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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신탁통치 논란의 시작과 초기 반응
얄타회담에서 논의된 신탁통치에 조선을 포함할 것인지에 대한 공식적인 합의가 없이 일본이 항복했다. 소련의 38도선 이북 점령 이후에도 신탁통치는 미국 정부의 공식 입장이었다. 1945년 10월 20일 존 카트 빈센트 미 국무부 극동국장은 외교정책협의회에서 “조선은 자치를 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 미국은 우선 신탁관리제를 실시할 것을 제안한다.”고 밝혔다.
국내의 《매일신보》가 1월 1 일자 및 2일 이를 보도했다. 1945년 10월 23일자는 미국의 소리(VOA)방송 산하의 샌프란시스코방송 발로 빈센트(J. C. Vincent) 극동국장의 신탁통치 관련 발언을 보도하였다. 이 보도로 인해 조선이 신탁통치 대상이라는 점이 최초로 조선인에게 공식적으로 알려졌다.
10월 25일자 《매일신보》는 “탁치 실시는 조선에 대한 중대 모욕”이라고 항의성 기사를 게재했다. 이어 중도계열 안재홍 뿐만 아니라 조선공산당의 김삼룡도 “탁치에 반대하는 통일전선을 만들어 조선인민의 힘을 과시하자.”고 제안하였다. 이어서 조선인민공화국의 중앙인민위원회와 송진우와 김성수의 한국민주당도 반탁을 결의했다.
1945년 10월 26일 건국동맹, 조선공산당, 임시정부 환영준비위원회 등 좌우익 모두가 참가한 ‘각정당행동통일위원회’는 회의를 열고 신탁통치에 대해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위원회는 이 성명서를 통해 "카이로 회담으로 완전한 자주독립을 기대하였는데, 신탁통치를 언급하는 것은 조선민족을 모욕하고 기만한 것이다."라고 발표했다.
이 회의에서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의 주필 정태식은 “아직 신탁관리가 사실인지 확실치 않으나 반대성명을 내야한다.”고 강조했다. 나중에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중앙위원을 역임하는 조선공산당 김형선 등 3명이 이 회의에서 반탁운동을 주도하는 실행위원으로 지명됐다.
ㅡ 모스크바 3상회의와 오보 사건
1945년 12월 16일부터 25일까지 미국, 소련, 영국의 외무부장관이 참여한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조선의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미소공동위원회가 이 임시정부와 협의하여 5년 동안의 신탁통치를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소련이 먼저 신탁통치를 제안했다.”는 것과 “박헌영이 소련 단독의 신탁통치와 통일조선의 소련 가입을 주장했다.”는 두 개의 오보사건이 발생했다. 의도적인 언론공작으로 추정되는 이 사건은 반탁반공반소 여론이 형성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여기에는 미군정, 미국 국무부, 미국의 소리, 《동아일보》,《조선일보》 등이 가담했다.
모스크바 3상회의가 끝난 직후 12월 27일 석간신문들은 미국 번스 국무장관이 정부로부터 받았다는 훈령을 보도했다. 이 보도에 따르면 모스크바 3상회의 직전에 번스가 "소련의 신탁통치안에 반대하면서 즉시 독립을 주장하라."는 미국 정부의 훈령을 받았다. 이러한 훈령 내용은 25일 미군 태평양사령부가 발행하는 태평양판 ‘성조지’에 보도됐고 이를 미군정의 관제언론사인 ‘합동통신’이 전재한 것이고 석간신문들이 이를 인용하여 보도했다.
당시 미군정은 언론을 통제했으며 합동통신은 당시 미군정이 운영했다. 1945년 9월 국제통신(國際通信)이 만들어졌는데 미군정은 11월 1일 국제통신의 운영진을 강제로 해직시켰다. 그리고 미군정은 미군 제24군단 통신대장인 A. 글래스를 국제통신의 사장으로 취임시켰다. 1945년 12월 미군정은 국제통신과 연합통신(聯合通信)을 합병하여 전국의 신문사·방송국을 회원으로 하는 조합제의 합동통신사를 발족하였다.
