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사람을 찾아서 : 4·9통일열사 도예종의 아내 신동숙
한찬욱(사월혁명회 사무처장)  
등록일 : 2026.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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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후 산업진흥관의 잔해.  미국은 1945년 8월6일 히로시마에 핵폭탄을 투하해 약 14만명이 희생됐다. 이어 8월9일 나가사키에도 폭탄이 투하돼 약 7만4000명이 숨졌다. 사진은 1945년 9월 촬영된 것. ( 출처= 뉴스1)

 

 

제2차 세계대전은 과학기술과 산업생산력의 결합을 통해 전쟁에서 대량살상의 규모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기동력과 기습을 앞세워 전선을 돌파한 전격전의 전차, 적의 군사 목표와 군수시설을 파괴하여 굴복시키려 했던 전략폭격기, 태평양전쟁에서 해상 항공력의 중심이 된 항공모함 등이 전쟁과 결합하면서 인간의 파괴 능력은 전례 없는 수준으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1945년, 그 정점에 원자폭탄이 등장했다.

 

핵무기는 단순히 더욱 강력해진 폭탄이 아니었다. 인간이 그동안 이룩해 왔던 문명과 지구적 생존 자체를 위협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점에서 이전 무기들과 질적으로 달랐다. 핵은 인간의 과학기술이 인류공동체와 문명 자체를 완전히 파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마침내 미국은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전쟁을 빌미로 핵폭탄을 사용함으로써 무모한 학살을 자행했다. 핵은 대규모 인명피해만이 아니라 폭발 순간 발생한 강력한 열선(섭씨 수천 도)과 초속 수백 미터의 폭풍으로 인해 도시 전체가 순식간에 초토화되었다. 그뿐 아니라 폭발에서 살아남은 사람들도 초기 방사선 노출로 인해 탈모, 구토, 피하 출혈, 고열 등의 증세를 겪으며 고통스럽게 숨져갔다. 특히 수년,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백혈병, 암(갑상선암, 유방암 등), 그리고 다양한 만성 질환에 시달려야 했다.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피폭자뿐만 아니라 그들의 자녀에게까지 대물림된 유전적 영향으로 피폭자란 사회적 차별을 받으며 살아야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전쟁의 파괴력이 어디까지 확대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고, 핵폭탄의 등장은 그 파괴력이 새로운 역사적 단계에 들어섰음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원자폭탄의 과학적 기원

 

원자폭탄의 과학적 기원은 19세기 말 물질과 원자에 관한 새로운 발견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95년 독일의 물리학자 빌헬름 콘라트 뢴트겐(Wilhelm Conrad Röntgen, 1845~1923)은 이전에 알려지지 않았던 X선을 최초로 발견했다. 뢴트겐은 이 발견으로 1901년 최초의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이듬해인 1896년 프랑스의 물리학자 앙리 베크렐(Henri Becquerel, 1852~1908)은 우라늄 화합물이 외부에서 빛을 받지 않아도 스스로 방사선을 내놓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것은 자연방사능 감마선의 발견이었다.

 

베크렐의 발견을 이어받아 피에르 퀴리(Pierre Curie, 1859~1906)와 마리 퀴리(Marie Curie, 1867~1934)는 방사능을 체계적으로 연구했고, 1898년에는 폴로늄과 라듐이라는 새로운 방사성 원소를 발견했다. 베크렐은 1903년 노벨물리학상을 퀴리 부부와 공동 수상하였다.

 

이러한 방사선 발견은 원자가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단순하고 불변의 물질 단위가 아니라 내부에 복잡한 구조를 가진다는 사실을 밝혀가는 출발점이 되었다. 이후 어니스트 러더퍼드(Ernest Rutherford, 1871~1937)는 우라늄에서 나오는 방사선을 연구하여 1898년 알파선과 베타선의 존재와 성질을 구분해냈다. 이후 방사능의 성질과 원자의 내부 구조에 관한 연구를 발전시킨 러더퍼드는 1911년 원자의 중심에 매우 작고 무거운 원자핵이 존재한다는 새로운 가설을 제시하면서 현대 핵물리학의 기초를 놓았다.

 

러드퍼드를 비롯한 과학자들의 연구는 원자가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단순하고 불변의 물질 단위가 아니라, 전자와 원자핵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구조를 가진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또한 원자핵 안에 막대한 에너지가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점차 과학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했다.

 

1932년 제임스 채드윅(James Chadwick, 1891~1974)이 중성자를 발견하면서 이러한 연구는 새로운 단계로 발전했다. 헝가리 태생의 물리학자 레오 실라르드(Leo Szilard, 1898~1964)는 1933년 중성자를 이용한 핵분열 연쇄반응의 가능성을 제안했고, 원자폭탄에 대한 중요한 이론적 기초를 발견했다.

