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찬욱의 총반격
  • - 통일애국원로 홍갑표 선생을 추모하며 -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등록일 : 2026.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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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19 당시, 선두에서 상수도관을 굴리며 경무대로 진격하던 청년들. 맨 오른쪽이 홍갑표 선생님(사진출처 = 홍갑표)


사월혁명회 주된 대외 활동 중 대표적인 것이 월례발표회이다. 그러나 2020년 코로나 19 팬데믹으로 월례발표회가 중단되자, 필자인 사무처장의 주 임무 중 하나가 참석하셨던 원로 통일인사에게 정기적으로 전화해 근황과 건강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사무처장이 통화하는 분 중에는 4·19혁명 당시 학생으로 본회 서정복(1940~2018), 임동규(1939~2020) 회원과 농촌운동에 참여했던 홍갑표 선생이 계신다. 

 

홍갑표 선생은 ‘사월혁명회’의 월례발표회 이외에도 매년 수유리 4·19묘소에서 개최되는 민족민주운동단체 합동참배식 등 여러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지지해 주셨다. 필자가 선생께 전화를 드리면 항상 온화한 목소리로 ‘한 동지’라며 반겨주시던 그분이 올해 초 건강이 악화해 병원에서 투병 중이었다가 2월 4일 새벽 0시 28분 별세하셨다. 향년 87세

 

지난 5일, 서울대학교병원장례식장에서 진행된 ‘통일애국원로 고 홍갑표 선생 국민주권연대장’에는 본회 주례모임과 월레발표회가 중복되는 관계로 참석은 못 하였지만 늦게나마 조문 가서 마지막 가는 길을 추모했다.

홍갑표 선생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초등학교 시절 양주 누님댁에서 겪은 6·25전쟁이었다. 

 

ㅡ  6·25전쟁 시기 칠봉소년단 활동과 중국 항미원조지원군과 미군에 대한 증언
 

홍갑표 선생은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나던 해 아버지 홍순홍, 어머니 최립분의 3녀 1남 중 막내로 서울시 신당동 꼭대기 마을 유락동에서 태어났다. 출생 백일 좀 넘어 아버님이 타계하여 홀어머님 품에서 자랐다. 이후 고인은 외가 동네인 경기도 양주시 덕정동(원잠동)으로 이사하였고 친가인 홍씨 집성촌도 십 리 떨어져 있는 곳에 있어 직장 생활 말고는 고향 양주에서 일생 대부분을 보낸다.

 

선생은 1950년 6·25전쟁 초기 양주가 조선인민군에 점령당한 후 칠봉산 이름을 딴 칠봉소년단(뒤에 화랑소년단으로 변경)이 조직될 때 참가했다. 고인은 칠봉소년단이 조직될 때 좀 똑똑하고 노래 잘한다는 이유로 저학년인데도 지도부장의 감투를 쓰고 활동한다. 이후 누나 형들이 가르치는 노래를 따라 배워 선생은 그것을 다시 저녁에 단원들이랑 마당에 멍석 깔고 동네 주민들에게 모깃불을 피우면서 가르쳤다고 한다. 당시 고인의 나이는 13세로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그러나 9·28 수복이 되어 국군이 들어오자 동급생으로 나이가 서너 살 위인 소년단 면 위원장이었던 동무는 총살당했다. 또한 여성동맹 면 위원장인 친구 어머니는 시냇가 찔레 덤불 아래서 사살되었다. 선생은 다행히 변은 당하지 않았지만, 너무도 무섭고 끔찍한 학살이었다고 했다.

 

이후 전황이 바꾸어 중국 항미원조지원군이 추운 겨울에 마을에 주둔하게 됐다. 선생은 이제 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또 다른 경험을 한다. 이 증언은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 사건 관련자들이 만든 친목 단체인 ‘남민전 동지회’가 필자에게 홍갑표 선생 구술을 의뢰해서 한 구술 내용을 짧게 정리한 것이다.

