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맹이.jpg

 

‘미국 쌀로 큰 자식 에미‧애비 몰라본다.’ 1990년대 초반, 쌀 수입 개방 정책에 항의하는 대중 집회에서 어느 발언자가 외친 구호였다. 수많은 다른 구호들은 잊었지만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 구호는 생생히 기억난다. 오래 기억되는 것은 대개 남다른 데가 있다. 공감되는 이야기, 선명한 그림, 느낌이 풍부해지는 조형물 등이 그런 것이다. 

 

이 구호는 미국 쌀 수입을 반대하는 농민의 마음을 전하되 ‘미국 쌀 수입을 반대한다’처럼 단순한 주장으로 그치지 않고 보다 구체적인 장면을 통하여 수입의 폐해를 생각하게 해 준다. 미국 쌀로 밥을 지어 먹는 장면이 내포되어 있고,  그렇게 자란 자식들이 세월이 지나서 부모도 몰라보는 패륜아가 된다는 이야기가 압축되어 있다. 여러 가지 생각을 부르고 풍부한 느낌을 주는 구호다.

 

‘미국 쌀 수입을 반대한다’는 집회의 핵심이요 뼈대다. 주장이고 메시지다. ‘미국 쌀로 큰 자식 에미‧애비 몰라본다’는 그 주장을 구체화하여 보여 주는 수단으로서 공감을 많이 얻고 오래 기억될 수 있는 효과적인 표현 중 하나다. 전자를 골격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그 뼈를 감싸는 피부와 같다고 볼 수 있다.

 

미국쌀 반대.jpg

 

시에서 사상성과 예술성은 뼈와 살의 관계와 같다. 작품에서 말하고 싶은 핵심 내용이 뼈대라면 그것을 드러내는 표현은 살과 같다. 뼈와 살이 제대로 갖추어져야 악수도 할 수 있고 사랑도 할 수 있으며, 옷을 입을 수도 있고 치장도 할 수 있다.

 

시를 쓴다고 하면서 성급한 나머지 뼈대만 가지고 구성한다면 완성도가 그만큼 떨어질 수 있다. 가령 이런 뼈대를 생각해 보자.

 

‘우리의 투쟁은 끝이 없고 변화는 보이지 않는다/ 지쳐서 더 이상 나아갈 힘이 없다/ 동지여, 그러나 포기하지 말자/ 많은 것을 바라지 말자/ 성급히 결과를 바라지 말자/ 늘 함께할 동지 하나 있음을 자랑으로 삼고/ 작은 힘이라도 보태며 변함없이 이 길을 가자.’

 

이 내용 자체로도 시가 될 수 있지만 어쩐지 구호 같기도 하고 연설 같기도 하여 뒷심이 약하다. 머리에서는 옳은 소리라고 판단되지만 가슴속 울림이 약하다. 뜻은 있지만 그림이 그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구체적 장면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오래 기억되기 어렵다.

 

이제, 위와 같은 사상이 담겨 있는 시 한 편을 보자.

 

하늘과 땅 사이에
바람 한점 없고 답답하여라
숨이 막히고 가슴이 미어지던 날
친구와 나 제방을 걸으며
돌멩이 하나 되자고 했다
강물 위에 파문 하나 자그맣게 내고
이내 가라앉고 말
그런 돌멩이 하나

 

날 저물어 캄캄한 밤
친구와 나 밤길을 걸으며
불씨 하나 되자고 했다
풀밭에서 개똥벌레쯤으로나 깜박이다가
새날이 오면 금세 사라지고 말
그런 불씨 하나

 

그때 나 묻지 않았다 친구에게
돌에 실릴 역사의 무게 그 얼마일 거냐고
그때 나 묻지 않았다 친구에게
불이 밀어낼 어둠의 영역 그 얼마일 거냐고
죽음 하나 같이할 벗 하나 있음에
나 그것으로 자랑스러웠다

 

(김남주, 「돌멩이 하나」)

 

이 시에서는 구체적인 상황이 그려진다. 이야기가 보인다. 밤길을 나란히 걷는 친구들의 결연한 의지가 보인다. 어쩐지 분위기가 느껴진다. 그래서 머리 속에 주입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껴진다. 앞서 제시한 사상을 품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구호처럼 직설적으로 표출하지 않고 예술적 표현의 옷을 입고 우리 앞에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 편의 시에 견고한 사상의 뼈가 들어 있고 살처럼 보드라운 예술적 표현이 이를 감싸고 있다면 감동과 여운은 그만큼 크고 오래 갈 것이다.

