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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발발한 경제 대공황이 1930년대 초반에 전 세계를 강타했다. 세계 각국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미국은 1932년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Roosevelt, 1882~1945)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뉴딜정책’으로 대공황의 돌파구를 만든다. 미국은 1차 세계대전으로 축적한 자본을 ‘뉴딜정책’에 쏟아부음으로써 일자리를 만들어냈다.
대자본가와 부자들은 반발했지만, 루스벨트는 ‘완전 고용을 실현·유지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개입 없이 시장에만 경제를 맡기는 자유방임주의가 아닌 정부의 개입과 보완책이 필요하다'라는 케인스(Keynes, 1883~1946)주의를 받아들인다.
1935년에 ‘뉴딜정책’의 하나로 제정된 전국노동관계법인 ‘와그너법(Wagner Act)’으로 노동자에게 단결권과 단체교섭권을 보장했다. 그리고 최저임금제를 시행하고 노동시간을 제한해 안정된 고용과 임금을 확보하려고 했다.
또한, 테네시강 유역을 개발하는 대규모 공공사업을 일으켜 실업자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금본위제를 폐지해 통화에 대한 정부의 통제를 강화한다. 그리고 생산 제한과 농작물 경작 제한으로 가격을 안정시켰다.
반면에 제1차 세계대전 패전국 독일은 겨우 살아나던 경제가 대공황으로 심각한 타격을 받는다.
특히 전후 ‘파리강화회의’에서 연합국과 체결한 ‘베르사유조약’에 따라 독일은 모든 해외 식민지 포기를 강요당하고,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승전국에 지급해야 했다.
ㅡ 독일 공산주의 혁명의 불발과 나치 히틀러 등장
제1차 세계대전으로 고통을 겪은 독일 인민은 혁명을 일으켜 황제를 쫓아내고, 1918년 11월 9일 바이마르공화국을 세운다. 그러나 독일 혁명은 공산주의 혁명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독일 사회민주당이 보수 세력과 연합하여 바이마르공화국을 세웠기 때문이다.
바이마르공화국 국방장관 구스타프 노스케(Gustav Noske, 1868~1946)는 정규군이 베르사유조약에 의해 10만으로 제한되자, 전쟁에서 돌아온 군인들을 모아 ‘자유군단(Freikorps)’이란 준군사조직 우익 민병대 ‘백색테러단’을 조직한다.
‘자유군단’은 1919년 1월 바이마르공화국 총선을 무산시키려는 독일 공산당의 전신인 스파르타쿠스 연맹의 공산당 폭동을 진압하고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1871~1919)와 카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 1871~1919)를 비롯한 독일 공산당 지도부를 암살 사살한다. 이로 인해 독일 혁명은 불발되고 공산주의자들은 대학살을 당한다.
이런 정세 속에 독일 민족지상주의자였던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는 1919년 독일노동자당에 가입해 두각을 나타내며 당수가 된다. 히틀러는 강대한 독일 건설과 민주공화제 타도 그리고 베르사유조약 폐지를 선동하며 국민에게 인기를 끌면서, 당명도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나치, Nazi)’로 변경한다. 그리고 이탈리아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 1883~1945)의 일인·일당 독재에 자극받아, 1923년 11월 뮌헨에서 봉기를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투옥된다.
1924년 히틀러가 출옥하지만, 독일 경제 상황은 더욱 나빠져 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세계 경제 대공황은, 국민으로부터 강대한 독일을 주장하는 히틀러를 불러내게 했다.
세계 경제 대공황은 엄청난 전쟁 배상금과 함께, 독일을 국내외적으로 재정 압박을 받으며 더욱 더 경제위기에 봉착게 한다. 불경기로 많은 공장이 도산돼 실업자가 무려 800만 명에 달하고, 수많은 농민이 파산해 곤란을 겪어야 했다.
이런 정세 속에 히틀러의 나치는 1930년 총선에서 18.2%의 득표율로 제2당이 되고, 1931년 대통령 선거에서 히틀러를 후보로 내세워 36.8%를 득표한다. 1933년 1월 30일, 당시 바이마르공화국 대통령이자 전 제국 원수였던 힌덴부르크는 경제공황이 지속하고 민심이 바닥으로 떨어지자, 마르크스주의와 노동운동을 뿌리째 뽑아내자고 주장하는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한다.
