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태규 (전 한겨레 논설실장)
등록일 : 2024.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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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은 당연히 한국을 잘 알아야 한다.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험하지 않다'(지피지기 백전불태, 知彼知己 百戰不殆)라는 손자병법의 얘기를 굳이 끌어들이지 않아도 그렇다.

손자병법에는 상대를 아는 것이 먼저 나오지만, '나를 아는 것이 앞서야 한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모든 인식과 행위의 출발은 나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나를 잘 파악한 다음에 상대를 잘 알면 대화를 하든, 싸움을 하든, 논쟁을 하든 큰 손해를 보지 않을 것이다.

이런 자세는 국제관계에도 들어맞는다. 한국 사람으로서 한국을 제대로 아는 것을 전제로, 그다음 잘 알아야 하는 상대를 꼽으라면 단연코 미국이 첫손가락에 들 것이다. 중국도 일본도 러시아도 있지만, 미국이 한국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삶에 막강한 영향을 끼치는 미국에 관해 의외로 깊이 아는 한국 사람이 많지 않다. 전문가라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비근한 예로, 한국에서 자칭 '가장 우수한 외교관들'이 주미한국대사관에서 근무하고 미국 관계를 담당한다. 그런데 이들이 제대로 된 미국의 정치·외교·경제를 다룬, 그럴싸한 책을 쓴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때그때 흘러 다니는 정보를 먼저 또는 독점적으로 아는 것으로 전문가 행세를 하다가 그런 정보 유통망에서 빠지면서 바로 비전문가 신세로 전락하는 탓이리라.

이런 상황이니 '트럼프'라는 희대의 괴물이 다시 미국 대통령에 재선할 가능성이 커져도 이런 현상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것이 한국 사회에 끼칠 영향은 무엇인지에 관해 깊이 있게 분석하고 전망하는 전문가나 글을 찾아보기 쉽지 않다.

<보수에서 극우로-공화당의 추락과 미국 정치의 위기>(삼인, 김평호 지음, 2022년 8월)는, 미국 보수주의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공화당의 타락을 다룬 미국 정치사다. 저자인 김평호씨는 <문화방송> 프로듀서 출신의 커뮤니케이션 전공 학자다. 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하고 미국에서 커뮤니케이션을 공부할 때 부전공으로 미국사를 공부했기 때문에, 미국 역사에 조예가 깊다. 김씨는 지금 시민언론 <민들레>에 미국 역사를 중심으로 칼럼을 쓰고 있는데, 그 글들을 보면 미국사에 대한 그의 내공이 얼마나 깊은지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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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질러 이 책의 결론을 말하자면, 현재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트럼프 현상은 갑자기 돌출한 것이 아니라 타락에 타락을 거듭해온 미국 보수주의가 낳은 필연적인 결과라는 것이다.

이 책은 미국의 제45대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2020년 재선에 실패한 뒤 이를 뒤집기 위해 벌인 쿠데타로부터 시작한다. 저자는 2021년 1월 6일 트럼프 지지자들이 의사당을 폭력적으로 점거해 대선 결과 추인을 방해하려고 했던 사건을 트럼프가 주도한 친위 쿠데타라고 규정한다. 250년 미국의 역사에서 선거에 패한 세력이 그 결과를 폭력적인 방법으로 뒤집으려고 한 최초의 쿠데타라는 것이다. 그 쿠데타가 제도적으로 가장 오랜 전통을 가졌고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인 민주주의 국가에서 일어났다는 것이 충격적이다.

저자는 이런 충격적인 사태가 어떻게 가능했는가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이 책을 쓰게 됐다고 밝혔다.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공화당으로 대변되는 미국 보수세력의 과거, 현재, 그리고 역사적 변질과 경과, 그것이 초래한 미국 정치의 위기를 살폈다.

저자의 답은 미국 보수는 1950년대의 준비운동, 1960~70년대의 이행기, 1980년대 정상의 길을 거쳐 점차 극우의 길로 치달았고, 트럼프는 그런 흐름 속에서 피어난 꽃이라는 얘기다.

저자는 시간에 따라 극우화하는 보수의 변화상을 추적하기 위해, 2장에서 먼저 미국의 보수주의자는 누구인지, 그들의 생각과 논리가 무엇인지를 정리했다. 그리고 3장부터 7장까지 공화당을 포함한 보수 세력이 헤게모니적인 지위에 오르게 된 과정을 자세하게 더듬었다. 1930년대 이후 70년대까지 미국 사회를 지배했던 뉴딜 체제, 즉 사회민주주의에 기초한 복지국가 체제를 뒤엎기 위해 미국 보수들이 어떤 일을 해왔는지가 이들 장에 잘 나와 있다.

민주당 표밭이었던 남부를 공략하기 위한 리처드 닉슨의 '남부 전략', 남침례교회의 '남부 신화' 창조를 비롯한 기독교 우파의 맹렬한 선교 활동, 밀턴 프리드먼 등 시카고학파를 중심으로 한 신자유주의 경제이론의 전파 등으로 세력을 차근차근 넓혀온 보수세력은 1980년 대통령 선거에서, 로널드 레이건을 당선시킴으로서 드디어 정상 고지를 밟는다.

레이건 대통령의 등장과 함께 미국은 1930년대부터 40여 년간 이어졌던 뉴딜 체제를 끝내고 신보수주의-신자유주의를 축으로 하는 새로운 체제를 세웠다. 신보수주의는 냉전시대의 반공주의의 새로운 버전이고, 신자유주의는 자유지상주의를 더욱 확장한 이데올로기다. 이렇게 구축한 세 체 체제가 이른바 '자유시장형 도덕 사회'다. 레이건 이후 빌 클린턴과 버락 오바마, 조 바이든 등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기도 했지만, 신보수주의-신자유주의를 핵심으로 하는 미국 정치의 보수화 흐름은 큰 변화 없이 큰 흔들림 없이 착착 진행되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레이건 이후 신보수-신자유주의가 승승장구하면서 내용적으로 큰 변화를 했다. 저자는 극우 미디어의 확산, 백인종주의 집단의 공개적·위협적 활동, 기독교 국가주의의 본격적 대두, 공화당 정치 행태의 극단화 등 4가지를 중요한 특징으로 꼽았다. 이를 통해 1980년대 후반부터 변방의 극단적 요소들이 정치적·사회적 주류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저자는 미국이 당면한 극우의 위협과 민주주의 위기가 절대 단기적인 사태가 아닐 뿐 아니라, 취약한 진보세력이 이런 흐름을 견제하지 못한 탓도 있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지금 미국이 1860년 남북전쟁, 1930년대 뉴딜, 1960~70년대 민권운동·반전운동에 이어 1980년대가 낳은 신보수-신자유주의라는 4번째 위기에 처해 있다고 진단하면서, 그 대안으로 북유럽 국가의 민주사회주의 길, 극우를 배제하는 공화당의 각성과 결단을 통한 정치적 전환의 길을 제시했다. 하지만 '다시 트럼프 대통령'의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을 감안하면, 적어도 상당 기간 동안 미국 보수가 극우화 흐름에서 탈피해 다른 길을 찾기는 힘들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가치는 훼손되지 않는다. 지금 미국에서 트럼프가 득세하는 이유와 배경을 한국에서 출판된 어느 책보다 잘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와 배경을 잘 파악한다면, 트럼프가 한반도 상황과 관련해 아무리 변화무쌍한 공을 던진다고 해도 훨씬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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