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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을 『철학대사전』(한국철학사상연구회 편, 동녘, 1989)에서 정의한 일부이다.
“금융 자본의 가장 반동적이며 국수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분자에 의한 노골적인 폭력적 독재(디미트로프 Dimitroff).
금융 자본의 이러한 분자들은 파쇼 통치를 통하여 사회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우위를 확보, 확대하며 국민 경제를 전쟁 준비에 완전히 예속시킨다. 파시즘은 금융 과두정(金融寡頭政 : Finanzoligarchie) 세력과 국가 권력의 융합을 촉진시키며 전체 국가기구를 금융 자본 중에서 반동적이고 호전적인 집단의 지배하에 완전히 종속시킨다.
또한 그것은 모든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자유를 말살하며 모든 민주적, 진보적 인민 세력에 대해 거침없는 테러를 감행한다.
(중략)
파시즘은 정치적 도적 행위, 도발 및 정치적 모험을 감행하는 통치 체제로서 외국과의 관계에서도 모든 국제법을 거침없이 무시한다.
(중략)
최초의 파쇼 정권은 1920년대에 이탈리아, 폴란드, 헝가리, 그리고 포르투갈에서 수립되었으며, 1933년에는 독일 파시즘이 그리고 1938년에는 독일과 이탈리아 파시즘의 지원을 받아 에스파냐 파시즘이 정권을 잡는데 성공하였다.”
파시즘의 출발은 이탈리아였다.
ㅡ 이탈리아 통일과 제1차 세계대전
이탈리아는 유럽문화의 기원인 고대 로마제국의 발상지이지만, 476년에 서로마제국 멸망 이후 수많은 도시국가와 봉건 영지로 분열되어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이탈리아의 정치·사회적 통일운동인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로 1861년에 이탈리아반도와 주변 섬 여러 국가를 통합하여, 단일 국가인 이탈리아 왕국(Regno d'Italia)을 세운다.
이때 중심은 이탈리아 서북부의 사르데냐(Regno di Sardegna)왕국으로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사실상 전신이다.
이탈리아는 제국주의 열강이었지만, 최대 영역은 이탈리아 본토와 리비아, 동아프리카 일부 그리고 발칸 반도까지로, 이는 열강 중 독일 다음으로 작은 영토였다. 하지만 중국에도 군 병력을 주둔한 조계(租界)를 설치할 정도로 식민지 침략에 집착했다.
그러나 로마 멸망 이후 1,200여 년 만에 이탈리아 왕국이 통일하여 전체를 아우르지만, 오랫동안 자유로운 도시국가로 분열되어 있던 관계로,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로 나가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특히 이탈리아는 모든 국력을 쏟는 식민지 쟁탈전에서, 오스트리아 제국과는 이탈리아통일전쟁 당시 적대국이었고, 독일과는 아프리카 진출 이해관계로 충돌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탈리아는 독일, 오스트리아와 삼국동맹을 맺었지만,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에 가담해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싸운다.
이런 주변 정세 속에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 1883~1945)는 1912년 이탈리아 사회당(Partito Socialista Italiana, PSI) 혁명 조직을 이끌며, PSI 기관지 『아반티 Avanti!』, 『전진』의 편집장으로 등장한다. 그는 철저한 반제국주의 투사로 총파업 등 직접 행동을 통한 사회주의혁명을 주장하면서, 웅변과 열정으로 대중적 지지를 얻는다.
그러나 무솔리니는 PSI의 제1차 세계대전 전쟁 중립 선언을 비판하고, 이탈리아 참전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PSI에서 제명당한다. 당시 사회주의자들은 전쟁이 전 세계의 노동자 단결을 약화시켰다고 생각했다.
이는 제2인터내셔널의 중요 논쟁 중 하나인 “반전 논쟁” 때문이었다.
전쟁은 국가들 사이에 벌어지는 것으로,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국가’는 자본가계급의 지배 수단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노동자계급의 생명을 빼앗는 행위로 보았다. 원칙적으로 노동자계급은 전쟁에 찬성하지 않았고, 마르크스주의 원칙에도 전쟁은 부정적이고 반대였다.
ㅡ “반전 논쟁”, 공격 전쟁과 방어 전쟁
“반전 논쟁”은 1860년 프로이센(이후 독일제국)-오스트리아 전쟁과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을 계기로, 노동자계급의 전쟁 대응 문제가 제기된다.
