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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사람을 찾아서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등록일 : 2025.03.14
1961.3.22. 서울 시청앞 광장에서 3만 군중이 2대악법 반대 군중대회를 열었다. [사진출처 - 사월혁명회].png
1961.3.22. 서울 시청앞 광장에서 3만 군중이 2대악법 반대 군중대회가 열렸다. (사진출처=- 사월혁명회)


4월혁명공간의 3대 투쟁은 ‘2·8한미경제협정 반대투쟁’과 ‘2대악법(반공임시특별법과 데모규제법) 반대투쟁’ 그리고 ‘남북학생회담 성사투쟁’이다.

 

그중에서 ‘2대악법 반대투쟁’은 4·19혁명 후 최대 규모의 반정부투쟁으로 다른 투쟁과 달리 전국에 걸쳐 지속적으로 전개됐다. 

 

마치 지금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비상행동)>의 ‘윤석열 즉각퇴진! 사회대개혁! 전국행동’과 <촛불승리전환행동(촛불행동)>의 ‘윤석열 파면! 국힘당 해산! 촛불문화제’가 전국적으로 개최하는 것처럼, 4월혁명공간의 ‘2대악법 반대투쟁’도 대구, 서울, 마산, 부산, 전주, 광주, 대전 등지에서 진행됐다. 

 

또한, 현재 집회 이후 야간에 ‘응원봉’을 들고 시내를 행진하는 것처럼, 4월혁명공간 당시는 ‘햇불’을 들고 시내를 돌면서 투쟁했다.


특히 대구는 전국 최초로 ‘2대악법 반대투쟁 민중 궐기대회’를 개최한 선도(先導) 지역이었다. ‘조선의 모스크바’라 불릴 정도로 대구는 진보 운동의 역사가 깊을 뿐 아니라 6·25전쟁 시기 민간인 집단학살의 아픔이 많은 곳이었다. (참조 ; [사람을 찾아서](30) 지춘란, 무덤도 없는 원혼이여! 천년을 두고 울어주리라.)
 
ㅡ  ‘반공임시특별법’과 ‘데모규제법’에 대한 언론 비판 보도

 

장면 정권은 ‘2·8한미경제협정 반대투쟁’을 보고 민(民)의 정치세력화와 연대투쟁에 대처하기 위해 ‘집회와 시위운동에 관한 법’과 ‘반공을 위한 특별법’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또한 내무부는 1961년 1월 19일, 대공 사찰을 강화하기 위해 반공특별법을 기초 중임을 언급했다. 

 

사월혁명회 전 공동의장인 손병선은 사월혁명연구소(현 사월혁명회 전신) 『한국사회변혁운동과 4월혁명 ②』(한길사, 1990)의 ‘2대악법 반대운동’에서 언론에서 나온 비판 기사를 정리했다.

 

“1961년 3월 8일과 9일, 각 신문을 통해 ‘정부는 <집회와 시위운동에 관한 법률안>을 각의해 상정하기 위해 심의중에 있으며, 내무·법무 양 장관이 <반공을 위한 특별법>을 별도로 구상중에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보도가 전해지자마자 전국의 언론, 혁신정당, 재야단체, 학생, 심지어는 보수야당의 일부까지도 일제히 비난의 화살을 퍼붓기 시작했다.

 

「한국일보」는 3월 9일자 사설에서 ‘공산당이 아닌 사람들을 공산당으로 만들어내는 법률’이라고 비판했고, 같은 날 「대구일보」는 ‘양 법안은 헌법위반’이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민족일보」는 3월 12일자 사설에서 ‘민주주의에 도전하는 장 내각의 폭거’라고 맹공을 가했고, 같은 날 「영남일보」에서는 ‘우리 사회를 일대 공포분위기로 몰아넣을 가능성이 크다’며 반대입장을 표명했다. 그 외에도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에서도 양 법안에 대한 반대의 압장을 분명히 했다.”