 

“중국군은 당나귀의 중간인 노새가 잔뜩 물자를 짊어지고 이동하는데 노새가 아무 데나 쓰러져도 끄떡없고 아주 생활력도 강하고 잘 끌어요. 중국지원군의 움직이는 이동 수단은 노새가 거의 전부에요. 미군 쌕쌔기(제트기)가 마을을 폭격하러 오면 중국군은 모두 흰 홑이불을 망토처럼 뒤집어쓰고 ‘싹’ 하고 앉아 있으면 주위가 눈 천지니까 안 보여요. 비행기 가게 되면 모두 털고 다시 나옵니다. 그리고 중국지원군의 복장은 전부 누비옷인데 계급장이 없어요. 그러니 누가 대대장인지 누가 연대장인지도 몰라요. 자세히 보니 간부 되는 사람은 뻘건 줄이 팔에 있었어요. 

이들이 마을로 들어오면 동네 가운데에서 간부가 집 배정을 하는데. 너희는 어느 집에 들어가라 너희는 이쪽으로 배정을 하면 그들은 우선 고맙다고 주민들에게 인사부터 해요. 동네 사람들은 처음에는 좀 그랬지만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함께 잤어요. 주인집 여자들은 아랫목으로 그들은 윗목으로, 그리고 그 경계선에 남자인 내가 들어가서 잤어요. 그뿐 아니라 이 사람들은 성 문제에 대해서는 규율이 엄격하고 정확해요.”

 

또한 고인은 미군에 대해서도 증언을 했다.

 

“9·28 수복되어 미군들이 덕정에 들어왔는데 칠봉산 밑에서 맥주 먹고 비틀비틀하면서 총 들고 들어와 색시 있어, 색시 이래요. 병사들이 집마다 당기면서 여자들을 찾고 그랬어요. 

불행하게도 우리 누나 친구는 윤간당해서 애까지 생기니까 지우려고 양잿물을 먹고 그래서요. 나는 우리 누나 지키려고 오줌 뿌린 독 속에 누나 들여보내서 솜으로 막아놓고 그 추운데 내가 지키고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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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9월, 미대사관 앞 7차 반미월례집회에 참석한  홍갑표 선생님

 

ㅡ  나는 세균전의 희생자다

 

선생은 중국지원군하고는 같이 생활했지만, 북의 조선인민군들하고는 생활은 못 해 봤다고 했다. 하지만 이때 중국 항미원조지원군과 미군의 주민을 대해는 태도를 보고 누가 옳고 누가 조선 사람 편인지 깨달았다고 했다. 이런 경험은 선생이 평생을 살면서 반미반제운동에 나서는 계기가 된다. 고인의 증언이다.

 

“그런 거를 보면서 중국인민해방군이 더 좋아진 거지. 

또 큰댁에 있을 때 이 사람들이 오더니 곡식을 총 창으로 이렇게 찌르면 파묻어 감춰놓은 거 ‘딱’ 찾아내요. 주민은 곡식 감추기 작전, 그 사람들은 곡식 찾기 작전. 그리고는 찾은 곡식에 대해 반드시 돈을 줘요. 그냥 싹 가져가는 법이 없어요. 주민들 먹을 거 남겨 놓고. 자기네들이 미안하다고 몇 번 절하고 뻘건 돈(조선 화폐)을 줘요. 그러면 받을 수밖에 없지. 

중국군은 곡식을 볶아서 미숫가루로 만들어놓고 전대에다가 눌려 넣어요. 그리고 아이들을 위해 과자를 만들어서 우리에게 줘요. 이게 말이지 곡식을 빼앗아 가는 원수가 아니라 아이들에게는 먹는 재미도 있고 좋았어요. 

한 번은 중국군이 닭을 잡아서 뭘 만들었는데. 이들은 어른 공경을 참 잘해요. 제일 먼저 맛있는 부분을 큰아버지 먼저 드리고 꼬마인 나도 주고 나머지만 자기들이 먹어요. 예의가 상당히 발랐어요. 그렇게 우리는 그 사람 중국 인민해방군에게서 사람 냄새, 인격을 느끼게 되었어요. 

하지만 중국군에게도 또 다른 부류도 있었어요. 춘기 공세 때 중국군이 다시 들어오는데 이때 국부군도 함께 들어옵니다. 장개석 부대 출신인데 이들은 사납다고 조심하라고 마을 사람들이 이야기해요, 중국군 안에 모택동 군대와 장개석 군대가 섞여 있는 것이었어요.”

 

고인은 1952년 봄, 초여름 사이 미군의 세균전에 의한 열병으로 한 달간 앓았다. 전쟁 중이라 의료기관 없어서 세 번이나 반복해서 걸린다. 일종의 장티브스(장질부사)였다.