 

1938년 독일의 오토 한(Otto Hahn, 1879~1968)과 프리츠 슈트라스만(Fritz Strassmann, 1902~1980)은 중성자를 우라늄에 충돌시킨 실험에서 바륨이 생성되는 현상을 확인했다. 리제 마이트너(Lise Meitner, 1878~1968)와 오토 프리슈(Otto Robert Frisch FRS, 1904~1979)는 이를 우라늄 원자핵이 둘로 갈라지는 현상, 즉 ‘핵분열(nuclear fission)’로 해석했다. 이 과정에서 막대한 에너지가 방출되고 여러 개의 중성자가 새롭게 방출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하나의 핵분열이 다시 다른 핵분열을 일으키는 연쇄반응의 가능성이 현실적인 과학적 문제로 떠올랐다.

 

이처럼 19세기 말 방사능의 발견에서 시작된 연구는 원자의 내부 구조와 원자핵의 발견, 중성자의 발견, 핵분열의 발견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핵분열에서 발생하는 연쇄반응에 관한 연구는 훗날 원자력 발전뿐만 아니라 원자폭탄이라는 새로운 무기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과학적 토대가 되었다.

 

독일과 영국의 원자폭탄 개발 경쟁

 

과학자들은 핵분열 과정에서 방출되는 막대한 에너지를 군사적으로 이용할 경우 가공할 위력을 가진 폭탄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이러한 가능성은 더 이상 이론적인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군사 전략의 문제로 떠올랐다.

 

제2차 세계대전의 핵무기 개발을 돌아볼 때 불행 중 다행은 독일이 원자폭탄을 먼저 완성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독일은 1938년 오토 한과 프리츠 슈트라스만의 실험을 통해 우라늄 원자핵이 쪼개지는 핵분열 현상을 확인했다. 리제 마이트너와 오토 프리슈는 이 현상을 이론적으로 해석하고 ‘핵분열(fission)’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핵분열 과정에서 여러 개의 중성자가 방출되고, 이 중성자가 다시 다른 원자핵의 분열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은 원자폭탄의 가능성을 현실적인 문제로 만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독일은 우라늄을 뜻하는 ‘우란(Uran)’과 계획을 뜻하는 ‘프로젝트(Projekt)’를 합친 ‘우란프로젝트(Uranprojekt)’를 추진하며 핵분열과 원자력 이용에 관한 연구를 국가 차원에서 진행했다. 양자역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 1901~1976)도 이 연구에 참여해 핵분열 연쇄반응과 원자로의 가능성을 연구했다. 1939년 하이젠베르크는 독일 육군병기국을 위한 보고서에서 우라늄과 중수 등을 이용한 연쇄반응 연구를 검토했다.

 

그러나 독일의 핵 연구는 나치 정권의 인종정책으로 유대계 과학자들을 비롯한 많은 과학자가 독일을 떠났고, 핵 연구에 필요한 자원과 시설도 충분히 지원되지 못했다. 연구 역시 집중되지 못하고 여러 기관으로 분산되었으며, 전쟁 수행에서 핵무기 개발을 최우선 과제로 삼는 일관된 국가 전략도 마련되지 못했다. 또한 중수와 같은 원자로 관련 물질의 확보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결국 독일의 핵 연구는 원자폭탄의 실제 제작 단계까지 이르지 못했다.

 

독일이 먼저 핵무기를 개발할 가능성을 우려한 영국과 연합국은 과학자들의 핵분열 연구를 군사적 차원으로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영국은 나치 독일을 피해 망명한 물리학자 오토 프리슈와 루돌프 파이어얼스(Rudolf Peierls, 1907~1995)가 1940년 3월 ‘프리슈-파이어얼스 보고서(Frisch–Peierls memorandum)’를 작성했다. 이들은 우라늄-235를 충분히 농축하면 기존에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적은 양으로도 폭발적인 연쇄반응을 일으킬 수 있으며, 이를 이용한 원자폭탄의 제작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계산했다.

 

프리슈-파이어얼스 보고서는 영국의 핵무기 개발 계획인 ‘튜브 앨로이스(Tube Alloys)’를 본격적으로 추진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독일의 공습으로 연구 환경이 악화하자, 영국의 과학자와 기술자들은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의 연구에 참여했고, 영국의 핵 연구 성과와 인력은 훗날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다.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 완성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은 나치 독일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온 과학자들의 우려가 커지는 가운데,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이 레오 실라르드의 초안을 바탕으로 1939년 8월 2일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1882~1945)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독일의 핵 연구와 핵분열 연쇄반응을 이용한 강력한 폭탄의 가능성을 경고했다. 아인슈타인의 편지를 받은 루스벨트는 즉시 ‘우라늄 자문위원회(Advisory Committee on Uranium)’를 구성하도록 지시했다. 이것이 국가 주도 핵 연구의 첫걸음이었다.

