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등록일 : 2024.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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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민주통일전사 한기명   사진제공 : 자주민주통일전사 한기명 의장 시민·사회장 장례위원회

 

 어머니는 반미자주통일 전사였다. 
그러나 동지에게는 항상 밝은 미소의 자상한 목소리로 반겨주시던 다정한 어머니였다.

필자는 명절 때와 요양원에 계시는 4·9인혁열사 도예종 선생의 사모님 신동숙 어머니에 대한 근황을 알기 위해 주기적으로 어머니에게 전화했다. 그러면 어머니는 노구를 이끌고 김병길 장기수 선생과 함께 신동숙 여사 면회 갔다 온 이야기랑, 신 여사의 건강을 걱정하며 자신의 일처럼 안타까워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정말 이런 것이 동지애이구나 하며 어머니를 존경했었다.

그런데 이번 설에 새해 인사를 하기 위해 전화를 하니, 연결이 되지 않아 불안하였다. 다행히 따님 이단아 동지와 통화하니 아직은 괜찮다는 소식을 들어 안심했는데, 결국 지난 2월 18일 오후 3시 35분 노환으로 별세하셨다. 향년 9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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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태어나서 해방공간 활동한 고향 서울을 떠나, 1960년경 부군 이형락 동지와 대구에 안착한다. 이후로 제2의 고향인 대구에서 지역을 떠나지 않고 통일운동가로 양심수의 어머니로 활동해 오신 한기명 어머니의 장례식은 20일 대구전문장례식장에서 <자주민주통일전사 한기명의장 추모의밤>과 21일 마석열사묘역에서 <故 한기명 의장 하관 및 장지 추모제> 등으로 엄수되었다.

 

8·15해방 이후 2·7구국투쟁과 5·10단정단선반대투쟁에 나서다.

 

20세기 역사는 혁명의 시대였다.

그중에서 여성 혁명은 참정권 쟁취와 확대라는 결과도 있지만, 무엇보다 순종이나 동정의 대상으로 여겼던 여성을 남녀평등과 동지 그리고 연대의 대상으로 바뀌게 했다. 또한, 여성들은 해방된 새로운 사회에서 자유와 자립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했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에서 여성 해방의 문제는 일제에서 벗어나는 민족해방 자주 독립운동이 추가되었다. 

깨어있는 여성들은 우선 조국의 독립이 여성 해방의 첫 단계라 여기고 투쟁했다. 

어머니 또한 거대한 감옥, 일제 식민지하에서 신음하던 식민지 조국에 태어나 민족해방과 민중해방의 숙명을 지게 된다. 특히 일제의 침략전쟁에 정신대로 끌려가는 여성과 태평양전쟁 총력전을 위한 농민과 노동자수탈 같은 만행을 보면서, 분노를 넘어 항일 민족의식은 점점 커져간다.

그리고 만주의 무장 독립투쟁 소식을 들으며 항일 투쟁의식에도 눈을 뜨게 되었다고 한다.

 

8·15해방은 어머니에게 본격적인 혁명운동에 참여하게 했다. 

그러나 미군정으로 이남 사회는 반동과 혁명으로 혼란과 혼돈 상태로 빠져들어 갔다. 미군정은 이런 반동과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조선인 폄하와 인종차별 그리고 친일파를 등용하며 공격했다. 

어머니는 1942년 동덕여자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민주학생연맹에 가입하여 1948년 2·7구국투쟁과 5·10단정단선반대투쟁 등에 동덕여고 대표로 동맹휴학을 주도했다. 이로 인해 유치장에 수감 되고 학교도 자퇴하게 된다.

해방공간 미 군정 시기 의식 있는 남녀 청춘들은 “20세기는 연애도 없고 예술도 없다”라면서, 그들은 혁명과 단독정부 수립반대 운동 그리고 통일을 위해 투쟁했다.

혁명과 통일 그리고 미제 타도를 위해 청춘 남녀는 기꺼이 자신의 목숨까지 던질 수 있었다. 

어머니 또한 마찬가지로 민족해방과 민중해방 그리고 미제 타도를 위해 자신의 몸을 던졌다.

 

6·25전쟁 시기 활동하다 체포되어, 서울 대전 부산 마산형무소를 전전하다.

