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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람을 찾아서 : 4·9통일열사 도예종의 아내 신동숙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등록일 : 2026.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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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전쟁이 시작된   1939년 9월 1일 을  제2차 세계대전의 출발점으로 보는 것은 유럽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서구 역사관의 한계를 보여준다. 즉 서구 중심 서술은 유럽 패권 다툼인 독일과 영·프 그리고 소련을 세계대전의 본질로 파악하는 오류에 빠지기 쉽다.
제2차 세계대전은 유럽에서 전쟁이 시작되기 훨씬 전인 1931년 9월 18일, 일본 관동군이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중국 동북지역에 대한 침략과 점령으로 아시아 대륙침략이 본격화되고 1937년 7월 7일에 중일전쟁으로 전면화된다. (본문 중에서)
사진은  중국 선양을 침략하는 일본 제국 관동군. 출처 =위키백과

 

제2차 세계대전의 일반적인 세계사 서술은 1939년 9월 1일, 독일군의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본다. 이어 폴란드와 동맹 조약을 체결했던 영국과 프랑스가 9월 3일 독일에 선전포고하면서 유럽전쟁은 본격적인 세계전쟁으로 확대되었다. 

 

따라서 일반적 서술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은 1939년 9월 1일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2,175일 동안 계속되었으며, 일본의 항복 문서가 미주리호 함상에서 서명한 9월 2일까지로 계산하면 2,193일에 이른다.

 

그러나 이 날짜를 제2차 세계대전의 출발점으로 보는 것은 유럽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서구 역사관의 한계를 보여준다. 즉 서구 중심 서술은 유럽 패권 다툼인 독일과 영·프 그리고 소련을 세계대전의 본질로 파악하는 오류에 빠지기 쉽다.

 

사실 제2차 세계대전은 유럽에서 전쟁이 시작되기 훨씬 전인 1931년 9월 18일, 일본 관동군이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중국 동북지역에 대한 침략과 점령으로 아시아 대륙침략이 본격화되고 1937년 7월 7일에 중일전쟁으로 전면화된다.

 

중국·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침략전쟁이 유럽전쟁보다 먼저 시작된 것이다.

 

따라서 1939년을 세계대전의 출발점으로 삼을 때 중국·동아시아에서 이미 진행되고 있던 일제의 침략전쟁에 맞선 저항과 항일투쟁의 역사는 제대로 조명하지 못하는 한계에 빠지게 된다. 즉 유럽전쟁이 세계대전으로 중국·동아시아 전쟁은 전사(前史)로 밀려난다. 이는 단순히 전쟁의 시작 연도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대전의 역사를 유럽전쟁에 맞추어 서술하는 과정에서 아시아 민중이 겪은 일제 침략과 희생, 저항의 항일역사가 상대적으로 가려질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일제의 식민 지배에 맞서 독립을 쟁취하려 했던 조선 인민의 자주독립운동과 항일투쟁을 세계대전의 역사와 분리되는 오류로 이어질 수 있다. 조선의 독립운동 세력이 중국의 항일세력과 연대하여 일본에 맞서 싸운 역사는 조선인의 독립투쟁이 동아시아의 반침략전쟁과 반파시즘·항일 투쟁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당당한 주체였다. 

 

제2차 세계대전은 열강의 패권 다툼만이 아니라, 침략에 맞선 민중의 저항과 식민지 민족의 해방투쟁까지 포괄하는 세계사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점을 1939년으로 한정하지 않고 1931년 만주사변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한·중·일 3국의 1930~40년대 전쟁에 대한 명칭의 차이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 그리고 1939년 2월 하이난섬 침략으로 이어진 중국 전선은 이후 추축국과 연합국 간 유럽 전선과 세계대전의 실질적 시작이었다.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는 1931년부터 1945년까지의 전쟁을 ‘14년 전쟁’으로 본다. 특히 중국은 1937년 7·7사변 이후의 ‘전면 항전’과 1931년 9·18사변 이후의 ‘국부항전’을 포함하여 1931년부터 1945년까지의 ‘14년 항일전쟁’으로 역사적 범위를 확장했다. 서구 역사학계에서도 일본의 중국 침략을 제2차 세계대전의 중요한 출발점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한중일 3국공동역사편찬위원회의 『한중일이 함께 쓴 동아시아 근현대사』(휴머니스트, 2012)에 나오는 1930~40년대 한·중·일3국의 전쟁을 일컫는 명칭이다.

