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경렬(전 주앙골라 대사)
등록일 : 2026.03.26
레바논 침공을 개시한 이스라엘군.png
레바논 침공을 개시한 이스라엘군.

 

어떤 민족에게 시간은 아물지 않는 상처의 연대기였다. 유대인의 시간이 바로 그랬다. 기원전 586년 바빌론의 군홧발 아래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고 백성들이 먼 타국으로 끌려갔던 ‘바빌론 유수’는 신앙과 정체성, 공동체의 뿌리가 통째로 뽑혀 나간 대재앙이었다. 서기 70년 로마 군단이 다시금 예루살렘을 짓밟았을 때 도시와 성전은 불길 속으로 사라졌고 백성들은 또다시 유랑의 운명을 짊어졌다. 마사다 고원에서 무릎 꿇기를 거부하며 택했던 비극적 최후는 유대인이라는 집단의 심연에 깊게 파인 흉터이자 세계가 함께 품은 고난의 흔적이다.

 

근대에 이르러서도 잔혹한 수난은 멈추지 않았다. 1905년 러시아 제국을 휩쓴 포그롬(Pogrom)의 광기는 유대인의 일상을 무참히 도륙했고 수많은 이들을 공포의 바다로 내몰았다. 그리고 마침내 인류는 홀로코스트라는 전대미문의 파멸 앞에 마주 섰다. 유대인들은 이를 ‘쇼아’(Shoah)라고 부른다. 대참사라는 뜻이다. 600만 명의 생명이 조직적으로 말살된 이 비극은 문명사 최악의 치욕이다. 유대인이 겪어온 고통의 역사는 인류 전체가 두 손을 모아 엄중히 기억해야 할 참혹한 경고다.

 

바로 그렇기에 지금의 이스라엘은 더욱 준엄한 질타를 받아야만 한다. 박해의 기억을 누구보다 깊이 새긴 나라가 어찌하여 타인의 영토를 찢고, 생명의 물길을 막으며, 타인의 머리 위로 죽음을 비처럼 쏟아 붓고 있는가. 과거 그들이 왜 박해받았는지 묻는 것은 핵심이 아니다. 어떤 민족도 그런 고통을 겪어 마땅한 이유는 없다. 진정한 비극은 따로 있다. 피해의 기억이 어느 순간부터 타인에 대한 무자비함을 정당화하는 ‘살육의 면허증’으로 변질되었다는 사실이다. 역사의 상처가 권력의 칼날로 쓰이고 비극은 가해자의 얼굴을 바꿔 되풀이되고 있다.

 

이스라엘에서 목격했던 사소한 장면들은 그들 멘탈의 기저에 깔린 불길한 징후를 선명히 드러낸다. 남의 자리에 주차한 이웃은 사과 대신 “그건 네 문제지, 내 문제가 아니야”라고 소리를 지르며 돌을 집어던졌고, 수영장에서는 아이를 씻기고 있는 사람을 밀어내듯 비키라고 다그치는 자가 있었으며, 골프장에서 양보를 받아 먼저 나간 이가 막상 앞에서는 태연히 노닥거리며 뒤 팀의 흐름을 막고 있었다. 민족 전체의 본성으로 일반화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런 몹쓸 자기중심적 태도는 오늘날 이스라엘이 주변국에 행하는 폭력적 행태와 전혀 다르지 않다.

 

1993년 오슬로 협정과 1995년의 후속 협정은 분명 평화의 약속이었다. 상호 인정과 공존을 향한 이 중대한 약속은 그러나 헌신짝처럼 내팽개쳐졌다. 서안지구와 동예루살렘에는 수백 개의 불법 정착촌이 독버섯처럼 퍼졌고 75만여 명의 유대인 정착민이 타인의 땅을 잠식했다. 검문소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목을 조였고 가자와 서안 사이의 소통은 차단되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의 대수층은 통제되고 요르단 강은 가로막혔으며 모든 수도망은 점령의 논리에 종속되었다. 땅과 물과 길을 한 손에 틀어쥔 이 체제는 안보라는 이름의 명백한 ‘압제’다.

 

가자지구에서 그 압제는 마침내 인류의 양심을 붕괴시키는 학살로 폭발했다. 무너진 병원, 전기가 끊긴 인큐베이터, 잿더미가 된 잔해 속에서 빵 한 조각을 위해 줄을 선 아이들, 자식의 시신 앞에서 통곡하는 어머니들. 이것이 오늘날 가자의 참혹한 실상이다. 숫자는 인내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 더욱 끔찍한 것은 매일같이 무너져 내리는 인간의 존엄이다. 네타냐후는 전쟁수단으로서의 기아 유발, 반인도 범죄로서의 살인 등의 혐의로 국제형사재판소의 체포영장이 발부된 범죄자다. 이스라엘은 더 이상 ‘피해자 코스프레’를 할 자격이 없다.