《동아일보》는 이 합동통신의 보도를 근거로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점령”이라는 제목의 1면 머리기사로 실었다. 《조선일보》는 “조선의 자주독립은 어디로, 독립·신탁론 대립” “미국은 즉시 독립을 주장”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 이후 반탁운동은 반소운동으로 확대됐다. 당시 《동아일보》는 반소반탁을 주도하는 한국민주당의 김성수에 의해 창간됐으며, 그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동아일보》는 28일자에서 1면 전부를 ‘탁치’에 대한 반대 여론으로 채웠다. 김구 측의 임시정부는 12월 28일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결성했고 이승만도 반탁운동에 나섰다. 당시 김구와 이승만 모두 여론을 앞세워 미군정으로부터 권력을 이양 받으려 했다. 다만 김구는 통일정부를 이승만은 반공단독정부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런 논란 중에 29일 미 군정청에서 외상회의 결정문을 발표했다. 결정문에 따르면 미소가 한국에 행정권이 없는 자문기구 성격의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최장 5년간 신탁통치를 하되 미국과 소련 대표로 구성되는 공동회의가 임시정부와의 협의를 거쳐 신탁의 구체적인 내용을 확정한다. 외상회의의 내용이 공개된 이후에도 좌익은 김구, 이승만에 맞서 반탁운동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했다.
12월 30일 조선공산당, 인민당, 조선인민공화국의 서울시 인민위원회, 경기도 인민위원회 등 23개의 좌익단체들은 반파쇼공동투쟁위원회(위원장 홍명희)를 결성했다. 당일 위원회는 신탁통치안을 철폐하라는 성명과 김구의 임시정부가 추진하는 국민대표대회를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위원회는 성명서를 통해 신탁통치의 필요성을 강조한 미국국무부 극동국장 빈센트를 비난했다.
좌익은 신탁통치에 반대하면서 즉시 독립을 위한 임시정부 구성을 추진했다. 12월 31일 여운형이 주도하는 조선인민공화국의 중앙인민위원회는 임시정부 국무위원에게 “통일정부를 논의하기 위한 통일위원회를 구성하자.”고 제안했다. 중앙인민위원회는 “임시정부와 조선인민공화국을 동시에 해체하고 좌우합작의 단일정부를 구성하자.”고 제안하면서 1946년 1월 2일 오전 10시까지 대답을 요구했다. 하지만 임시정부 측은 자신과 경쟁적인 조선인민공화국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공문을 반송해 버렸다.
이어 조선인민공화국과 조선공산당은 1월 1일 ‘탁치문제의 해결은 민족통일전선 결성으로’라는 제하에 탁치반대 내용을 담은 성명을 발표했고 《조선일보》가 1월 1 일자 및 2일 이를 보도했다.
ㅡ 좌익의 입장 전환과 혼란
한편 조선공산당 박헌영 비서는 1945년 12월 28일 평양으로 가서 31일 모스크바로부터 귀환한 소련군 북조선 민정사령관인 로마넨코 소장으로부터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구체적인 내용을 전달받고 회담을 지지할 것을 요청받았다. 이날 열린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집행위 상무위원회에서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을 지지하기로 결의했다. 비록 이북에서 열린 회의이지만 좌익이 최초로 사실상 찬탁입장을 밝힌 것이다.
박헌영은 1946년 1월 2일 서울로 귀환하여 공산당 중앙위원회를 소집하고 일부 중앙위원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을 지지하는 결의를 이끌어 냈다(김남식,《南勞黨硏究》, 돌베개, 1984, 250~251쪽). 같은 날 2일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와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여론이 안 좋은 신탁통치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을 하지 않은 채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한다."고 발표했다. 반파쇼공동투쟁위원회는 1월 3일 ‘민족통일자주독립촉성시민대회’를 원래 계획한 반탁대회가 아니라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행사로 바꿔 진행했다.
조선공산당 등 좌익은 신탁통치에 대한 미소합의를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 상황에서 미국 쪽에서 신탁통치안이 흘러나오자, 미국을 반대하는 반탁운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좌익들은 모스크바 삼상회의 이후 구체적인 미소합의를 접하고 소련의 설명을 들은 후 신탁통치가 미소에 의한 남북지배라는 당시 조건에서 빠른 시일 내에 통일국가를 건설하는 고육지책이라는 점에서 갑자기 찬탁으로 돌아섰다.
미군정이 조장하는 반소반탁 언론보도와 여론에 대해 소련이 항의하자, 미국 국무부 극동과장 빈센트는 1월 16일 “조선 임시정부가 남북을 통일적으로 통치하고 치안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 줄 때에는 탁치를 실현하지 않겠다는 것이 연합 3국의 공통된 의견이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그날 동아일보는 이러한 내용 대신 “소련이 조선을 속국으로 만들려고 한다.”고 보도했다. 즉 《동아일보》는 “소련이 신탁통치를 제안하였다.”는 허위보도를 반복하여 반탁, 반공, 반소여론에 불을 붙였다.
