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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소식

지난 15일. 동십자각 부근에서 “윤석열 즉각 퇴진! 사회대개혁! 15차 범시민대행진”이 개최되었다.
광화문이 아닌 경복궁 부근에서 개최된 집회 중으로는 최대 군중이 모였다. 주최 측인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비상행동)은 100만 명이라고 한다.
최대 군중이 모인 이유는 단 하나 “내란 수괴 윤석열을 파면하라”였다.
탄핵 심판 기일이 역대 최장으로 점점 길어지고 있다. 민(民)은 단 하루도, 아니 단 한 시간도 더 기다릴 수 없다. 지금 당장 윤석열을 파면시켜야 한다.
이날 비상행동 공동의장단을 대표하여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이 힘있게 발언했다.
“우리 역사에 3월 15일은 이승만 독재가 부정선거로 국민주권을 강탈한 날로 기록됐다. 그러나 오늘부터 3월 15일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정의가 주권자 국민들의 힘으로 바로 세워진 날로 기억될 것…. 부정선거가 4·19를 불러왔던 것처럼, 윤석열의 내란과 불법, 탈옥이 빛의 혁명을 불러온 날로 기록될 것….
(중략)
내란에 동조하고 부역한 자들, 내란 수괴를 옹호하고 헌정질서를 파괴한 자들, 장관, 경찰, 검찰, 군인, 국민의힘, 극우세력을 이제 낱낱이 색출해서 처벌하고 역사에서 지워버리자”
‘3·15 마산항쟁’ 65주년에 걸맞은 발언이었다.
정부 수립 이후 학생이 아닌 최초의 반정부 데모가 ‘3·15 마산항쟁’이었다.
발단은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선거’였다. 예나 지금이나 대통령 선거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군부·수구세력은 관권을 동원한 부정선거가 판을 쳤다.
하지만 해방공간 선거는 물론 국회의원 선거이지만 오늘날과 달랐다.
▶ 마을 민심이 당선을 좌우했다.
당시 농촌은 라디오는커녕 신문이라도 볼 수 있는 집들은 거의 없었고, 문맹률(文盲率)도 높았다. 그래서 선거 때 궁여지책으로 선거 벽보 기호는 아라비아숫자가 아닌 막대로 숫자를 표시했다. 하지만 높은 문맹률에도 불구하고 국회의원 후보자에 대한 사람 됨됨이에 대해서는, 한두 세 집 건너 이야기하면 후보가 일제 강점하에서, 해방공간에서 어떤 일을 하였는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특히 1948년 5월 10일 선거인 경우, 단독선거와 단독정부를 반대하는 2·7구국투쟁을 벌인 좌파와 김구·김규식을 비롯한 남북협상을 추진하는 중도파 민족주의자는 선거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선거 결과는 예상과 달리 미군정에 우호적인 한국민주당(한민당)은 참패했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등 이승만 지지 세력은 전체의석 200석 중 70석, 한민당은 29명의 당선과 총 유효 투표의 13% 지지를 얻는 데 그쳤다.
반면에 무소속은 85석, 38%의 지지를 얻었다. 그중에는 ‘소장파’로 불리는 이승만과 한민당에 대해 비판적이고 진보·개혁적인 인사들이 많았다.
역시 해방공간이라 혁명적 분위기가 국회의원 선거에도 영향을 미쳤고, 무엇보다 과거 전력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마을 민심이 당선을 좌우했다.
5·10선거에 의해 선출된 의원은 5월 31일 ‘제헌국회’라 부르는 초대 국회를 열어, 대한민국을 국호로 정하고 제일 중요한 과제인 헌법을 제정했다.
헌법기초위원회 등 대다수가 정부 형태를 내각책임제를 선호했음에도, 이승만이 한민당을 협박해 ‘대통령중심제’로 변경했다.
경제 관련해서는 중요 자원의 국유(제85조), 농지를 농민에게 분배할 것(제86조), 중요 기업의 국유 또는 공유인정(제88조) 등 자본주의국가에서 드문 ‘사회주의 요소’가 많이 반영됐다.
7월 17일 현재 ‘제헌절’이라 부르는 날에 보통선거제에 기반을 둔 헌법이 공포되었다. 그리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공포되고, 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은 미군이 철수할 때까지 미군이 갖기로 했다.
‘제헌국회’가 나름 좋은 헌법을 제정한 것은, 국회에 중도 진보·개혁적인 민족주의자가 당선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는 국회의원 선거와 판이하게 달랐다.
