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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젋은 시절 리리싼(李立三)

 

 

지식인이자 지도자였던 리리싼

탄광 대파업 승리로 이끌어

무장폭동 등 무모한 실력행사에 

좌경모험주의 비판 직면

소련으로 가 사상개조 받아

귀국 후 노조, 노동안전에 공헌하지만

문화대혁명 격랑에 휩쓸려 자살

1980년 뒤늦게 명예회복

 

투쟁과 혁명운동으로 점철된 리리싼의 생애

 

리리싼은 중국의 대표적 노동운동가로 손꼽힌다. 근공검학을 다녀온데다, 많은 논문과 논설을 발표한 지식인이었지만, 대중조직과 투쟁 지도에 대단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1919년 리리싼은 프랑스에서 강철 제조 노동자로 일하며 혁명 활동에 분주했다. ‘탱크’라는 별명을 얻은 리리싼은 금방 프랑스 당국의 주목을 받고 강제 귀국을 당하였다.

 

귀국한 그는 공산당 후난성 지부의 서기 마오쩌둥을 찾아갔다. 마오쩌둥은 그를 장시성과 후난성의 경계에 있던 탄광도시 안위안(安源)으로 데려가 노동운동에 배치하였다. 리리싼과 류샤오치(劉少奇)는 안위안 탄광의 대파업 투쟁을 조직하여 전면적 승리를 쟁취했다.

 

1925년 그는 상하이 총공회(노동조합 총연합) 위원장이 되어 5.4운동을 이끌었다. 리리싼은 노동자 파업, 동맹휴학, 상인들의 철시를 이끌어 내며, 상하이의 제국주의 질서를 완전히 흔들었다. 군벌과 자본이 혈안이 되어 그를 찾자, 리리 싸는 노동자들의 보호 속에 상하이를 탈출하여 소련으로 갔다. 소련에서 그는 코민테른과 프로핀테른 회의에 참여하여 중국 인민들의 반제국주의 투쟁상황을 보고하고 중국혁명을 지원해 달라고 호소했다.

 

귀국한 리리싼은 전국 총공회의 주요 지도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1927년 후베이성 우한에서 활동하던 리리싼은 몇십만 명의 군중과 함께 한커우의 영국 조계 지역으로 밀고 들어갔다. 그들은 영국의 조계경찰서를 포위 점령하고 경찰들을 몰아냈다. 대중투쟁에 놀란 영국은 한커우와 주장(九江)의 조계를 중국에 반환하게 되었다.

 

1927년 장제스가 상하이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수만명의 공산당원과 노동자들을 학살하였다. 리리싼은 국민당 반동파에 맞서 무장투쟁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덩중샤와 함께 공산당 중앙에 군사행동을 제안하여 동의를 얻었다. 공산당은 난창폭동을 일으켰지만, 중과부적으로 실패했다. 뒤이은 광저우 봉기와 광둥 코뮨도 잇따라 실패하였다.

 

1928년 11월 리리싼은 중앙정치국 위원, 상임위원, 중앙선전부장에 선임되어 당의 주요 지도부에 참가하였다. 코민테른의 방침에 따라 총서기는 노동자 출신 샹중파가 맡았지만, 실질적인 지도자는 리리싼이었다. 1930년 6월 중앙정치국은 리리싼이 기초한 ‘새로운 혁명고조와 1개 성 혹은 몇 개 성에서 우선 승리하자.’는 결의를 통과시켰다. 좌경 모험주의의 상징이 된 리리싼노선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결의에 따라 우한(武漢) 및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폭동을 일으키는 등 홍군 부대들이 주요 도시들을 공격하는 일이 벌어졌다. 계란으로 바위치기와 같은 무모한 실력행사는 모두 실패하였고 국면은 한층 더 엄중해졌다.

