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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 (편집위원)
등록일 : 2023.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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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공산당 대회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국*은 1917년 8월 6일 (양력 19일)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그것은 당 중앙위원회의 한 사무기구로서 스베르들로프, 스타소바, 제르진스키, 월비, 무라노프 등 5명의 중앙위원으로 구성되었고, 책임자는 스베르들로프이다. 서기국은 당의 일상 사무를 책임지고 당의 조직 업무도 겸한다. 이전에는 당 중앙에 이런 기구가 설치되지 않았다. 2월 혁명 전 당의 일상 사무, 예를 들면 서신 왕래, 당의 문헌 발송, 당의 재무, 당비 등은 사실상 레닌의 부인 크루프스카야가 책임졌다.

 

* 이하 '서기국'에 관한 자세한 설명이 이어지는 것은, 스탈린이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 있어 이후 서기국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보통 '서기장 동지'로 불려졌다.(역자주)

 

2월 혁명 후에는 고참 볼셰비키 스타소바가 이 일을 맡았다. 그녀는 두세 명의 조수를 배치하여 왕래 문건을 책임지고, 중앙지령을 배포하였다. 중앙위원회 회의록을 기록하고, 방문자 접견과 당의 재무 업무도 책임졌다. 서기국이 정식으로 설치된 후에도 스타소바는 여전히 일상적인 업무를 담당하고, 당의 조직사업은 스베르들로프가 책임졌다. 1919년 3월 6일, 스베르들로프는 제3차 전 우크라이나 소비에트대표대회에 참가한 후 모스크바로 돌아오는 도중에 바이러스성 독감에 걸려 결국 3월 16일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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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르들로프

 

스베르들로프는 유능한 지도자였으며, 서기국을 맡았을 뿐만 아니라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도 역임했다. 그는 직접 간부를 임명하고 배치했는데, 각 임명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작성했다. 스베르들로프 사후 1919년 3월 당 제8차 대회는 중앙위원회에 정치국, 조직국, 서기국 3개의 상설 기관을 설립하기로 공식 결정했다. 중앙서기국은 당중앙의 한 기구로서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선출되어 당의 일상사업을 책임지며, 주로 간부를 선발하고 결의집행 상황을 점검하고, 당의 조직사업은 새로 설립한 중앙조직국에 넘겨줬다. 그리고 책임서기직을 설립하고 스타소바가 맡았다.

 

1919년 12월, 니니 크레스틴스키(N. N. Krestinsky)는 스타소바의 후임으로 책임서기를 맡았다. 그는 정치국 위원 겸 러시아 연방의 재정인민위원이기도 했다. 당시  러시아공산당 조직사업이 비교적 문란하였음을 감안, 1920년 3월 제9차 당대회는 서기국을 강화하고 이를 3명의 중앙위원 상임서기가 책임지는 기구로 확대하기로 결정했다. 현재의 조직과 행정문제를 서기국 관할로 돌리고, 중앙위원회 조직활동 방면의 일반적인 관리업무는 조직국 관할로 남겨두도록 했다. 이후 플레오브라임스키(Preobrazhensky)와 레피 셰레브리아코프(Le. P. Serebryakov) 두 사람을 서기로 선출해 크레스틴스키의 일을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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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스틴스키(Nikolay Krestinsky)

 

1921년 3월, 러시아공산당 제10차 당대회는 몰로토프, 미하일로프, 야로슬라프스키를 서기국 서기로 선출하고 몰로토프가 책임서기  직을 맡았다. 그러나 레닌은 서기국의 업무에 대해 늘 불만스러워했다. 왜냐하면 서기국이 행동은 느리고 낡은 규칙을 고수하면서 종종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공산당의 실수에 대한 사법 수사 기관의 태도에 대해서 조직국 결정 초안을 몰로토프가 작성했는데, 1921년 11월 19일 레닌은 이에 대한 비판 메모를  몰로토프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몰로토프 동지:
나는 이 문제를 정치국에 넘길 것이오.
일반적으로 이런 종류 문제는 조직국에서 결정하는 것이 옳지 않소. 왜냐하면 이것은 순전히 정치적 문제이고 완전히 정치적 문제인 때문이요.
따라서 이 문제는 별도로 처리해야만 하오.*

* <레닌전집> (2판) 42권, 268쪽, 인민출판사.

 

몰로토프가 책임서기로 있는 동안 그의 능력이 제한되어 있음이 확실히 입증되었기 때문에, 서기국 업무를 정돈할 필요가 있었다. 1922년 3월 27일부터 4월 2일까지 러시아공산당 제11차 당대회가 모스크바에서 개최되었다. 이것은 레닌이 참가한 마지막 당대회이다. 대회의 임무는 신경제정책(NEP)을 실시하는 첫해를 총평가하고, 사회주의 건설을 계속 추진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하는 것이다.

