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정호 (편집위원)
등록일 : 2023.11.19
1918년 11월 7일 레닌은 마르크스 엥겔스 기념비 제막식에서 연설하는 모습.jpg
1918년 11월 7일  마르크스 엥겔스 기념비 제막식에서 연설하는  레닌

 

제2장 변혁과 불일치

 

전쟁은 끝났지만 소비에트와 러시아 전국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공장은 도산하고 토지는 황폐화 되었으며, 기근과 전염병이 횡행하여 수천만 명이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죽었다.

 

국민경제는 이미 붕괴 직전에 이르렀다. 전쟁이 끝난 1920년의 산업총생산은 전쟁 전의 7분의 1에 불과했다. 1920년 석탄 생산량은 870만t으로 1917년 생산량(3천130만t)의 28%이었는데, 이는 1898년 수준에 불과했다. 철 생산량은 12만t으로 1917년 생산량(300만t)의 4% 수준이었다. 철강 생산량은 19만t으로 1917년 생산량(310만t)의 6%에 불과했다. 교통 운수는 마비되어 7만여 킬로미터의 철도와 거의 절반의 기관차가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몇 안 되는 공장 정도가 가동되고 있었지만 그마저 일손이 부족했다. 통계에 따르면 1920년 말 전국 노동자 수 (120만명 좌우)는 전쟁 전의 절반도 안되었고, 대부분 농촌에서 도시로 유입된 농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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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주린 민중, 볼가강 유역에서 (1921)


원래의 산업 노동자들은 전선에 나가 있거나 농촌에 파견되어 무장 식량 징수대의 일원이 되었다. 시내에 있는 노동자들은 매달 한 묶음의 지폐를 받았지만, 가치가 떨어진 돈은 겨우 이삼일 동안만 쓸 수 있었다. 노동자들은 배급으로 생활을 연명하였다. 1920년 하반기, 산업노동자들의 식량은 매일 3분의 2파운드로 줄어들었고, 다른 주민들은 매일 3분의 1파운드만 받았다. 1921년 봄이 되자 그렇지 않아도 허기를 채울 수 없었던 배급량은 다시 3분의 1이 줄었다. 관료들은 공식적으로는 연료 위기를 선포했다. 1920년 말부터 1921년 초까지 추운 겨울에 쌓인 눈이 우크라이나, 코카서스, 시베리아로부터 오는 식량과 연료를 실은 열차 운행을 방해했다. 이는 소비에트 러시아로선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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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로부터 거둬들인 귀중품은 굶주린 민중을 구제하는 데 쓰여졌다

 

농업 생산은 미증유로 파괴되었다. 파종면적이 대폭 감소되어 1920년 농업총생산량은 1913년에 비하면 3분의 1에도 못 미쳤다. 1920년에 또 한 차례의 심각한 흉년이 있었지만, 무장 식량 징수대는 여전히 농촌 곳곳에서 활동했다.

 

"실제로 농민의 손에서 모든 여유 식량을 가져왔다. 심지어 때론 여유 식량뿐 아니라 농민의 일부 필수 식량까지 징수했다."*

* <레닌전집> (2판)제41권, 208쪽, 인민출판사.

 

농민들의 불만은 곳곳에서 나타났다. 1920년 말부터 1921년 봄까지 전국적으로 빈번하게 농민 소동과 노동자들의 파업이 나타났다. 그중 가장 강력한 표현은 1921년 2월에 시작된 크론슈타트 수병의 폭동이었다. 애초 볼셰비키 10월 혁명의 강력한 지지자였던 크론슈타트 수병들은 “자유 소비에트”, “공산당원이 없는 소비에트”, “볼셰비키 폭정 타도” 등의 구호를 내걸고 소비에트 정권에 반대했다. 이 폭동은 사실상 당시 소비에트 러시아의 정치경제적 위기의 집중적 표현이었다. 그것은 일부 사람들이 현재의 생활 상황에 대해서 극도의 불만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그들이 전시 공산주의 정책을 더 이상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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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크론슈타트 수병 폭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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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론슈타트 폭동 수병과 대치 중인  소비에트 홍군 병사

 

원래 레닌을 비롯한 러시아공산당 지도자들은 전시 공산주의 정책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유지하려 했다. "노동자계급 국가가 직접 명령을 내리는 방식으로 소농 국가에서 공산주의 원칙에 따라서 국가의 제품 생산과 분배를 조정한다"*라고 하면서 직접적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하려 했다. 그러나 1920년 말부터 1921년 봄까지 나타난 정치경제적 위기는 러시아공산당으로 하여금 자신의 정책을 재고토록 했다.