 

“1930~40년대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일어난 전쟁을 일컫는 이름은 시대별·나라별로 서로 다르다.

중국에서는 보편적으로 ‘항일전쟁’이라고 부른다. 이는 1937년 7월 7일~1945년 8월 15일 중국 인민이 일본 군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싸운 전쟁을 가리키며 ‘전면(全面)항전’이라고도 한다. 1931년 9·18사변(만주사변)부터 1937년 7·7사변(중일전쟁)까지의 항일투쟁은 ‘국부(局部)항전’이라 부른다. 최근 중국 학계에서는 ‘국부항전’과 ‘전면항전’을 ‘항일전쟁’으로 통칭하는 학자도 있는데, 그 시기는 1931년 9월 18일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로 잡는다.

전시 일본에서는 ‘지나(支那)사변’이라고 불렀다. 전후에는 일반적으로 ‘일중전쟁’ 또는 ‘일중15년전쟁’이라고 하며, 그 시기는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부터 1945년 8월 15일 ‘종전’까지이다.

‘태평양전쟁’은 1941년 12월 8일 진주만 사건 이후 중국·미국·영국 등이 동맹을 맺어 일본·독일·이탈리아에 선전포고한 것을 가리킨다. 또한 전후 중국과 구미 학계에서는 ‘태평양전쟁’을 ‘제2차 세계대전’의 일부인 ‘세계 반(反)파시스트 전쟁’의 동방 전선으로 본다.

‘대동아전쟁’은 ‘태평양전쟁’을 가리키던 이름이다. 도조 내각은 '금번 대미영 전쟁 및 금후 정세의 추이에 따라 일어날 전쟁은 지나사변도 포함해 대동아전쟁으로 부른다. 대동아전쟁으로 부르는 것은 대동아 신질서 건설을 목적으로하는 전쟁이라는 의미이지 전쟁 지역을 대동아로 한정한다는 의미가 아니다'라고 분명하게 밝혔다. 

또, 전후 일본에서는 ‘대동아전쟁’을 ‘태평양전쟁’이라 불렀지만 최근에는 ‘아시아·태평양전쟁’이라는 명칭이 널리 사용되고 있다.”

 

한·중·일 3국의 전쟁을 일컫는 명칭의 차이는 아시아 민중이 겪은 일제의 침략과 경제 약탈에 맞선 저항과 항일투쟁 및 반파시스트의 역사를 명확하게 밝히는 것이다.

 

중국의 대일전쟁 승리는 ‘참승(慘勝, 참담한 승리)’ 

 

일본은 8월 15일 연합국의 포츠담선언을 수락하고 항복했다. 사실 8월 15일은 일왕이 포츠담선언을 수락했다고 일본인에게 라디오 방송을 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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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9.3  중국 전승절  80주년  기념 열병식.   사진출처= 연합뉴스 TV

 

일본이 8·15를 종전기념일로 삼은 것은 패자의 굴욕을 지우고 희생자 추모를 위한 날임을 강조하기 위해 정부와 언론이 조작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미국과 소련의 대일 전승기념일은 9월 2일이며, 중국과 몽골은 9월 3일을 항전 승리기념일로 삼는다. 여기에 러시아는 매년 5월 9일에 나치 독일의 항복을 받은 날을 대조국전쟁(제2차 세계대전) 승전 기념식을 진행한다.

 

중국은 연합국의 일원으로 일본에 맞선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오랜 전쟁으로 국토는 황폐해지고 경제와 생산 기반은 크게 파괴되었다. 수많은 인민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었으며, 전쟁으로 인한 빈곤과 식량 부족 속에서 고통받아야 했다. 

 

일본의 항복은 전쟁의 종결을 의미했지만, 중국 인민에게 그것이 곧바로 평화와 안정된 생활의 회복은 아니었다.

 

교토대학의 이시카와 요시히로 교수는 『중국 근현대사 3―혁명과 내셔널리즘, 1925~1945』(2013)에서 당시 중국의 전쟁 피해를 설명했다.