특히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은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먼저 선전포고를 해서 시작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비스마르크가 프로이센의 부상을 위해 전쟁 준비를 해놓고 전쟁을 유도한 것이었다. 비스마르크의 계략에 의해 나폴레옹 3세는 대패하고, 그 과정에서 “파리코뮨(Commune de Paris, 1871.3.18.~ 5.28, 72일간)” 봉기가 일어난다.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와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는 나폴레옹 3세의 전제정치 행태를 ‘보나파르트주의(Bonapartisme)’라 부르고 가장 반동 정치 체제라 비판했다. 그들은 ‘보나파르트주의’가 프랑스 혁명을 타락시키고, 독일 노동운동을 약화시킬 것으로 전망했다.
보나파르트에 대해 마르크스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역사는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라는 유명한 문구를 남긴다.
“헤겔은 어느 부분에선가 세계사에서 막대하게 중요성을 지닌 모든 사건과 인물은 두 번 나타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헤겔은 한 번은 비극으로, 다음 번은 희극으로 나타난다고 덧붙이는 것을 잊었다.
당통 대신에 고시디에르가, 로베스피에르 대신에 루이 블랑이, 1793-1795년 사이 산악당 대신에 1848-1851년 산악당이, 삼촌 대신에 조카가 나타났다.” 『프랑스혁명사 3부작』(소나무, 2017)
여기서 ‘삼촌 대신에 조카’는 프랑스의 나폴레옹 1세와 나폴레옹 3세를 가리킨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독일노동자계급이 자본가들의 반동적 정치 체제가 유발한 ‘공격 전쟁’에 대해, 자국 정부의 “방어 전쟁”을 지지할 의무가 있다고 했다. 또한 그들은 독일이 먼저 침공하면 독일의 노동자계급은 “전쟁 반대” 투쟁을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즉 각국의 노동자계급은 원칙적으로 자국 정부 지배계급의 ‘공격 전쟁’ 시도는 반대 투쟁을, “방어 전쟁”일 경우는 침략 저지와 지지 투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방어 전쟁”의 논리는 제2인터내셔날 주요 논쟁이 되다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자국의 참전을 옹호하는 논리로 나아간다.
과거 서방 언론들이 소위 ‘우크라이나 전쟁’이라고 부르는 것도, 필자는 당시 러시아의 “방어 전쟁”으로 미국 대리전으로 보았다. (참조 : 자주시보 [기고] 우크라이나 전쟁의 기원, 2022/06/25)
ㅡ 공산주의와 사민주의로 나누는 “슈투트가르트 결의”
1907년 독일 슈투트가르트(Stuttgart)에서 제7차 제2인터내셔널 대회가 열린다. 그리고 2개의 역사적 중요한 의제인 “군사주의와 국제분쟁”과 “식민지문제”가 채택된다.
또한 이 대회에서 공식적으로 반전 문제가 논의되면서, ‘전쟁’에 대한 두 입장이 대립한다.
하나는 ‘전쟁’이 자본주의 모순이고, 또한 ‘전쟁’을 위한 군비경쟁은 자본주의 모순을 심화시켜 결국 자본주의가 망하게 되니 ‘전쟁’에 개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전쟁’은 너무나 비참하므로, 총파업이 안 되면 무장봉기를 해서라도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특히 프랑스 사회당은 전쟁이 발발했을 때 모든 국가의 노동자들이 혁명적 파업을 일으켜야 한다는 결의안을 제안한다. 그러나 독일 사회민주당(Sozialdemokratische Partei Deutschlands, SPD)은 실패가 분명한 총파업을 지지할 수 없다고 했다.
결국 결의안에 대해 논쟁이 해결되지 않자, 소위원회를 구성해서 결의안 작성을 위임한다. 이때 소위원회 결의안 작성을 주도한 사람이 레닌과 로자 룩셈부르크 그리고 마르토프(L. Martov, 1873~1923)였다.
그리고 그들은 “슈투트가르트 결의안”을 제출한다.
결의안의 마지막 구절이다.
“만약에 전쟁이 어떻게든 발발하게 된다면, 그것의 신속한 종결을 위해서 개입하는 것이 노동자계급의 의무이다.
그리고 개입을 할 때는 전쟁이 야기한 모든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위기를 온 힘을 다해서 활용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대중들을 촉발시키고 그것을 통해서 자본가들의 계급지배를 붕괴시키는 것을 촉진하기 위해서이다.” 『맑스주의 역사 강의』(그린비, 2010)
이 결의로 “반전논쟁”에 대해 서유럽 중심의 사회민주주의와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두 진영으로 나뉜다. 그리고 결의안을 받아들여서 혁명을 주장한 세력은 공산주의 혹은 현실사회주의진영으로 계승되고, 결의안을 거부하고 전쟁을 찬성했던 사람들은 사회민주주의자가 된다.
“슈투트가르트 결의”는 마르크스주의를 공산주의와 사민주의라는 두 흐름으로 나누는 역사적 결의가 된다.