 

* <레닌전집>(2판) 제42권, 176쪽, 인민출판사.


1921년 3월 8일부터 16일까지 러시아공산당 제10차 대회가 개최되었다. 대회는 전시 공산주의 정책을 폐지하고 신경제정책(NEP)을 채택하였으며, '곡물세'로 잉여곡물 징수제도를 대체키로 결정하였다.

 

스탈린은 이 대회에 참가하여 대회 주석단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대회에서 <민족문제에 대한 당의 당면 임무에 관한 보고>를 하였으며, 토론 후 ‘결론’을 내렸다. 대회는 스탈린이 기초한 <민족문제에 대한 당의 당면 임무에 관하여> 라는 결의를 통과시켰다.


대회에서 토론한 또 하나의 중대한 문제는 '노동조합 문제'였다. 레닌은 이 문제에 대해 특별 연설을 했다. 노조 문제에 대한 논쟁은 트로츠키에 의해 촉발된 것이라고 천명하면서, 이는 심각한 정치적 실수라고 말했다.

 

레닌의 말은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일찍이 1920년 11월 3일, 트로츠키는 제5차 전러시아 노동조합 대표대회에서 연설을 하면서 노동조합이 "가장 심각한 내부 위기"에 직면해 있으며, 위기를 해결하는 출로는 "정돈과 쇄신" 정책을 실행하고, "나사를 조이고" 즉각적으로 “노조의 국가화"와 "노동의 군사화"를 실현하는데 있다고 주장했다. 11월 9일에 소집된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트로츠키는 <노동조합과 향후 역할>이라는 테제를 제출하였는데 총회에서 부결되었다. 전체회의는 전문위원회를 설립하여 노동조합 문제를 한층 더  구체적으로 토론하되, 논쟁을 중앙 내부로만 한정키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위원회의 참여를 거부하고 자신의 의견을 신문에 공개하였다. 12월에 <노조의 역할과 임무>라는 강령성 팜플렛을 발표해서 노동조합 문제에 대한 전당적인 대토론을 불러일으켰다.

 

레닌은 <노조, 현재 정세 및 트로츠키 동지의 오류를 논한다>, <당내 위기>,  <노조, 현 정세 및 트로츠키 동지와 부할린 동지의 잘못을 재론한다> 등의 글을 통해 트로츠키와 부할린의 관점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논쟁 중에 부할린 등은 '완충 집단'을 결성하여 원칙 문제에서 절충하려 했다. 1921년 1월 부하린은 아예 트로츠키와 손을 잡고 노동조합 문제에 관한 연합 강령을  10차 당대회에 제출하여 토론을 유도 했다.

 

스탈린은 이 논쟁에서 별로 눈에 띄는 역할을 하지 않았다. 1921년 1월 5일이 돼서야 그는 <우리의 의견 차이>라는 글을 써서 [프라우다]에 발표했다. 스탈린은 이 글에서 노동자 대중에 대해서는 주로 설득적인 방법을 취해야 하며, 노동조합 내부에서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를 실시하고, 트로츠키의 강압적인 군사적 방법에는 반대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트로츠키와의 "이견은 원칙적인 견해차가 아니다"라면서 노동규율을 강화하는 방법, 노동자 대중을 대하는 방법, 노조 체계 개선 등에 대한 이견일 뿐이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논쟁에서 주저 없이 레닌 편에 서 그를 지지했다. 1921년 1월 14일 스탈린은 레닌,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톰스키, 칼리닌, 아르티옴(페안 세르게예프), 페트로브스키, 루주타크, 로조프스키와 함께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설립된 '노동조합 문제 위원회'가 제정한 <노조 역할과 임무에 관한 러시아공산당 제10차 당대회의  결의 초안>에 서명했다. 이 초안은 ‘10인 강령’이라고도 불렸다.