 

부산대학교 3학년 당시 4월혁명에 뛰어든 손병선 사월혁명회 공동의장. [사진제공 - 사월혁명회].png
부산대학교 3학년 당시 4월혁명에 뛰어든 손병선 사월혁명회 공동의장

 

특히 손병선은 같은 책에서 혁신계 정당과 진보적 사회단체들이 2대악법으로 존폐의 위기에 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사회대중당, 통일사회당, 혁신당,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중립화조국통일총연맹 등은 국가보안법이 목적범에 대해서만 처벌할 수 있는데 반하여 반공입법은 목적의식에 상관없이 결과적으로 이적행위를 했다는 구실만 서면 처벌할 수 있도록 규정한 데 대하여 이는 혁신계의 정치 운동을 탄압하려는 의도가 명백하다고 판단하고 이에 즉각 성명을 발표하여 2대악법은 ‘4월혁명에 대한 배반이며 반동적 폭거’라고 규탄했다”

 

그리고 청년 학생단체는 규탄과 성명에 그치질 않고 발 빠르게 ‘악법반대전국청년단체공동투쟁위원회’를 3월 11일 결성한다. 

 

결성 선언문에 참가한 단체 순이다. 

 

통일청년단, 민족혁신청년연맹, 통일민주청년동맹, 민주학생통일연맹, 민족통일청년연맹, 전국혁신청년연맹, 조국통일민족전선, 전국피학살자유족회청년학생위원회, 전국학생혁신연맹, 민주민족청년연맹 (『한국사회변혁운동과 4월혁명 ②』)

 

ㅡ 청년·학생단체와 혁신계정당·사회단체의 악법반대 투쟁위원회 결성

 

전국 청년단체들이 3월 11일 결성한 ‘악법반대전국청년단체공동투쟁위원회’ 선언문 일부이다.

 

“자신의 부패와 무능을 ‘반공’이라는 편리한 구호로써 합리화하여 온갖 악을 자행하여 온 이승만이 타도된 지 불과 일년, 혁명청년들의 피와 백골 위에 세워진 장정권이 이제 이승만도 놀라자빠질 희대의 악법을 제정하려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에 직면하여 우리는 의분과 증오를 금할 수 없다.

 

우리는 결코 또 하나의 폭군을 맞아들이기 위하여 독재자 이승만을 하와이로 축출한 것은 아니다.

 

지금 이 시각에 이승만을 무색케 하는 공포정치로써 명맥의 유지를 위해 꾀하는 장정권의 행동을 분쇄하기 위하여 우리는 이제 4월혁명정신으로 돌아가서 결사적으로 투쟁할 것을 선언하고 이에 악법반대 전국청년단체공동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

 

1. 장면정권은 국민기본권을 박탈하는 반민주적이며 반혁명적인 2대악법을 즉시 철회하라. 
1. 정부는 사상의 자유와 학문의 자유를 보장하라.
1. 정부는 관제공산당을 조장하고 국민을 우롱하는 일절의 망동을 즉각 중지하라
1. 정부는 혁명과업을 완수하고 경제부흥을 할 능력이 없으면 스스로 물러나라.
1. 우리는 민족자주독립정신에 입각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기한다. 
1. 우리는 반민주적인 2대악법을 반대하기 위하여 혁명선배들의 뜻을 받들어 거족적인 투쟁을 전개한다.”

 

그리고 3월 14일, 더 광범위한 연대로 악법분쇄를 위해 혁신계 정당·사회단체 대표자들이 ‘반민주악법반대 공동투쟁위원회’를 결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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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들의 '2대 악법' 반대시위

 

또한, 3월 16일 민통련 등 각 학생단체 대표는 ‘악법반대 전국학생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17일 ‘악법반대 전국학생투쟁위원회’를 결성한다. 참가단체이다.

 

전한국학생총연맹, 피양민학생유족회중앙학생위원회, 서울대학교민족통일연맹, 단국대민족통일연맹, 고려대학교민족통일연맹, 외국어대학민족통일전선, 성균관대학교민족통일연맹, 민주학생통일연맹, 전국학생자립경제추진위원회, 민족통일연구소, 전국학생혁신연맹, 동국대학교민족통일연맹, 항공대학민족통일연맹, 중앙대학교민족통일연맹, 계랑단(契郞團), 전국대학교민족통일전선 (『한국사회변혁운동과 4월혁명 ②』)

 

ㅡ 결의문과 성명을 넘어 전국적으로 불타오르는 ‘2대악법 반대 투쟁’ 궐기대회

 

‘2대악법’에 대해서 제일 먼저 대구 경북지구 한국교원노동조합총연합회(교원노조)는 ‘2대악법’ 반대 결의문을 3월 5일 발표한다. 