 

이후 미국은 핵 연구에 대한 정부의 지원을 확대했고, 1942년에는 미 육군 공병대 산하에 맨해튼 엔지니어 디스트릭트(Manhattan Engineer District)를 설치하면서 원자폭탄 개발을 위한 대규모 비밀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추진됐다. 이것이 훗날 ‘맨해튼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로 불리게 된 사업이다.

 

미국은 오크리지(Oak Ridge)에 우라늄-235를 분리하고 농축하기 위한 시설을 건설하고, 핸퍼드(Hanford)에서는 플루토늄-239를 생산하기 위한 세계 최초의 본격적인 원자로들이 가동되었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로스앨러모스(Los Alamos) 연구소에서는 이론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J. Robert Oppenheimer, 1904~1967)가 과학적 책임자로 연구를 이끌었고, 군사적 총책임은 레슬리 그로브스(Leslie R. Groves) 장군이 맡았다.

 

오펜하이머의 지휘 아래 오크리지, 핸퍼드, 로스앨러모스 연구소 기지들에서 확보한 핵물질을 바탕으로 원자폭탄을 설계하고 조립했다. 결국 이 프로젝트는 과학계, 군사, 산업계가 전례 없는 규모로 융합된 현대 ‘거대 과학(Big Science)’의 시초가 되었으며, 미국은 세계 최초의 원자폭탄을 제작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리고 1945년 7월 16일 오전 5시 30분, 미국 뉴멕시코주 알라모고도 인근 트리니티 시험장에서 인류역사상 최초의 핵폭발 실험인 ‘트리니티 테스트(Trinity Test)’가 실시됐다. 플루토늄을 사용한 내폭형 원자폭탄 장치가 폭발하면서 맨해튼 프로젝트는 마침내 핵무기가 실제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한편 핵분열 연구가 발전하면서 우라늄과 함께 새로운 핵물질인 플루토늄도 발견했다. 1940년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에서 에드윈 맥밀런(Edwin McMillan, 1907~1991)과 필립 에이벌슨(Philip Abelson)이 우라늄에서 생성되는 새로운 원소인 넵투늄을 찾아냈다.

 

이어 글렌 시보그(Glenn T. Seaborg, 1912~1999)와 동료들이 플루토늄을 분리·확인한 이후, 플루토늄-239 역시 핵분열을 일으킬 수 있고 원자폭탄의 재료로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로써 원자폭탄 개발에는 우라늄-235와 플루토늄-239의 두 가지 경로가 있음을 확인됐다.

 

우주의 비밀을 푸는 순수한 과학적 연구로 시작된 핵분열 연구는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극단적 전쟁 상황에서 불행하게도 군사기술로 전환되어 인류를 위협하는 대량살상무기 즉 원자폭탄으로 진화했다.

 

도쿄 대공습과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1944년 7월 사이판섬이 미군에 함락되자, 아이러니하게도 일본군이 사용하던 기지는 곧 일본 본토를 공격하는 미군 B-29 전략폭격기의 주요 거점으로 전환되었다. 사이판과 티니안, 괌 등 마리아나 제도의 비행장에는 B-29 폭격기가 배치되었고, 1944년 11월부터 일본 본토에 대한 대규모 공습이 본격화됐다.

 

1945년 3월부터 미군은 고공에서 군수공장과 산업시설을 겨냥한 정밀폭격이 효과가 없자, 저고도 야간비행을 통한 소이탄 공격으로 전술을 전환했다. 소이탄 폭격은 목조주택이 밀집한 일본의 도시들을 무방비상태로 거대한 화재에 휩싸이게 했다. 이 과정에서 군수산업과 도시 기반시설뿐만 아니라 수많은 민간인의 거주지도 함께 파괴되었다.

 

특히 1945년 3월 9일 밤부터 10일 새벽까지 벌어진 도쿄 대공습에는 약 300기의 B-29가 투입됐다. 소이탄 공격으로 거대한 화재가 발생하면서 도시의 약 4분의 1이 파괴되었고, 하룻밤 사이 10만 명을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산된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단일 공습으로 발생한 가장 참혹한 민간인 피해 가운데 하나였다.