ㅡ 박헌영 발언 왜곡 사건
1946년 1월 5일 박헌영은 내외신 기자회견을 했는데, ≪뉴욕타임즈≫ 존스턴 기자의 두 가지 질문에 대해 박헌영이 영어로 답변했다. 박헌영은 “소련 단독의 신탁통치가 가능하냐?”는 질문에 대해 소극적으로 인정하고, “통일조선이 소련에 가입할 수 있겠냐?”는 질문에 대해 “현 시점에서는 불가능하고 10년~20년 이후에나 가능할 것”이라고 답변했다.
하지만 존스턴은 “박헌영이 소련에 의한 단독 신탁 통치와 소련연방 가입을 제안했다.”고 메모로 남겼다. 당시 모든 보도는 미군정의 통제를 받았는데, 미군정은 존스턴의 메모를 ≪뉴욕타임즈≫ 본사로 송신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국내 언론도 이러한 유도성 질의응답을 보도하지 않았다. 그런데 하지 중장이 참모회의에서 존스턴의 메모에 대해 “중요한 내용인데 보도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했다.
당시 회의에서 다른 참모들은 “평상시 박헌영의 입장으로 보아 이 메모가 왜곡된 것일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으나 존스톤의 메모는 중요 언론정보로 분류돼 활용방안이 논의됐다. 그런데 미국의 소리 산하의 샌프란시스코 방송이 1월 15일 이 메모의 내용과 “한국언론이 이 메모를 무시했다.”고 보도했다. 다음날 16일 샌프란시스코방송을 인용하여 《동아일보》 등이 박헌영의 발언을 크게 다뤘다. 이러한 언론공작으로 인해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에 대한 여론이 악화됐고 이들의 영향력이 급감했다(정용욱, 2003: 168- 173).
조선공산당은 성명을 통하여 존스턴의 왜곡에 항의하면서 미군정에 존스턴의 추방을 요청했으나 수용되지 않았다. 또 박헌영도 적극적인 해명에 나섰지만 주요 신문들은 박헌영의 반론을 비중있게 다루지 않았고 여론 악화를 되돌릴 수 없었다. 결국 미군정이 존스턴의 메모를 미 국무부에게 전달했고 미 국무부가 자신이 운영하는 미국의 소리 방송에 이를 전달한 것으로 추측된다.
샌프란시스코방송은 1945년 10월 국무부 극동국장 빈센트의 신탁 통치 발언을 보도하기도 했는데, 해방 정국에서 출처가 의심스러운 외신기사들 중 다수가 샌프란시스코방송 발이었다. 1945년 12월 2일 《영남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샌프란시스코방송은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어로 송출되는 미국의 소리 방송의 일부이다. 12월 1일부터 서울중앙방송국이 방송을 매일 아침 7시 5분부터 30분간 중계해서 한국에서 들을 수 있었다.
ㅡ 타스통신의 폭로와 미국의 곤경
소련 정부는 미군정 통제 아래 진행되는 반소반탁운동에 대해 우려하기 시작했다. 소련관영 타스통신은 1월 22일 미군정이 남조선 언론의 반소선전을 허용했으며, “삼상회의 결정에 대한 반대를 선동한다.”고 보도했다. 1월 23일 스탈린은 주소 미국대사 해리만(Averell Harriman)과 면담에서 남조선의 소련대표부에서 온 전문을 읽어주었다.
그 내용은 "미국은 신탁통치에 반대하는데 소련만이 굳이 신탁통치를 고집한다는 내용의 기사들이 언론에 보도되고 있다“는 것이다. 스탈린은 해리만 대사에게 러치(Archer L. Lerch) 군정 장관이 이러한 왜곡 선전의 장본인이라고 지적했다. 러치 장관은 당시 소련에 적대적이고 이승만이나 한민당과 친했으며 ”우익에게 남조선 정치를 맡겨야 한다.“는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다시 타스통신이 24일 "삼상 회의에서 신탁통치 제안자가 미국이었다."는 사실을 공개하고 스탈린과 해리만대사의 면담 내용을 자세히 보도했다. 타스통신은 미국 측 신탁통치 제안을 자세히 설명했다. 미국 제안에 따르면 신탁통치가 실시되기 전에 먼저 남북 조선인이 참여하는 행정기구를 양군 사령부가 설치하되 행정기구는 정부가 아닌 자문기구로 하자는 것이었다. 또한 타스통신은 미국은 임시정부 수립의 시급성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 4강에 의한 신탁통치를 10년까지 연장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는 점을 보도했다.