 

그리고 전국에서 제일 먼저 3월 18일, 대구에서 ‘대구 반민주악법반대 공동투쟁위원회’가 주최한 ‘2대악법 빈대 시민궐기대회’를 민(民)과 학생 1만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개최하고, 이후 시가행진과 햇불데모를 한다.

 

이후 3월 22일, 서울 시청광장에서 ‘반민주악법반대공동투쟁위원회’가 주최한 ‘반공법반대 성토대회 대강연회’를 개최하고 시가행진을 한다. 학생과 민(民)을 포함한 3만여 명은 시가행진 중 경찰과 충돌하여 쌍방 부상이 발생하지만, 대구와 마찬가지로 저녁에는 햇불데모를 전개했다.

 

3월 23일에는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마산에서 ‘마산 악법반대학생투쟁위원회’가 천여 명의 민(民)과 학생이 참여한 ‘악법반대 성토대회’를 개최한다. 같은 날 부산에서도 ‘반민주악법반대 경남학생투쟁위원회’가 부산역 광장에서 오천여 명이 참가한 ‘2대악법철회 궐기대회’를 개최하고 이후 행진과 햇불데모를 한다.

 

그리고 3월 24일에 부산에는 전날(23일) 데모 연행 학생 석방과 악법반대 요구를 하며 경남상고 학생 700여 명이 연좌데모를 한다. 같은 날 대구에서는 ‘2대악법반대 경북학생투쟁위원회’의 ‘2대악법반대 궐기대회’를 대구역 광장에서 3만여 민(民)과 학생이 참가한 가운데 개최하고 어김없이 야간에는 햇불데모을 했다. 또한 ‘대구 대학생민주수호학생회’와 ‘4월혁명학생동지회 경부본부’도 ‘2대악법 저지대회’를 개최한다.

 

3월 25일에도 마산, 부산에서 ‘2대악법 반대대회’ 그리고 전주에서는 혁신계 주최로 오천여 명이 참가한 ‘통일촉진과 2대악법 반대대회’를 개최한다. 

 

',2대 악법', 반대시위.png
'2대 악법'  반대시위

 

이에 정부는 3월 30일 국가보안법 개정안과 집회와 시위운동에 관한 법률안을 의결하고 국회에 제출한다.

 

이에 반발해서 노동계는 4월 1일 대구에서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련) 경북지구연합회에서 조합원 천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2대악법 반대 규탄대회’를 개최한다. 또한, 4월 7일 ‘대구 2대악법반대 정당·사회단체공동투쟁위’는 ‘2대악법 반대 및 구속자 석방요구대회’를 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하고, 이후에도 4월 9일과 11일에도 집회가 계속됐다.

 

부산에도 4월 13일, 14일 4·2데모 구속자 석방과 2대악법 반대 데모를 한다.

 

물론 지금과 같이 태극기 부대 수준의 맞불 우익데모도 있었다.

 

강준만은 『한국사산책 1960년대 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에서 우익데모를 기록했다.

 

“낮부터 마이크를 단 찝차들이 ‘반공법 없는 나라로 가라’는 등 방해구호를 외쳤으며, 멸공의거단, 멸공애국동지회 등의 단체가 반공법지지 전단을 살포하였다. 이런 전단의 하나는 이렇게 주장하였다.

 

‘반공 진영이 일어날 때가 왔다. 공산분자들이 날뛰는 이 땅은 누구의 땅인가? 지금은 위기의 순간이다. 모두 뭉쳐서 공산주의자들을 파멸시키자, 혁신계로 가장한 용공분자들을 때려잡자!’”

 

ㅡ 민족일보, 현장취재와 논단 그리고 사설로 민(民)과 학생을 견인하다.

 

현재와 같은 핸드폰과 SNS 등 선전 홍보물을 거의 볼 수 없는 4월혁명공간에서, 발 빠른 현장취재뿐만 아니라 주요 학생·청년단체와 혁신계 단체의 성명서나 결의문 등의 전문을 볼 수 있는 신문은 ‘민족일보’뿐이었다. 또한 ‘민족일보’는 논단과 사설 등으로 민(民)과 학생·사회단체의 견인차 역할을 하는 선도 신문이기도 했다.