 

뼈는 튼튼해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맞선을 볼 때나 이력서를 낼 때 엑스선으로 찍은 골격 사진을 제출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시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좋은 사상도 예술적 표현을 생략하고 그 자체를 드러내어 부르짖는다면 그다지 매력적이지 못할 것이다. 

 

골격을 감싸고 있는 피부가 있을 때 비로소 한 사람으로서 타인에게 의미를 갖게 된다. 피부를 입고 있어야 비로소 송혜교가 되기도 하고 손흥민이 되기도 한다. 동일한 사상도 예술적으로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독자에게 주는 영향은 천차만별이다.

 

좋은 시를 판단하는 여러 가지 기준 중에서 사상성과 예술성은 빼놓을 수 없다. 사상은 좋은데 예술적 표현이 빈약하다면 골격은 튼튼한데 살이 없어 마치 기아에 허덕이는 난민과 같은 모습이 될 것이다. 표현은 좋은데 사상이 빈약하다면 뼈가 약해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골다공증 환자나 다름 없을 것이다.

 

시를 감상할 때 그 뼈와 살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 살펴보는 습관을 들인다면 그만큼 시를 보는 눈이 트일 것이다. 시를 창작할 때도 제대로 된 사상이 준비되어 있는지 자문해 보고, 그 사상을 예술적 표현으로 잘 감싸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 연구한다면 완성도를 꾸준히 높여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지창영.jpg
지창영 시인

 

[울산함성 무료구독 신청]  https://t.me/+ji13hLs-vL83ZTBl

삭제하시겠습니까?
취소
사진 및 파일 첨부

여기에 파일을 끌어 놓거나 왼쪽의 버튼을 클릭하세요.

파일 용량 제한 : 0MB (허용 확장자 : *.*)

0개 첨부 됨 ( / )
취소

교양

사람이 안 보이는 영화, “건국 전쟁”

2024.04.13

연재

지춘란(14)ㅡ 제3지대장 남도부와 지춘란의 만남

: 사람을 찾아서

2024.04.07

초보자를 위한 시창작 강의(5)ㅡ 낯선 것이 눈에 띈다

2024.03.31

연재

 [민병래의 사수만보] 쓰레기소각장에서 죽었다는 아들, 의혹은 더 커졌다

ㅡ 87년 9월 8일 7327부대에서 숨진 최우혁 이병의 아버지 최봉규, 형 최종순 ①

2024.03.31

연재

요셉 스탈린(제22회) ㅡ 트로츠키•지노비예프 동맹의 패배 ⓶

2024.03.30

연재

[민병래의 사수만보] 10년간 조선학교 차별과 재일동포 아픔 카메라에 담은 김지운 감독⓶

ㅡ 울부짖은 일본인 "왜 이리 조선학교 학생을 괴롭히나"

2024.03.23

연재

지춘란(13)ㅡ 박종근 경북도당 위원장과 아내 이숙의의 의리

ㅡ 사람을 찾아서

2024.03.21

연재

요셉 스탈린(제21회) ㅡ 트로츠키•지노비예프 동맹의 패배 ⓵

2024.03.19

교양

[허영구의 산길 순례] 봄이 왔으나 아직 완연한 봄이 오지는 않은 인왕산

2024.03.18

연재

초보자를 위한 시창작 강의(4)ㅡ 뼈와 살, 사상성과 예술성

2024.0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