 

“현재 중국에서는 1937년부터 1945년까지 8년에 걸친 전쟁으로 중국 군인과 민간인 사상자 3천5백만 명 이상, 재산 손실 600억 달러 이상으로 추산하고 있다.

일본군의 사망자는 약 47만 명으로 추정된다.

오로지 중국인을 굴복시키기 위한 전쟁과 그에 따른 무수한 만행과 살육을 저지름으로써, 일본은 그때까지의 중일 관계사를 근원적으로 붕괴시키는 거대한 불행을 만들어 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시카와 요시히로 교수가 추산한 수치는 일제의 침략과 수탈로 파괴된 중국 인민의 삶과 인민이 겪은 전쟁의 규모와 일제의 무수한 만행과 살육의 참혹함을 보여준다. 

 

중국은 ‘14년 전쟁’을 통해 민족의식과 내셔널리즘이 고양되고 인민의 각성과 신장을 촉진했지만, 대일전쟁 승리는 ‘참승(慘勝)’이었다.

 

그럼에도 중국 인민의 끈질긴 저항과 해방의 열망에 더해 중국공산당 마오쩌둥의 「지구전론(持久戰論)」이라는 뛰어난 전략과 지도력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승리로 이끈다. 마오쩌둥은 중일전쟁이 시작되자 전쟁의 성격과 전쟁을 둘러싼 국내외의 정세, 적과 아군의 전력 비교 등을 분석했다. 

 

마오쩌둥은 일본이 군사력과 산업력이 강하고 준비되어 있으나 인구와 영토는 작고, 침략이라는 도의적 불의를 지녔다고 분석했다. 반면 마오는 중국이 경제와 산업이 약하고 무장의 수준은 낮으나 인구와 영토는 넓고, 혁명적이고 정의로운 방어 전쟁으로 보았다. 

 

마오는 적의 침공과 아군의 방어 단계(적극적 방어), 적과 아군의 전선 교착단계(대치), 적의 피로와 아군의 반격(적극적 반공세)라는 3단계로 나누는 「지구전론」이라는 군사전략을 펼쳤다. 그는 광대한 영토와 인적 자원을 활용한 시간 끌기 즉 지구전만이 약자가 강자를 무너뜨릴 수 있는 유일한 필승 전략으로 마침내 승리를 이끌었다.

 

서로 다른 군사적 기반과 조건 속, 조선 독립운동과 항일투쟁 

 

조선 민족 또한 일제의 군국주의 침략에 맞서 세계 반파시즘 투쟁의 당당한 주체로 서 있었다. 

 

조선은 일제의 패망과 조국의 독립을 준비하며 국내외에서 다양한 항일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국외에서는 중국 각지와 만주, 소련 접경지역을 무대로 항일 무장투쟁과 독립운동이 이어졌으며, 국내에서도 비밀결사와 공산주의운동, 노동·농민운동 등을 통해 일제의 식민 지배에 저항하고 해방 이후의 새로운 국가 건설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전개되었다.

 

국외의 대표적인 항일 무장세력으로는 충칭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 중국 화북지역의 조선독립동맹과 그 산하 무장부대인 조선의용군, 그리고 만주에서 활동하다 소련으로 이동한 동북항일연군 출신 조선인 대원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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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용대 성립 기념사진(1938년 10월10일)
1942년 7월, 김원봉(金元鳳)이 창설한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가 중국 태항산에서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으로 개편되었다. 조선의용군은 중국 관내에서 중국공산당과 함께 일제와 싸웠다.  출처= 월드코리안

 

한국광복군은 김구(1876~1949)가 주석으로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대였으며, 김두봉(1889~1958)이 주요 지도자로 활동한 조선독립동맹은 1942년 중국 화북에서 결성되어 조선의용군을 이끌었다. 한편 김일성(1912~1994)을 비롯한 동북항일연군 출신 조선인 대원들은 소련으로 이동한 뒤 소련 극동군 산하 제88국제여단에서 활동하며 항일투쟁의 경험을 이어갔다. 이들 세력은 활동 지역과 정치적 노선, 군사적 기반에서 차이가 있었지만,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조선의 독립을 추구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국내에서도 여운형(1886~1947)이 1944년 조직한 조선건국동맹이 일제의 패망과 조국의 해방에 대비해 비밀리에 조직망을 확대하고 국외 항일세력과의 연대를 모색했다. 이와 함께 이재유·이관술·박헌영 등과 관련된 공산주의운동 및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노동운동을 비롯한 여러 사회운동의 흐름이 이어졌다. 이들 운동은 조직과 활동 시기, 지향에서 서로 차이가 있었지만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고 노동자와 인민의 권리를 추구하며 해방 이후의 사회를 구상했다는 점에서 당시 국내 항일운동의 중요한 한 축을 이루었다. 