 

논쟁은 1921년 3월 개최된 10차 당대회까지 계속되었다. 10차 당대회에서 지노비예프는 ‘10인 강령’의 옹호자를 대표해 보고를 했다. 트로츠키는 '트로츠키-부하린 연합 강령'의 옹호자를 대표하였으며, 슐랴프니코프(Shlyapnikov)는 ‘노동자반대파’를 대표해 보고를 했다. 변론을 거친 표결 결과 '10인 강령'에 기초한 <노동조합의 역할과 임무에 대한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결의안은 노동조합을 신속하게 국가화하는 것은 심각한 정치적 오류를 범하는 것이며, 노조의 국가화 속도를 인위적으로 가속화 하는 어떤 방법도 소비에트 러시아의 경제 상황을 개선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노조가 '공산주의 학교'의 역할을 하는 것을 방해할 뿐이라고 했다. 노동조합의 주된 방식은 설득이지 강제가 아니다라고 언급했다.

 

노동조합 문제에 관한 논쟁에서 당내 각 파벌 (트로츠키파, 부할린 등이 있는 '완충 그룹', 노동자 반대파, 민주 집중파, 노간파, 랴자노프주의자, 이그나티우스 토프 분파 등) 의 적극적 활동을 감안해서 대회는 특별히 <당의 통일에 관하여> 라는 결의를 통과시켰다. "어떤 정치강령으로 구성되든 상관 없이 모든 집단을 즉각 예외 없이 해산할 것을 명령한다. 어떠한 파벌 활동도 금지한다"고 말했다. 당내와 전반적인 소비에트사업에서 엄격한 규율을 집행하기 위해 "당대회는 중앙위원회에 권한을 위임하여 규율을 위반하거나, 파벌활동을 회복하거나 진행하는 상황이 발생했을 경우 당에서 제명시키는 것을 포함한 당내의 모든 처벌 방법을 취할수 있다."고 규정했다.*

 

* 대회의 결정에 따라 이 결의( 제7조)는 공포되지 않았다. 이상 [소련공산당 당대회, 대표회의와 중앙위원회 전체회의 결의 집성]제2분권, 인민출판사 1964년판, 65~66페이지 참조.

 

대회 이후 신경제정책(NEP)이 점차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농민은 미리 규정된 세액의 곡물세를 납부한 후에는 잉여 식량과 다른 농수산물을 시장에 가져가 판매할 수 있게 되었으며, 필요한 공산품을 자유롭게 교환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국가는 일정 수량의 가장 중요하고 규모가 큰 기업만을 직접 관리하고, 나머지는 모두 국내외의 기업주에게 임대하고,  국가가 관리할 능력이 없고 임차인도 없는 기업은 폐쇄하는 등 '국가자본주의'*를 대대적으로 발전시켰다. 국영 상업유통 기구를 강화하는 동시에 개인적인 영업과 일정한 범위내의 무역자유화를 허용했다.

 

*  원래 학계에서 ‘국가자본주의’는 여러 가지 의미로 쓰여진다. 여기서는 사회주의 국가가 경제에 적극 개입하여 자본주의적인 정책을 일부 도입하는 것을 뜻한다.

 

신경제정책(NEP)은 새로운 사물로 그 중요성을 올바로 인식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그것을 실행하기 전에는 러시아공산당 지도자들은 대부분 공산주의로의 직접적인 이행을 믿었으며, 또한 세계 혁명의 도래에 대해 일정한 환상을 품었다. 하지만 레닌은 가장 먼저 현실의 위기를 인식하였으며, 새로운 사회주의 건설 방법을 채택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와 관련된 그의 사상은 아직 완벽하지 않았고, 그의 마음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었다. 게다가 하늘도 그에게 생각할 시간을 많이 허용하지는 않았다. 오늘날 시각에서 보면 아직 젊은(54살) 그의 생명을 너무도 일찍이 질병이 빼앗아 가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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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제정책(NEP)

 

부하린은 이 신경제정책을 열광적으로 옹호했다.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등은 아직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신경제정책의 향방은 이후 당내 논쟁에 있어 중요한 화두가 되었다.