2015년 6월 13일 자 자주시보 ‘나는 한국전쟁시기 세균전의 희생자다’ 기사에 나오는 당시 민족정기구현회 전 회장 홍갑표의 세균전 피해 증언이다.

 

“나는 세균전의 희생자다.
 얼마 전 케블 티비 히스토리 체널에서 한국전쟁 시기 미국의 세균무기 사용에 대하여 집중 방영하였다. 시청을 하다 보니까 그 시기가 바로 내가 염병(장티브스?)에 걸려서 사경 한 달을 견디고 겨우 몸을 추스릴 수 있었고 같은 병으로 이웃 사람들이 죽어나가던 때와 일치하였다.
 많은 미국인들이 세균전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으며 특히 극비리에 세균을 전단에 섞어 뿌렸다는 비행사의 증언도 있었다.
또 일본군이 한국전에 참여했다는 내용도 히스토리 체널은 언급하고 있었다.
악명 높은 731 이시이 부대는 숱한 한국인과 중국인을 생체실험 대상인 '마루타' 해부를 통하여 세균 무기를 개발했으며 패전 이후 여기에 종사했던 자들이 미 점령군에 그대로 영입되어 미국의 세균 무기 개발에 참여했으며 이들의 일부가 미 군속으로 위장하여 한국전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이시이 부대 소속 대원들은 전범 재판은 커녕 미국의 비호 아래 한국전 특수로 일본 혈액사업을 벌여 떼돈을 벌었고 일본 굴지의 제약회사로 발전했다.
 또 뒤에 실은 韓國戰爭資料叢書(63-67)(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는 미국 정부의 공문서로서 한국의 상황에 대해 미국무부가 작성하였거나 국무부에 접수된 다른 행정부서 및 재외공관, 개인, 전문가, 비평가들의 문서들을 집약한 것인데 이 글의 요약 부분을 읽고 내가 세균전의 피해자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ㅡ  1960년 4월 19일, 4·19혁명의 선봉에 서다. 

 

선생은 1953년 정전되고 그해 겨울 동짓날 동무들과 놀다가 수류탄 뇌관이 터져 오른손 엄지 검지 중지 한마디씩 날아가는 부상을 당한다. 이후 고인은 미군부대에서 나온 물품들을 5일 장에 팔아서 1년간 생계를 유지하다가 누님들의 권유로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1956년 경동고등학교, 1959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에 입학한다.

 

고인은 1960년 4월 19일, 태평로 국회의사당 앞 4·19혁명에 학우들과 참여하고 경무대 근처까지 진출하다가 실탄 소리를 듣는다. 시위군중과 학생들은 경찰의 발포에 대응하기 위해 근처 공사장에 널려 있는 상수도관을 굴리며 진격한다. 

 

이때 선생은 ‘亂射(난사)하는 경찰의 銃彈(총탄)을 무릅쓰고 通義洞(통의동)을 지나 景武臺(경무대)로 육박하는’ 사진의 주인공이 된다. 4월 19일 당일 선생의 생생한 증언이다.

 

“4·19 당일 국회의사당 시위에 참여했는데 학우들이 광화문으로 가자. 지금은 광화문이지만 당시는 중앙청이란 말이지. 중앙청 쪽으로 가니 약 200m 되는 철조망이 있어. 누가 제안했는지 모르겠지만 여기서 잠깐 앉았다 가자 그러더라고. 그런데 저쪽 안에서 소방차가 빨간 물감 타가지고 이쪽으로 뿌리는 거야. 이게 3.1 운동 때 일제가 하던 짓이거든. 흰옷 입은 사람들한테 뿌려서 나중에 색출하는 건데. 우리는 검은색 교복 입었는데 저거 때문에 못 들어갈 건 아니잖아. 그래서 두 패로 갈라지면서 바리케이드 철조망을 공격하자. 연좌 농성하자 이렇게 되었어. 

이때 동국대학이 들어오는데 ‘가자’, ‘안 가자’가 어디 있어 그냥 밀고 가는 거야. 나는 열이 나서 어디서 들은 건데 ‘고맨 고, 이즈맨 이즈(Go-man go, is-man is!)’. 그런 영어 이 세상에 없는데. 말인즉슨 여기 있을 사람은 있고 갈 사람은 가자, 이런 콩글리시거든. 그리고 그들과 합류했지.