ㅡ 히틀러, 비상 입법인 수권법을 제정하고 나치 일당 독재 파시즘 체제를 구축
1933년 2월 1일 히틀러는 내각회의에서 ‘공산당이 최대의 적’이라고 주장하며, 공산당 시위 운동 금지를 선포했다. 2월 27일, 나치 2인자 헤르만 괴링(Hermann Göring, 1893~1946)은 공산당 소행이라는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이라는 자작극을 벌여, 공산당원과 반나치 인사 등을 대대적으로 체포하고 대학살을 감행했다. 이 사건으로 나치는 비상대권을 장악하고 독재정치 확립의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다.
그리고 히틀러는 3월 23일 ‘국가와 민족의 위난을 극복하기 위한 법률(Gesetz zur Behebung der Not von Volk und Reich)인 수권법(授權法, Ermächtigungsgesetz)을 제정한다.
수권법은 비상시 입법부가 행정부에 입법권을 위임하는 법률로, 총리 히틀러는 이를 통해 국회를 거치지 않고 법률을 제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사실상 바이마르공화국은 끝이 나고, 나치 체제가 들어서게 된 것이다. 이로써 인민의 정치적·개인적 권리와 재산권에 대한 모든 합법적 보호장치도 사라졌다.
1934년 힌덴부르크가 죽자 히틀러는 대통령직도 겸임한다. 이어 보수파와 군부의 지지를 받아 일당 독재체제를 구축함으로써 독일에 파시즘 정권이 수립된다. 그리고 독일의 민주주의 체제를 무력화시킨 뒤, 독일 내 모든 야당을 불법화하고 지방의회도 폐지한다. 이어서 국명을 대독일국(Großdeutsches Reich)로 바꾸고, 나치 독일을 세운다.
히틀러는 집권 초기, 당시 대공황으로 심각하게 침체한 경제를, 국가 주도의 군수산업과 중공업 육성 그리고 자동차 전용 고속도로 아우토반(Autobahn) 건설과 같은 대규모 공공사업으로 경제를 안정시킨다. 이와 함께 당시 독일에 만연하던 대규모 실업 문제를 해결하면서, 히틀러와 나치는 국민의 폭넓은 지지를 받는다.
이후 히틀러는 본격적인 재무장과 대외침략 정책을 추진하면서 군비 확장에 힘을 쏟는다. 히틀러는 ‘버터보다는 대포’라는 전쟁 구호를 내걸고, 12 군단 36개 사단의 50만 대군 양성을 계획함으로써 ‘베르사유조약’의 독일 군비제한 조항을 파기한다. 또한 히틀러는 징병제를 시행해, 군을 기계화 현대화하고 ‘베르사유조약’에서 금지한 공군을 창설하면서 강한 군대, 강한 독일, 아리안(Aryan) 민족의 영광을 부르짖는다.
나치의 극단적이고 호전적인 정치 이념으로 인해 나치 집권 후부터 독일에서는 유대인,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같은 나치에 반대하는 이들이 노골적인 탄압과 박해를 당해야만 했다. 특히 히틀러는 유대인과 슬라브족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을 혐오했다.
ㅡ 혐중(嫌中)의 기원, 9·18 만주사변의 전주곡 만보산 사건
세계 경제 대공황은 자원이 부족한 일본에 심각한 충격과 경제적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일본 군국주의는 이 기회를 이용해 조선 식민정책 강화와 본격적인 자원 획득을 위해 중국 대륙침략, 9·18 만주사변을 준비한다.
그런데 9·18 만주사변의 사전 조짐이 있었다. 바로 만보산 사건이다.
강준만은 『한국 근대사 산책 8권: 만주사변에서 신사참배까지』(인물과사상사, 2007)에서 일제의 만보산 사건 음모를 자세히 밝힌다.