 

그리고 전쟁의 마지막 단계에서 미국은 새로운 형태의 폭탄을 사용했다. 1945년 8월 6일 B-29 에놀라 게이(Enola Gay)가 우라늄-235를 이용한 원자폭탄 ‘리틀보이(Little Boy)’를 히로시마에 투하했고, 8월 9일에는 플루토늄-239를 이용한 ‘팻맨(Fat Man)’이 나가사키에 투하됐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인명피해는 폭발 직후에 그치지 않았다. 폭풍과 열, 방사선에 의한 즉각적인 사망과 부상뿐만 아니라 이후 방사선 후유증과 질병으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1945년 말까지 히로시마에서는 약 14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나가사키에서는 약 7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했는데, 이 수치는 조사 방법과 기준에 따라 차이가 있다.

 

미국 정부가 원자폭탄 사용을 정당화한 핵심 논리는 미군과 연합군의 막대한 인명 손실을 피하고 일본의 항복을 끌어내 전쟁을 종결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원자폭탄 투하를 둘러싼 역사적 평가는 오늘날까지도 복잡한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일본은 이미 1945년 여름부터 군사적 한계에 부딪혀 외교적 모색이 진행되고 있었고, 특히 소련의 중재를 기대하는 움직임도 있었다. 하지만 일본 지도부는 국체 보존 즉 천황제 유지를 고수하며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 선언을 즉각 수락하지 못하고 분열된 상태였다.

 

1945년 8월 9일에는 나가사키 원폭 투하와 거의 같은 시기에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만주에 대한 군사작전을 시작했다. 일본 지도부는 원자폭탄의 충격과 소련의 참전이라는 두 가지 급격한 변화를 동시에 맞게 되었다.

 

결국 일본은 8월 14일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기로 했고, 8월 15일 천황의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전쟁 종결을 알렸다. 이후 9월 2일 항복문서가 공식적으로 조인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은 막을 내렸다.

 

역사학자 하워드 진이 제기한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 근본적인 질문

 

미국의 역사학자 하워드 진(Howard Zinn, 1922~2010)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수로 여러 폭격에 참여한 당사자로서 나중에 폭격과 원자폭탄 사용의 문제를 비판한 역사학자가 된다. 하워드 진은 1960년 <하버드 동아시아연구소>의 연구원 시절 「엉망진창의 죽음과 문서들(A Mess of Death and Documents)」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리고 하워드 진은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도서출판 이후, 2002)에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할 도덕적·군사적 정당성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한 이유에 관한 가장 강력한 논거는,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미국이 일본 본토를 침공해서 결국 죽게 되었을 사람들의 생명을 구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격 폭격 조사단>의 공식 보고서는, 전쟁 직후 7백 명의 일본 관리를 심문한 후 당시 일본인들은 항복하기 직전이었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지 않았더라도, 그리고 일본을 침공하지 않았더라도 1945년 12월 이전에는 ‘확실히’ 전쟁이 종결되었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아울러 미국은 이미 일본의 암호를 해독하고 있던 상태로 일본이 막 항복하려고 하는 상황임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원폭은 왜 떨어뜨린 것일까? 미국 학자 가어 앨퍼로위츠의 연구는 정치적 동기를 지적했다. 러시아가 태평양전쟁 참전을 앞두고 있던 상황에서 일본을 패배시키는 데 있어 그들의 기선을 제압하고 우리의 힘을 보여주고자 했다는 것이다.

 

르와양에서의 내 경험은 또다른 이유들을 암시해 주었다. 꾸준히 증강되어 에너지로 충만한 군사 기구의 강력한 추진력, 엄청난 양의 시간과 돈과 인재가 소비된 프로젝트를 ‘허비’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 새로운 무기를 보여주려는 욕망, 전쟁 과정에서 확대된 인명 경시, 고결한 대의에 대한 총체적인 신념을 갖고 전쟁에 착수한 이상 아무리 끔찍한 수단이라도 받아들일 태세가 되어 있던 태도 등등.

(중략)

히로시마와 르와양은 한때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였던 것 – 파시즘에 맞선 전쟁의 절대적 도덕성 –을 점차 다시 생각해 보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당시 미국의 원자폭탄 사용은 군인들의 희생을 줄이려는 군사적 필요성, 일본의 항복 가능성, 소련의 참전 등 여러 가지 이유가 거론된다.

 

그러나 하워드 진은 군사적 목적을 위해 인명을 경시하면서까지 일본의 군국주의에 맞선 원자폭탄 사용이 과연 정당하였느냐고 질문하였다.

