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정호 (편집위원)
등록일 : 2024.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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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집단농장

 

ㅡ 위에서 아래로의 혁명

 

일찍이 소비에트 정권이 수립된 후 ‘전시 공산주의’ 시기에 소비에트 러시아는 토지 개혁에서 집단농장과 국영농장을 시도한 적이 있다. 하지만 당시 이들의 수자는 매우 적었으며, 또 그것의 출현은 농민들의 환영을 받지 못했다. 레닌 역시 집단농장 문제는 당면한 문제가 아니며, 국영농장 역시 이상적이지 않기에 사회주의와 집단화로 과도하게 이행하려 해서는 안 되며, 반드시 개인 농민에게 의존해야 한다는 사실을 재빨리 깨달았다. (<레닌전집>2판 40권,177쪽)


신경제정책(NEP)의 시행으로 경제가 빠르게 회복되어 발전했다. 소농 경제가 발전했으며, 대부분의 농민은 중농이 되었다. 일부 경영에 수완이 있는 농민들은 부유한 농민이나 부농이 되었다. 신경제정책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부농을 어떻게 이해하며 농민을 사회주의의 길로 인도하는 방법에 관해 볼셰비키 당내에서는 원래 이견이 존재했다. 레닌 서거 이후 이러한 문제에 대한 당내 논쟁은 더욱 표면화되고 첨예화되었다. 몇 차례 벌어졌던 당내 투쟁은 모두 이와 관련이 있었는데, 이 문제에 대한 논쟁은 권력 투쟁의 요소와 뒤섞여 당내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1927년 말까지는,  제15차 당대회가 “개인 소농경제를 통합하고 대규모 집단경제로 전환하는 것”을 농촌에서 당의 기본임무로 삼으면서도, 다른 한편 소농의 자발적 방식을 채택하고, 강제적인 방법을 사용해서는 안 되며 반드시 농민들을 진일보하게 합작화하는 기초 위에서 점진적으로 수행토록 했다. 당대회에서 스탈린이 제안한 집단 농장을 소농 경제를 혁신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간주하는 견해는 아직 완전하게 채택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른바 부하린과의 ‘우경 투항주의 집단’과의 투쟁이 점차 심화됨에 따라, 소련의 집단화운동 또한 점차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1927년 말 현재 전국 20만 농가만이 집단농장에 참가하여 전체 농가의 0.8%만 차지하고 있었다. 전국적으로도 집단농장 수자는 1만 4800개에 불과했지만, 1929년 4월 '부하린그룹'과의 투쟁이 결정적 승리를 거두자 집단화 운동은 즉각 전국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1929년 여름부터 우리는 전반적인 집단화 단계에 들어섰으며, 부농계급을 없애는 정책으로 전환을 시작했다"라고 발표했다. (<스탈린전집>12권,1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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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를 선고받은 부농 (레닌그라드, 192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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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농의 소멸 (1929)

 

1929년 중반부터 정부는 대출, 기계와  농기구 공급, 토지 할당, 세금 우대 등의 방식으로 집단농장에 대한 점점 더 많은 지원을 제공했다. 신문도 집단농장에 참여하는 농민 대표의 느낌과 경험들을 대량으로 실으면서 여론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일부 지역은 상급의 지시에 따라 ‘할당’, ‘돌격운동’을 전개하여 농민들에게 집단농장에 참가하면 기술을 제공하고, 농업기술자의 도움을 제공하겠다는 등의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했다.  그해 여름부터 개별 구역 및 특별 구역은 전체 농민을 '전면 집단화' 한다는 구호를 내걸었다.

 

그런데도 1929년 11월 초까지 전국에 6만 7400개의 집단농장만 만들어졌을 뿐, 집단화 농가는 전체의 7.6%인 약 192만 가구에 불과했다. 집단농장에 참가한 대부분의 농민은 빈농이었으며 중농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이런 개별적인 사실들을 부랴부랴  종합해 <대전환의 해> 글을 통해 다음과 같이 공언했다. "지금 집단화 운동의 결정적 의의를 지닌 새로운 현상이 나타났는데, 농민들이 예전처럼 몇 사람씩 가입하지 않고 마을 전체, 촌 전체, 읍면 전체, 구역 전체, 심지어는 특별구역 전체가 가입한다는 점이다. 이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즉 중농이 집단농장에 가입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스탈린은 이것이 집단농장의 근본적 전환의 시작이라고 믿었으며, 전국적으로 집단화 운동을 신속하게 전개할 것에 대한 요구라고 간주했다. 그는 집단농장과 국영농장의 발전과 함께  "2-3년 안에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식량이 많은 국가 중 하나가 될 것이고, 심지어는 세계에서 식량이 가장 많은 국가가 될 것이다"라고 단언했다. (<스탈린전집>12권, 118쪽)