 

레바논의 상황도 처참하기 이를 데 없다. 3월 들어 이스라엘은 매일같이 공습을 가하고 있고 수많은 사망자와 백만이 넘는 피란민이 발생했다. 이스라엘의 피란 명령은 레바논 국토의 상당 부분을 뒤덮었고 남부에서는 아파치 헬기와 전투기가 쉼 없이 상공을 휘젓고 있다. 군은 비워진 마을의 집집마다 수색을 벌이며 리타니 강을 향해 진격 중이다. 이미 주요 교량들은 파괴됐고 베이루트에는 가자지구처럼 만들어버리겠다는 경고 전단이 뿌려진다. 지상군까지 대거 투입하며 전선을 넓히고 있는 이스라엘은 숫자를 숨기며 병력을 계속 증강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이스라엘의 전쟁이 한 나라의 머리와 숨통 자체를 겨누는 광기로 치닫고 있다는 점이다. 이스라엘은 개전 첫날 이란의 최고지도자 하메네이를 폭사시킨데 이어 3월 17일 라리자니를 겨냥해 공습을 벌였다. 3월 18일에는 세계 최대 해상가스전인 사우스 파르스까지 타격해 이란의 민생과 경제를 떠받치는 에너지 심장부를 흔들었다. 미국의 고위 안보관료인 조 켄트는 3월 18일 사임하며 “이란은 즉각적인 위협이 아니었으며, 이 전쟁은 이스라엘과 그 로비 세력의 압력 때문에 시작됐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이스라엘은 ‘악의 축’이다.

 

이쯤 되면 이것은 더 이상 안보의 언어로 포장될 수 없다. 자위에는 한계가 있고, 국가의 생존에는 최소한의 절제가 따라야 한다. 그러나 지금 이스라엘이 보여주는 것은 방어가 아니라 응징의 중독이며, 생존이 아니라 타인의 생존권까지 짓밟아도 된다는 위험한 특권의식이다. 박해의 기억을 가진 국가가 그 기억을 절제의 윤리로 승화시키지 못하고 지배와 파괴의 면허로 바꾸고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역사의 피해자가 아니라 현재의 가해자로 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는 침묵이 아니라 가장 단호한 언어를 선택해야 한다.

 

이스라엘과 네타냐후에 강력히 경고한다.

 

광기를 멈추라. 포그롬과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방패삼아 오늘의 폭력을 합리화하는 기만을 멈추라. 네타냐후는 전쟁을 멈추고 반인도 범죄 혐의자로 국제 심판을 받으라.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가로막는 정착촌 확장을 중단하고 봉쇄와 집단처벌의 손을 거두라. 오슬로 협정의 본래 약속으로 복귀하라. 국제법을 필요할 때만 꺼내 쓰는 도구로 타락시키지 말라. 예루살렘의 폐허와 마사다의 비극을 진심으로 기억한다면 그 기억은 이제 ‘절제의 윤리’로 승화시켜라. 바빌론 유수의 눈물을 안다면 타인의 아이들이 폐허 속에서 울부짖게 내버려 두지 말라.

 

미국에 경고한다. 동맹이라는 허울 아래 인류의 양심을 저당 잡히지 말라. 국제사회에 호소한다. 더 이상 침묵으로 이 범죄의 공범이 되지 말라. 그리고 우리 한국에도 말한다. 식민의 아픔과 분단, 전쟁의 참혹함을 겪은 나라로서 우리는 점령과 봉쇄 앞에 결코 침묵해서는 안 된다. 외교는 이익의 각축장이기도 하지만 결국 문명의 최소한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여야 한다.

 

유대인의 수난은 인류가 영원히 기억해야 할 비극이다. 그러나 그 비극을 가장 숭고하게 기리는 유일한 길은 다시는 그 고통을 누구에게도 되풀이하지 않는 것이다. 피해의 기억이 가해의 권리로 치환되는 순간 역사는 구차한 타락의 기록으로 퇴락한다. 이스라엘이 당장 멈추지 않는다면 세계는 더 이상 그들을 박해의 생존자로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또 다른 폐허를 남긴 권력의 이름으로, 타인의 눈물을 강요한 오만한 국가의 이름으로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이스라엘이여, 인간의 길을 걸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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