 

특히 하워드 진의 문제 제기는 원자폭탄을 단순히 ‘전쟁을 종결시킨 강력한 무기’가 아닌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가 1961년 퇴임을 앞둔 고별 연설에서 고발한 군산복합체 프로젝트로 보았다.(참조: 울산함성·통일시대 「사람을 찾아서(4·9통일열사 도예종의 아내 신동숙, 24회」 미국의 매카시즘 광기, 빨갱이 사냥과 인혁당사건, 2026/8/22)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조선인 피폭자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원자폭탄의 피해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히로시마·나가사키 폭발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화상과 부상, 방사선 피해와 그 후유증을 안고 살아가야 했다. 그 가운데에는 당시 일본에 살고 있던 수많은 조선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히로시마에는 미쓰비시중공업의 조선소와 기계제작소 등 군수산업 시설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이곳에는 많은 조선인 노동자가 동원되어 있었다. 또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은 노동자뿐만 아니라 일제의 식민지배와 전시동원 체제 속에서 일본으로 건너갔거나 동원된 다양한 조선인들이 있었다.

 

1972년 4월 한국원폭피해자 원호협회가 작성한 현황보고서는 원자폭탄 투하 당시 히로시마에는 약 42만 명 나가사키에는 약 27만 명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중 조선인은 히로시마에 5만여 명, 나가사키에 2만여 명 총 7만여 명 정도 거주하다 피폭되었다. 그중 사망자(히로시마 3만 명, 나가사키 1만 명) 등 총 4만여 명이었으며 그 외 3만여 명은 생존하였으나 귀국한 사람은 2만 3,000명 정도였다고 한다.

 

강준만은 『한국근대사 산책 10권: 창씨개명에서 8·15해방까지』(인물과사상사, 2008)에서 원폭 당시 폭사한 사람 수와 피폭자에 대한 비참한 증언을 기록했다.

 

“‘당시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살고 있던 한국인의 수는 상세히 알 길이 없고 조사한 자료도 없지만 어림잡아 7만~8만 명으로 추산한다’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7만~8만 명 중 원자탄 투하 당시 폭사한 사람은 4만~5만 명이고, 살아서 귀국한 사람은 2만 3,000명, 일본에 남아있는 사람은 7,000명 정도로 추정된다는 것이 정설이다. 일본 전체의 피폭자가 70만 명이니까 그 10분의 1, 즉 1할이 한국인인 셈이다.……육체는 방사선 피해로 벌집처럼 되었고, 외모는 한센병 환자와 구별이 안 되니 상대해주는 이웃도 없었다. 그러니까 거지 중에도 상거지, 사람들 눈을 피해 깊은 산중에서 움막을 짓고 살기가 일쑤였다. 가난하고 병들고 약 사먹을 돈이 없으니 죽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 살아남아 협회에 등록되어 있는 피폭자는 2,100명 정도다. 일본의 피폭자가 28만 5,000명이니까 한국인 피폭자는 그 1할인 3만 명 가까이 돼야 하는데 10퍼센트는커녕 1퍼센트도 못 된다. 다 어디로 갔는가? 모두들 천추의 한을 품고 저승으로 간 것이리라. 나는 그들의 참상을 직시하면서 반세기를 살아왔다. 눈뜨고 차마 바라볼 수 없는 참혹한 광경,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그들의 처절한 신세타령, 그들은 외치다 쓰러지면서 ‘내가 죽거든 시체를 일본 대사관으로 가지고 가라’는 말을 남기고 죽어갔다.’”

 

1995년 일본 NHK가 실시한 조사에서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가 옳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비율이 일본 8.2퍼센트, 미국 62.3퍼센트, 한국 80.5퍼센트로 세 나라 중 한국이 제일 높았다.

 

앞의 책에서 강준만은 여론조사 결과에 대해 도쿄대 철학교수 다카하시 데쓰야는 “원폭투하를 긍정하는 사람이 미국보다도 한국에서 많았던 것은 왜일까?”라고 물으면서 원인은 일본의 식민 지배와 침략에 있다고 주장했다.

 

“원폭 투하가 일본의 패전을 결정적으로 만들어 식민지 지배로부터 해방을 도왔다는 견해나, 전쟁 이후에도 식민지 지배나 침략의 책임을 명확히 인정하지 않는 일본에 대한 비판 등이 이유가 아닐까?

 

원폭의 참화와 피해의 고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일본인들이 한국·아시아인들에게 안겨준 참화와 고통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도 식민지 지배의 결과인데 피폭자 가운데는 조선인들도 있다. 일본에서든 한국에서든 원폭이라는 악에 대한 이해가 한층 깊어지기를 바란다.”