곧 바로 1929년 11월에 열린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스탈린과 몰로토프는 집단화 속도를 높일 것을 요구했다. "지금 조건에서 5년간의 집단화를 말하는 것은 더 이상 필요치 않다. 주요 농업 지역과 주(州)의 경우 집단화 속도가 매우 다르지만, 이제 5년의 집단화가 아닌 바로 다음 해로 생각해야 한다."(<스탈린연구> 1993년 2집, 76쪽)  몰로토프 보고서에 따라 전체회의는 <집단농장 건설의 총결산과 향후 임무> 결의를 채택하고, “소련은 농촌에서 사회주의 변혁과 사회주의 대농업 건설의 시기에 들어섰다”라고 선언했다. 최근 몇 달 동안 상당한 조직 재능과 정치적 경험을 지닌 2만 5,000명의 노동자를 집단농장, 기계 트랙터소 및 기타 직책에 파견하여 집단화 지도를 할 것을 요구했다.


1929년 12월 5일, 공산당 중앙정치국은 농업인민위원 야코블레프를 대표로 하는 집단화 지역위원회(통칭 특별위원회)를 설립하고, 집단농장 건설을 연구 및 요약하여 집단화 문제에 대한 결의안을 작성토록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전면적 집단화에 관한 주(州)> 결의안 초안을 작성하여 5년(즉 제1차 5개년 계획) 이내에 '대다수 농민'의 집단화 임무를 완료할 것을 제안했다. 주요 곡물 생산 지역에서는 2~3년, 다른 지역에서는 3~4년, 경제적으로 낙후된 소수민족 공화국에서는 집단화 작업을 2차 5개년 계획으로 연기해야만 완수할 수 있다고 건의했다. 결의안 초안은 또한 집단화에 있어 신중해야 하며, 행정명령과 같은 수단이나 근거도 없이 준비가 부족한 구(區)나 주를 전면 집단화 지역으로 선포하는 데 몰두하지 말아야 한다. 그뿐 아니라, 인위적으로 집단화 운동의 발전 또한 막지 말아야 한다고 건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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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농장을 건설하기 위해  기아에 내몰린 농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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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첫번째 트랙터 (1930년)

 

12월 22일, 결의 초안은 중앙정치국에 제출되었다.  스탈린은 이것을 보고 집단화의 일정과 신중한 집행을 요구하는 것에 대해 매우 불만스러워하며 이에 대한 수정을 지시했다. 스탈린의 견해에 따라 특별위원회는 다시 수정 작업을 진행하여 <집단화의 속도와 국가가 집단농장 건설을 돕는 방법에 관하여> 라는 결의 초안을 작성하였다. 신중한 집행을 요구하는 내용을 삭제하고 집단화를 완성하는 기한을 크게 단축하였다. "5개년계획 기간 우리는 5개년계획의 규정에 따라 20%의 파종면적에 대한 집단화를 완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절대다수 농가의 집단화 임무도 완수할 수 있다. 볼가강 하류, 볼가강 중류, 북코카서스와 같은 주요 양곡 생산지역 집단화는 1930년 가을이나 늦어도 1931년 봄에 기본적으로 완수할 수 있다. 기타 양곡 생산지역의 집단화는 1931년 가을이나 늦어도 1932년 봄에 기본적으로 완성할 수 있다."* 1930년 1월 5일,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이 결의안 초안을 통과시켰다.

 

*<소련공산당 당대회, 대표회의 및 중앙위 전체회의 결의 집성> 제4책, 113쪽.