 

민족일보는 “민족의 진로를 가리키는 신문, 부정과 부패를 고발하는 신문, 노동대중의 권익을 옹호하는 신문, 양단된 조국의 비원을 호소하는 신문”이라는 사시(社是)로  4월혁명 공간에서 1961년 2월 13일에 창간됐다.

 

 

민족일보는 “보안법 보강안과 데모규제법”에 대해 4월 5일, 6일, 9일, 10일 4일간에 걸쳐 설문조사를 한 것을 게재했다.

 

설문 내용이다.

 

“①보안법강화는 망민법이 되지 않을까? ②장면내각의 비합리적인 연명책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③보안법을 꼭 보강해야 할 정도로 현하 국내외 정세가 달라졌다고 보는가? ④보안법보강과 데모규제법 등 이대악법은 단일민족간의 감정대립을 격화시키지나 않을까?”

 

민족일보 4.10.jpg
민족일보 설문조사  관련 기사

 

또한, 4월 1일 “데모규제법과 보안법 보강안”에 대해 사설을 게재했다.

 

먼저 ‘장면내각은 집회 시위의 자유마저 앗으려는가? = 「데모」규제법 국회제안에 즈음하여 = ’라는 사설 일부이다.

 

“민주당이 이(李)정권 치하에서 가진 굴욕과 박해를 받아가면서 시위와 집회의 자유를 고창해 왔었고, 급기야 4월혁명이라는 위대한 역사 앞에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획득하기에 이르렀고 바로 그 집회·시위·자유가 현 민주당 정권을 탄생케 하였음은 공지의 사실인 것이다.

 

단적으로 표현해서 이 정권은 「데모」에 의해서 멸망했고 민주당 정권은 「데모」로 인해서 탄생하였던 것이 아닌가?

 

이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얻기 위하여 우리들은 헤아릴 수 없는 피의 대가를 지불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피의 투쟁」은 결코 민주당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며, 관권에 대한 민권의 승리를 위한 생존권의 발로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피로써 획득한 집회시위의 자유를 횡재한 현 정권은 그 피에 보답하고 무한한 채무를 청산하는데 총력을 기울여야 하며, 그 방법은 오직 그와 같은 자유를 계속 보호하는 한편 각 분야에 걸친 선정을 시행하는데 있음은 재언을 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제 「데모」로 탄생한 정권이 집회시위를 제한하다니 이 무슨 망발인가?”

 

민족일보 4.1-2.jpg

 

ㅡ 보안법 보강은 야당을 탄압하기 위한 흉계다

 

같은 날짜(4월 1일) 민족일보 ‘보안법 보강은 관제공산당을 만들어 야당을 탄압하기 위한 흉계다.’라는 사설 일부이다.

 

“동 개정안을 보면 현행법조문을 전면적으로 보강 개정하는 외에 새로이 제17조에 「정보제공자에 대한 상금조항」을 신설한바 통틀어 동 개정안은 「반공법안」의 재판이라 할 수 있고 다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단행법을 제정하는 대신에 현행법의 개정이라는 형식을 취하였을 따름이다.

 

본 법안에 대한 세절과 축조검토는 다시 지면을 빌어 이를 논하고자 하거니와 동 초안 중 몇 가지만을 여기서 검토한다면, 첫째로 제3조 제5호의 신설규정 「반국가단체(구성원을 포함한다)나 그 활동을 찬양 고무 조장 또는 동조하는 행위를 한 때에는 (10년 ○)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전단에 규정된 행위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를 조직하거나 이에 가입한 자도 같다」는 조항은 반공법안 제4조 제1항의 규정을 답습 또는 그것을 넘어서 보다 더 강화한 조항이니 이 규정이야 말로 언론 사상 결사의 모든 기본적 자유를 근본적으로 제약하는 조문이다. 

(중략)

법안 제5조 1항의 「문서 도화 기타의 표현물을 제작 복사 은닉 운반 반포 또는 소지한 자」의 처벌규정 역시 「반공법 제4」조 제3항, 4항」 문항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며, 학문연구의 자유를 말살할 위험성이 내포되어있다 아니할 수 없고 특히 제17조의 「정보제공자에 대한 상금 등 규정」은 상금을 타기 위한 공산당의 조작을 조성할 우려가 있는 규정이며, 이러한 규정이 없는 현재에 있어서도 정적을 공산당으로 조작모략하여 가해하는 실정하에 「상금제도」를 악용하여 「관제공산당」을 함부로 만들어 내는 사태가 발생하리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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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일보  사설 (1961.4.1)

 

전국적으로 불타오르는 ‘2대악법 반대투쟁’은 혁신계의 대중적 역량을 키우는 데 일조했다. 청년·학생단체와 혁신계정당·사회단체는 투쟁 속에 단련되고 연대를 통해 4월혁명정신을 고취해 나갔다.