 

총회에는 의결권이 있는 대표 522명과 발언권만 있는 대표 165명이 참석하였다. 그들은 전체 당원 53만 2천여 명을 대표했다. 레닌, 스탈린,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톰스키, 몰로토프, 오르조니키제, 보로실로프, 야로슬라프스키 등이 대회 의장단에 선출됐다. 레닌은 회의에서 중앙위원회 정치보고와 보고에 관한 총화발언을 했다. 신경제정책이 집행된 1년간의 상황을 총평가하면서 신경제정책의 성과를 지적했다. 대회는 레닌, 스탈린,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등 27명을 중앙위원으로,  그리고 키로프, 피다코프, 부브노프 등 19명을 후보 중앙위원으로 선출했다.

 

4월 3일, 새로 선출된 중앙위원회는 제1차 전체회의를 소집하고 카메네프가 개막식을 주재했다. 전체회의는 레닌,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스탈린, 리코프, 톰스키를 정치국위원으로 선출하고, 부하린, 몰로토프, 칼리닌을 정치국후보위원으로 선출했다. 본회의에서는 중앙서기국 서기장직을 신설하기로 결정하고 스탈린을 서기장으로 선출했다. 몰로토프와 쿠이비셰프는 중앙서기국 서기로 선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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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로토프

 

여기서, 정치국 위원 중 스탈린을 서기장으로 처음 제안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이에 대한 견해는 늘 달랐다. 한 가지 설은 "1922년 4월 3일, 레닌의 제안에 따라 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는 레닌의 가장 충성스럽고 가장 충실한 제자이자 전우인 스탈린을 중앙위원회 총서기로 선출했다." * 하지만 이 진술은 신뢰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런 사실은 스탈린의 주재하에 쓰여진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약사>에서 언급되지 않았고, 레닌의 글과 연설에서도 근거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 <스탈린 전기 약술>, 71-72쪽 .

 

또 어떤 사람은 스탈린을 처음 지명한 사람은 카메네프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 설은 비교적 믿을만 하다. 중앙위원회 총회가 열리기 전에 카메네프는 제11차 당대회 대표들과 몇 가지 일을 처리했다. 제11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들을 선출할 때 일부 대표는 투표용지에 스탈린의 이름 옆에 "중앙위원회 총서기"라고 적었다. 당시 투표용지 검사를 담당했던 니 스크렙닉(N. Skrepnik)은 이 투표용지에 대해 무효 처리할 것을 요구했다. 카메네프는 긴급히 회의에서 중앙서기국은 당대회가 아닌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선출된다면서, “어떤 투표용지에 서기를 맡을 인선이 명기되어 있는데, 이 일로 인해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의 선거의 자유를 제한해서는 안 된다. 이는 일부 대표가 표현한 소망에 불과하다"라고 주장했다.  

 

 카메네프는 이미 ‘서기장’이라는 새로운 직책이 설립될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 중앙기관의 수장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했다.  그리고 당시 그는 스탈린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4월 3일 중앙위원회 전체회의는 총서기직을 신설키로 결정했다. 회의 의장인 카메네프는 스탈린이 이 직책을 맡을 것을 제안했다. 참석한 중앙위원회 위원 중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

 

 이와 달리, 트로츠키는 스탈린을 서기장으로 지명한 사람은 지노비예프였으며, "스탈린이 레닌의 의지에 반해 당의 서기장으로 선출되었다. 레닌이 이를 묵인한 것은 당이 레닌 자신에 의해 지도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해석은 너무 자의적이다.

 

* 트로츠키, <나의생애> (1930년 영문판),  480쪽.

 

서기장으로서 스탈린의 직위를 처음 제안한 사람이 누구이든 간에, 이는 항상 중앙위원회 전체회의 다수의 승인을 받아야 하며, 또한 레닌의 지지를 필요로 했다. 스탈린이 서기장으로 선출된 날 레닌은 <서기국 업무 배치에 관한 러시아공산당 결의안 초안>을 썼다.

 

 중앙위원회는 서기국에 정식 접대 시간 배치를 엄격히 규정하고 준수하도록 책임을 부여하며, 동시에 이를 공포한다. 이와 함께 확실히 원칙적인 지도사업에 속하는 일 외에 서기들은 모든 업무를 스스로 떠맡아서는 안 된다. 이런 업무를 자신의 조수와 비서에게 넘겨줄 수 있고, 이는 하나의 제도로 되어야 한다.


스탈린 동지에게 즉시 자신을 위한 몇 명의 대리인과 조수를 물색하고, 그가 소비에트 기관의 일상 업무 (원칙적 지도는 제외) 에서 벗어나도록 지시하도록 한다.
중앙위원회는 조직국과 정치국에 2주 내로 노농검사원 부서의 위원과 부인민위원 인선 명단을 제출토록 지시한다.