동국대학은 수가 많아. 끝이 없어 그냥 밀려들어 오고 선발대가 깃발 들고 앞으로 쫙 나가면서 우리하고 다 섞인 거야. 그런데 저쪽 얼마 안 떨어진 곳에서 ‘땅땅’ 하는 거야. 나중에 확인했지만, 난 카빈총으로 공포를 쏜다고 생각했는데. 최루탄을 쏜 거야. 최류탄이 ‘슈슈슛’ 터지니 눈이 따가워, 다행히 바람이 말이지 우리를 도와서 수건으로 막고 가는데 또 소방차가 물감을 뿌리는 거야. 

저쪽에서는 총 쏘지, 최루탄을 갈기지. 소방차가 물감을 뿌리지. 하지만 이제 시위대는 무서운 거라건 조금도 없고, 앞으로 나가며 저항해요. 한번 부딪쳐 보자는 것이지. 시위대는 사복을 입은 건 동국대, 교복은 서울대 사범대학이야. 

이후 경찰의 발포에 대응하기 위해 근처 공사장에 널려 있는 상수도관을 굴리며 진격하는데 지휘관이 따로 없어요. 그냥 말을 하면은 전부 따라 해요. 총을 쏘면 엎드리고. 그냥 밀고 들어가는 거야. 거기서부터는 최루탄을 그냥 쏟아부어. 나는 누구 것 빼앗았는지 사범대학이라고 쓴 팻말을 들고 있었어. 이후 앞으로 가면 한 십 미터 이십 미터 정도 시위 물결이 쫙 들어가는 거야. 그러면 저쪽에서 최루탄 쏘면 이제 시위 물결이 쫙 뒤로 빠지는 거야. 

그런데 저쪽에 꾀죄죄한 옷 입은 애들이 보인단 말이야. 그게 양아치, 구두닦이 바닥에서 갖은 모욕을 다 당하던 애들이야. 하지만 우리보다 더 용감하게 철조망 뜯어내고 싸웠어. 

이후 시위대랑 효자동 입구 제1 바리케이드를 뚫고 상수도관을 굴리고 정지된 전동차 두 대를 밀어 제2 저지선마저 뚫었지. 경무대 정문 바리케이드를 소방차와 더불어 공격하는 데 경찰들이 조준 실탄 사격을 하는 거야. 그래서 후퇴하면서 뒤를 돌아보니 여기저기 학생들의 주검이 쓰러져 있었어요.”

 

선생은 당시 4월혁명에 도시빈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시위군중이 전차를 이용해 바리케이드를 허무는 장면도 목격하였다고 증언했다. 필자 또한 사월혁명회 회원으로부터 학생뿐만 아니라 고학생, 구두 닦기, 넝마주이 등 여러 계층의 군중이 참여하였다는 증언을 들었다. 

 

ㅡ  향토개척단 창단과 향토 민족 의식화 운동

 

선생은 서울대 입학 후 과 회장이 농촌 출신이니 농촌계몽대를 만들어 농촌운동 하자고 제안해서 자연스럽게 함께 한다. 선생은 4월혁명 이후 국민계몽대를 이끌었던 서울대 문리대 학생회장 안병규가 사무실로 찾아와 국민계몽대의 법통을 향토개척단에게 공식적으로 넘겨주었다고 증언했다.

 

사월혁명연구소 고명균 연구위원의 논문 「국민계몽대의 전개과정」, 『한국사회변혁운동과 4월혁명 ②』(한길사, 1990)에 나오는 국민계몽대 태동 경위 등이다.

 