 

미군정 하의 민중은 경찰과 서북청년단과 같은 우익 반동 단체들의 테러와 무자비한 탄압으로, 민중은 새 조국 건설의 꿈은 물론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생존권마저 유린당했다.

특히 10월 인민항쟁과 제주 4·3항쟁은 너무도 많은 희생을 치렀다.

제주 4·3항쟁 희생자의 수는 정확히 알기 어렵다. 당시 제주도 도민이 30여만 명이라고 하였으니, 3만 명이라고 해도 제주도 인구의 10분의 1이 희생되었다. 그러나 ‘8만 명 희생설’도 있다. 당초 토벌대가 파악한 무장대 숫자는 최대 500명이었다 하니, 제주 도민에 대해 무차별 학살을 자행한 것이다. 

그뿐 아니라 좌익 세력에 대한 야수적 무차별적 탄압으로 민주주의민족전선, 남조선노동당,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전국농민총연맹, 남조선민주여성동맹, 민주애국청년동맹 등 대부분 단체는 불법화된다.

그리고 이승만은 ‘국토 분단’을 기정사실로 하고, 1948년 단독정부 수립을 강행해 6·25전쟁 전의 전쟁을 불러왔다. 

미국이 ‘국토 분단’하고 이승만은 ‘국가 분단’을 한 것이다.

1950년 6·25전쟁 이후 어머니는 조선노동당 서울시 동대문구역당 선전부 일꾼으로 활동하다가 그해 10월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서 15년형을 선고받고, 대전 부산 마산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1953년 마산형무소에서 3년여 만에 병으로 인한 형집행정지로 출소했으나, 다음 해인 1954년 병이 없는데 형집행정지로 출소하였다는 사유로 다시 서대문형무소에 구속된다.

그리고 이곳에서 통일운동가인 박정숙, 김선분 선생을 만나 범민련 결성 이후 평생동지로 함께 활동한다.

어머니는 1955년 1년의 형을 살고 출소해, 1956년 이형락 동지와 결혼해 1960년경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산하 경북노협 결성을 위해 대구로 생활 터전을 옮긴다.

 

10월항쟁과 6·25전쟁 전후 학살이 자행된 대구에 정착하다.

 

한기명 어머니가 정착한 대구는, 해방공간에 ‘조선의 모스크바’ 불렸던 곳이다.

격동의 해방공간에서, 대구는 그 어느 곳보다 혁명의 열기가 높았다. 그러나 그만큼 희생도 컸다. 특히 여성에게는 도저히 감내할 수 없는 기막힌 사연이 많은 곳이었다. 희생이 많다 보니 과부가 많았고, 남편의 신원(伸寃)과 진실규명을 위해 온 생을 받쳐 활동한 열녀들도 많았다.

그리고 여성들의 이런 가열찬 투쟁은 2차 인혁당 사건과 어머니 부군 이형락의 ‘남조선해방전략당’사건으로 이어진다.

대구·경북지역은 일제강점기 항일 독립투사를 많이 배출한 곳이라, 어느 지역보다 의식이 높아 10월 인민항쟁에 남달리 희생이 많았다. 학살의 참화로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한 집안으로 황보가(家)가 있다.

경북 영천 화북면 구전동(현 화남면 구전리), 당시 대지주였던 황보집은 집안사람들과 함께 영천의 10월 시위를 주도한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혹했다. 황보집은 실종됐고, 황보씨 사람들은 '빨갱이 집안'으로 낙인찍혔다. 심지어 동네 전체가 '좌익 마을'로 매도당했다. 

황보집은 대구의 대표적 좌익계 신문인 민성일보 편집장과 조선공산당 경북도당의 선전부장을 역임했다. 

간신히 살아남은 황보집의 고명딸 황보희는 학교에 다닐 때 민주학생연맹에서 활동을 했다. 아버지는 학생운동 활동과 집안 배경이 드러나면 위험하니, 신분을 숨기고 박춘자로 살아가라고 하여 이후 박춘자라는 이름으로 평생을 살아왔다고 한다.