 

중앙위원회 전체회의는 레닌의 이 결의 초안을 통과시켰다. 통과할 당시 초안 말미에다 "스탈린 동지가 한 달 안에 노농검사원 업무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라는 보충 문구를 썼다. 1922년 4월 25일, 인민위원회는 결정을 내려 스탈린의 노농검사 인민위원 직무를 정지시켰다.

 

4월 4일, [프라우다]는 스탈린이 서명한  이하 통고를 게재했다.

 

러시아공산당 각급 조직과 당원들은 주목하시오. 러시아공산당 제11차 당대회에서 선출된 중앙위원회는 스탈린 동지(서기장), 몰로토프 동지, 쿠이비셰프 동지로 러시아공산당 중앙 서기국 구성을 결정했다.
중앙서기국은 다음과 같이 중앙위원회 접대 방법을 규정하였다. 매일 낮 12시부터 3시까지, 월요일 몰로토프와 쿠이비셰프, 화요일은 스탈린과 몰로토프, 수요일은 쿠이비셰프와 몰로토프, 목요일은 스탈린과 몰로토프, 금요일은 스탈린과 몰로토프, 토요일은 스탈린과 쿠이비셰프.


중앙위원회 주소ㅡ 보스드비젠카(Vozdvizhenka) 5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스탈린

 

서기장 스탈린.png
서기장 스탈린

 

스탈린이 이 직책을 맡을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는 정치국 위원이자 조직국 위원이었으며, 유일하게 민족인민위원과 노농검찰인민위원 두 직책을 맡았다. 그리고 공화국군사혁명위원회와 노동방위위원회 위원... 등 이 모든 것은 스탈린이 정치 관리와 국가 관리에 대해 어느 정도 경험을 쌓았으며, 대리 업무에도 익숙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당시 레닌도 스탈린을 신뢰했다. 카메네프, 지노비예프, 트로츠키는 이론문제에서 재능을 발휘했는데, 총서기라는 직책에 필요한 것은 노동할 수 있는 강한 능력 그리고 힘들고 평범한 노동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이런 종류의 일은 그들에게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고, 당시 그들도 이 직책이 평범한 직책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들 같은 ‘큰 인물’이 이런 자질구레한 일을 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한 것은 너무  단순하고 순진할 수도 있다. 서기국은 비록 사무기구이지만,  이미 권한이 매우 컸고 인원은 방대했다. 1917년 11월 중앙위원회 서기국 직원은 30명도 안 되었다. 하지만 1919년 말 80명에 가까웠으며, 1920년 3월에는 150명에 달했다. 다음해 1921년 3월에는 602명으로 급증했다.

 

서기국은 경제, 국방, 국가기관, 교육 등 문제를 직접 다루지는 않았다. 하지만 스탈린이 서기장에 취임한 후 이 기구가 모든 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일련의 제도를 확립 개선했다. 서기국은 당대회, 대표회의, 중앙위원회 전체회의, 정치국 회의 의제를 준비했다. 각각의 문제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였으며, 당 결의와 문서를 작성/수정하고, 이 문서를 각급 당 조직에 전달했다.

 

스탈린.png
평소 보드카와 담배를 애호했던  서기장 스탈린

 

또한 산하 부서인 조직지도부는 정기적으로 각 성 당위원회 서기들을 소집하고 조직사업을 중앙 서기국에 보고토록 했다. 각급 당 조직에 지도원과 조직 담당자를 두어 중앙과 상급조직 지시를 전달하는 한편, 하급 당 조직 작업을 검사, 감독 , 지도했다. 이렇듯 서기국은 점차 지방조직과 중앙정부를 연결하는 중심과 중추가 되었다. 또 서기국 산하에 '등록유통부'라는 기관을 두었는데, 전국 당대표대회 대의원과 고등·중등급 간부에 대한 심의 및 추천을 담당하였으며, 이들의 임명에 대한 결정적인 의견 제시 권리를 가졌다. 서기국은 이들 기구를 통해 중앙조직국을 상당 부분 대체하면서 당의 인사권을 장악했다.

 

바로 이 무렵 레닌의 건강 상태가 급격히 악화됐다. 1918년 사회혁명당원으로부터 저격을 받은 두 발의 총알이 체내에 남아 레닌의 건강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1921년 겨울무렵 부터 레닌은 점점 더 자주 일을 멈추고 단기 휴양을 취해야만 했다. 12월 6일, 레닌은 러시아공산당 제11차 당대회 전날까지 모스크바 근처 고르크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았다. 대회 폐막 후 의사들은 레닌이 긴 휴식을 취하고, 신선한 공기를 마시기 위해 코카서스 산맥으로 가야한다며 진지한 치료를 권했다.