“① 1960년 6월 10일 학도호국단을 해체하고 결성된 서울대 학생회에서 전국적인 국민신생활운동과 농촌을 중심으로 한 광범위한 국민계몽대 결성을 최초로 결의, 6월 20일경 각 단과대학 학생회 중심으로 단대별 국민계몽반을 조직하고 이를 일원화하기 위해 문리대를 중심으로 통합조직을 결성하였다. 
(중략)
② 1960년 7월 2일 오전 11시, 1,100여 명 참석하에 문리대 운동장에서 문리대 국민계몽대 결단식을 거행하고, 바로 도단부(道團部)를 결성. 당일 치대에서도 188명이 참석, 계몽대 결대식을 거행, 의대에서는 매년 실시하던 무의촌진료를 국민계몽운동과 병행 실시키로 결의하고, 사대에서는 농촌을 중심으로 한 문맹퇴치, 성인교육을 강력히 실시키로 결의했다.
(중략)
③ 1960년 7월 16일 10시 문리대 운동장에서 서울대 국민계몽대 결대식을 거행. ‘전국대학생에게 보내는 메시지’와 ‘국민계몽대 선언문’을 낭독하고 ‘반혁명세력’을 조상(弔喪)한다는 상징적인 영구를 선두로 시가행진을 했다. 7월 7일부터 전국각지로 계몽대 출발. 7월 8일에는 서울과 도시지역을 책임 맡은 계몽대원들이 ‘새나라 새터에 새살림’이란 플래카드를 선두로 시가행진을 하고 새생활운동을 개시했다.” 

 

하지만 선생은 학생 통일운동단체인 서울대 민족통일학생연맹 활동은 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아마 농촌운동에 관심이 많고 농촌계몽대를 확장하는데 고인은 몰두한 것 같다. 그리고 1961년 5·16쿠데타 이후 12개 단과대학 농촌운동단체인 서울대 향토개척연합회 등을 통합해서 단일 조직인 향토개척단을 창단하고, 선생은 창단 회장으로 활동한다. 

 

향토개척단의 활동은 서울대 12개 단과대학 총학생회의 결정으로 ‘학생회비’의 지원을 받았다고 선생은 증언했다. 고인은 향토개척단은 민족주체성 확립과 농촌 협동화 등을 목표로 삼고 활동하면서 구호로 ‘1. 민족주체성 확립 2. 농민의 협동화 3. 싸우자!’를 사용했다고 했다. 

 

이후 향토개척단은 충남 보령군 청소면에서 갯벌 막는 활동과 수문 만드는 활동 등도 전개했다. 보령군은 서해안을 끼고 많은 간석지를 갖고 있지만, 수백 년을 내려온 빈곤의 사슬에서 벗어나겠다는 저항도 노력도 없이 그대로 순종 되어왔다고 선생은 증언했다. 향토개척단은 민족주체성 확립과 농촌 경제의 부흥을 외치며 활동했다고 했다.

 

또한 향토개척단은 일제나 이승만 정권에 기생하는 ‘반민족 기독교적’인 농민운동과 농민이 못사는 이유를 무식이나 게으름으로 몰아붙이던 풍조를 불식하기 위해 초창기부터 매번 ‘개척지침서’를 발간했다. ‘개척지침서’를 통해 농촌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과학적 방법으로 파악하고 농민의 의식 고양을 목표로 사업했다고 선생은 이야기했다.

 

이후 향토개척단은 향토 의식이 다시 돌아오게끔 하는 ‘향토의식 초혼굿‘ 등 민족 의식 운동을 전개한다. 

 

ㅡ  농촌운동에서 민족의식 운동으로 전환, 제1회 향토의식초혼굿(鄕土意識 招魂굿)

 

향토개척단은 외세문화에 물들어가는 사회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향토 의식화 문화운동을 기획한다. 당시 대학 축제는 미국판 대중음악이 판을 쳤다고 한다. 밴드를 불려다 놓고 재즈를 부르는 것을 대단한 것으로 여겼다고 한다. 

이런 퇴폐 축제문화를 바꾸기 위해 향토개척단은 풍물을 치고 탈춤을 추면서 굿을 해야 농촌이 피폐에서 벗어나고 농민이 주인 되고 민중이 소생된다는 취지로 ’향토의식 초혼굿‘을 기획한다.

 

1963년 겨울, 제1회 ‘향토의식 초혼굿(鄕土意識 招魂굿)’과 강연, 사대주의 장례식, 살풀이, 가면극(원귀마당쇠), 농악과 함께하는 뒤풀이 등을 내용으로 하는 축제를 개최하면서 선생은 졸업생이지만 홍길한이란 이름으로 ‘원귀마당쇠’에 출연한다. 

 

선생은 졸업했으나 “후배들 행사에 끼어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그때만 해도 지금의 굿판 같은 데 어울리는 ‘끼’를 기진 학생이 드물었고, 남자 탈춤의 기본인 어깨 흥을 추스르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아” 함께 했다고 증언했다.

