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김장민(정치경제학연구소 프닉스)
등록일 : 2025.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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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세계질서에 관한  중요 결정이 이루어진 얄타회담(1945.2)

 

미국은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에게 큰 타격을 주었고, 루스벨트는 전쟁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면서 전후 처리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루스벨트는 먼저 영국과 중국에게 신탁통치안에 대한 동의를 얻은 후 스탈린을 설득할 계획이었다. 

 

당시 루스벨트의 신탁통치 구상은 “당장 민주주의를 실시할 능력이 없는 민족에 대해 민주주의 훈육 과정을 거친 후 선거를 통해 미국식 국가를 만든다.”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신탁통치는 겉으로는 민족자결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미국의 정치경제적 이해관계를 보장하는 미국식 체제를 건설하겠다는 미국의 속셈을 드러낸 것이었다. 

 

이러한 네이션 빌딩(국민 혹은 민족 정체성을 건설해가는 과정: 주)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친미 국가를 창출하려는 미국 정책에서도 발견된다. 반면 소련은 루스벨트가 동의한 얄타회담 결과에 따라 동유럽에서 자국민에 의한 즉각적인 독립국가 수립을 보장하였다. 그 실질적인 내용은 친소 공산주의자들을 배후 조종하여 소련을 방어하는 위성국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장제스의 고문으로 일한 오원 래티모어(Owen Lattimore)를 통해  1942년 12월 24일 장제스에게 보낸 서신에서 "소련과 협의를 통해 조선 등 식민지에 신탁통치를 적용할 수 있다."고 밝혔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1943년 3월 27일 백악관을 방문한 앤소니 이든(Anthony Eden) 영국 외상에게 “한국의 국제신탁을 미국과 중국을 포함, 3-4개국에 위임하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1943년 2월 소련 주둔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20만 명 이상의 전사자를 내고 항복하였다. 이후 소련군은 동유럽으로 진격하였다. 미국은 1943년 하반기에 들어 연합국 정상들과 연이어 만나 구체적인 전후 처리에 대한 국제협상에 나섰다. 

 

루스벨트는 1943년 11월 22일 카이로에서 처칠과 장제스를 만나 일본 문제를 상의하였다. 처칠은 인도와 동남아시아에 대한 자신의 기득권을 보장받기 위해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안에 대해 동의했다. 장제스는 임시정부를 지지하고 있었지만, 미국의 지원을 계속 받고 연합국으로서 지위를 보장받기 위해 신탁통치에 대해 소극적으로 동의했다. 

 

이들 정상은 카이로 선언에서 한국과 대만, 필리핀 등 일본의 식민지를 승전국의 식민지로 되돌려 주지 않고 “적절한 과정(in due course)”을 거쳐 독립시킬 것 것이라고 발표했다. 즉 적절한 과정은 영국 및 중국과 이미 합의된 신탁통치를 아직 공식적으로 동의하지 않은 스탈린의 입장을 고려하여 외교적으로 표현한 문구였다. 스탈린은 비행기를 타야만 참석이 가능한 카이로 회담에 참여하지 않았다.

 

루스벨트는 11월 28일 처칠, 스탈린과의 테헤란 회담에서 유럽에서 제2 전선을 형성하는 것과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안을 스탈린에게 공식적으로 제안했다. 또한 루스벨트는 소련에게 태평양 전쟁 참전을 요구하는 한편 소련이 참가하는 국제연합 창설을 제안하였다.

 

제2 전선과 관련하여 스탈린은 동유럽에서 서유럽으로 진출하고자 독일군을 중유럽에서 분산시키는 프랑스 북부에 대한 상륙작전을 주장하였다. 반면 처칠은 그리스와 터키 등 영국에 중요한 국가들이 위치한 남부 유럽과 지중해를 회복하고자 지중해 상륙작전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회담 과정에서 2차 대전 중 2,700만 명의 인명피해를 감수하며 독일 주력군을 격파한 스탈린의 입김이 거셌다. 이들 정상은 소련군의 동유럽 진군에 부응하여 스탈린의 주장대로 프랑스 북부에서 상륙작전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소련은 독일 항복 이후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기로 결정하였다. 

 

테헤란 회담에서 스탈린은 자신의 영향 아래 있는 동유럽에선 즉시 독립을 보장받았다. 루스벨트의 일본 식민지에 대한 신탁통치 제안에 대해 즉시 독립의 입장이었지만, 마지못해 루스벨트의 요구를 수용하였다. 테헤란 회담에서 신탁통치에 대한 합의문은 없었기 때문에 조선인은 아직도 카이로 선언을 즉시 독립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루즈벨트는 1944년 1월 12일 태평양 전쟁 위원회(Pacific War Council) 회의에서 테헤란 회담 당시 스탈린이 한국에 대한 40년간의 신탁통치 필요성에 동의하였다고 밝혔다.

 

테헤란 회담(1943.12).png
테헤란 회담(1943.12)

 

1945년 1월 소련은 동유럽에서 승리를 확정하고 베를린으로 향하였다. 처칠은 소련의 중부유럽에 대한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해 루스벨트에게 “미군이 독일을 먼저 점령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일본과 전쟁에 주력하는 루스벨트는 미군의 피해를 우려하고, 전격전을 회피하고 서부전선을 통해 시간을 끄는 방식으로 독일로 향하였다. 결국 미군과 소련군은 독일에서 만나게 될 예정이었으므로 독일 항복 이후 독일에 대한 미소의 공동 점령과 지배가 기정사실로 되었다.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도 루스벨트는 소련군의 대일참전, 소련의 유엔 참여를 가장 큰 목적으로 삼았다. 소련이 이 문제에 원칙적으로 동의하자, 루스벨트는 처칠의 바람과 달리 대체로 소련의 요구를 수용하였다. 루스벨트는 소련이 극동의 육지를 통해 태평양 전쟁에 참가하면 만주, 한국, 일본 일부를 소련에게 양보하기로 하였다. 루스벨트는 “이러한 양보는 미국이 혼자서 일본 본토에서 전쟁할 경우 발생할 미군의 희생 약 백만 명에 비하면 경제적이다”고 보았다.

