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김장민(정치경제학연구소 프닉스)
등록일 : 2025.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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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 8. 15. 서울. 대한민국 정부수립기념식장에 참석한 맥아더와 이승만( 사진출처 : 오마이뉴스) 

 

이승만은 1919년 파리강화회의 이후,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한국이 자치능력이 없다.”면서 국제연맹 위임통치 청원서를 제출했다. 이승만은 1920년 12월 상해 임시정부로 돌아왔으나 위임통치 문제에 대한 논의를 거부했다. 또한 그는 대통령이 상해에 없을 때 행정결재권을 국무총리에게 위임하는 안도 거부하고 1921년 5월 미국으로 떠났다.


임시의정원은 1923년 4월 이승만 탄핵안을 제출하고, 1924년 9월 국무총리 이동녕에게 대통령직을 대리할 것을 명령했다. 이승만은 이에 반발하며 “미국동포들에게 임정에 독립자금을 보내지 말라.”고 선동했다. 의정원은 1924년 12월, 박은식을 국무총리 겸 대통령 대리로 추대했다. 의정원은 "이승만 대통령이 헌법을 위반하고 정부의 위신을 손상하며 민심을 분산시켰다."고 탄핵 사유를 밝혔다. 의정원은 1925년 3월 18일, 이승만 탄핵안을 압도적 찬성으로 가결했다.


1932년 11월 이승만은 임시정부 국무회의에 의해 한국의 독립을 국제사회에 탄원할 특명전권대사로 임명되었고 이어 1934년 외무위원장에 선임돼 1936년 7월 개인 사정으로 사직할 때까지 활동했다.


이승만은 1941년 6월 대미교섭의 전권(全權)을 행사하는 주미외교위원장으로 임명됐다. 이승만은 미국무부 극동국장을 만나 공식적인 항일활동을 하도록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이승만은 국무부, 백악관, 국방부와 계속 접촉했으며, 특히 루스벨트 대통령 부인을 만나기도 했다.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항일투쟁을 미국 국방부나 정보기관과 상의하면서 이들과 인맥을 쌓았다. 


이승만은 1942년 6월부터 미국의 소리 방송망을 통해 매일 고국 동포들의 투쟁을 격려하였다. 1942년 8월 29일, 이승만의 제안으로 미국의 소리 한국어 방송이 개국하였다. 미 군정으로부터 정보를 제공받은 샌프란시스코 방송도 미국의 소리 방송의 일부이다. 이승만은 반공노선을 견지하고 얄타회담에서 소련이 한국을 점령하는 비밀논의가 있었다면서 소련의 한국점령을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이런 활동들은 소련이 이승만과 임시정부를 기피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승만은 해방 직후 귀국을 시도했으나 미·소 협력에 악영향을 우려한 미국 국무부가 비자를 내주지 않아 국방부 인맥을 동원하여 맥아더 태평양사령관의 허가를 받았다. 맥아더는 반공 반소의 입장에 동의했기 때문에 이승만을 지원하기로 했다. 이승만은 1945년 10월 12일 맥아더 사령관과 하지 미군정사령관을 면담한 후 맥아더 사령관의 전용기를 타고 10월 16일 귀국했다. 김구보다 2개월 먼저 귀국한 셈이다. 맥아더 사령부는 이즈음 이승만의 명망을 이용해 남한에서 열세인 우익을 강화시켜 좌익을 견제하는 계획인 ‘한국인민행정위원회(National Korean Peoples Executive Committee)’ 계획을 수립했다.


이승만은 미 군정의 후원과 자신의 명망을 무기로 삼아 자기중심으로 좌우익을 통합하고자 했다. 이승만은 각 정당 행동통일위원회, 조선공산당, 한국민주당 등에게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 구성을 제안했다. 이승만은 자신이 미국 백악관과 맥아더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호언장담을 했으며, 좌우익도 임시정부의 초대대통령인 이승만의 명망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승만의 제안에 호응하여 10월 23일 200여 명이 참석해 협의회가 발족됐다.

 

하지만 친일파를 참가시키는 문제와 이승만의 반공 반소 발언으로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이 탈퇴하면서 협의회는 한 달 만에 우익조직이 됐다. 곧이어 귀국한 임시정부는 이 협의회에 참여하지 않고 독자적인 건국 준비를 하면서 이승만의 입지가 좁아졌다. 


이승만은 1945년 말 모스크바 3상회의의 신탁통치안에 반대하면서 다시 세력을 규합했다. 이승만은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전국적으로 조직하고 지방순회를 통해 1946년 3월경에 100만 명 이상을 회원으로 모았다. 신익희 임시정부 내무부장이 임시정부 산하의 정치공작대를 임시정부 뜻에 반해 이 국민회에 결합시켰다. 이승만은 미소공동위원회에 반대하면서 1946년 6월 3일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을 공식화했다. 한국민주당 역시 “남한만의 총선을 통해 단독정부를 구성한 후 점진적으로 통일을 달성하자.”고 주장했다.


이승만은 1946년 7월 미군정의 요청으로 시작된 여운형과 김규식의 좌우합작을 반대하면서 남한 단정론을 설파했다. 그해 가을부터 미군정의 좌익 탄압과 총파업으로 미 군정은 좌우합작을 중단했고 이승만의 단정론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이승만은 12월 2일부터 1947년 4월 21일까지 일본, 미국, 유엔에서 남한 단정론을 확산시켰다. 이승만은 2월 미국 국무부에 남북통일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남조선의 과도정부를 수립할 것 등을 포함한 6가지를 제안했다. 


1947년 2월 민족통일총본부·독립촉성국민회·비상국민회의가 통합해 국민의회를 발족시켰다. 3월 국민의회는 임시정부의 법통을 승인하고 이승만을 임시정부 주석, 김구를 부주석으로 선출하고 미군정에 임시정부의 권능을 인정해달라 요구했으나 거부당했다.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법통은 추후에 논의하자며 주석직을 고사했으나 형식적으로 1948년 정부수립 때까지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다.

 

이승만은 1947년 3월 발표된 트루먼 독트린을 지지하면서 트루먼에게 서한을 통해 미·소 합의에 의한 좌우 통일정부 수립을 중단할 것과 남한에서 즉각적인 과도 독립정부를 수립하여 공산주의 확장을 저지하는 방파제를 구축할 것을 요청했다. 


미 군정과 여운형, 김규식이 추진하는 좌우합작에 참여하지 않은 이승만과 한국민주당은 임시정부 법통을 주장하며 반탁운동으로 좌우합작을 견제했다. 이들의 주도로 전국에서 수만 명이 반탁시위에 가담했다. 하지만 미 군정이 좌우합작을 지지하고 좌익을 탄압하기 전까지 여론은 미소공동위원회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1947년 7월 3일 조선일보가 서울에서 2,495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반탁시위가 독립의 길이다'라는 의견은 651명, '독립의 길이 아니다'라는 의견은 1,736명이었다. 특히 미소공동위원회가 임시정부를 구성하는 협상대상에서 제외할 단체에 대해 한민당 1,227명, 한독당 922명, 독촉국민회 309명, 남로당 174명으로 주로 반탁단체들이 거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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