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지창영 (시인)
등록일 : 2024.04.15

아가-2.jpg

 

한 편의 시가 탄생하기까지는 여러 과정을 거친다. 그 중에서 착상과 포착은 빼놓을 수 없는 과정이다. 

 

착상(着想)은 작품에 대한 새로운 생각이나 구상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을 말한다. ‘아, 이런 시를 써 봐야겠다’ 또는 ‘이거 시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포착(捕捉)은 시적 대상, 즉 시에 활용하는 관념이나 사물을 놓치지 않고 꼭 붙잡는 것을 말한다. 착상이 아무리 좋아도 이를 구체화할 수 있는 대상을 포착하지 못하면 좋은 시가 탄생할 수 없다. 

 

일반적인 순서는 착상이 먼저고 포착이 나중이지만 그 순서는 바뀔 수도 있고 동시에 일어날 수도 있다. 창작 과정은 작품마다 다르고 또 작가마다 다르므로 아무래도 필자의 경우를 예로 들어야겠다.

 

흔들리는 보도블록 밟으며 
아장아장 아기가 걸어갑니다.

 

황급히 따라오는 엄마를 보면
아가는 신이 나서 
서툰 발걸음 재촉합니다.

 

아가의 호기심은 원심력
엄마의 조바심은 구심력

 

자꾸만 벗어나는 어린 발걸음
엄마는 자꾸만 당겨 줍니다.

 

(지창영, 「두 개의 별」)

 

위 시는 포착을 먼저 하고 착상을 나중에 한 경우다. 애초 이런 시를 쓸 생각이 없었는데, 한순간 눈에 띄는 장면이 있어 이를 포착하고 이어서 시를 구상한 것이다. 

 

포착된 장면은 간단하다. 걷기에 재미를 붙인 아기가 마음껏 걸어 보고자 속도를 내는데 그 엄마가 다칠세라 붙잡아 주기를 반복하는 장면이다. 거리에서 보게 되는 온갖 풍경 중에서 하나의 장면에 유난히 눈길이 가는 것은 거기에 뭔가 색다른 면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포착된 장면은 별다른 생각 없이 곧 잊힐 수도 있지만 착상으로 이어지면 작품으로 승화될 수 있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서 가만히 생각하니 그 장면이 예사롭지 않게 여겨졌다. ‘세상의 모든 엄마와 아기 사이에 공통적으로 작용하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있구나, 우주에도 보편적으로 작용하는 힘이 있지 않은가. 엄마 손을 벗어나려고 하는 아기의 걸음은 원심력, 벗어나지 못하도록 잡아 주는 엄마의 손길은 구심력과 닮아 있다. 그렇다면 엄마도 아기도 하나의 별이라고 할 수 있다. 아, 이거 시가 되겠다!’ 이것이 착상이다.

 

다음 시는 착상을 먼저 하고 포착을 나중에 한 사례에 해당한다. 

 

운현궁 뒤꼍 대나무들이 수런수런 얘기한다 
우리는 죽창이 될 수 없었다고
그 때 죽창이 됐어야 한다고

 

바람은 솔솔 불어오는데
지키지 못한 나라를 한탄하며 
자꾸만 수런거린다

 

낭창낭창 휘어지는 신우대가 아니라
마디마디 우악스런 왕대가 됐어야 한다고 
하늘을 찌르는 참대가 됐어야 한다고 
피를 두려워하지 않는 죽창이 됐어야 한다고

 

외세에 문 걸어 닫고 두려워 떨 것이 아니라

 

사대문을 활짝 열어
죽창 들고 한양으로 진군해 오는
동학군을 맞이했어야 한다고

 

이제라도 그래야 한다고
외세 동맹 뒤에 숨을 것이 아니라
우리민족에게 문을 열어야 산다고

 

(지창영, 「운현궁에서」)

 

이 시는 자주(自主)를 주제로 한 작품을 써야겠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자주정신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고민하다가 동학병의 죽창을 생각하게 되었고 결국 대나무를 활용하기로 했다. 대나무로 자주를 표현하자. 그것으로 착상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착상이 곧바로 작품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작품으로 승화시킬 구체적인 장면이나 대상을 포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뒤에 불현듯 운현궁이 생각났다. 거기에 대나무가 있었던 것이 어렴풋이 생각나서 기회를 보아 다시 방문했다. 운현궁 뒤꼍에는 과연 대나무가 있었다. 굵은 대나무가 아니고 가느다란 시누대였다. 변혁기 역사의 주요 무대였던 운현궁 그리고 거기에 심어져 있는 낭창낭창한 시누대는 시를 위한 좋은 소재로 확실히 포착되었다.

 

운현궁_012.jpg
운현궁 대나무

 

시적 대상을 포착한다고 해서 반드시 눈으로 확인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직간접적인 경험이나 타인의 이야기, 책 속의 내용, 역사적 사실이나 사회적 관심사, 심지어 꿈 또는 가상의 이야기도 모두 포착할 수 있는 대상이다.

 

착상 자체는 하나의 생각으로서 형체가 없기 때문에 붙잡아 두지 않으면 날아가 버린다. 착상을 작품으로 만들 수 있는 대상을 당장 포착하지 못한다면 착상 자체를 메모해 두었다가 이따금 되새겨 본다. 그러다 보면 그 착상을 작품으로 완성할 수 있는 대상을 포착할 기회가 올 것이다.

 

반대로 어떤 장면이나 대상이 유난히 눈에 띈다면 그것을 잘 포착해 둘 필요가 있다. 메모도 좋고 사진도 좋다. 그것이 어느 순간 착상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눈으로 본다면 포착할 수 있는 대상이 많을 것이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면을 보려고 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시창작을 위한 착상과 포착을 염두에 두고 세상을 보면 보이지 않던 것도 보일 수 있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머리 속에 떠오를 수도 있다. 숙달되면 착상과 포착이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 점점 많아질 것이다. 시인이 되는 길은 그렇게 열리게 된다.

 

지창영.jpg
지창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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