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안길성 (노동운동가)
등록일 : 2025.11.20
민주노총 본부가 입주해 있는 정동 경향신문사 본관 건물-2.png
민주노총 본부가 입주해 있는 정동의 경향신문사 본관 건물.

 

지난 11월 17일, 국회 기후에너지환경노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논란의 예산안이 통과되었다. 정부가 민주노총에 55억원의 임차 보증금을, 한국노총에 55억원의 사무실 노후 설비 개선 비용을 지원하는 내용이다. 민주노총은 현재 서울 중구 정동 경향신문사 본관과 별관의 총 6개 층을 보증금 31억원, 월 임차료 2600만원에 임차해 사용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 보증금 31억원도 2002년부터 2005년까지 5차례에 걸쳐 정부가 지원한 약 29억 9800만원이라는 사실이다(조선일보, 2025.11.18자 보도) 이는 노무현 정부 이후 약 20년 만에 재개되는 노동조합 임대료 지원으로,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이루어진 결정이다.

 

국민의힘 의원들은 이 기회를 놓칠세라 당장  "누가 봐도 정권 교체에 대한 대가성 지원 사업이고 배임에 가까운 예산"(우재준 의원), “사회 초년생들은 노동시장에 진입도 못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는 예산에서 보이지 않는데 민주노총 보증금으로 55억원을 지원한다는 건 국민에게 부끄러운 일”(조지연 의원)이라고 비판하고 나섰다. 이에 대해 민주노총 위원장 출신인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은 "지원을 통해 민주노총의 사회적 책임을 더 부여하는 것"이라며 "걸맞은 역할을 요청하겠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재정지원은 여러 측면에서 우려스럽다. 무엇보다 민주노총이 표방하는 '자주적 대중조직'이라는 정체성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자주성이란 외부의 간섭이나 통제를 받지 않고 스스로의 의지와 판단으로 움직인다는 의미다. 그런데 정부로부터 재정지원을 받는다는 것은, 비록 임대료 보조비 명목이라 하더라도, 구조적으로 정부에 대한 의존성을 높이는 결과를 초래한다.

 

조선일보 같은 보수언론은 이미 이 사안을 '쪽지예산', '대가성 지원'으로 프레임화하며 공격하고 있다. 앞으로도 민주노총이 정부 정책을 비판하거나 강경한 투쟁에 나설 때마다 "세금으로 사무실 임대료 받아놓고 정부에 반대하느냐"는 식의 공격이 반복될 것이다. 이는 단순한 언론 공세를 넘어, 민주노총의 정당한 노동운동에 대한 사회적 지지를 약화시키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실질적인 투쟁력 약화다. 최근 민주노총의 행보를 보면 이러한 우려가 기우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민주당 정부 출범 이후 민주노총은 과거와 같은 강력한 투쟁성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양경수 집행부는 26년 만에 노사정 기구인 국회 주도 사회적 대화에 참여하기로 결정했으며, 이는 갈수록 이재명 정부에 의존하는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아래로부터의 투쟁력이 약화되면 그 양보는 언제든지 철회될 수 있다"며 사회적 대화 참여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특히 최근 한미 간 무역 및 관세 문제가 첨예한 쟁점으로 부상하고 있음에도 민주노총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미국의 보호무역주의 강화는 한국 노동자들의 일자리와 직결된 문제임에도, 정부 정책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명확히 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정부와의 관계를 의식한 결과가 아닌지 의심스럽다.

 

민주노총은 120만 조합원을 보유한 거대 조직이다. 조합원 1인당 연간 조합비를 10만원만 책정해도 약 1200억원의 재정을 확보할 수 있다. 이는 사무실 임대료 정도는 충분히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규모다. 물론 최근 민주노총의 조합원 수가 감소 추세에 있다는 점은 우려스럽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민주노총이 더욱 강력한 투쟁성을 발휘하고, 현장 노동자들의 실질적 이익을 대변함으로써 조직력을 회복해야 한다는 과제를 제시한다.

 

2100만 한국 노동계급을 대표한다는 민주노총이 정부 지원금으로 사무실 임대료를 충당한다는 것은 상징적으로도 문제가 크다. 노동조합의 힘은 조합원들의 자발적 참여와 연대,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재정적 기반에서 나온다. 정부 지원에 의존하는 순간, 노동조합은 더 이상 자본과 정부에 맞서는 독립적 투쟁 주체가 아니라, 정부 정책의 협력자 또는 들러리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민주노총은 지금이라도 이번 정부 지원을 재고해야 한다. 그리고 조합원들의 조합비를 통한 완전한 재정자립을 이루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자주적 노동운동의 출발점이다. 재정자립 없이는 진정한 의미의 자주성도, 강력한 투쟁력도 담보할 수 없다.

 

민주노총은 현장 노동자들의 절박한 요구에 응답하고, 자본의 횡포와 정부의 반노동 정책에 맞서 싸우는 전투적 노동조합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럴 때 조합원 수는 자연스럽게 증가할 것이고, 재정 능력도 강화될 것이다. 정부 지원금 55억원은 당장은 도움이 될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민주노총의 자주성과 투쟁력을 갉아먹는 독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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