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지창영 (시인)
등록일 : 2024.02.18

 

목장갑-2.jpg

 

한때 유행했던 우스개 사진을 상기해 보자. 감자 여덟 개를 각각 절반씩 깎아 냄비에 담아 둔 장면이다. 

 

아내는 남편에게 비닐봉지 속에 든 감자를 반만 깎아 삶아 달라고 했던 것이다. 아내의 의도대로라면 감자 8개 중 반에 해당하는 4개를 잘 깎아야 했다. 그러나 남편은 이를 잘못 알아듣고 감자를 각각 반쪽씩만 깎았던 것이다. 아내가 “비닐봉지에 들어 있는 감자 8개 중에서 네 개를 꺼내 깎아서 삶아 달라”고 했다면 그런 실수는 없었을 것이다.

 

작가가 위 이야기 속의 아내라면 독자는 남편과 같다. 독자는 때로 작가가 의도하는 내용을 파악하지 못하거나 잘못 파악하는 경우가 있다. 작가가 의도하는 대로 독자가 이해하도록 하려면 그럴 만한 장치를 해 주어야 한다. 그러한 장치 중 하나가 비반복적 반복이다.

 

시에 등장하는 중심 소재는 한 번 등장하고 마는 것보다는 반복하여 등장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독자의 머리 속에 그만큼 강하게 각인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심 소재를 반복하여 제시해 주면 작품 전체를 하나의 이미지로 꿸 수 있어서 메시지가 선명해진다. 작가가 의도하는 주제를 끝까지 끌고 가게 되므로 독자는 혼란에 빠지지 않고 주제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특히 시작과 끝이 일관되면 통일성이 있어서 글이 깔끔해진다. 

 

그러나 반복이라고 해서 앞과 뒤가 무조건 똑같게 하는 것은 아니다. 모종의 변화를 주어야 한다. 그러한 변화를 통하여 시는 일상의 사물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새롭게 보게 하는 힘을 발휘한다. 처음 제시한 소재가 두 번째, 세 번째 반복하여 등장한다는 면에서 반복이라 할 수 있지만 처음 등장한 소재와 다시 등장하는 소재는 그 의미가 똑같지 않다는 면에서는 비반복적이다. 

 

김남주 시인의 작품을 예로 들어 본다.

 

낫 놓고 ㄱ자도 모른다고
주인이 종을 깔보자
종이 주인의 목을 베어버리더라
바로 그 낫으로

 

(김남주, 「종과 주인」 전문)

 

이 시에는 낫이 두 번 등장한다. 처음 등장하는 낫은 일상적 의미를 지닌 사물이다. 즉 벼를 베거나 풀을 베는 도구다. 그러나 끝부분에 나오는 낫은 의미가 다르다. 갑질하는 주인의 목을 벨 수 있는 자주의 도구, 세상을 바꿀 수도 있는 혁명의 도구다. 낫은 반복적으로 등장하지만 그 의미는 비반복적이다.

 

같은 낫인데도 이렇게 의미가 변화될 수 있는 것은 중간에 하나의 사건이 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인과 종으로 구분되는 봉건 사회에서 지배와 피지배자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갈등과 투쟁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조금 긴 시를 살펴본다.

 

경운기 한 대 따발총 소릴 내며 지나간 자리
들판을 가로지르는 농로 한가운데에
붉은 손바닥 하나 누워 있네

 

어둑한 새벽부터 조선낫을 잡고 꼴을 베던 손
삽자루를 잡고 논두렁의 검은 흙을 퍼 올리던 손
저 손으로 논에 물을 대고
저 손으로 퇴비를 담고 뿌리고
저 손으로 씨앗을 뿌리고
저 손으로 밧줄을 당기고
저 손으로 말뚝을 박고
저 손으로 벼 포기를 옮기고
저 손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고

 

누군가 버리고 간 노동의 껍질
노을이 벌겋게 불타는 가을 저녁
지금은 뜬구름 바라보며 누워 있네
언젠가는 털고 다시 일어나 들판으로 가는
신성한 꿈에 젖어 있네

 

그때
들판에 잘 익은 벼들이
그 붉은 손바닥을 향해 일제히 경배를 하네

 

(백수인, 「목장갑 한 짝」 전문)

 

여기에서는 목장갑이 중심 소재로 사용되었다. 목장갑은 네 번 등장하는데, 제목에서 한 번, 1연에서 ‘붉은 손바닥’으로 한 번, 3연에서 ‘노동의 껍질’로 한 번, 4연에서 다시 ‘붉은 손바닥’으로 한 번이다. 2연에 등장하는 내용은 1연의 ‘붉은 손바닥’을 자세히 설명하는 내용이므로 등장 횟수에서 제외한다.

 

제목에 등장하는 ‘목장갑’은 작품 전체가 목장갑에 관한 내용임을 알리는 역할을 한다. 1연에 등장하는 ‘붉은 손바닥’은 일반적 의미의 장갑을 가리킨다. 독자들은 이 대목에서 손바닥이 붉은 고무로 코팅돼 있는 장갑을 떠올린다. 3연에 등장하는 ‘노동의 껍질’은 조금 다른 의미가 깃들어 있다.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2연에서 묘사한 역할을 하는 도구로서 노동과 직결되는 사물이다. 4연의 ‘붉은 손바닥’은 노동의 결과물인 잘 익은 벼들로부터 경배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위대한 존재로 승화된다. 이렇게 하여 전체적으로는 노동의 연속성과 신성함을 드러내고 있다.

 

비반복적 반복의 관점에서 여러 시들을 살펴보면 많은 작품에서 이러한 기법이 사용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나아가 창작에 활용해 보면 매우 효과적이라는 점도 알게 될 것이다. 메시지를 드러내기에 적합한 중심 소재를 찾아서 이를 아바타처럼 내세워 묘사해 주되 그 의미가 일상적인 것에서 특별한 것으로 승화될 수 있도록 해 주면 전달력이 훨씬 좋아진다.

 

지창영.jpg
지창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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