 

이처럼 조선의 독립운동은 특정한 한 조직이나 한 인물의 활동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일제 강점하라는 특수상황에서 국내외에서 중국 국민당 정부, 중국공산당, 소련이라는 서로 다른 군사적 기반과 관계를 맺으며 서로 다른 조건 속에서 활동하면서 해방을 준비했다. 

 

그뿐 아니라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일제의 억압이 극에 달한 상황에도 각계각층은 일제에 대한 저항을 포기하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태업과 물자 소실로, 농민들은 물자 은닉 및 농경 포기로, 학생들은 여러 비밀결사 조직과 징집 거부·학병 탈출 등의 방법으로 일제에 맞서나갔다. 

 

노동자들은 1941년 2월 평북 후창광산 광부들이 파업했고, 1943년에는 나진부두 노동자들이 민족 차별에 항의하는 파업을 벌였다. 성진고주파공장 노동자들도 파업을 벌였다. 그러나 이 시기 노동자들의 파업은 경찰에 의해 즉시 진압, 검거되었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종종 태업을 선택했다. 1940~1943년 문평제련소 노동자들은 은밀한 방법으로 태업을 진행해 생산량을 떨어뜨렸다. 이런 파업과 태업은 외부로부터의 공작이나 내부 각성한 노동자들의 조직적 결정에 따른 파업이 아니라 일제 말기 패전의 기운을 읽고 개별적으로, 이심전심으로 보여준 행동들이었다.

 

물론 더 적극적인 저항도 있었다. 1942년 동방광산 광부 400여 명은 작업을 거부하는 한편 광산 사무실, 선광장 등의 시설물을 파괴하는 폭동을 일으켜 한 달 동안 휴업할 정도의 타격을 입혔다. 남포제련소와 이원광산에서도 기계와 설비를 파괴하는 투쟁이 전개되었다. 은성탄광에서는 노동자들의 방화로 저탄장에 1년 동안 불탔다. 평양철공 노동자들과 함북 계림탄광 노동자들은 무장투쟁을 계획하기도 했다. 

 

그 외에 여러 곳에서 화재와 폭발 사건이 있었다. 조선항공회사와 삼척탄광의 화재, 본궁화학공장에서는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여러 차례 가스탱크 폭발 사고가 일어났다. 1943년 여름에는 회령광산의 탄광 인입선 폭파 사건이 발생했으며, 역 구내에 있던 마초 160톤이 불에 탔다. 

 

이러한 사례들은 일제 말기 노동자들의 저항이 임금과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투쟁을 넘어, 전시 생산체제와 군수산업에 타격을 가하는 행동으로까지 나아갔음을 보여주었다. 다만 이를 하나의 통일된 조직이 주도한 투쟁이 아니라 극심한 전시 동원 체제와 식민지 노동 통제 아래에서 다양한 형태로 표출된 노동자의 저항이었다.

 

저항은 노동자가 있는 공장과 광산에만 머물지 않았다. 

 

농민 학생들의 자주 해방 투쟁

 

농민들은 늘 식량 부족, 물자 부족에 시달렸다. 

 

농촌은 징용으로 일손이 부족한 상황에서 일제의 수탈로 수확물은 공출로 다 빼앗기고 배급까지 통제당했다. 또한 일제는 ‘애국반’으로 촘촘히 조직된 체제하에서 집단행동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애국반은 동원 가능한 자원이 빈약했던 조선에서 총독부가 감시·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최하부 말단 조직이었다. 

 

하지만 농민들은 일제의 촘촘한 상호 감시 체제 아래서도 수확물 은닉과 농경 포기라는 개별적·집단적 불복종으로 저항했다. 일부 의식 있는 청년들은 미군 폭격기의 출몰과 집에 있는 놋그릇까지 가져가는 이런 물자 부족 상황을 보고 일제가 패망의 길로 간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청년들은 징용, 징병을 피해 산으로 들어갔으며 무장투쟁을 준비하기도 했다.

