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 마르크스와 혁명적 무정부주의자(제5회)
김장민(정치경제학연구소 프닉스)
등록일 : 2025.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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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바쿠닌
Михаил Александрович Бакунин
1814.5.30-1876.7.1

출처: 위키백과

 

귀족의 특권을 포기하고 평생 무장봉기 시도

 

미하일 바쿠닌(Mikhaïl Bakounine, 1814~1876)은 러시아 귀족 출신이다. 바쿠닌은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자, 바뵈프, 블랑키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소수 엘리트의 폭력혁명을 주장하는 무정부주의자였다. 그는 비밀스런 엘리트 조직인 프리메이슨의 단원이기도 했다. 바쿠닌은 실제로 몇 번 무장봉기를 주도했으나 실패했다. 
바쿠닌은 국가를 부정하고 자유로운 연합으로서 아래에서 위로 조직되는 사회와 집산체적 소유 또는 사회적 소유를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집산제척 소유 아래서 화폐는 폐지되고 노동의 양과 질에 따라 구성원들에게 노동전표가 배급된다. 생산수단의 사유를 자유로운 연합의 소유로 전환하려면 소유자로부터 생산수단을 박탈하는 혁명이 필요하다. 공상적 사회주의자들과 달리 바쿠닌은 사회주의는 평화적이거나 의회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폭력으로서만 가능하다고 봤다. 


바쿠닌의 아버지는 철학박사 학위를 땄고 어머니도 학식 있는 귀족출신이라서 바쿠닌은 어릴 때 이미 독일어와 불어를 배웠다. 외교관 출신인 아버지의 권유로 14살에 포병사관학교에 들어가 19살에 졸업하기 직전에 이미 포병 소위가 됐다. 철학에 관심이 많았던 바쿠닌은 군사훈련에 집중하지 않았고 사관학교 졸업을 앞두고 불성실을 이유로 퇴교 당했다. 그는 폴란드의 주둔지로 쫓겨났으며 거기서 러시아의 폴란드 억압에 실망했다. 그는 병영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학문적 열망을 실현하고자 탈영했으나 가족의 배경으로 21살에 무사히 제대했다. 


그는 1835년 모스크바로 이주했으며 공무원이 되겠다는 꿈을 버리고 학문의 길을 선택했다. 그는 모스크바주립대학에서 독일철학을 공부하는 서클에서 활동했으며, 헤겔의 저서를 번역했다. 1837년경 바쿠닌은 모스크바에서 헤겔 전문가로서 인정받았다. 그는 모스크바의 지식인들과 교류했는데, 작가인 알렉산더 헤르젠(Aleksandr Herzen)의 도움을 받아 1840년 헤겔이 오랫동안 근무했던 베를린 대학으로 유학 갔다. 바쿠닌은 원래 모스크바에 돌아와 교수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루게 등 베를린 대학의 헤겔좌파들과 교류했고 이어서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문헌을 접하면서 무정부주의적인 사회주의자가 됐다. 

 

시베리아에서 지구를 한 바퀴 돌아 런던으로 탈출

 

1843년 러시아가 베를린 당국에 러시아 혁명가들의 단속을 요구하자 그는 벨기에로 피신했다. 바쿠닌의 아버지는 러시아 당국의 압박으로 아들에게 재정지원을 중단했다. 바쿠닌은 1844년 궐석재판을 통해 러시아 귀족의 지위를 잃었다. 그는 시베리아로 유형 가는 형을 선고받아 러시아 당국의 수배를 받았다.

 

그는 파리로 도망가 의인동맹의 바이틀링 등 독일인 망명자들과 교류하였으며, 이때 마르크스를 만났다. 바쿠닌은 파리에서 만난 프루동에게 무정부주의를 받아들였고 프루동을 평생 스승으로 여겼다. 둘 다 선거와 같은 부르주아 정치를 부정했지만 프루동은 화폐금융제도의 폐지와 협동조합 건설처럼 평화적인 경제개혁으로 사회주의혁명이 가능하다고 봤다. 반면 바쿠닌은 무장봉기를 통한 혁명이 필요하다고 봤다.


바쿠닌은 1847년 1,500여명의 폴란드 망명객들과 프랑스인들 앞에게 러시아를 비판하는 선동연설을 한 이유로 다시 러시아로부터 체포령을 받았고 결국 파리에서 추방당했다. 그는 브뤼셀에서 1848년 혁명을 맞이했고 파리로 돌아왔다. 그는 파리의 혁명정부의 지원을 받아 유럽 곳곳에 혁명을 전파하러 다녔다. 그는 러시아에 점령당한 폴란드에 잠입하려다 실패했으며, 체코의 프라하에 들려 게르만 지배에 대항하는 슬라브 민족대회에 참석했다. 그는 프라하의 혁명에 참여했다가 독일로 돌아왔다. 