“만보산 사건은 원래 중국 동북지방에서 종종 일어나곤 했던 조선·중국 농민 간의 충돌에서 비롯된다. 인명피해도 없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사건이었는데, 중국 동북지방에 대한 침략의 구실을 찾고 있던 일본 관동군이 이 사건을 악용하면서 문제가 커졌다.
관동군은 창춘 영사관에 지령을 내려 많은 조선인 농민들이 큰 피해를 입은 것처럼 조선에 허위보도하도록 했다.
그 결과 일본의 음모대로 조선 내에서 화교에게 보복을 가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에 맞서 중국 내에서도 조선인에 대한 보복사태가 일어났다.
그러자 일제는 이 사건이 만주에 사는 조선인을 중국 당국이 박해하고 내쫓으려 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하면서 조선·중국 민족의 대립과 충돌을 격화시키고자 했다.”
같은 책에서 강준만은 일제의 음모에 놀아나는, 조선 언론의 한심하고 무책임한 보도에 대해 기록했다.
“만보산에서 조·중 농민 간의 처음 충돌이 발생한 이래 1931년 6월부터 「동아일보」는 모두 3번 이 사건을 보도한 반면, 1927년 이래 재만동포옹호운동을 주도해 온「조선일보」는 이 사건을 모두 16차례나 보도했다.
1920년대 후반 이래 중국 관헌들이 재만동포를 박해하고, 또 중국인 노동자들 때문에 조선인들이 일자리를 잃는다는 의식이 퍼지면서 조선에는 반(反)중국인의식이 자라고 있었다.
이런 반중국인 감정에 불을 당긴 것은 1931년 7월 2일 밤과 3일 새벽에 「조선일보」가 이례적으로 두 차례나 발간한 호외였다.
호외는 ‘중국 관민 800여 명과 200동포 충돌 부상, 창춘 일본 주둔군 출동 준비, 대치한 일·중 관헌 1시간여 교전, 급박한 동포 안위, 기관총대 급파, 전투 준비 중’ 등 당시의 상황을 다급하게 전했다.
이 기사의 내용은 동포 다수가 부상이 아니라 살상당한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이는 오보(誤報)였다.”
하지만 단순한 ‘오보’가 아니었다. 일제가 만주 침략의 구실로 조선인과 중국인의 감정을 악화시키기 위해 조작한 ‘허위정보’를 제공한 것이다.
ㅡ 만보산 사건과 9·18 만주사변의 음모
일제의 조선인과 중국인을 이간시키려는 음모는 집요했다.
여기에 더해 음모의 나라답게 일제는, 1931년 6월 관동군 소속 나카무라 신타로(中村震太郎) 대위가 중으로 변장해 첩보활동을 벌이다 중국 군벌 장쉐량(張學良, 1901~2001)의 동북군에 발각돼 피살된다. 이 사건 또한 만주사변의 구실 중 하나가 된다.
이로 인해 일본 내에서 반중 여론이 거세게 일어난다.
앞의 책에서 강준만은 일제의 만보산 사건 음모와 9·18 만주사변과의 상관관계를 기록했다.
“1931년 7월 16일 조선총독부는 만보산 사건이 유발한 국내 사태로 중국인이 100여 명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했다는 사실을 소상히 발표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조선인은 만주와 중국에서 다시 박해를 받게 됐으며, 일본 관동군은 만주 거주 조선인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출병을 시작했다.
9월 18일 밤 일본군은 봉천(奉天, 지금의 선양) 교외의 유조호(柳條湖) 부근에서 남만주 철도의 일부를 폭파하고, 이를 중국군의 소행으로 돌리며 공격을 개시했다.
이것이 이른바 ‘만주사변(9·18사변)’의 서막이었다.
조동걸은 " ‘사변(事變)’이란 정부의 전쟁 결정 절차를 기다리지 않고 군부의 일부 부대가 무력충돌을 일으키는 변고를 일컫는 말이었다"며 1931년 9월 18일 일본 군부의 만주사변은 "군부에 의한 ‘사변’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의 계산에 의한 침략전쟁의 도발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고 했다."
일제는 침략 일주일도 안 되는 사이 관동군이 랴오닝성 지린(吉林) 대부분을 점령한다.