 

2001년 12월 22일 「디지틀말지」에 쓴 선생의 ‘1963년 공연된 원귀마당쇠 원본’ 기사 일부이다.

 

“이 극은 곧 이어 대학을 벗어나 대구 경북고 학생과 경북대 학생들이 출연하여 대구 KBS방송국 공개홀인 KG홀에서 공연하여 절찬을 받았다. 그 때 연출은 내가 맡았다. 사대주의 장례식에 사용된 상여와 허수아비를 기가 막히게 만들어 박수를 받았던 임동규 친구가 2001 민족통일대축전에 범민련 남측 부의장 자격으로 방북했다가 문제가 되어 아직도 공판에 계류 중임이 안타까웁다.
(중략)
<19일 본부서 광대놀이·농악 굿 등 흥겨워> (당시 대학신문의 기사 한 토막)
‘학생 농촌운동의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여 기세를 올리던 향토개척단에서는 자체의 자세를 반성하고 민족 예술 현대화의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 이번에 「제1회 향토의식 초혼 굿」이라는 이름의 축제를 벌렸다. 지난 19일 하오 5시 문리대 강당에서 '향토개척단의 문제와 방향'이라는 강연회 (=연사 김문식, 박동묘 교수)를 열고 이어서 문리대 소극장서 신판 광대놀이를 공연 문리대 교정에서 사대주의 장례식, 농악 굿 등을 호화롭게 열었다. 횃불이 높이 지피고 巫歌와 농악이(※동국대학교 농악대-당시 유일한 대학 농악대) 흥겨운 가운데 막걸리를 나누면서 대학가를 떠들석하게 한 이 축제는 종래의 외래풍 카니발과 달리 흥겹고 친근한 향토성이 〇〇했다는 점으로 이채로웠으며 농촌과 농민을 토대로 한 주체성 확립을 다짐했다는 점으로 큰 의의를 보였다.

이날 강연회를 끝내고 시청각 교육센터 소극장에서 막을 연 광대놀이「원귀 마당쇠」(趙東一현서울대 국문과교수 작 李弼遠 연출)은 탈을 쓴 평민의 원귀 마당쇠(홍갑표-졸업)군과 전형적인 악덕 양반 卞학도군(이영윤-졸업 세실극장 및 세실레스트랑 경영)이 등장하여 (※무덤가에 앉아) 옛날과 지금의 농촌 생활을 비교 - 신랄한 「새타이어」를 풍겼고 변학도가 상놈인 마당쇠한테 속죄하고 새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하는 등 관중을 시종 시원한 웃음에 잠기게 했다.

연극이 끝나자 「事大·買辦·屈從之柩」를 넣은 상여를 몰고 문리대 교정을 한바퀴 돌면서 장례식을 지냈다. 향토개척단 학생들이 運柩하여 4.19 기념탑 앞에서 「유세차.....祭爲事大主義하노라」 운운의 제문(별항 참조)을 읽으면서 관을 태워 버릴 때는 박수가 터저 나오기도 하였다.
(중략)
대학가에서 탈춤이 극으로서 연출된 것이 처음이었고 왈 ’경성 제국대학‘ 캠퍼스에서 농악이 울려 퍼진 것도 처음이었다. 당시 농악대는 동국대학교 농아대가 협조 출연해 주었다.”

 

선생은 굿을 배우기 위해 그 분야의 전문가들을 찾아가서 자문과 가르침을 받았다고 했다. 또한 춤도 배우고 탈춤도 하면서 문화 운동 쪽으로 나갈 뻔했다고 고인은 웃으면서 말씀했다. 또한 선생은 고향인 양주에서 어린이 산대놀이인 ’양주산대놀이‘를 덕정 장마당에서 시연한다. 그뿐 아니라 고인은 의정부에서 양주탈 전시회를 하면서 탈춤의 기본동작과 봉산탈춤의 동작 그리고 통영오광대도 배운다.

 

ㅡ  민족 무예보급과 국민주권연대 및 진보정당 고문 활동

 

선생은 1963년 9월 졸업 후 명동 ‘학사주점’ 초기 운영에 참여하고 봉사한다. 이후 고인은 사범대 졸업 이후 교사로 진출하지 않고 앞에서 모범을 보여야 한다면서 1965년 전남 광양 옥룡 백운산 산악개척협업농장에 입주한다. 선생은 1년 만에 나오지만, 후에 여기 왔던 무안 망운 출신 오선자 여사와 결혼한다.