 

한편 루스벨트는 내심 독일과 일본의 패망 이후 영국 제국주의의 복원을 경계하며 유럽에서 영국의 지배가 강화되지 못하도록 소련의 영향력을 일부 인정했다. 소련은 독일과의 중간지대인 폴란드뿐만 아니라 향후 독일이 다시 전쟁을 못하도록 동부 독일을 지배하고자 하였다. 루스벨트는 스탈린의 요구를 수용하였다. 소련은 동유럽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나아가 연합군은 독일을 분할하여 통치하기로 하였다. 

 

소련의 입장에선 다시 독일과의 전쟁이 나더라도 중립지대, 즉 완충국가(Buffer Zone) 혹은 위성국가가 필요하였다. 이는 폴란드 등 동유럽의 공산화로 귀결되었다. 영국은 독일을 무장해제하고 서유럽의 주도권 회복을 위해 프랑스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또한 영국은 이탈리아와 그리스 등 남부 유럽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하였다.

 

얄타회담에서 미소영은 이미 점령한 지역의 기득권을 상호 존중하는 방향에서 합의하였다. 소련은 동유럽에서 반나치투쟁을 해 온 공산주의 세력을 중심으로 즉각적인 위성국가를 만들고자 하였다. 반면 루스벨트는 필리핀이나 조선같이 태평양 아시아 지역에서 자신들이 점령한 나라를 즉각 독립시키지 않고 최대 40년 동안의 신탁통치를 통해 미국식 민주주의를 배양시킨 후 독립시킬 계획이었다. 

 

특히 루스벨트는 새로이 출범하는 국제연합에서 미국과 소련이 협력하여 국제질서를 유지하고자 하였는데, 이들 지역에서 미소공동에 의한 신탁통치를 첫 과제로 설정하였다. 

 

얄타협정문에는 “향후 국제연합의 상임이사국이 되는 5개 국가가 어떤 지역에 신탁통치를 할 것인지 상호 협의하며 구체적인 지역은 향후에 결정한다.”고 밝혔다. 미국과 소련의 이해관계가 조정된 얄타회담에 이미 미소냉전이 잠재돼 있었다. 

 

1945년 4월 루스벨트가 뇌일혈로 사망하고 트루먼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하였다. 소련에 유화적이었던 루스벨트와 달리 트루먼은 육군 출신으로 소련을 나치만큼 미워하였다. 히틀러의 몰락 이후 스탈린의 몰락이 트루먼의 희망이었다. 냉전은 1945년 7월 17일부터 8월 2일까지 열린 포츠담회담에서 트루먼과 스탈린이 신경전을 벌리면서 비로소 확연해졌다. 

 

트루먼은 형식적으로 루스벨트가 합의한 얄타회담의 후속조치를 논의하였지만 내심 소련의 유럽과 아시아에서 팽창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포츠담 회담에서 이탈리아의 과거 점령국에 대한 신탁통치 논의는 진전이 없었지만, 그 외 대부분의 신탁통치 지역이 결정되었다. 

 
원래 루스벨트는 독일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 미소 양국의 군대가 조우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일본에 대한 미국과 공동관리를 구상하였다. 하지만 소련의 태평양 전쟁 참전이 늦어지면서 미국이 일본을 단독으로 점령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트루먼은 마지못해 루스벨트의 약속대로 소련이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는 대신 만주와 코리아반도로 남하하는 것을 동의하고, 코리아반도를 분할 점령하는 것을 제안하였다. 트루먼은 태평양과 일본 본토로의 진출로 인해 일본 일부를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이에 포츠담회담에서 일본 대신 미소가 조우하게 될 한국에 대해 연합국의 공동점령과 공동관리가 합의되었다.

 

트루먼은 일본과의 전쟁을 가능한 빨리 끝내 일본이 과거 점령한 극동식민지에서의 소련의 지분을 최소화하고자 하였다. 트루먼은 스탈린과 회담 중 미국의 원자폭탄 실험이 성공하자 스탈린에게 “엄청난 폭탄 실험에 성공하였다.”면서 스탈린에게 양보를 압박하였다. 하지만 스탈린은 이미 첩보를 통해 원자폭탄 실험 사실을 알고 있었고, 소련도 원자폭탄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미국이 1945년 7월 16일 미국 뉴멕시코주 로스앨러모스 사막에서 실시한 첫 원자폭탄 실험.png
미국이 1945년 7월 16일 미국 뉴멕시코주 로스앨러모스 사막에서 실시한 첫 원자폭탄 실험

 

트루먼은 소련의 참전 전에 일본의 항복을 얻어내고자 결국 포츠담회담 직후 8월 6일 원자폭탄을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했다. 소련이 일본 항복 전에 참전을 서둘러 8월 9일 선전포고를 하고, 곧바로 만주를 통해 코리아반도로 진입하였다. 8월 10일 밤에 워싱턴에서 열린 국무부, 전쟁부, 해군부가 참여한 3부조정위원회(State-War-Navy Coordinating Committee)의 명령에 따라 찰스 본 스틸 대령과 딘 러스크 대령이 38도 분할을 제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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