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지창영 (시인)
등록일 : 2024.06.11

빙산.png.jpg

 

빙산은 극히 일부분만 보이지만 물속에 더 큰 부분이 숨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안다. 한 편의 시에서 작가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보여 줄 필요는 없다. 빙산의 일각처럼 중요한 부분을 보여 줌으로써 나머지 부분을 상상하고 유추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좋다. 그럴 때 독자가 참여할 공간이 넓어진다. 안 보이는 부분을 스스로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시는 천차만별이어서 잔물결에도 흔들리는 얼음 조각처럼 가벼운 느낌을 주는 작품도 있고, 거대한 빙산처럼 묵직하고 유장한 맛을 자아내는 작품도 있다. 어느 것이 좋고 어느 것이 나쁘다고는 할 수 없으나 빙산 같은 작품을 쓰고자 노력할 때 시인의 역량이 커지는 것은 당연하다.

 

욕심이 앞선 나머지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털어 넣으려고 한다면 수면에 떠서 가볍게 흔들리는 종잇장이 될 수 있다. 울림이 깊은 시를 쓰려면 보이지 않는 부분을 풍부하게 준비하되 문자로 드러나는 부분은 줄이고 압축하고 비유와 상징을 통하여 표현하는 것이 좋다.

 

작품 속에 숨어 보이지 않는 부분을 설명해야 하므로 부득이 필자의 시를 예로 든다. 다른 작가의 작품에서 보이지 않는 부분을 필자가 말하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눈물이 싱거워요

 

투발루는 나라가 통째로 잠겨 간대요
해수면이 야자수 머리까지 차오르면 
플라스틱 잔해들만 둥둥 떠서 
구원을 받고 영생하겠지요

 

세계를 점령한 위대한 플라스틱은 
빙하를 녹이는 힘을 가졌대요

 

섬나라 농장에 바닷물이 침투하여 
플루아카 뿌리가 썩어 들어가자
플라스틱이 단숨에 점령했지요
자급자족은 이내 전설이 되어 버렸어요

 

플라스틱, 그 맛을 알아요

 

조상 대대로 나서 자라고 묻히던 땅
두엄이 썩어 비료가 되듯
모든 것이 발효되어 밑거름으로 순환하는 땅에
달콤한 초콜릿을 품고 점령군으로 들어와 
여기저기 알박기 하더니
아예 눌러앉아 주인 행세하는 제국주의의 포장지

 

그 유혹에 인류는 일찍이 순응하고 말았죠
그 위세에 맞서 저항하기를 이미 포기했죠
포로가 되어서도 헤어나지 못하는 
그 몽롱한 편의주의 처방

 

기억을 위해 
투발루를 디지털로 옮긴다고 해요
하지만 눈물이 짠 사람은 
디지털 나라에서 살 수 없어요

 

플라스틱이 태평양을 점령하고
서서히 혈관으로 흘러들고 있어요
눈물이 자꾸만 굳어 가요

 

이제 우리도 구원을 받게 되는 건가요?

 

(지창영, 「플라스틱 눈물」)

 

첫 번째 연에서 눈물을 등장시킨 것은 최근 우려가 커지고 있는 미세플라스틱 문제를 염두에 둔 까닭이다. 미세플라스틱은 염증과 산화 손상을 유발하여 온몸 건강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하는데 특히, 눈에 들어가면 자극과 염증을 유발할 수 있어 인공눈물을 장기간 사용할 경우 주의가 필요하다고 한다. 필자는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작품에는 언급하지 않고 그냥 눈물이 싱겁다고 표현했다.

 

두 번째 연에서는 해수면 상승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태평양의 작은 섬나라 투발루를 언급하면서 극단적인 경우를 가정해 보았다. 그 나라에는 예전에 없던 플라스틱이 보급되어 각종 용기가 폐기물로 쌓여 가고 있다. 나라가 완전히 잠긴다면 결국 플라스틱 제품들만 둥둥 떠다닐 것이 예상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야자수는 잠기고 플라스틱 잔해들만 구원받을 것이라고 표현했다. 야자수는 자연물이고 플라스틱은 인공물이므로 결국 인공물이 자연을 파괴한다는 메시지도 담고 싶었다.