 

핵 없는 새로운 세계, ‘제3세계’의 등장

 

미국은 원자폭탄 개발에 이어 더욱 강력한 수소폭탄 개발에 나섰다. 1954년 3월 1일, 미국은 서태평양 마셜제도의 비키니 환초에서 최초의 수소폭탄 브라보(Bravo) 실험을 했다. 작전명 캐슬 작전(Operation Castle)과 합쳐 캐슬 브라보(Castle Bravo)로도 불린다. 폭발력은 약 15메가톤으로, TNT 1,500만 톤에 해당했다. 이는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약 1,000배, 나가사키 원자폭탄의 약 700배에 해당하는 엄청난 규모였다.

 

그러나 이 실험의 방사능 낙진은 미국이 예상했던 범위를 훨씬 넘어섰다. 당시 비키니 환초 인근 해역에서 조업하던 일본의 참치잡이 어선 제5후쿠류마루(第五福龍丸)가 방사성 낙진을 맞았다. 23명의 선원 모두가 피폭되었고, 그중 기관장이 급성 방사선 증세를 보이다가 1954년 9월 23일 사망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이미 원자폭탄의 참상을 경험했던 일본 사회에서 제5후쿠류마루 사건은 다시 한번 핵무기의 공포를 일깨웠다. 특히 일본 시민사회에서는 원자폭탄과 수소폭탄의 실험을 중단하고 핵무기를 금지하라는 서명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3,200만여 명이 서명에 참여했다. 또한 외국에서도 6억여 명이 서명에 동참했다. 그리고 195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서 열린 제1회 원수폭금지세계대회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런 핵무기 금지 운동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소련은 경쟁적으로 핵을 보유했다. 특히 양대국은 직접 충돌을 피하면서도 유럽과 아시아, 중동과 아프리카 등 세계 곳곳에서 동맹국과 우방을 지원하고 군사적·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경쟁했다.

 

그러나 아이로니컬하게도 미국과 소련이 가지고 있는 가공스러운 핵무기의 공포로 냉전의 평화는 유지되고 전쟁은 억제됐다.

 

이처럼 핵무기는 역설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지만, 결코 안전하고 평등한 평화가 아니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무기였지만, 바로 그 파괴력이 상대방에게도 치명적인 보복을 받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만들어 전면적인 핵전쟁을 억제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특히 1960년대에 들어 미국과 소련이 서로에게 치명적인 공격 능력을 갖추게 되면서, 핵전쟁을 시작하는 것 자체가 양쪽 모두의 파멸로 이어질 수 있다는 상호확증파괴(Mutually Assured Destruction, MAD)의 논리가 냉전시대 미·소 핵전략의 중요한 기반이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로운 세계, ‘제3세계’가 등장한다.

 

‘제3세계’란 자본주의 질서를 따르는 1세계와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실험하는 2세계를 제외한 나라가 아니라, 과거 식민지였던 아시아·아프리카 국가들의 연대와 단결 그리고 평화를 실현하고자 하는 세계였다. 특히 제3세계는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아시아·아프리카 국가들이 미·소 중심의 ‘적대적 공존’체제인 냉전에 맞서 반제(反帝)와 반식민(反植民), 민족자결(民族自決), 평화공존(平和共存)을 내세우며 국제정치에서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새로운 사조였다. 이들에게 중요한 문제는 어느 강대국의 편에 설 것인가가 아니라, 식민주의와 인종차별을 끝내고 자신들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세계를 만드는 것이었다.

 

1955년 4월 18일 인도네시아의 도시 반둥에서 아시아, 아프리카 대륙의 총 29개국 대표가 모여 국제회의를 열었다. 이것이 ‘반둥회의’로 여기에 참가한 나라는 문화·인종적으로 공통점은 없었으나,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 통치를 경험했고 여기에 맞서는 반제(反帝) 민족·민중해방의 투쟁역사는 어떤 식으로든 일치했다.

 

제3세계는 미국과 소련 양측에게 ‘평화 10원칙’을 선언하면서, ‘원자폭탄과 달러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식민주의를 끝내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모색하였다. 그리고 제3세계는 그 어느 쪽에도 군사적으로 가담하지 않는 비동맹 중립, 외세 불간섭을 대안으로 선택했다. 그리고 미·소 양 진영으로 분할된 적대적 공존체제인 냉전을 거부하고 평화를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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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개 아시아·아프리카 국가(지역)의 정부 대표단이 1955년 4월 18~24일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아시아·아프리카 회의를 개최했다.
(사진출처 = 신화망 한국어판)
반둥 회의 또는 아시아 아프리카 회의는 인도의 네루 총리, 인도네시아 대통령 수카르노, 중화인민공화국 총리 저우언라이,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가 중심이 되어 개최를 목표로 한 회의의 총칭이다. 1955년 에 인도네시아의 반둥에서 제1차 회의가 개최되었다.(출처=위키백과)

