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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적인 글이 사실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주목적이라면 예술적인 글은 느낌을 공유하고 공감하도록 하는 것이 주목적이다. 실용문은 머리에 전달하는 글이요, 예술문은 가슴에 호소하는 글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가슴에 호소하려면 중심 소재가 살아 있어야 한다. 시에서 중심 소재는 작가를 대신하여 메시지를 전달하는 아바타와 같다. 누리 소통망(SNS)에서 흔히 사용하는 아바타는 화자의 기분이나 느낌을 몇 줄의 글보다 효과적으로 빨리 전달한다. 이런 원리를 시창작에 한껏 활용한다면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먼저 나의 메시지를 가장 잘 전할 수 있는 아바타(중심 소재)를 찾은 다음 그가 나를 대신하여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도록 해야 한다. 아바타를 배경으로만 사용하지 말고 최대한 주인공으로 내세워 줄 때 그 효과가 커진다.

 

필자의 시를 예로 들어 본다.

 

눈발이 후비는 어깨뼈 아래 
심장처럼 일렁이는 횃불을 품고 
부동의 밤을 지킨다.

 

혈서 같은 현수막의 긴급 신호에 
바람이 칼춤을 추며 울부짖는다.

 

“해고자 복직” 
“노동 인권 보장”

 

붉은 쇳물 펄펄 끓던 노동의 기억들이 
까만 하늘 가득 반짝이는 파편들로 쏟아지고 
“아빠, 힘내세요.”
응원하는 아이의 편지는 
암호처럼 전선을 타고 흐른다. 

 

지구를 태워도 좋을 불꽃을 감추고
팽팽한 고압 전선이 씽씽 울면
서릿발 딛고 선 마른 뼈가 후끈 달아오른다. 

 

세상이 잠들어도 꼿꼿이 버티는 파수병
동녘에 들불을 놓아 천지가 붉게 타는 
새 아침이 눈뜰 때까지……

 

(지창영, 「송전탑 ― 고공 농성」)

 

이 시에서는 제목에 제시되어 있는 ‘송전탑’이 아바타 역할을 한다. ‘고공 농성’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으므로 송전탑에서 고공 농성을 하는 노동자의 이야기라는 점이 독자에게 전달된다. 

 

본문은 철저히 송전탑의 처지에서 묘사되어 있다. 송전탑이 살아 있는 존재처럼 그려져 있다는 것을 쉽게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송전탑이 노동자를 대신하여 고통을 견디고(‘눈발이 후비는 어깨뼈’) 투쟁의 의지를 담지하고(‘심장처럼 일렁이는 횃불을 품고’) 굳은 결의로 밤을 지새운다(‘부동의 밤을 지킨다’).

 

일반적인 눈으로 볼 때 송전탑은 아무런 느낌도 없는 존재지만 농성하는 노동자의 심정을 전이시켜 그렇게 살려낸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치열성이 강화된다.

 

이 시에서 아바타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예술적 표현을 빼 버린다면 대략 이런 글이 남을 것이다.

 

송전탑 위에 노동자들이 올라가 농성한다. 밤이 되어 눈이 내려도 뜨거운 투쟁 의지로 버틴다. ‘해고자 복직’ ‘노동 인권 보장’이라고 쓰인 현수막이 바람에 펄럭인다. 쇳물이 끓듯 치열한 노동의 현장을 생각하는 밤, 하늘에는 별들이 반짝인다. 아이로부터 “아빠, 힘내세요.” 하는 편지를 받았다. 고압 전류가 흐르는 송전선에 바람이 불어 씽씽 소리가 난다. 모두가 잠든 밤이다. 투사들은 파수병처럼 굳은 의지로 버틴다. 아침이 오듯이 노동 해방의 새날이 왔으면 좋겠다.

 

위 시와 달리 여기서는 송전탑이 그냥 배경의 하나로 치부된다. 나머지 장면들도 각각 지나가는 소품으로 여겨질 뿐 하나로 통합된 장면으로 이해되기에는 부족하다. 이 내용은 보이는 부분을 글로 옮긴 것으로서 일반적인 사실에 그친다. 그만큼 치열성이 높지 않다.

 

치열하고 호소력이 강한 작품이 되려면 아바타가 최대한 살아 움직이게 해야 한다. 위에 제시한 시처럼 아바타(송전탑)에게 생명을 불어넣고 그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노동자를 대변하게 해야 한다.

 

주인공이 제자리를 잡으면 조연들도 살아난다. 송전탑에 붙어 있는 현수막도 ‘혈서’ 같이 느껴지고 그것이 ‘긴급 신호’로 거듭난다. 노동자의 주장(현수막)을 방해하는 바람 또한 ‘칼춤을 추며 울부짖는다’. 쇳물이 끓듯 치열하던 노동자의 기억들은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이 되어 ‘파편들로 쏟아지고’ 아이가 보낸 응원의 편지는 ‘전선을 타고’ 흐르는 암호처럼 비장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한국알콜-1.jpg

 

송전탑이 지니고 있는 고압은 ‘지구를 태워도 좋을 불꽃’으로 묘사되어 노동자의 무서운 잠재력을 대변하고 ‘팽팽한 고압 전선이 씽씽’ 우는 장면은 노동 투쟁 전선의 엄혹함을 대변하며, ‘서릿발 딛고 선 마른 뼈가 후끈 달아오른다’는 표현은 현실은 비록 힘겹지만 투쟁의 결의는 뜨겁다는 점을 대변한다.

 

마지막 연의 ‘세상이 잠들어도 꼿꼿이 버티는 파수병’은 송전탑과 농성 노동자에게 공통으로 적용되는 표현이다. 밤이 지나고 아침이 오는 장면은 ‘동녘에 들불을 놓아 천지가 붉게’ 탄다고 묘사함으로써 투쟁의 결과로 열리는 새 세상을 연상하도록 했다.

 

아바타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비유적 장치들이 들어 있기 때문에 이 시는 여러 번 읽어도 새롭게 느껴지는 면이 있다. 한 번 읽을 때 찾지 못했던 숨은 뜻을 두 번 세 번 읽으면서 새롭게 발견하는 묘미가 있다.

 

시창작 초보 단계부터 아바타를 앞세우는 습관을 들인다면 창작 실력 향상에 가속도가 붙을 것이다. 나를 대변할 아바타를 찾고 그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주인공 역할을 하도록 할 때 예술성은 더 높아지고 느낌은 색다르게 다가오며 여운은 오래 남는다.

 

지창영 시인.jpg
지창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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