《동아일보》가 26일 “근거 없는 타스통신 보도”라고 반박했지만 27일 미 국무부는 “타스통신 보도가 맞다.”고 확인했다. 맥아더 장군 역시 처음에는 타스통신의 보도를 부인했지만 자신의 발언이 미소 간 외교문제로 비화되자 처음 발언이 공식입장이 아니라고 물러섰다. 이후 미국정부는 타스통신의 잇따른 보도에 대해 반박하지 않았다.
타스통신의 폭로성 기사로 인해 미국의 외교적 신뢰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이에 하지 중장은 1월 28일 맥아더 사령관에게 자기가 사직해서 상황을 바로잡을 수 있다면 기꺼이 ‘희생양’이 되겠다는 전문을 보냈다. 하지 중장이 신탁통치의 찬반을 둘러싼 좌우대립이 격화되자, 그 책임을 회피하고자 “신탁통치에 대한 정보를 국무부로부터 미리 제공받지 못했다.”고 변명한 셈이다. 하지 중장의 전문을 접한 미국 국무부는 “하지는 삼상회의에 임하는 미국 입장을 사전에 숙지했다.”며 미군정의 실수로 치부하는 하지 중장의 태도를 문제 삼았다.
ㅡ 냉전 구도 속 신탁통치의 좌초
트루먼 독트린이 3월에 발표된 후 5월에 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으나 사실상의 적대관계로 전환된 미소는 조선반도 문제를 협력하여 풀 의사가 없었다. 미국 입장에선 신탁통치안에 따를 땐 좌익도 합법적으로 새로운 통일국가의 정부에 참여하지만. 미소가 분할한 남북에 각각 정부가 들어설 경우 최소한 자신이 점령한 이남 정부에서 좌익을 배제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탁통치에 대한 반대가 거세지자 미국은 내심 공산주의 세력을 배제하고 이남에 친미 반공국가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이런 의도에서 미국은 신탁통치 구상에 대한 책임을 소련에 넘기고 신탁통치 협상에 소극적으로 임하였다.
한편 미군정은 반탁운동이 거세지자 이남 상황에 대한 통제권이 약화되는 것을 우려했다. 미군정은 신탁을 둘러싼 혼란의 책임을 소련과 조선공산당에게 떠넘기고자 하였다. 결국 미군정과 국무부는 조선에 신탁통치를 강요한 것은 소련이라는 믿음을 조선인들 사이에 조성하려고 노력하였다.
좌익이 반탁에서 찬탁으로 입장을 갑자기 바꾸면서 “반탁은 반소반공이고 찬탁은 친소용공”라는 구도가 형성되었다. 당시 남한의 좌익들은 미소공동에 의한 신탁통치만이 남한에서 미국 단독에 의한 반공국가 수립을 저지할 수 있다고 봐 신탁통치에 찬성하였다. 해방 직후 여론조사에 따르면 사회주의와 좌익에 대한 지지도가 높았는데, “소련이 강요하는 신탁을 반대한다.”는 반탁운동으로 우익이 급성장하고 좌익은 위축되었다.
한편 소련은 이북에서 김일성을 내세워 동유럽식 친소 위성국가의 수립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북 전체에 대한 신탁에 대해 미국의 입장을 따라가는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미소냉전이 본격화되는 당시 조건에서 미소가 공동으로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면 미소는 신탁통치 틀에서 주도권을 놓고 경쟁하고 남북의 좌우익 역시 임시정부의 주도권을 놓고 대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특히 루스벨트의 신탁통치안을 마지못해 이행하다가 반공정책을 채택한 트루먼 대통령은 소련과 협력할 의사가 없었다. 결국 미소는 미소대립, 남북대립, 좌우대립을 야기할 수 있는 불확실성보다는 남북 각각에서 자신들이 주도하는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확실한 경로를 내심 선호했다. 미소는 각각 남북에서 위성국가를 수립하는 현실적인 안으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남에선 조선공산당으로 대표되는 좌익이 척결되었으며, 북에선 조만식으로 대표되는 우익이 척결된 후 각각 단독정부가 수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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