 

일제 패망 움직임은 정보를 더 많이 접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더욱 현저했다. 학생들은 여러 비밀결사 조직과 징집 거부, 학병 탈출 등의 방법 등으로 일제에 맞섰다. 특히 일제의 전시통제가 강화되었지만,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비밀결사를 조직해 민족의식을 키우고 조국의 독립을 모색했으며, 때로는 동맹휴학과 같은 집단행동으로 식민통치에 맞섰다.

 

학생들의 항일저항도 노동자와 농민의 저항처럼 광주, 대구, 부산, 서울 등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광주서중에서는 1938년에 결성된 독서회가 발전해 1941년 무등회(無等會)로 개편·발전했다. 무등회는 일제의 식민통치에 반대하며 독립을 지향한 비밀결사였다. 1943년 5월 무등회 관련 학생들에 대한 검거가 시작되자, 광주서중 학생들은 학병 지원과 창씨개명, 일본어 상용, 징병제도 등에 반대하며 동맹휴학에 나섰다. 결국 350여 명이 검거되었고, 일부 학생들은 기소되거나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검거된 학생들은 가혹한 취조와 고문을 당했으며, 여러 학생이 옥중에서 목숨을 잃었다. 

 

대구사범학교는 1939년 10월에 조직된 윤독회가 발전해 1941년 2월 다혁당(茶革黨)을 조직했다. 다혁당은 문학, 학술, 미술 등 각 분야에서 실력을 키우고 조국독립을 촉진하기 위해 결사투쟁한다는 목표를 내걸었다. 그러나 1941년 7월 관련 활동이 발각되면서 졸업생과 재학생뿐 아니라 교사와 학부모 등 300여 명이 검거되었다. 이 가운데 34명이 최고 8년, 최하 2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부산 동래중학교에서도 1940년 결성된 독서회가 1941년 겨울 조선독립당(朝鮮獨立黨)으로 발전했다. 이들은 1943년 졸업 이후 본격적인 행동을 준비했으며, 1944년에는 일본군 탄약고와 군용열차가 통과하는 구포다리의 폭파, 총독 처단 등을 계획했다. 학생들은 계획이 실패하면 일본군에 입대한 뒤 연합군 진영으로 탈출해 독립운동을 이어 간다는 방안도 마련했다. 그러나 연계 조직이 1944년 7월 발각되면서 조선독립당도 같은 해 8월 검거되었다. 당원들은 고문과 옥고를 겪었으며, 관련 인물 가운데는 옥중에서 병사한 이들도 있었다. 

 

서울에서는 경복중학교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중앙중학교 출신 등 서울·경기 지역 학생들이 참여한 항일비밀결사 흑백당(黑白黨)이 1942년 4월 조직되었다. 흑백당은 비밀전단 배포와 무기 확보를 추진했으며, 친일파 처단과 일본인 집단 거주지 방화 등을 계획했다. 처단 대상으로 이광수와 최린 등 친일 인사들의 명단을 작성하고, 무기를 확보해 은닉하기도 했다. 일제가 학병 징집을 추진하자 흑백당은 학병을 거부하고 중국 충칭의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망명해 광복군에 합류하거나, 국내에 남을경우 독립군의 국내 진공에 호응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러나 1942년 10월 조직이 발각되면서 해외 탈출을 시도한 단원들도 베이징 등지에서 체포되었다. 체포된 12명은 혹독한 고문을 당한 뒤 재판에 넘겨져 징역 3년에서 8년을 선고받았다. 

 

이처럼 일제 말기 학생들의 항일운동은 서울의 흑백당과 부산의 조선독립당뿐 아니라 대구사범의 다혁당, 광주서중의 무등회 등 여러 지역에서 비밀결사의 형태로 전개되었다. 이들 조직은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독립사상을 연구하는 데서 출발해, 비밀전단 배포와 학병 거부, 무장투쟁 준비, 해외 독립운동 세력과의 연계 등을 모색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은 가혹했으며, 체포 검거된 학생들 가운데는 고문 후유증과 옥중 생활로 목숨을 잃은 이들도 있었다. 그런데도 소규모 학생 비밀결사들은 전국 각지에서 항일운동의 명맥을 이어 갔다. 