 

물에 잠겨가는 나라 투발루.jpg
물에 잠겨가는 나라 투발루

 

세 번째 연에서는 플라스틱에 대하여 세계를 점령한 위대한 존재로서 빙하를 녹이는 힘이 있다고 비꼬아 표현했는데, 이는 환경 오염의 대표적 인공물인 플라스틱이 세계 도처에서 사용되면서 환경 파괴의 주범이 되고 있음을 염두에 둔 것이다.

 

네 번째 연에서 여섯 번째 연까지는 투발루라는 섬이 파괴되는 장면을 표현했다. 해수면 상승으로 농장에 바닷물이 스며들어 플루아카(투발루 사람들이 수백 년간 주식으로 재배해 온 식물)가 썩어 들어가고 외지에서 들어온 플라스틱이 대량 유포되어 처리가 곤란할 지경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빗대어 플라스틱을 점령군이요, 제국주의의 포장지라고 표현했다.

 

일곱 번째 연에서는 인공물의 자연 파괴적인 속성을 알면서도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인류의 처지를 반영했다. 자본주의 물결을 타고 급속히 퍼지는 플라스틱류가 환경에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엄청난 물량 공세에 별다른 대책을 세울 엄두가 나지 않을뿐더러 그 편리함에 익숙해지고 말았다.

 

여덟 번째 연에서는 바다에 잠겨 가는 투발루를 기억하고 보존하는 방법으로서 투발루의 모든 것을 디지털화한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삼았다. 디지털 데이터로 기억은 할 수 있지만 눈물이 짠 진짜 사람은 그 속에 살 수 없는 일 아닌가.

 

아홉 번째와 열 번째 연은 마무리와 여운을 위하여 압축적인 표현과 상징적인 표현을 사용했다. 플라스틱이 바다 생물까지 오염시키고 그 생물을 인간이 먹으니 결국 사람의 몸에도 플라스틱의 악영향이 미치는 것이 아닌가. 이 심각성을 혈관과 눈물의 오염으로 압축하여 표현했고, 결국 사람도 플라스틱이 되어 바다에 둥둥 떠다닐 것이라고 과장되게 상상하면서 이를 구원이라는 상징을 빌어 역설적으로 표현했다.

 

프라스틱-2.jpg
플라스틱

 

이 시에 대해서 위에 언급한 내용 외에도 할 말이 많다. 자세히 말하자면 기사나 보고서가 몇 편 정도 될 분량이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은 작품에 직접 표현하지 않았다. 문자로 표현된 작품이 수면 위에 드러난 빙산이라면 표현하지 않은 내용은 수면 아래의 빙산이다. 

 

독자에게 수면 위의 빙산은 감상의 영역이고 수면 아래의 빙산은 상상과 유추의 영역이다. 플라스틱의 폐해에 대하여, 투발루의 상황에 대하여,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횡포에 대하여 많이 알고 생각하는 만큼 느낌도 풍부해질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모른다고 해도 환경 오염의 심각성을 느낌으로 공감하는 데는 지장이 없을 것이다. 이 시를 접하고 나서 투발루에 관심이 생겨 관련 자료를 찾아 보는 독자도 있을 수 있다.

 

시는 사실을 전달하는 실용문이 아니라 느낌을 공유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는 예술문이기 때문에 사실과 현황을 구구절절 다 설명할 필요는 없다. 그 부분은 기사나 보고서 등 실용문이 할 몫이다. 예술 작품에서 사실이나 현황이 활용되는 예도 많은데, 그것은 특별히 노리는 효과가 있을 때 제한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불필요하게 모든 것을 말할 필요는 없다는 얘기다. 그렇게 하면 작품이 그만큼 산만해지고 가벼워질 수 있다. 

 

수면 위의 빙산은 비록 작아도 그를 떠받치는 수면 아래의 빙산은 엄청나게 크다. 시를 쓸 때는 빙산의 일각만 보여 주자. 수면 아래의 것을 모조리 보여 주고 싶다면 빙산이 아니라 조각조각 부서진 얼음 조각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시는 비록 짧지만 그 속에 내포된 내용과 의미는 크고 깊을 때, 즉 보이지 않는 부분이 크면 클수록 감동이 커지고 울림이 오래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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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창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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