그런데 장쉐량의 동북군은 당시 25만으로, 만주에 11만이 있었는데 무저항으로 일관했다. 이는 장제스의 양외필선안내(攘外必先安內, 밖을 막으려면 안을 먼저 안정시켜야 한다) 정책을 추종한 것으로 당시 장제스는 내부 공산당 토벌이 먼저였다.
이로 인해 만주사변으로 만주를 지배하고 있던 장쉐량의 군대가 흩어져 만주 일대는 무법천지가 된다. 그리고 만주 동포들은 중국의 행정 기능이 일시 마비되는 상황에서, 일본의 구호 조치로 피난민 수용소에 수용되나 굶주림과 추위에 떨어야 했다.
동아일보는 1932년 2월 10일까지 전국 방방곡곡에 수많은 구호 물품과 구호금을 거두어 만주 동포에게 보내는 구호사업을 전개했다. 이때 참담한 현실을 잊기 위해 나온 노래가 <조선의 노래>로, 나중에 애국가 내용으로 널리 불렀다.
백두산 뻗어내려 반도 삼천리/ 무궁화 이 동산에 역사 반만년
대대로 예사는 우리 삼천만/ 복되도다 그 이름 조선이로세
ㅡ 신동숙, 독일 파시즘과 일제 군국주의의 대두(擡頭) 속에 국민학교를 다니다.
신동숙은 독일의 파시즘과 일본의 군국주의가 대두하는 시기에 국민학교를 다닌다.
일제의 군국주의는 국민학교 교육에서부터 시작된다.
‘일왕’ 메이지가 1890년 10월 반포한 ‘교육에 관한 칙어’는 유교 원리를 차용하고 있으나 목적은 천황제와 전체주의의 합리화였다. 이것을 1911년 조선총독부가 식민지교육의 기본이념으로 이용했다. 그리고 학교마다 교육칙어를 가르치고 암송케 했다.
일제는 식민지 조선을 ‘일왕(천황)’ 이념교육을 통해 동화시키려고, 정세가 요동칠 때마다 조선교육령을 수정 제정했다. 1911년 제1차, 1922년 제2차, 1938년 제3차, 1941년 제4차 무려 4번이나 수정하면서 학생들을 복종케 했다.
제3차 교육령은 1937년 중일전쟁(中日戰爭)으로 일제의 대륙침략이 본격화하자 조선총독부는 전시체제를 강화하면서 다시 개정한 것이다. 특히 ‘내선일체를 통한 황국신민의 육성’을 교육의 최우선적인 과제로 삼았다.
특히 ‘국체명징(國體明徵)·내선일체(內鮮一體)·인고단련(忍苦鍛鍊)’을 3대 목표로 제시하여 구체화하였다. 또한 민족 별로 달랐던 각종 제도나 명칭도 통일시켜 조선어를 선택 과목으로 바꾸어 사실상 폐지했다.
신체 단련과 실업 과목 등을 신설해 전쟁 동원에 대비하고 조선의 민족문화를 말살하며 병참 기지화를 위한 것이었다.
신동숙은 제3차 조선교육령 시기에 국민학교를 다녔다.
“일제 시기였기 때문에 조선인과 일본인이 따로 학교를 다녔어요. 저는 조선 아이들이 다니는 영일초등학교에 다녔는데, 일본 선생들한테 공부를 배웠어요.
학교에는 시골에서 오는 나이 많은 아이들도 있고 해서 저는 어린 편에 들어갔어요. 그리고 아버지는 은행에 다닌 관계로 학교 임원을 하셨어요.
국민학교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6년제였습니다.
저는 여학생이 다니는 상급 학교인 포항여고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어려웠어요. 50명 모집하는데 열댓 사람만 조선 사람 넣고 나머지는 전부 일본 아이들이예요. 여자학교이다 보니 여학생들이 많이 몰렸어요.
포항여고에 경상북도 영덕, 영해에서도 오고 경주, 안강 이런 데서도 오니 들어가기가 상당히 어려웠어요. 경상북도에는 국민학교가 많았거든요.”
※ 격주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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