 

불령선인(不逞鮮人)이야말로 조선인 다운 조선인

 

일제는 일본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조선인을 ‘불령선인’이라 낙인(烙印)찍어 탄압했다. 특히 일제는 조선 민족의 언어와 문자 그리고 민족의 관습과 혼으로 살아가려고 한 사람에 대해 불령선인이라 했다. 

 

하지만 조선어학회는 불령선인의 우리말과 우리글을 연구하면서 1933년 한글맞춤법통일안 발표, 1936년 조선어사전 편찬 시작, 1940년 외래어표기법 통일안 발표 등 민족문화를 지키기 위해 줄기차게 달려왔다.


1942년 10월 일제는 조선어학회 활동을 민족운동으로 간주하고 독립운동과 연결해 조선어학회사건을 만들어 탄압했다. 

 

조선어학회 「예심 종결 결정문」은  조선어학회의 우리말 지키기 운동이 갖는 의의를 잘 표현하고 있다.

 

“민족운동의 일 형태로서의 소위 어문운동은 민족 고유의 어문의 정리 통일 보급을 도모하는 하나의 문화적 민족운동임과 동시에 가장 심모원려를 품은 민족 독립운동의 정진 형태다.
(중략)
이 같은 어문 운동은 민족 고유문화의 쇠퇴를 방지할 뿐만 아니라 그 향상 발전을 가져오게 하고, 문화의 향상은 민족 자체에 있어서 다시 강한 반성적 의식을 갖게 함에 이르게 하고, 강렬한 민족의식을 배양해서 약소민족에게 독립 의욕을 낳게 하고 정치적 독립 달성에의 실력을 양성하게 하는 것으로서 이 운동은 18세기 중엽 이래 구주 약소 민족이 반복적으로 행하여온 성과에 비추어 세계 민족운동사상 가장 유력하고 또한 효과적인 운동으로 지목하기에 이르렀다.”

 

일제가 조선어학회 사건에 적용한 함흥지방법원의 「예심종결결정서」 법조문은 조선어학회 학자들에게 ‘국체 변혁’을 목적으로 한 결사 조직 및 수행을 처벌하는 치안유지법 제1조와 제5조를 적용했다. 일제 법제에서 ‘국체 변혁’이란 천황의 절대적 통치권에 변경을 가하고 식민지 영토권으로부터 이탈하려는 일체의 행위를 의미했다.

 

즉, 일제 사법 당국이 조선 말과 글을 연구하고 사전을 편찬하는 행위를 일제 제국주의 체제를 흔들고 조선의 독립을 도모하는 가장 근본적인 전복 투쟁으로 법률상 공식 규정한 것이다. 즉 일제의 사법적 판단은 조선의 독립운동과 항일투쟁은 무장 전선뿐만 아니라 언어와 문화, 양심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일제 파시즘의 뿌리를 흔드는 전방위적 자주 해방투쟁까지 포함했다.

 

조선어학회의 활동은 단순한 학술 연구를 넘어 민족 고유의 언어를 정리하고 보급함으로써 조선인의 문화와 정체성을 지키려는 노력이었다. 조선 말과 글을 연구하고 사전을 편찬하려던 활동마저 독립운동의 혐의로 몰았다는 사실은, 일제가 조선인의 언어와 민족의식을 얼마나 경계했는지를 보여준다.

 

결국 ‘불령선인’이라는 말은 식민 권력의 시선에서 만들어진 낙인이었다. 그러나 그 낙인이 가리킨 사람들은 단순히 일제 명령을 거부한 사람들이 아니라 언어와 문화,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려 했던 사람들이었다. 일제가 불령(不逞)하다고 규정한 그들의 행동은 오히려 식민지 조선에서 인간다운 삶과 민족적 존엄을 지키려는 독립운동가요 항일투사였다.