 

 

반둥회의의 반제·반식민, 민족자결, 평화공존과 4월혁명공간 자주·민주·통일운동

 

반둥회의에 한국은 6·25전쟁 직후 정전 상태이고 미국을 중심으로 한 반공 동맹체제에 묶여있어 참가하지 못했다. 이후 한국은 비동맹운동과의 초기 연대 기회를 놓치게 되어 한미동맹과 예속적 미국의 군사·외교 노선이 이승만 독재체제에서 굳어지고 신생 독립국들이 추구했던 반제·반식민, 민족자결과 평화공존의 흐름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된다.

 

그러나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면서 이승만 친미사대독재정권이 무너지고 한국 사회에는 새로운 정치적·사회적 공간이 열렸다. 학생과 청년, 그리고 혁신계 인사들은 분단과 냉전의 현실을 넘어 새로운 평화 질서와 자주·민주·통일을 위해 반둥회의에 관해 관심을 두게 된다.

 

특히 반둥회의가 제시한 반제·반식민과 민족자결, 평화공존의 문제의식은 4월혁명 이후 한국 사회 청년학생과 혁신계에 분단과 냉전을 당연한 질서로 받아들이기보다 자주독립과 민주번영을 쟁취하기 위한 미래지향적인 새로운 세계 사조로 인식한다.

 

사월혁명연구소(현 사월혁명회 전신)의 『한국사회변혁운동과 4월혁명 ②』, 1990)에 나오는 현단계 평화공존의 세계 사조를 변혁의 순간으로 활용하자는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공동선언문의 일부이다.

 

“세계사적 현단계의 기본적 특징은 식민지 반식민지에 있어서의 민족해방투쟁의 승리이다. 우주과학분야와 경제성장면에 있어서의 사회주의 진영의 비약적인 발전과 그리고 자주독립과 민주번영을 쟁취하기 위한 아아(亞阿)·중남미 제후진지역에 있어서의 민주·민족적 해방투쟁의 고양으로 인해 금일의 세계사는 최근 수년간을 계기로 하여 평화적 공존이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돌입하고 있다.

 

세계사의 새로운 국면으로서의 이 평화적 공존의 사조는 이러한 객관적 정세가 인류에게 필연적으로 요청하는 가장 과학적인 결론이다. 그것은 가공할 파멸적 전쟁을 기대하며 강행되던 핵무기 군확경쟁의 냉전으로부터 평화적 경제경쟁 단계로의 이행과, 그리고 식민지 반식민지의 전면적 해방 및 군사동맹체제와 전초기지화의 부담으로부터의 후진민족의 독립이라는 두 명제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이러한 평화 자주 번영을 사랑하는 세력은 고립되고 봉쇄된 소수가 아니라 세계사의 방향을 결정하는 주요인으로 확립되어 있다.

광대한 아시아·아프리카·중남미의 대부분의 인민들은 이미 식민주의와 군사기지적 예속체제를 거부하고 국내의 매판관료세력을 타도하여 민족자주의 독립노선 위에 경제적 번영의 길로 매진하고 있다. 그들의 단결된 국제적 세력은 유엔에 있어서의 발언권을 증대하여 전쟁세력을 압도하고 있다.

 

동시에 오늘날 자본주의진영 내부에 있어서도 핵장비와 군사기지의 철폐를 주장하는 양심적 시민들의 열렬한 평화주의 운동이 고조되고 있다. 여하한 현실적인 문제에의 접근일지라도 이 평화공존원칙에 위배될진대는 그것은 스스로의 존재를 역사로부터 말살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본 준비대회에 참석한 모든 대표들은 전국의 학생동지들을 대신하여 알제리아·콩고·쿠바·라오스 및 여타의 아아·중남미에 있어서의 민족해방투쟁을 열렬히 성원하는 바이다.

(중략)

금일 우리 사회에는 이러한 구조적 여건을 반영하는 하나의 모순현상이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매판관료세력과 대중간의 모순인 것이다. 이 두 세력의 모순은 현실적으로 통일세력 대 반통일세력간의 모순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이들간의 격화하는 대립은 4월혁명을 게기로 하여 급격한 힘 관계의 역전을 시현하게 되었다. 4월혁명은 이러한 우리의 사회구조와 지배관계에 있어서의 모순의 대립이 그 극치점에 도달하였을 순간 폭발적으로 현상화된 역사의 객관적 운동법칙의 당연한 전개였다.