▶ 군부·수구세력 대통령들의 정적(政敵) 죽이기
역대 대통령 선거는 후보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동원해, 사생결단(死生決斷)으로 선거했다. 그리고 끝난 후에는 당선자는 상대 후보를 그냥 두지 않았다.
특히 군부·수구세력 대통령 당선인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적(政敵)을 끝까지 죽이려고 했다.
이승만은 조봉암을 죽였고, 박정희·전두환·노태우는 김대중을 죽이려다 실패했다. 그리고 이명박도 노무현을 죽였다.
당연히 윤석열도 이재명을 죽이려 기회를 엿보다, ‘12·3 비상계엄’을 자행한 것이다.
물론 윤석열이 ‘비상계엄’을 한 구실은 비단 정적 제거뿐만이 아니라, 비열하고 비겁한 졸장부답게 사적(私的)인 이유가 차고 넘친다.
대표적인 것이 아내 김건희의 비리 의혹이다. 김건희의 명품 뇌물 수수 사건과 주가조작 사건 그리고 15년간 추진되어온 국책사업인 서울-양평 고속도로 노선 변경을 시도 등 윤석열·김건희 일가의 부정·비리 혐의는 끝이 없었다.
이것뿐만 아니라 김건희의 공천개입 등 국정농단 사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 팔불출(八不出) 윤석열은 김건희 특검에 대해 모두 거부권을 행사했다.
그리고 윤석열 부부 공천개입 의혹의 중심인 ‘명태균 게이트’가 사실로 드러날 경우, 직권남용과 공직선거법, 청탁금지법, 알선수재 혐의 등으로 처벌을 피할 수 없다.
여기에 국정 운영 실패에 따른 정부 지지율 하락으로 윤석열은 사면초가(四面楚歌)였다.
한국갤럽이 ‘12·3 비상계엄’ 전 11월 5일부터 7일까지 전국 만 18세 이상 성인 남녀 1,002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윤석열 정부의 지지율은 최저 17%까지 하락하였다. 이것을 두고 한국갤럽은 이명박 대통령 집권 말기인 2012년 8월 국정지지도 최저치와 국정농단 의혹이 증폭된 2016년 10월 박근혜 대통령 지지도와 같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사대 친미 반민족 반통일 ‘내란수괴’ 윤석열의 권력 욕심은 정적 제거 원조인 이승만과 판박이였다.
▶ 이승만의 권력 탐욕(貪慾)과 정적(政敵) 조봉암 죽이기
이승만의 권력 탐욕은 끝이 없었다.
1954년 제1공화국 제3대 국회에서 사사오입 개헌(四捨五入 改憲)으로 이승만은 이미 종신 집권할 수 있는 길을 마련했다. 그리고 1960년 실시 예정인 제4대 정·부통령 선거에도 당시 이승만은 85세의 고령이었지만 대통령 선거에 나간다.
오늘날과 같은 의료 위생 환경 상태가 아닌 65년 전 당시로 생각하면, 85세인 이승만이 대통령에 출마한다는 것은 노인의 권력 탐욕으로 보기에는 너무도 황당무계(荒唐無稽)했다. 아니 일종의 과대망상(誇大妄想)이었다.
조선 이씨 왕조의 부활이자 이승만 자신을 우상화(偶像化)하려는 행위로 민(民)은 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미 민심은 이승만과 자유당에서 떠나 있었다.
1956년 5월 15일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무소속 조봉암 후보를 이승만은 이겼지만,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지는구나”라는 조봉암의 대선 패배 후 발언처럼 관권 부정선거였다.
또한 1958년 5월 2일 제4대 민의원선거에서 자유당의 의석은 줄고 여촌야도(與村野都) 현상은 더욱 뚜렷해져 자유당은 서울에서 전멸에 가까운 참패를 당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위기를 느끼고 야만적인 방법으로 정적 조봉암을 간첩죄 및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1959년 7월 사형을 집행했다.
거기에 불행하게도 이승만과 대항할 대통령 후보는 민(民)에게 없었다.
유일한 후보인 조병옥은 1959년 11월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지만, 병 치료차 도미(渡美)했다가 운명했다.
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이 운명한 상황에서 이승만의 당선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상상을 초월한 불법 부정선거로 몰락의 길을 간 것은, 이승만의 고집과 추종자들의 권력욕 때문이었다. 특히 자유당의 2인자 부통령 후보 이기붕의 인기가 없어 선거가 불안했다.
물론 뒤에는 세계의 냉전 반공 교두보로 이승만을 이용하려는 미국이 있었다.
