늘날 널리 보급된 유튜브를 통해서 각자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정보화시대에 있어 SNS나 인공지능의 발달이 전반적으로 사회 소통구조를 풍부하고 강화시켜 주는 이면에는, 이처럼 특정 정치 지지층의 폐쇄구조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이 구조에 갇힌 그들에겐 이미 ‘진실’이 무엇인지는 별반 중요하지 않으며, ‘자기편의 승리’야 말로 절대적인 관심사가 된다. (계속)

 

[울산함성 무료구독 신청]  https://t.me/+ji13hLs-vL83ZTBl

삭제하시겠습니까?
취소
사진 및 파일 첨부

여기에 파일을 끌어 놓거나 왼쪽의 버튼을 클릭하세요.

파일 용량 제한 : 0MB (허용 확장자 : *.*)

0개 첨부 됨 ( / )
취소

“임금차등 폐지·임시직 정규직 전환” 쟁취-UAW로부터 배운다

급속하게 증가하는 촉탁을 막지 못하면 현대차지부 미래 없다!

2024.05.02

[22대 총선평가] ‘조국 열풍’으로 본 한국의 정치 지형 ②

ㅡ 좌우파 간 극심한 분열 양상 보여준 22대 총선

2024.04.24

[22대 총선평가] ‘조국 열풍’으로 본 한국의 정치 지형 ①

2024.04.23

난무하는 선거 방침에 대한 확고한 기준을 세우기 위하여 ⓷

ㅡ 노동자 의원단의 경험

2024.03.20

난무하는 선거 방침에 대한 확고한 기준을 세우기 위하여 ⓶

ㅡ 운동의 자주성과 능수능란한 선거협정 사이에서

2024.03.18

난무하는 선거 방침에 대한 확고한 기준을 세우기 위하여 ⓵

ㅡ 볼셰비키의 선거 원칙과 전술을 2024년 우리의 방침으로 삼는 것은 낡은 것인가?

2024.03.17

[인터뷰] 울산 북구 윤종오 후보ㅡ 최다선(多選) 노동자 정치인 

ㅡ 진보진영, 2024총선 투쟁 어떻게 할 것인가?

2024.02.01

[인터뷰] 울산 동구에 출사표 낸 이장우 노동당 울산시당 위원장

ㅡ 진보진영, 2024총선 투쟁 어떻게 할 것인가?

2024.01.17

진보진영, 2024총선 투쟁 어떻게 할까? (하)ㅡ 노동자 밀집지역에 집결하자

2024.01.09

진보진영, 2024총선 투쟁 어떻게 할까? (중)ㅡ 먼저 내부 ‘진영 구도’를 바꿔야 한다

2024.0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