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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집행부가 최근 제시한 정치방침은 ‘노동 중심의 진보정당 건설’을 강조하고 있다. “민주노총은 농민, 빈민 등 진보 민중세력 및  진보정당과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구축하고 노동중심성이 확보될 수 있도록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추진한다.”(민주노총 정치방침(초안))가 그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정작 ‘노동중심성’의 의미는 무엇인지가 불명확하다. 단순히 “노동자의 이해와 요구를 실현”(민주노총 ‘정치방침 해설’) 한다는 표현만으로는 너무 추상적이기에 좀 더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


‘노동중심성’은 어떤 정당에 노동자들이 많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며, 무엇보다도 노동자계급의 이익에 복무하는 당이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 시기 한국 노동자계급에게 있어 가장 시급하고 절박한 요구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비정규직문제이며, 수많은 중소하청 노동자 문제일 것이다. 결국 오늘날 정치세력화에 있어 ‘노동중심성’이 관철된다는 것은 이들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당을 만든다는 뜻이다.


여기서 이들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 방식밖에 없다. 하나는 법을 개정해서 비정규직 남용을 엄격히 제한하고, 비정규직제도를 내용적으로 철폐시키도록 하는 것이다. 지난 시기 민주노동당이 추구했던 것이 바로 이 방식이었다. 하지만 결과가 보여주었듯이 이 방식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2005년 민주노동당의 의원단이 총동원되어 국회의사당 안에서 먹고 자고 농성하며 사력을 다해 국회 본회의 통과를 저지하려 했지만, 노무현 정권이 추진했던 기간제법과 파견법 개정을 막아내지 못하고 말았다. 결국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지 못하는 소수당의 한계를 뼈저리게 맛보아야만 했다. 


그 후 이런 소수당의 한계를 극복코자 더욱 선거에 매진했지만, 그럴수록 민주노동당은 현장투쟁에서 멀어지고 보수 양당의 높은 벽을 넘어서지 못한 채 자체 분열로 지리멸렬하고 말았다. 이제 다시 이 같은 전철을 되풀이해야 하는가? 언제 달성될지 모르는 원내 다수당이 되기 위한 머나먼 길을 다시 걷기에는 지금 우리 주변의 비정규직문제는 너무도 심각하고 절박하다.


 더구나 법원의 불법파견 관련한 일련의 판결에서 보듯, 사법부는 개별 소송만 인정하고 집단소송은 인정하지 않는다. 즉 당사자들이 한 사람 한 사람 재판을 받아야 하며, 각  사건별로 판결이 내려질 때까지 5년이고 10년이고 무한정 기다려야만 한다. 이 같은 법원의 불파 판정에 의존해서 한국의 비정규직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전도가 요원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노동자들이 국회 혹은 사법부 판결에만 의존하지 말고 자신의 조직된 힘으로 실질적으로 비정규직제도를 무력화시키는 방식이다. 그런데 노동자들이 자신의 힘에 의존해서 비정규문제를 철폐하려면, 무엇보다 지금처럼 정규직-비정규직, 원-하청으로 사분오열되어 있는 대오를 하나로 묶어서 계급적 대단결을 이룩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지금 이 같은 ‘전략적 연대’를 실현 시킬 마땅한 주체가 부재한 상태이다. 민주노총이나 금속노조 같은 상급 단체나 산별노조들이 응당 그런 역할을 해주어야 하겠지만, 그들조차도 비정규직문제나 원-하청 문제의 해결에 진지하게 매달리기보다는 오히려 곤혹스러운 그런 문제들을 비켜 가고 싶어 하며, 그것을 인정한 기초 위에서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는데만 급급한 형편이다. 따라서 이들 조직들에게 당장 무엇을 기대하기는 힘들며, 우선 그들 내부의 개혁이 절실한 실정이다.


지금은 이처럼 정규직-비정규직, 원-하청 노동자들 간 전략적 연대를 실현 시킬 수 있는 새로운 계기를 찾아야 하는 시점이기에, 제2의 정치세력화는 한편으론 반갑기도 하다. 마땅히 이러한 시대적 사명에 부응하는 정치세력화이어야 하며, 그럴 경우 우리는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새로운 ‘전기’를 기대할 수 있다.


첫째, 당의 강령 작성을 통해서이다. ‘노동중심성’이 관철되는 당 강령은 마땅히 노동자계급의 궁극적 목표를 천명함과 함께, 지금 시기 노동운동의 가장 절박한 요구를 표현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앞서도 언급했듯이 비정규직문제, 원-하청 문제의 해결일 수밖에 없으며, 이를 위한 방안으로써 정규직-비정규직과 원-하청 노동자의 전략적 연대 실현이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가 만들려고 하는 당은 반드시 이 같은 과제를 자신의 임무로 분명하게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노동해방’이나 ‘사회주의’와 같은 궁극 목표를 제기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를 위해서도 지금 노동자계급의 가장 시급하고 절박한 과제인 비정규직문제와 원-하청 문제에 대해서 구체적 해결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야말로 현재로선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둘째, 이 같은 공통 강령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현장에서 당의 기반을 확대해 나갈 때, 그리하여 이들이 주축이된 '노동중심'의 당이 조합원과 노조 집행권력에 대한 영향력을 점차 획득해 갈 때, 전국적으로 이 같은 전략적 연대의 실현을 위한 조건은 자연스럽게 무르익게 된다.


혹자는 진보연합정당이든 민주노총이 주도하는 정당이든, 우선 당이 먼저 창당된 후에 이 틀 안에서 현안 문제를 천천히 논의하면 된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같은 방식은 ‘무늬만 산별’인 지금의 금속노조 건설의 실패 경험을 답습하는 길이다.

 

또한 과거 민주노동당의 실패한 전철을 그대로 답습하는 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처럼 현장의 절박한 문제에 처음부터 초점을 맞추지 않은 채 선거를 위해 급조된 당은, 시간이 흘러도 결국 현장의 요구를 비껴가기 마련이다. 이런 식의 정치세력화는 대공장 노조간부나 일부 명망가들이 득세할 기회만 제공하며, 과거와 같은 선거중심의 정당, 의회주의 정당의 틀을 결코 벗어날 수 없게 한다. 


결론적으로, 제2 정치세력화는 그 '추진과정에서부터' 노동운동의 가장 시급하고 절박한 문제의 해결에 복무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럴 때만이 현장의 동력을 끌어낼 수 있으며, 그 밖의 어떤 방식도 결코 현장의 동력을 이끌어 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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