 

소련에서 개조를 받다

 

리리싼은 비교적 빠르게 자신의 잘못된 노선을 시인하였다. 1930년 9월 공산당 6차 3중전회에서 그는 자아비판을 하며 잘못을 시인하였다. 그해 10월, 리리싼은 공산당 지도부에서 내려와 모스크바로 갔다. 그의 소련행은 코민테른의 요구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코민테른이 소집한 극동국 및 주석단 회의에서 리리싼은 거듭 자신의 잘못을 비판하였다. 그 후 그는 코민테른의 결정에 따라 15년간 소련에 머물며 국내투쟁에서 벗어나 있었다.

 

소련 당국은 그를 시베리아의 벌목 노동자로 보내어 죄수들과 함께 노동하게 하였다. 그 후 남부 러시아의 기계공장에 견습공으로 보냈다가 다시 모스크바 조선소의 조선공으로 일하게 하였다. 스탈린 치하의 소련당국은 리리싼을 트로츠키주의자로 의심했다고 한다. 리리싼이 거듭 귀국하여 투쟁하게 할 것을 요청했지만, 소련은 허용하지 않았다.

 

1946년 1월 리리싼은 소련에서 귀국하여 옌안으로 갔다. 리리싼의 귀국은 마오쩌둥이 주선한 것이라고 한다. 리리싼은 동북에서 당활동에 복무하다가 1948년 8월에 개최된 전국 노동대회에서 중화전국총공회 부주석으로 선출되었다.

 

내전 시기의 공산당 노동운동은 점령지의 생산증대, 노자 간 협력, 내전 동원 등을 주임무로 하였다. 신중국 성립 후 리리싼은 계속 전국노동총공회(노총)를 주도했으며 중앙인민정부 위원, 정무위원, 노동부장 등 요직을 겸임했다. 그는 노동부장으로 공회법(노동조합법)을 제정•공포하는 것을 주관했으며, 노동자 임금관리제도와 노동보험제를 제정하였다. 실업노동자 임시조치법 등 중요한 법률과 규정을 기초하여 각급 정부와 공회가 관련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었다. 그는 또 산업안전과 노동자 보호를 위해 안전규정 제도를 수립하였다.

 

중국에서는 리리싼이 노동조합 사업과 노동보장 사업에서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신중국 성립 후 리리싼은 전국총공회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공회의 모든 사업에서 생산발전을 관철해야 하며 경제를 번영시켜야 한다. 노자가 함께 유리한 방침으로 가야하며, 강대한 국방역량과 경제역량을 건설해야 한다. 이것이 현시기 중국 노동자계급과 인민의 최고 임무이고 최대 이익이다”

 

신중국 성립 후 노동조합과 노동계급은 자발성과 역동성을 잃었다. 노동조합 본연의 임무인 노동자 권리를 위한 투쟁, 그중에서도 파업권을 실질적으로 박탈당하였다. 사회주의 국가들의 노조들이 하나같이 당과 국가의 부속기구로 전락하고 노조 간부들은 당과 국가의 관료가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중국 노조들의 퇴화와 당의 부속 기구화가 리리싼만의 책임이라고 볼 수는 없다.

 

리리싼에 대한 평가

 

리리싼은 문화대혁명의 격류에 휘말렸다. 1967년 그는 박해를 견디다 못해 다량의 수면제를 먹고 자살하였다. 1980년 공산당은 리리싼의 누명을 벗기고 명예를 회복하는 조치를 취했다. 중국의 공식기록은 리리싼의 일생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리리싼은 당내 저명한 노동운동의 영수이다. 그는 직접 참가하고 조직한 영도자이다. 그는 기층에 깊이 들어가 안산(鞍山) 강철공장, 안위안 탄광 등 대규모 사업장에서 활동하였다. 신중국 성립 후 노동자계급의 열렬한 노동경쟁을 불러일으켜 항미원조전쟁(6.25전쟁을 중국에서 일컫는 말)을 지원하였고 국민경제의 회복과 발전을 촉진하였다. 리리싼 동지가 관철한 당의 노동운동 방침은 신중국 공회 사업의 발전을 추동하였으며 기초를 놓았다”

 

출처 : <노동자신문>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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