ㅡ 무솔리니의 전향과 국가 파시스트당 조직
제1차 세계대전이 노동자계급의 ‘공격 전쟁’과 “방어 전쟁” 논란 속에 끝나자, 독일 사회민주당과 프랑스 사회당 등은 엄청난 시련을 겪는다. 이탈리아 사회당 또한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 1891~1937) 등이 창당한 공산당(Partito Comunista Italiano, PCI)에게 주도권을 빼앗긴다.
특히 이탈리아는 대전에 참전했던 노동자들이, 연합국임에도 패전국 취급을 받는 무능한 정부로 인해 보상도 받지 못하고 거리에 방치된다. 자연히 이들은 전쟁에 참전했다고 후방에서 자신들을 비판한 사회주의자들에게 강한 적대감을 갖게 된다.
이때 PSI에서 제명당한 무솔리니는 혼란의 도가니 속 대중의 불만을 파고 들어가 반제국주의 투사에서 극우로 전향한다. 그리고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통일의 영웅이자 혁명가인 주세페 가리발디(Giuseppe Garibaldi, 1807~1882)가 조직한 “붉은 셔츠단(Camicie rosse)”을 모방하여 정치깡패 집단인 ‘검은 셔츠단’을 조직한다.
1921년 무솔리니는 민주주의보다 강력한 국가주의를 내건 국가파시스트당을 조직하고, 이후 총선에서 19%를 득표하여 37명의 당선자를 낸다. 그리고 무솔리니는 1922년 추종자 ‘검은 셔츠단’을 이끌고, 로마로 진군하여 쿠데타를 일으킨다.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무솔리니는 1928년에 의회를 해산하고, 국가파시트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 활동을 전면 금지하는 일인·일당 독재체제를 구축한다. 그리고 1929년 선거에서 국가파시스트당은 98.4%의 득표율로 전체 의석을 완전히 장악한다.
특히 무솔리니는 유럽에서 침략적 파시즘으로 사회주의자들을 때려잡는 데 앞장선다. 또한 “파시즘은 정치적 도적 행위, 도발 및 정치적 모험을 감행하는 통치 체제로서 외국과의 관계에서도 모든 국제법을 거침없이 무시한다.”라는 『철학대사전』 설명처럼, 1935년 국제사회의 반대를 무시하고 에티오피아를 침공, 1936년 수도 아디스아바바를 점령한다.
당연히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 LN)이 비난하지만, 무솔리니는 일제가 만주 침공 후 국제연맹에서 탈퇴했음에도 제재를 가하지 못하자 탈퇴로 응수한다.
1940년 9월 동서의 파시스트 국가인 이탈리아 왕국, 나치 독일, 일본 제국은 추축국(樞軸國, Axis Powers) 동맹인 삼국동맹을 결성한다. 추축국이라는 명칭은 무솔리니가 1936년에 ‘유럽의 국제 관계는 로마와 베를린을 연결하는 선을 추축으로 하여 변화할 것이다.’라고 연설한 데서 유래했다.
ㅡ 일본군의 변천, 한국주차군과 조선주차군 그리고 조선군사령부
일제가 조선에 군대를 들여놓는 방법은 교묘했다.
먼저 1880년 4월 서울에 일본공사관이 개설되자, 일제는 공사관 수비를 구실로 일본군을 들여놓는다. 이후 1904년 러일전쟁을 핑계로 ‘한국주차군’ 사령부를 설치한다. 그리고 일제는 러일전쟁을 일으킨 지 2주 후인 1904년 2월 23일 대한제국(大韓帝國, 1897~1910)을 협박해 ‘한일의정서’를 체결한다. 이는 전쟁 수행에 필요한 병참기지 사용과 각종 인적·물적 자원을 징발할 목적이었다.
1907년 7월 24일 불평등조약인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이 체결되고, 대한민국 군대는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된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전개된 조선 의병투쟁은 1907년 7월 고종의 양위와 8월 군대 해산을 계기로 전국 곳곳에서 의병투쟁이 또다시 일어난다.
강준만은 『한국 근대사 산책 5권: 교육구국론에서 경술국치까지』(인물과사상사, 2007)에서 의병부대의 치열한 전투 통계를 소개한다.
“일본군 통계에 따르더라도 1907년 12월부터 1909년 6월까지의 약 1년 반 동안(1909년 1월 제외)에 의병이 일본군과 교전한 횟수는 무려 3,714회에 이르며, 연인원 12만 1,360명의 의병이 이에 참전했다. 의병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1907~1911년에 활동한 의병 수는 총 14만 명 정도로 추산되었다.”
특히 일제는 동학 농민전쟁의 주 무대였던 호남지방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같은 책에서 강준만은 ‘남한대토벌작전’에서 정리한다.