필자는 과거 경북대학교에서 개최된 4·9인혁열사 추모제에서 남민전 이재문 총서기의 부인 김재원 여사와 황보희가 부둥켜안고 목놓아 우는 것을 본 적이 있다.

10월 인민항쟁의 원인은 미군정이 친일 관리를 고용하고 토지개혁을 지연하며 식량공출을 강압적으로 시행하는 등, 켜켜이 쌓인 농민들의 분노가 봉기의 기폭제가 됐다. 경북 22개 군 가운데 대부분 지역에서 민중항쟁이 일어났다.

1949년 발간된 『조선중앙연감』을 바탕으로 정해구 교수가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대구와 경북에서 시위와 봉기에 참여한 연인원은 77만3천 명으로 추정된다. 당시 대구·경북 인구 317만8천 명의 24%에 달한다.

또한 6·25전쟁 전후 미군과 군경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진상 규명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전국피학살자유족회’를 결성하고 주도한 곳도 대구였다. 

‘전국피학살자유족회’는 4월 혁명공간의 대표적 대중운동이었다. 이때 활동한 여성으로 최찬 여사가 있다. 그녀의 부군 김진하는 1949년 8월 체포되어 대구형무소 수감 중 1950년 7월 가창골에서 학살당한다. 이후 최찬 여사는 부군 김진하의 신원을 위해 평생을 바친다.

어머니는 이런 참화 속에 희생된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아픔을 간직한 유족을 동지애로 위로하며, 그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연대한다.

 

부군 이형락의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과 옥바라지

 

어머니는 대구를 제2의 고향으로 삼아 부군과 세 딸을 낳고 살아간다. 

그러나 부군 이형락은 1968년 7월 통혁당 관련으로 피검되고, ‘남조선해방전략당’ 지역조직책으로 사형을 구형받았으나, 2심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대전교도소 수감된다. 어머니는 이때 세 딸을 홀로 키우며 10년간 부군의 옥바라지를 한다,

1985년 6월 10년 부군은 만기출소 하지만, 고문후유증과 트라우마 등으로 스스로 유명을 달리한다.

마석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쓰여 있는 이형락 동지의 ‘삶과 죽음’이다.

 

“동지는 서울 성도중학교에 입학하여 민주학생연맹 활동을 하다 체포되었으나, 한국전쟁이 발발한 시기에 탈옥하여 남로당 종로구 당원, 체신부 인쇄공장 지도원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56년 여학생연맹 위원장 출신의 한기명님을 만나 결혼한 후, 1959년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산하 경북노협 결성에 참여하고 경북노동조합협의회 통계부장으로 활동하였다. 

1968년 통혁당 사건으로 피검되었고, ‘남조선해방전략당’으로 조작되어 10년형 선고받고 투옥되었다가 1978년 만기출소하였다. 

출소 이후에도 보안관찰 대상자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였으며, 1980년, 1983년 대구미문화원 폭파사건 때 예비검속으로 안기부에 잡혀가서 며칠씩 조사를 받기도 했다. 

고문의 후유증과 트라우마, 가족에 대한 죄책감 등으로 고통을 받다가 결국, 1985년 젊은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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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고 권재혁 선생 48주기 추모제에 나오는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 개요다.

 

“1968년 중정에 의해 조작된 사건으로, 관련자 권재혁이 발표한 논문 중 ‘남조선해방의 전략과 전술’이란 제목에서 힌트를 얻어 중정이 작명하였다.

관련자 이일재 선생의 회고에 따르면, 서클들의 연합조직을 만들어 차츰 당조직으로 발전시키고자 하는 생각은 있었으나 당시는 서클활동의 수준의 노동운동조직이었다고 한다.

조직은 동학의 포(包) 조직원리를 적용하여 중앙포, 대구포, 부산포, 청량리포, 성동포, 학생포 등이 있었다. 조직의 노선은 ‘민족자주통일’로 남한 프롤레타리아의 자주적인 각성과 조직화가 절대적 선결과제라는 것에 합의, 일부는 노동현장에 투신하고, 일부는 노동조합의 활동을 돕는 외곽조직 역할을 하는 등 전국적 노동운동조직의 맹아적 형태를 띠었다.