 

전시 총동원 체제 아래에서 일제가 벌인 창씨개명 강요, 신사참배 및 궁성요배, 황국신민서사 암송, 조선어 사용 전면 금지, 조선어학회 사건 등 문화 말살 공작은, 단순한 식민지 수탈을 넘어 배달 민족의 ‘혼’을 통째로 파괴하려는 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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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 철폐 민주일반연맹  비정규직 노동자 1000인 선언
사진출처=전국민주일반연맹  2023.8.14

 

국가보안법으로 살아난 일제 치안유지법이 도예종과 4·9통일열사를 죽이다

 

일제가 독립운동가와 항일투사를 탄압하기 위해 휘둘렀던 파쇼적 무기인 ‘치안유지법’은 해방 후 사라지지 않고 ‘국가보안법’이라는 이름으로 되살아났다. 

 

1948년 단독정부 수립 이후 「반민족행위자처벌법」이 가동되자, 일제 청산의 위기에 처한 이승만 친일 사대 반민족 세력은 미국의 방조와 여순항쟁을 구실로 1948년 12월 1일 국가보안법을 급조해냈다.

 

이승만 친일 사대 반민족 세력의 목적은 명확했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처단과 민족적 정당성을 묻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정국을 사상 검증의 반공 정국으로 반전시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고자 했다. 이를 위해 해방 직후 처벌받아야 할 친일 반민족행위자들이 전가보도(傳家 寶刀)로 야만적 유산인 국가보안법을 불러낸 것이다 

 

제정 당시 집권 세력 자신도 ‘형법 제정 전 건국 초기의 임시 비상조치’라 전제했던 이 법은, 이후 국가정보원과 공안 기구의 손에서 표현과 사상의 자유를 짓밟고 보수 독재정권을 유지하는 도구로 전락했다.

 

일제가 치안유지법으로 조선어학회와 독립운동가, 항일 투사를 ‘국체 변혁’이라 탄압했듯, 이승만·박정희 정권은 국가보안법을 전면에 내세워 4·19 혁명 공간에서 분단을 극복하고자 했던 도예종과 4·9통일열사 그리고 혁신계의 ‘자주·민주·통일’운동을 반공으로 몰아 탄압했다. 

 

일제의 식민 통치 법제와 냉전 기득권의 결합이야말로 한반도 자주·민주·통일을 가로막은 가장 잔혹한 역사적 비극이었다.

 

국가보안법의 탄생은 단순한 법률 제정의 역사가 아니라, 일제 식민통치의 법적 유산과 해방 이후 친일세력의 재편, 그리고 반공주의를 통한 국가권력의 형성과 맞물려있다. 

 

일제의 치안유지법을 재이용한 국가보안법과 공안 통치 기구는 마침내 유신독재 시절 한국 현대사 최대의 고문 조작 사건인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사건 이라는 비극을 낳았다. 

 

세계총서22 편집부는 『공안사건기록』(세계, 1986)에서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인혁당재건위)의 주요 죄명으로 국가보안법 위반을 들었다.

 

“1974년 9월 7일 비상고들군법회의(재판장: 이세호)는 인혁당재건위 관계 21명, 민청학련 관계 27명, 일본인 2명 등 50명에 대해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에비음모, 내란선동 등의 죄명으로 선고공판을 열고 사형 8명(1심 9명), 무기징역 9명(1심 17명), 12년 이상 20명(1심 33명) 등을 선고하였다.”

 

그리고 도예종과 4·9통일열사는 대법원 양형 확정 불과 18시간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일제가 자기 언어와 혼을 지키려는 독립운동가와 항일투사를 ‘불령선인’이라 규정하고 치안유지법으로 탄압했듯, 유신 파쇼 정권은 외세의 분단을 극복하고 민족의 자주적 통일을 주창한 도예종과 4·9통일열사를 국가보안법으로 도륙했다. 그러나 잔혹한 고문과 조작 그리고 사형으로도 4·9통일열사가 품었던 ‘자주·민주·통일’의 불꽃을 끌 수는 없었다.

 

해방 후 초강대국의 냉전 논리에 굴하지 않고 4월혁명공간에서 신동숙 여사의 부군 도예종과 4·9통일열사는 조선의 독립은 외세에 의해 ‘주어진 해방’이 아니라 조선의 안과 밖에서 피 흘려 싸운 조선 인민의 자주적 해방 역량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주적 해방 역량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도예종과 4·9통일열사는 불멸의 사상인 ‘자주·민주·통일’과 ‘외세 배격과 자주적 평화통일’을 주창했다.


※ 격주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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