“1908년 각 도 의병의 전투상황을 볼 때 호남이 전국 대비 전투 횟수 25퍼센트, 전투 의병수 50.1퍼센트를 점했다. 이에 보병 2개 연대로 편성된 일본군 사령부는 1909년 9월 1일부터 약 2개월간 ‘남한대토벌작전’을 지휘하며 호남의병을 철저히 탄압했다.
남한대토벌작전에서 ‘남한(南韓)’은 한반도 중부 이남지역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전라남도 지역을 의미했다. 일제는 전라도의 경제적 가치에 주목하는 동시에 전라도의 기(氣)를 꺾기 위해 사실상 ‘대토벌’을 넘어서 ‘소멸’을 감행했다.”
1910년 강제 병합 후 일제는 조약 조인 사실을 1주일이나 극비에 부쳤다가, 8월 29일 경술국치(庚戌國恥)에 조약을 공포한다. 이후 일본군을 ‘조선주차군’으로 재편하여 조선의 독립운동을 무력으로 탄압한다. 그리고 1918년 한반도에 상주하는 병력을 배치하고 제19, 20사단을 통합하는 ‘조선군사령부’를 만든다.
결국 일제의 군대 주둔은 만주 침략과 중일전쟁의 전초기지로 조선을 이용하면서, 조선 민중은 엄청난 희생과 경제적 손실을 겪는다.
일제강점기 일본군 주둔의 변천사는, 현재 미군 주둔으로 이어져 민족의 자주와 평화통일에 크나큰 장애와 뼈아픈 역사적 치욕이 되풀이되는 것을 민중은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ㅡ 신동숙, ‘학도동원체제화’ 속에 고등학교를 다니다.
일제가 조선에 상주 군대를 둔 것은, 식민지 조선의 치안뿐 아니라 무력으로 식민통치를 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일제의 궁극적 목적은 한반도를 중국 대륙침략을 위한 교두보로 이용하려는 것이었다.
마침내 일제는 서서히 마각을 드러내고 중국대륙침략을 위해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내세우며 조선인을 억압한다. 내선일체는 일제가 조선을 식민 통치하기 위해 내놓은 민족말살정책 중 하나였다. 또한 ‘내지(內地)와 조선은 한 몸’이라는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정책도 시행한다.
마찬가지로 중국과 만주에도 일제의 동화정책인, ‘일본과 만주는 한 몸’이라는 일만일체(日滿一體)와 ‘만주족과 한족은 한 몸’이다는 만한일체(滿漢一體)를 시행한다. 특히 괴뢰 국가 만주국을 만들면서 내세운 오족협화(五族協和, 五族 : 일본, 조선, 한(漢)족, 만주족, 몽골족)란 동화정책도 있는데, 이는 시기에 따라 조선인 대신 백계 러시아인이 들어갈 때도 있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말뿐이었고, 실제 일본인과 친일 인사에게만 적용되었다.
신동숙은 1941년 일제가 제4차 조선교육령을 내려, 학생을 ‘학도동원체제화’속으로 끌어드릴 때 포항 고등여학교를 다닌다.
“제가 포항여고 다닐 때 아침 9시까지 학교에 가면, 오전에는 수업하고 나중에는 중간중간에도 수업을 많이 못 했어요. 오후에는 공장에 칸즈메(かんづめ) 공장, 통조림공장에도 가고 생선 군수공장에 가서 노력 봉사하고 이러했지요.
특히 일제 노력 동원으로 솔방울, 관솔 등을 주우러 많이 다녔어요. 솔가지, 소나무 가지 끊고 나면 조그마한 관솔 거기에 기름이 많아요.
그리고 보리도 베러 다니고, 그런 거 다닐 때 조선 아이들끼리 모이면 만주 저편에서 독립운동을 하는데 김일성 장군 이야기도 있고, 이제 얼마 안 있으면 해방된다는 그런 소리도 들었어요.”
1941년 일제의 제4차 조선교육령이다.
“1941년부터 일본은 전시(戰時)에 호응하여 전문학교 이상의 수업연한을 단축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총독부는 첫해인 1941년에 3개월(12월 졸업), 1942년부터는 6개월(9월 졸업)을 단축시켰다.
이렇게 총독부는 전문학교의 수업연한을 단축하고, 1943년 3월에는 종래 조선교육령을 근본적으로 개정하여 4월 1일에 시행하였다. 즉 대학·예과·전문학교·중학교·고등여학교·실업학교·사범학교 등에 학제개혁을 단행하였다.
또한 1945년 5월 일본정부는 학부의 결전태세(決戰態勢)확립을 위하여 '전시교육령(戰時敎育令)'을 공포하기도 하였다.”(위키백과)
※ 격주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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