 

이에 장면 정부는 반공주의와 냉전 이데올로기로 색깔을 덧씌우려고 하였으나, 오히려 학생과 청년 그리고 혁신계의 반발만 불러오고 통일운동은 더욱 활발해진다.

 

그 단적인 예로 청년·학생단체와 혁신계정당·사회단체의 단체명에는 대부분 ‘통일’이라는 단어가 들어갔다. 6·25전쟁 정전 이후 겨우 7년 정도 지난 세월이었기에 민(民)의 가슴에는 ‘통일’이 지상과제였다.

 

ㅡ 양키 고 홈!(Yankee Go Home!)

 

5‧16 군사쿠데타 후 ‘2대악법’을 반대하였다는 이유로 유일하게 ‘경상남도 반민주악법반대 학생공동투쟁위원회사건’이란 죄목으로 부산대학교 ‘민족통일연구회’ 대표인 손병선은 5년 형을 받는다.

 

손병선의 ‘2대악법’ 반대 투쟁 증언이다.

 

“1961년 3월 23일 오후 3시경 부산역 광장에서 약 300여 명의 고등학생과 대학생이 참가한 가운데 ‘2대악법반대 성토 궐기대회’를 개최하였다.

 

나택균(사월혁명연구소 회원, 1990년 작고)이 사회를 담당하고 최석환이 ‘2대법을 제정하려함은 이 나라 민주주의를 말살하려는 처사요 나아가서는 국가 민족을 위하여 간 4‧19의 충혼을 모독하는 처사다’라는 요지의 대회사를 했다.

 

저도 ‘2대법을 제정하려 함은 집권의 장기화를 꾀하려는 것이다. 내 형제 부모들은 반공이란 이름 아래 무참히 쓰러졌다. 잘살기 위해서는 우리는 2대법의 통과를 반대하여야겠다’라는 연설을 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2대악법을 철회하라. 배고파 우는 백성 악법으로 살릴소냐’, ‘학원을 좀먹는 악법을 철회하라’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하며 대청동 민주당사 앞에서 약 20분간 연좌데모를 하고 경남도청 앞을 거쳐 시청 앞에서 해산했다.

 

4월 13일은 부산시 중앙동 노동회관 앞 광장에서 부산공고, 경남여상고, 배정고교 등 시내 학생 약 1,500명을 동원하여, 저는 ‘2대악법은 국민의 기본권리를 박탈하는 조항이 많으므로 우리는 결사 반대한다’라는 요지의 연설을 하였다.

 

또한, 4월 16일은 상경하여 서울 삼일당에서 ‘반민주악법반대 공동투쟁위원회’ 경남학생대표로 ’2대악법반대‘ 강연회에 참석하여 ’2대악법‘은 장기집권화를 위한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였다.”

 

황금수가 3월 22일, 서울 시청광장에서 ‘반민주악법반대공동투쟁위원회’가 주최한 ‘반공법반대 성토대회’와 ‘시가행진’에 참가한 증언이다.

 

“저는 그때 상당 논의들이 있었는데, 그 논의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았어요. 지금 생각을 해보면. 서울 시청 앞에서 성토대회를 할 때 경찰이 단상을 점령하려고 하는 이런 기미가 보여서 거기에 대해서 준비를 해야 한다고 했어요. 

 

경찰이 단상을 급습하여 점령해서 완전히 깽판을 놓으려고 그랬는데. 이게 경찰이 오히려 거꾸로 철저히 당해버려서요. 그때 힘깨나 쓰는 청년들이 그걸 막았어요. 

 

경찰이 덤벼드니까 그 장면을 보고 막 군중들이 ‘와’ 소리가 나오고. 군중들이 흥분해서 그것이 바로 시위로 말이지 돌변해버리는….

 

그래서 광화문에서 종로로 말이야, 동대문까지 가면서 그때 반미구호가 막 튀어나오고 그랬어요. ‘양키 고 홈’이라고.”


※ 격주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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