 

레닌은 이에 동의하고 당시 코카서스에서 일하고 있던 오르조니키제에게 몇 통의 편지를 썼다. 그러나 결국 그는 가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레닌은 병원에 입원하여 수술을  했다. 체내의 총알을 꺼낸 후 고르크로 옮겨 휴양을 취했다. 5월 26일, 레닌은 첫 발작을 일으켰다. 오른손과 발이 잘 움직이지 않고 말이 어눌해지면서 이런 상태가 거의 3주 동안 지속됐다. 6월 중순에 가서야 호전을 보여 점차 손님을 만나고 책과 신문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줄곧 고르크에서 휴양하다가 10월 2일에야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만년의 레닌과 부인 크레푸스카야.png
만년의 레닌과 부인 크룹스카야

 

레닌이 병에서 회복되는 동안 스탈린은 서기장이었고,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와 같은 정치국원들이 실제 주요 당과 정부 문제에 대한 의사결정을 주재했다. 트로츠키도 당시 정치국 위원이었긴 했지만 스탈린,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등과 갈등이 있어 정치국은 일부 중대한 문제를 결정할 때 종종 트로츠키를 개입시키지 않았다. 8월 4일부터 7일까지 스탈린은 러시아공산당의 제12차 당 대회를 주재했다. 레닌은 병으로 결석한 상태였는데, 회의는 새로운 당규약을 채택했다. 새 당헌은 중앙감찰위원회의 기능과 권한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중앙감찰위원회는 1920년 9월 4일 레닌의 창의에 의해 발족되었으며, 같은 달 말 개최된 당 제9차 당 대회에서 공식 설립되었다. 제10차 당대회는 중앙감찰위원회의 임무와 목적을 명시한 특별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제11차 당대회에선 전문적으로 ‘감찰위원회 조례’를 통과하였는데, 중앙감찰위원회의 관련 규정을 당규약에 기입했다.

 

중앙감찰위원회의 임무는 중앙위원회 및 그 산하 기구인 정치국, 조직국, 서기국이 당대회 및 대표회의 결의와 결정을 정확하게 집행하는지 감독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당내에 침투한 관료주의와 출세주의 사상, 당원이 당내와 소비에트에서 자신의 직권을 남용하는 행위, 당내의 동지적 관계를 파괴하고 당의 위신과 통일을 파괴하는 각종 유언비어 현상과 투쟁한다고 명시했다. 당의 강령, 정관을 위반한 각종 사건을 심리하고, 상응하는 처리 결정을 내린다. 무의미한 분쟁과 파벌 활동을 방지하고 이런 현상과 투쟁한다고 규정했다. 

 

중앙감찰위원회의 권한은 다음과 같다:

 

중앙감찰위원회는 당 전국대표대회(당대회)에서 선출하며, 중앙위원회와 병행하여 직권을 행사한다. 중앙위원회 회의에 참가할 권리 및 발언권이 있다. 중앙감찰위원회는 자체 주석단의 지도하에 정치국의 모든 문서를 검토할 권리가 있으며, 특정 위원을 직접 파견해 참석할 권리와 발언권을 갖는다. 감찰위원회의 의결은 반드시 동급 당위원회에서 집행해야 하며 취소할 수 없다.

 

만약 이견이 있을 경우 문제를 당위원회와의 연석회의에 제출하여 해결할 수 있다. 만약 당위원회와 협의에 도달하지 못할 경우 문제를 당대회, 동급 대표회의 또는 상급 감찰위원회에 제출하여 해결할 수 있다. 중앙감찰위원회 위원으로 당선되려면 최소 10년 이상의 당원 경력이 있어야 하고, 감찰위원회 위원은 일률적으로 겸직할 수 없다. 감찰위원회는 자신의 범위 내에서 모든 당원과 당 조직에 임무를 배분할 권리가 있다.

 

그런데 당의 제12차 전국대표회의(당대회)에서 통과된 새 당규약에는 감찰위원회와 동급 당위원회가 병행으로 직권을 행사하는 것에 관한 조문이 삭제되었다. 또 "감찰위원회의 결의는 본급 (당)위원회가 집행해야 하며 취소해서는 안 된다. 이견이 있을 경우 연석회의에 문제를 제출하여 해결할 수 있다"는 원규정을 "각급 감찰위원회의 결의는 본급 당위원회가 취소해서는 안 되지만, 당위원회의 동의를 거쳐야 효력이 발생하며 후자가 실행에 옮길 수 있다. 이견이 있을 경우 연석회의에 문제를 제출한다"로 수정 했다.  이후 감찰위원회의 권력이 갈수록 작아졌는데, 이 점은 뒤의 관련한 장절에서 다시 언급하게 된다.


아마도 정치국 내의 다수 사람들은 아직 이러한 미묘한 변화에 주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변화는 스탈린을 레닌의 조수, 당의 ‘총서기’에서 점차 제2인자로 변모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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