▶ 기상천외한 총체적 관권 부정선거, 3·15 대통령·부통령선거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은 직접 1959년 3월 ‘최후에 써먹을 총알’이라는 43세의 최인규를, 선거 진두지휘하는 내무부 장관에 임명한다.
최인규는 장관 취임사를 통해 선거운동을 대놓고 지시했다.
“모든 공무원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충성을 다해야 하며 차기 정·부통령 선거에서는 기필코 자유당 입후보자가 당선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지방 관서를 돌면서 ‘공무원이 집무 시간이 아닌 때에 선거운동을 하는 것은 선거법 위반이나 공무원법에는 저촉되지 않는다’라고 공무원 사전 선거운동을 독려했다.
특히 지방자치단체장을 불러 놓고, 공무원 부정선거 개입을 직접 지시 독려했다.
“어떠한 비합법적인 비상수단을 사용하여서라도 이승만 박사와 이기붕 선생이 꼭 당선되도록 하라.
세계 역사상 대통령 선거에 소송이 제기된 일이 있느냐?
법은 나중이니 우선 당선시켜 놓고 보아야 한다. 콩밥을 먹어도 내가 먹고 징역을 가도 내가 간다.”
1960년 3월 3일 민주당이 폭로한, 내무부가 전국의 각급 기관장에 시달한 자유당의 부정선거 방법이다.
“4할 사전 투표 : 선거 당일의 자연 기권표와 선거인 명부에 허위 기재한 유령 유권자표, 금전으로 매수하여 기권하게 만든 기권표 등을 그 지역 유권자의 4할 정도씩 만들어 투표 시작 전에 자유당 후보에게 기표하여 투표함에 미리 넣도록 할 것
3인조․5인조 공개 투표 : 자유당 후보에게 투표하도록 미리 공작한 유권자로 하여금 3인조 또는 5인조의 팀을 편성시켜 그 조장이 조원의 기표 상황을 확인한 후 다시 각 조원이 기표한 투표용지를 자유당 측 선거위원에게 제시하고 투표함에 넣도록 할 것
완장 부대 활용 : 자유당 측 유권자에게 ‘자유당’이라는 완장을 착용시켜 투표소 부근 일대의 분위기를 자유당 일색으로 만들어 야당 성향의 유권자에게 심리적인 압박을 주어 자유당에게 투표케 할 것
야당 참관인 축출 : 민주당 측 참관인을 매수하여 투표 참관을 포기시키거나 그것이 여의치 않을 때는 적절한 구실을 만들어 축출할 것”(『4·19혁명 개정판』, 민주화운동기념사럽회, 2015.)
이외에도 투표함 바꿔치기, 개표 수 조작 등 온갖 기상천외한 선거 불법 부정 방법이 동원되었다. 이것이 바로 1960년 3월 15일 대통령·부통령선거에 대하는 자유당의 총체적 관권 선거운동이었다.
▶ 여촌야도(與村野都), 농촌 여당 승리 도시 야당 승리
1959년 6월 자유당은 전당대회에서 정·부통령 후보를 이승만·이기붕으로 지명했다.
이렇게 정·부통령 선거 1년 전부터 후보를 지명한 것은, 이승만과 자유당이 선거에 완벽하게 이기기 위해, 사전 부정선거 운동 기간을 여유가 있게 잡은 것이다. 그리고 일찍부터 최인규 내무부 장관과 함께 손발을 맞춰 선거 총력전을 펴기 위해서였다.
공무원을 동원한 자유당의 총체적 관권 선거운동이 진행되는 동안, 민주당 대선 후보 조병옥은 갑작스러운 병사로 이승만은 단독후보 부전승(不戰勝)으로 대통령이 된다.
그러나 자유당의 제2인자인 이기붕이 문제였다.
4년 전 1956년 5월 15일 제3대 정·부통령선거에도, 3·15 제4대 정·부통령선거와 똑같은 현상이 발생했다.
이승만의 유력한 경쟁자였던 민주당의 신익희 후보가 선거를 앞두고 급서(急逝)하면서 이승만의 압승이 예상되었으나, 진보당 추진 위원회 후보 조봉암이 216만 표를 얻어 2위로 선전하는 돌풍이 불었다. 다행히 이승만은 3선에 성공했으나, 부통령선거에서 민주당 장면 후보가 당선되면서 자유당 정권은 위기감이 고조됐다.
그런데 이번 3·15 정·부통령선거는 4년 전보다 이승만이 워낙 고령이라 심각했다.
만약 이승만이 임기 도중에 운명하거나 직무수행이 불가능하게 되면 자동으로 부통령이 승계하게 된다. 자유당으로서는 무조건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켜야 하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그래서 사전 모의한 대로 전국 규모의 부정선거를 위해 자유당 중앙당은 거액의 선거 자금을 준비했다.