1967년경 권재혁과 김종태(통혁당)가 몇 차례 만나 통합을 논의하였는데, 1968년 7월 김종태가 연행되면서 권재혁을 비롯한 ‘전략당’ 관계자들에게도 대대적인 검거선풍이 불게 되었다.

1968년 8월 24일 통일혁명당 관련사건 발표 때 ‘남조선해방전략당’을 산하조직으로 발표했으나 실제로는 일본교포를 통해 공작금을 받은 간첩단으로 둔갑시켜 별개의 사건으로 기소·처리되었다.”

 

남·북·해외 3자연대 통일운동연합체인 범민련 남측본부 활동을 하다.

 

어머니는 1986년 노동운동 관련 셋째 딸 이단아의 수배로 대구 민주화운동가족협의회에서 활동을 시작한다. 그리고 1989년 사회안전법이 폐지되자 장기수 선생과 교류를 하면서 본격적으로 통일운동에 뛰어든다.

그리고 1989년 설립된 대구사회운동연구소에서 1990년 민주시민대학이 개설되자, 어머니는 1기로 수료한다. 당시 함께 공부하던 2차 인혁당 유족들과도 교분을 나누면서, 같은 여성으로서 동병상련의 연민의 정을 나누게 된다.

 

한기명 어머니는 지난 2021년 작고한 강창덕 선생과 함께 대구‧경북 운동의 산증인이었다. 어머니는 일제 강점과 해방공간을 거치면서 군부 독재정권과 국가보안법에 맞서 4차례의 체포와 2차례에 걸쳐 복역한다.

특히 범민련 남측본부 활동과 관련하여 1995년 범민련 남측본부 대구경북연합 결성 건으로 구속됐으며, 2013년 국가보안법 위반(찬양, 고무)으로 불구속으로 기소되기도 했다.

어머니의 범민련 남측본부의 활동은 그야말로 ‘조직 운동의 기본’을 몸소 실천하셨다.

조직 성원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회의 참석이다. 

특히 범민련 남측본부 의장단 성원으로 한 번도 회의에 빠짐없이, 대구에서 서울까지 보행기에 몸을 의지하며, 회의뿐만 아니라 행사와 집회 등에도 참석했다. 

그뿐 아니라 범민련 남측본부 사무처에 확인하니, 회비도 빠진 적이 없이 냈다고 한다.

자주민주통일전사 한기명은 자랑스러운 범민련의 어머니였다. 

불행 중 다행으로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은 2013년 민주화운동보상심의원회로부터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받는다. 그리고 어머니는 2014년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을 받고 국가로부터 배상금을 받은 것을, 모두 모아 후진들을 위해 내놓는다.

2018년 부군과 당신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서 ‘형명재단’이라는 비영리민간단체를 만들어, 매년 ‘평등평화세상’을 위해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활동가의 자녀들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학업이 힘든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존경하는 한기명 어머님!

어머님은 가셨지만 우리는 어머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어머님의 조국과 민족 그리고 반미자주통일에 대한 붉은 신념은 우리들의 가슴속에 살아있고 영원히 불타오를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어머님이 못다 한 꿈을 우리는 반드시 쟁취할 것입니다.

조국은 기억하리라!

어머님의 이름과 걸어온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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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범민련 남측본부


【고 한기명 의장 약력】

1929년 9월 12일 서울 창신동에서 5남매 중 막내로 출생

1986년 민주화운동가족협의회 활동

1990년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결성과 함께 통일운동을 다시 시작함

1993년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대구경북연합 준비위원회 활동

1995년 대구경북지역양심수후원회 공동대표 (~현재)

1995년 3월 28일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대구경북연합 결성, 부의장으로 활동

1995년 11월 29일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대구경북연합 결성 건으로 구속

2000년 5월 22일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대구경북연합 의장 직무대행 이후 의장으로 추대

2003년 대구경북통일연대 상임대표 (–2006년)

2004년 국가보안법폐지대구경북연대 상임대표 

2004년 탄핵무효 범국민행동 대구경북본부 공동대표

2016년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대구경북본부 공동대표(~2023)

2018년 형명재단 초대 이사장

2023년 8월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대구경북연합 명예의장 추대

2024년 2월 18일 오후3시35분 영면(향년 9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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