바쿠닌은 1849년 독일 드레스덴 혁명에 참여했다가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고 러시아로 이송됐다. 그는 1851년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감옥에 이감된 후 1857년 시베리아로 평생 추방되는 감형을 받았다. 그는 1859년 시베리아에서 결혼한 후 친구인 무라비오프-아무르스키(Muravyov-Amursky) 백작이 통치하던 이르쿠츠크에 정착할 권리를 얻었다. 그는 러시아가 점령한 태평양 지역을 연구한다는 목적을 핑계로 유배지를 탈출했다.


그는 1861년 말 일본, 샌프란시스코, 파나마, 뉴욕을 거쳐 런던에 도착했다. 1863년 폴란드 봉기가 일어나자 바쿠닌은 러시아로 몰래 들어가 혁명을 유발하고자 했으나 러시아로 잠입하지 하지 못하고 핀란드. 스톡홀름, 파리 등을 경유해 영국으로 돌아왔다. 1864년 바쿠닌은 런던에서 마르크스가 주도하던 국제노동자협회에 가담했다. 


바쿠닌은 1864년 이탈리아에서 자신을 따르는 무정부주의자 그룹을 모아 비밀결사단체인 피렌체 형제단을 결성했다. 바쿠닌은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연인관계에 있었던 러시아의 귀족 오볼렌스키(Obolensky) 공작부인의 재정지원을 받았다. 그는 이러한 지원 아래 1866년 국제형제단이라는 자신의 비밀조직을 만들었다. 그는 1867년 스위스로 활동공간을 옮기고 이듬해 무정부주의자들을 국제사회민주동맹으로 결집시켰다. 

 

국제노동자협회에서 마르크스와 대립 끝에 분열

 

프랑스와 프로이센 전쟁이 끝난 직후 리옹의 공화파들은 나폴레옹3세가 프로이센에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1870년 9월 4일 파리보다 먼저 공화국을 선포했다. 바쿠닌은 9월 15일 리옹으로 가서 현지의 국제노동자협회의 동지들과 함께 공화국을 코뮌으로 전환시키고자 했다. 그는 9월 25일 코뮌혁명연맹의 선언문을 작성하고 28일 노동자들의 집회를 기회로 무기가 있는 시청을 점령하고자 봉기했다. 그러나 시청에 무기가 없어 노동자들이 무장하지 못해 봉기는 실패했다. 리옹 정부는 바쿠닌 일행에 체포영장을 발부했고 바쿠닌은 마르세유를 거쳐 스위스로 도피했다. 


바쿠닌은 국제노동자협회 내에서 자신의 국제사회민주동맹을 기반으로 하여 스위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에 지지 세력을 구축하고 지부의 분권과 자율을 주장했다. 이런 무정부주의 성향은 국제노동자협회를 파리코뮌 이후 중앙집권적 노동자당으로 만들려는 마르크스와 충돌했다. 결국 1872년 그는 마르크스파에 의해 국제노동자협회에서 축출됐다. 국제노동자협회 내 블랑키주의자 일부가 바쿠닌을 추방하려는 마르크스에 동조했다.


바쿠닌은 마르크스에 의해 국제노동자협회에서 축출됐지만 자신의 지지자들을 모아 무정부주의자 국제노동자협회를 결성했다. 마르크스는 자신이 결성한 국제노동자협회가 무정부주의자와 봉기주의자들에게 접수되는 것을 막고자 국제노동자협회의 본부를 뉴욕으로 이전했다. 결국 마르크스의 국제노동자협회와 바쿠닌의 국제노동자협회 모두 분열 끝에 조직력을 잃고 해체됐다.


바쿠닌은 1874년 8월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다시 봉기를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봉기 3일 전에 일행 중 한 명이 잡혀 당국에 정보가 누설됐고 당일 봉기 현장에는 소수만 모였다가 흩어졌다. 바쿠닌은 현장에서 낙담해 자살을 시도하였으나 주변의 만류로 인해 결국 볼로냐를 탈출했다. 그는 이듬해 1875년 공식 활동을 종료하고 이탈리아를 거쳐 스위스에 정착했으나 1876년 6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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