 

동시에 그 순간은 민족해방과 자주독립이라는 평화공존의 세계사의 조류가 우리 사회에도 적용되기 시작한 변혁의 순간이었다.” 

 

반둥회의의 반제·반식민, 민족자결, 평화공존 그리고 도예종의 통일운동

 

반둥회의가 내세운 반제·반식민, 민족자결, 평화공존의 원칙은 4·19혁명 이후 혁신계와 통일운동 세력의 자주·민주·통일운동, 평화 번영의 원칙과 사상적·국제적 원칙이 궤를 같이했다고 필자는 본다.

 

필자가 추정하는 이유는 혁신계와 통일운동 세력이 이런 세계 사조를 한국에 적용하기 위해 전국적 통일전선 조직인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를 창립하였기 때문이다.

 

김보영은 『4·19와 남북관계』(2000), 「4월민중항쟁 시기의 남북협상론」에서 민자통 조직구성과 역할에 대해 정리한다.

 

“민자통은 간부직은 민족건양회계가, 실무진이라 할 수 있는 부장급은 민민청과 통민청의 청년들이 맡았고, 사회당이 민자통 지방조직 중에 세력이 강한 경북·경남·전남지역과 서울시 협의회 등을 주도했다.

 

민자통은 강령에서 자주·민주·평화의 3대 원칙을 제시하고, ‘민주당의 선건설 후통일론 배격, 유엔 및 소련 당국이 통일을 위해 협조할 것, 남북한 간에 완충지대를 두어 서신왕래, 경제교류, 인사교류를 실시할 것’ 등을 발표했다.” 

 

사실상 민자통을 주도한 한 실무세력은 신동숙 여사의 부군 도예종 선생을 위시한 청년 전위조직인 민주민족청년동맹(민민청)과 통일민주청년동맹(통민청)이었다.

 

도예종은 4·19혁명 이후 교사를 그만두고 영주교육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된다. 그러나 민주당 정권은 도예종에게 교육감 발령을 하지 않는다. 그는 교육감직을 수행하지 못하고 이후 4월혁명공간 대구 민주구국동지회 후신인 경상북도민족통일연맹 간사장과 중앙 민자통 상무위원으로 활약한다.

 

민주구국동지회는 대구에서 4·19혁명 직후 5월 22일 독립운동가 출신 인사들을 중심으로 결성되었고, 안경근(1896~1978)이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안경근은 안중근(1879~1910) 의사가 종형(從兄)으로 김구(1876~1949)를 보좌하며 임시정부의 경무국장으로 활동하면서, 일제의 밀정과 관헌들을 처단하는 데 주력했다.

 

이후 민주구국동지회는 경북시국대책위원회로, 다시 경상북도민족통일연맹으로 이어진다. 조직의 변화는 단순한 명칭의 변경이 아니라 4·19혁명이 열어놓은 공간에서 ‘민족자주와 통일’이라는 보다 구체적인 정치적 단체로 발전해 가는 과정​이었다.

 

도예종은 1961년 『영남일보』에 2월 8일부터 12일까지 연재한 「노동운동과 통일문제」를 기고한다. 김민희의 『쓰여지지 않은 역사: 인물로 본 사회운동사』(대동, 1993)에 나오는 도예종의 기고이다.

 

“민족혁명의 완수는 통일이며 과제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봉건적 잔재의 일소와 둘째로는 소위 매판자본가의 배격, 셋째로 외세의존에서부터 민족자주성의 확립등이다.

  이것이 바로 민족의 자결원칙에 입각한 자주적 통일수립을 의미하는 것이다. 개인이나 집단이나를 물론하고 대중적이고 범민족적 운동으로서 전개되어야 하며 노동운동이 민족운동으로서의 성격을 띄워야 하는 소이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도예종이 기고에서 주장한 봉건적 잔재 일소, 매판자본 배격, 민족자주성 확립이라는 3대 과제는 전형적인 반제국주의·반식민주의(Anti-imperialism & Anti-colonialism)의 반둥회의 정신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는 미·소 강대국 중심의 냉전 구도에서 벗어나 신생 독립국들의 자주적 발전을 강조했던 반둥회의의 민족자결과 평화공존의 국제질서 원칙과도 직접 연결된다.

 

도예종은 민족자결에 입각한 자주적 통일론, 즉 외세의 간섭이나 강대국의 패권 논리에 의존하는 통일이 아니라, 한국민족 스스로의 자결권에 입각한 자주적 평화통일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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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예종 선생과 부인 신동숙 여사
(사진출처=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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