 

이 결의가 발표되자 농민 특히 중농들은 납득할 수 없었다. 1929년 4월 발표된 제1차 5개년 계획에서는 개인경제의 발전 필요성을 인정해 5년간 전체 농가의 18~20%, 전체 파종 면적의 17.5%만 집단화하도록 했다. 그러나  상부의 강력한 압력으로 첨단 식량 생산 지역뿐 아니라 중부의 흑토 지역 및 모스크바 주, 심지어는 동부 공화국에서도 "1930년 봄 파종 운동 기간"에 집단화를 완료하기로 결정했다. 난폭한 압력과 위협이 농민들 사이에서 마땅히 해야 할 설득 작업을 대체했다. 농민들은 "부농으로 토지와 재산을 몰수한다"는 위협 아래  어쩔 수 없이 집단 농장에 가입했다. 


많은 주가 "집단농장에 가입하지 않은 사람은 소비에트정권의 적"이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부농 재산을 몰수하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집단농장에 가입하지 않는 중농들도 재산을 몰수당했다. 심지어 일부 농민들을 '부농의 조력자'로 간주하고 부농과 함께 변방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와 동시에 일부 지방은 농민에 대한 위협과 회유를 병용하였는데, 농민들에게 트랙터와 대부금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무엇이든 다 내놓고 집단농장에 가입하자!"고 말했다. 게다가 집단화를 할 때 크고 공공적인 것만을 일방적으로 추구하였으며, 토지공동경작사*도 공유화 정도가 비교적 높은 노동조직과 공사의 정관을 채택하고, 심지어는 유일한 젖소 혹은 작은 가축까지도 모두 공공으로 귀속시켰다. 중앙에서 발행하는 간행물들도 각급 당 조직에 집단화의 발걸음을 다그칠 것을  호소했다.  <프라우다>는 1930년 2월 3일 사설에서 1930~1931년도에 75%에 달하는 집단화의 지표를 제시했는데, 이마저도 상한선이 아니었다.

 

*토지공동경작사ㅡ 소련의 집단농장의 낮은 형식인데, 이런 조직은 개별 농민의 토지를 연합하여 공동으로 노동 하지만 가축, 농기구 등 생산수단은 여전히 각자의 사유재산으로 남고 경작할 때만 공동으로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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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농장의 여성들

 

이와 같은 조치로 소련의 집단화 수준이 급격히 높아져, 1930년 3월 초 집단농장에 가입한 농가는 전체 농가의 57%로 급증했다. 그러나 농민들은 이 조치에 극도로 불만을 품고 식량을 숨기고 가축과 가금류를 죽였으며, 원망의 소리가 도처에 퍼져나갔다. 많은 곳에서는 정부에 반대하는 항의가 공개적으로 거행되었다. 통계에 따르면 1930년 1월 초부터 3월 중순까지 2,000건 이상의 농민의 반소(反苏) 무장 폭동 소식이 접수되었다. 1929년 가을과 겨울에 각지 농촌 지역에서 스탈린과 칼리닌에게 보낸 고소 및 항의 서한만 해도 9만 통에 달했다.

 

농촌에서 나타난 이 같은 상황은 스탈린과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도 감지되었다. 1930년 3월 2일 [프라우다]는 농민 실정과 정서를 고려하여 다시 개정한 농업노동조합 시범규약을 발표하였다. 이날 스탈린은 또 [프라우다] 에 < 승리는 머리를 혼란하게 한다>는 글을 발표해 집단화에서 과도한 행위를 규탄하고, 집단화는 반드시 자발적 원칙을 준수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집단화에서 '편차'가 나타난 원인은 일부 지방간부들의 '무모함'에 있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2월 20일까지 50% 농가가 집단화를 실현한 것은 "중대한 승리"를 거두었음을 의미한다고 하면서, "농촌에서 사회주의로의 근본적 전환이 이미 보장되었다고 할 수 있다"라고 했다. 따라서 지금의 임무는 "이미 획득한 승리를 공고히 하고, 이러한 승리를 계획적으로 이용해서 더욱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스탈린전집>12권, 167~1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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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들에게 일을 분배하고 있다

 