먼저 이승만 정부는 1960년 2월 3일, ‘농번기를 피해서’라는 이유를 내세워 5월에 치렀던 선거를 야당과 여론의 강력한 항의에도 3월 15일로 선거일을 바꾸는 꼼수를 부린다. 정·부통령 취임식이 8월 15일인데,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너무 빠른 조기 선거였다.
자유당이 ‘농번기’ 운운하는 농촌은 일제 강점과 해방공간 그리고 6·25전쟁을 겪으면서 너무나 큰 희생과 홍역을 앓았다.
특히 농민은 그동안 치른 희생과 홍역 속에서, 국가의 정책 결정 과정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는 차단당하고, 조직화는 아예 엄두를 못 냈다. 농민은 정치에서 아예 배제당했다.
농민 자신이 피해 대중임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당한 처절한 탄압과 희생으로 인해 더 이상의 피해나 당하지 말자는, 정치 불신과 무관심이 농촌을 지배했다.
자유당은 이런 농민의 심리를 교묘하게 악용하여, 막걸리 고무신 선심 선거로 농촌에 파고 들어갔다.
이것도 총체적 관권 부정선거와 함께 당시 선거에서 나타난 농촌 여당 승리, 도시 야당 승리라는 여촌야도(與村野都) 현상이었다.

▶ 제2의 3·15 마산항쟁으로 윤석열을 탄핵하자!
선거가 시작되자 야당의 선거유세는 곳곳에서 방해를 받았고 테러가 잇달았다. 선거 막바지에는 야당계 인사가 살해되기까지 했다. 극도의 공포 분위기 속에 선거가 진행된 것이다.
선거 당일인 3월 15일 마산에서 민주당 마산시당 간부들은 자유당의 ‘4할 사전 투표’ 등에 항의하며 선거 무효를 선언하고 부정선거를 폭로하며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시위를 벌이던 민중에게 경찰이 발포해 최초의 유혈 사태가 발생했다.
이날 8명이 희생됐고, 80여 명이 다쳤으며, 200여 명이 연행되었다. 이것이 “1차 마산항쟁”이다.
그런데 4월 11일 아침, 3월 15일 “1차 마산항쟁” 때 눈에 최루탄을 맞고 숨진, 김주열 시체가 마산 앞바다에서 참혹한 모습으로 떠올라 “2차 마산항쟁”이 시작된다. 마산 민중 2만여 명은 “이승만 정권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마산 경찰서와 시청에 난입하고 파출소를 습격했다. 이날 밤 경찰 발포로 2명이 또 희생된다.
다급해진 이승만은 ‘이 난동에는 뒤에 공산당이 있다는 혐의도 있어서 지금 조사 중’이라는 특별 담화를 발표했다. 이어 15일에도 공산당 선전에 속아서 ‘마산 폭동’이 일어났다는 특별 담화를 이승만은 또 낸다.
민중봉기가 전국적으로 확산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승만이 직접 나서, ‘마산시위’를 빨갱이가 조정한 것으로 몰고 간 것이다. 그런데 부통령 후보였던 이기붕은 한술 더 떠 ‘총은 쏘라고 준 것이지 가지고 놀라고 준 것은 아니다’라는 끔찍한 망언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3·15 마산항쟁으로 곪을 대로 곪은 자유당 정권의 환부가 드디어 폭발하고,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다.
단독정부 수립으로 조국을 분단시킨 원흉인 이승만은, 마침내 1960년 4·19혁명으로 민중으로부터 단죄받아 쫓겨난다.
지난 3월 15일 비상행동 100만 집회에서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은 “오늘부터 3월 15일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정의가 주권자 국민들의 힘으로 바로 세워진 날로 기억될 것”이며 “부정선거가 4·19를 불러왔던 것처럼, 윤석열의 내란과 불법, 탈옥이 빛의 혁명을 불러온 날로 기록될 것”이라고 선포했다.
제2의 3·15 마산항쟁으로 윤석열을 탄핵하자!
내란세력 청산할 때까지 다시 광장으로 모이자!
헌법재판소는 내란수괴 윤석열 즉각 파면하라!
分卽倒合必立(분즉도합필립)
분열하면 곧 쓰러지고 단결하면 반드시 일어난다.
역사는 저절로 전진하지 않는다!
전필승 공필취(戰必勝 攻必取)
전쟁을 하면 반드시 원하는 바를 얻어야 한다!
반제·자주·민주·평화애호 세력은 총단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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