 

스탈린은 신경제정책을 지지했다. 하지만 그의 발언 역시 모호했고, 아직 '세계혁명'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921년 7월 북코카서스의 날치크에서 쉬고 있을 때 그는 '소책자 개요'라는 표지가 붙은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의 정치 전략과 전술에 관하여>라는 글을 썼다. 이 글은 당시 전문이 발표되지는 않았지만, 1924년에 벌어졌던  '레닌주의의 정의'에 관한 논쟁에 스탈린이 참여하게 된 이론적 근거이자, 당시 신경제정책에 호응하여 쓴 이론성 글이기도 했다. 스탈린은 이 논문에서 "전쟁은 끝났지만 서구의 사회주의자들은 당분간 우리 경제 회복을 도울 능력이 없다. 경제적으로 우리는 상대적으로 산업이 발달한 부르주아 국가들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임대제도를 채택해야 한다. 불가피하게 일부 부르주아 국가와의 무역 협정을 체결하고, 일부 자본가 그룹과의 임대 계약을 체결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어떤 나라의 공산당의 전략과 전술도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만 올바를 수 있다. 즉 그들의 전략과 전술은 '자신의' 국가, '자신의' 조국, '자신의' 노동자계급의 이익 범위 내에만 국한되지 않아야 한다. 반대로 자신 국가의 조건과 상황을 예측하는 동시에 국제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이익, 다른 국가의 혁명적 이익을 우선시해야 한다. 즉 그들은 정신적으로 국제주의자이어야 하며,  "세계 모든 나라에서 혁명을 발전시키고, 지원하고, 자극하기 위해 한 나라에서 성취할 수 있는 것을 최대한 실현"하는 것이라야 한다. (인용은 레닌의 <프롤레타리아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 참조함). *

 

* <스탈린 전집> 제5권, 페이지 56-57, 64 , 인민출판사 참조.

 

8월, 스탈린은  다시 이 글의 일부 관점을 고쳐 <정권을 장악하기 전과 이후의 당>이라는 제목으로 [프라우다]에 발표했다. 스탈린의 이 논문에서의 기본 관점은 앞서와 같지만, 텍스트 상의 표현에 차이가 있다. 그는 권력을 장악하고 유지하는 과정에서 당은 "러시아 내에서 변혁을 실행하는 당에서 건설하는 당으로, 새로운 경제 형식을 창조하는 당으로 변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경제적 형식은 부득이하게 취해진 것이라고 했다. 세계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며, 세계경제의 조직은 응당 "선진적인 (산업) 국가와 낙후된 (연료 및 원자재) 국가 간의 경제 협력의 원칙 (전자가 후자를 약탈하는 원칙이 아니라)"에 따라서 진행되어야 한다고 했다.

 

"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국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세계 경제를 조직하고 정상적으로 발전시킬 생각은 포기해야 한다. 그러나 합리적으로 세계 경제를 시작하려면(최소한 시작하려면), 프롤레타리아가 적어도 몇 개의 선진 국가에서 승리해야 한다. 아직 이런 조건이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당은 각 자본가 집단과 경제 협력을 맺는 우회로를 모색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 <스탈린 전집> 제5권, 페이지 84-88 , 인민출판사 참조

 

여기서 스탈린이 견지하는 것은 분명히 '세계혁명' 사상이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신경제정책(NEP)이라는 이 ‘우회로’를 실행하는 것은 사회주의 건설의 새로운 경로를 찾는 것이 아니라, 최종적으로는 세계혁명을 자극하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스탈린은 신경제정책에 대한 이해와 열정이 부족했다. 1922년에 레닌은 일련의 글을 통해 신경제정책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켰지만, 스탈린은 같은 해 한 편의 글도 쓰지 않았다. 레닌이 타계한 후 당내에선 이 신경제정책의 거취를 놓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스탈린은 '신반대파', 그 다음에 '트로츠키-지노비예프 연맹'과 투쟁할 때는 레닌의 기치를 높이 들고 이 신경제정책을 옹호했다. 하지만 그 동기의 태반은 권력투쟁의 필요에서 였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왜 신경제정책을 결연히 수호했던 부하린을 공격해야 했는지 설명할 길이 없다. 부하린을  물리친 뒤 스탈린은 곧바로 신경제정책을 폐기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레닌이 신경제정책을 실시한 후에도 스탈린은 여전히 ‘전시 공산주의’의 이론적 수준에 머물렀으며, 그의 사상이 ‘전시 공산주의’ 실천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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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크에서  레닌과 스탈린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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