3월 14일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집단농장 운동에서의 당의 노선 왜곡에 관한 결의안>을 채택했다. 결의안은 강제명령에 의한 집단화를 저지하기 위한 실질적인 조치를 취해야 하며 주택, 소규모 가축, 가금류 등에 대한 공유화를 금지하고, 시장을 재개하며, 농민이 시장에서 제품을 판매하는 것을 제한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4월 3일 스탈린은 <집단농장 동지들에게 답한다>라는 글을 발표했다. 토지공동경작사와 같은 노동조직을 건너뛰어 직접 농업공사를 설립하거나, 부정확한 방식으로 심지어는 폭력적으로 중농을 대하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집단화의 자발적 원칙을 재차 강조했다. 또 집단화 과정에서 많은 오류와 과격한 행동을 “집단농장운동에서 우리의 빠른 승리로부터 비롯됐다”라고 말하는 것은 승리가 정신을 잃게 한 것이라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지방  사업일꾼 뿐 아니라 개별 성의 성위원회위원과 개별 중앙위원을 가르킨다”라고 했다.(<스탈린전집>12권, 177~186쪽)

 

스탈린의 글과 중앙위원회 결의안이 발표된 후 많은 지역의 분노는 즉각 진정되었고, 농민들은 집단 농장에서 대규모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통계에 따르면 1930년 7월 1일까지 집단농장에 남아 있는 농민은 전체 농가의 23.6%에 불과했다.


그러나 1930년 6월 26일부터 7월 13일까지 열린 제16차 당대회에서 스탈린 등은 회의에서 집단화는 “당 노선의 승리”라고 선전했으며, 농촌 건설에서  집단농장과 국유농장 건설을 계속하는 것은 당의 최우선 과제이며, 과거의 모든 것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부농계급은 멸망할 운명이며, 반드시 소멸될 것이다. 남은 길은 오직 하나, 집단농장의 길뿐이다."라고 말했다.(위의 책, 290~2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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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국 위원 스탈린, 보로실로프, 몰로토프, 카가노비치, 오르드니키제, 칼리닌, 구비셰프 등이 제16차 당대회에 참석하고 있다.

 

1930년 가을부터 집단화 운동은 다시 대규모로 전개되었다. 12월에 소집된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와 중앙감찰위원회 합동 전원회의는 5개년 계획의 첫 2년 동안 집단화는 이미 거대한 성과를 거두었으며, 기본적으로 양식문제를 해결했다고 하면서 전국 각지에서 집단화의 발걸음을 다그칠것을 요구했다. 1931년에 우크라이나 초원지구, 북코카서스, 볼가강 중하류 등의 지역에서 집단농장에 가입한 농가는 평균 80% 이상이어야 한다고 했다. 중앙 흑토지구, 시베리아, 우랄, 우크라이나 삼림초원지대, 카자흐스탄 양곡 생산지역은 반드시 50% 농가를 집단화해야 한다. 식량 자급이 불가능한 지역에서는 농가의 20~25%가 집단농장에 가입할 수 있도록 한다. 면화 생산 지역과 사탕무 지역에서 50% 이상 농가를 집단 농장에 가입시키도록 한다. 그렇게 해서 기본적으로 집단화를 완성하고 부농계급을 소멸시킨다.* 1931년 3월, 스탈린은 동시베리아 변강구위원회에 보낸 전보에서 집단화 운동을 "금지하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지방조직’이 임무를 초과 완수하도록 권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 <소련공산당 당대회, 대표회의 및 중앙위 전체회의 결의 집성> 제4책,  200~203쪽.

** <스탈린연구>  1993년 2집, 81쪽.

 

 집단화 운동의 고조 속에 새롭게 기계 트랙터 스테이션(거점) 계획이 수립되고, 집단 농장원의 노동 보수 인상에 대한 약속, 일정 규모의 개인 부업 운영 보장 등 집단 농장 가입을 장려하기 위한 특정 조치가 취해졌다. 하지만 농민들은 여전히 폭력적이고 무자비한 압박을 받았다. 1932년 말까지 집단 농장에 가입한 농가는 전체 농가의 62.4%를 차지했고, 집단농장과 국유농장의 파종 면적은 전국 파종 면적의 80%를 차지했다. 1932년은 “전반적인 집단화 완성의 해”로 선포되었다. 제2차 5개년 계획 이후인 1937년 말까지 집단 농장에 참여한 농민 수는 93%에 달했으며, 파종 면적은 99.1%에 달했다.

DT-54 크롤러 트랙터. 1949_1979년 3년간 총 98만 5천대를 생산했다.png.jpg
소련의 DT-54 크롤러 트랙터. 1949~1979년  30년간 총 98만 5천대를 생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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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농촌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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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를 사기 위해 기다리는 소련 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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