 

이후 선생은 중랑교 뚝방에서 합숙하면서 대학 선배 오병철에게서 검도 수련을 받는다. 고인은 1966년 파주에서 교편 생활하다가 3년 후 퇴직한다.

 

민족무예에 관심이 많은 선생은 안씨 집안 가전 무술인 ‘정도술’을 대학 친구 임동규와 같이 안길원에게서 기초를 배우고 정도술에서 임동규는 학술위원으로 고인은 자문위원으로 활동한다. 이후 안길선 씨와 수원역전에 도장을 마련하고 정도술 경기 지관장으로 활동한다. 하지만 운영난으로 귀경하여 1970년 경신중학교에 평교사 생활을 한다.

 

선생은 1979년 남민전 중앙위원인 친구 이해경(1940~2015)을 찾아내라고 공안이 옥인동 대공분실로 끌고 가 물고문당하는 등 고초를 치른다. 고인이 고문당한 이유는 가장 친한 친구이며 동지인 이해경이 장가갈 때 선생이 함을 지고 임동규가 청사초롱을 들고 갔다는 이유 하나였다. 이해경은 이화여전(이화여대 전신)을 나온 어머니 전수진 여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선생은 전했다. 

 

고인은 1999년 교사를 명예퇴직하고 민중의 소리, ‘디지털 말’(월간 ‘말’지 SNS자매지, 객원기자), 오마이뉴스의 시민기자로 활동한다. 그리고 선생은 민족문제연구소 경기북부와 24반 무예 ‘경당’ 활동도 했다. 이때 고인이 친구인 쌍무기수 임동규에게 무예도보통지와 동의보감을 감옥에 넣어주어 ‘빗자루 도사’가 되게 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선생은 민족정기구현회를 설립한 권중희(1936~2007) 회장의 급서로 민족정기구현회 누리집 회원의 추천으로 제2대 회장을 맡게 된다. 이후 민권연대 서상호(1934~2023), 윤한탁(1938~2023), 권오창, 이건 원로들과 알게 되어 함께 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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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9월 28~29일. 경주, 울산에서 진행된 1박 2일 민중당 정책당대회에  참가한  홍갑표 선생님과 사월혁명회  분들
 

필자가 선생과 함께 하면서 특히 기억나는 일은 2019년 9월 28~29일. 경주, 울산에서 진행된 1박 2일 민중당 정책당대회에 권오창, 홍갑표, 사월혁명회 등 당 고문들과 함께했던 시간이다.

 

29일 울산 <대의원대회>에 고문은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는 당의 배려로 오전을 경주 황룡원에서 보내면서, 3가지 주제에 대한 즉석 토론회를 하였다. 참가자는 서상호, 권오창, 홍갑표, 유선근, 이경진(1952~2021), 필자였다.

첫째는 아침에 대대적으로 보도하는 서초동 <검찰개혁 촛불 집회>를 보고 촛불집회의 분석과 향후 우리의 과제에 대해서 논의하였다. 좀 더 다양한 뉴스와 확인을 거쳐야 하겠지만 진보진영도 연합하여야 하지 않겠냐는 조심스러운 토론 결론을 내렸다.

둘째는 <이석기 의원 석방운동>을 현시점에서 어떻게 하여야 할 것 인가였다. 참석자 모두는 이석기 의원은 개인이 아니고,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민중이며, 분단극복과 민족해방 그리고 자주통일을 갈망하는 민중으로 규정하였다. 그러면 지금부터의 석방 운동은 우리 힘으로 감옥문을 열어야 하기에 강력한 구심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민중당>이라고 결론지었다.

셋째는 그러면 이석기 의원 석방 운동을 주도하는 <민중당을 어떻게 강화하여야 하는가?>였다. 결론은 이번 정책당대회에 결정된 강령을 더 철저하고 자세하게 민중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하면서 무엇보다도 당은 지도자가 중요하기 때문에 일사불란하게 이상규 상임대표와 김종훈 원내대표를 중심으로 뭉쳐야 한다고 모두 말씀하셨다.

그리고 홍갑표 선생은 토론 이후 환단고기(桓檀古記)에 대해 자세히 말씀하시면서 지금 글을 준비하고 있다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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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홍갑표 선생님!

 

살아 있는 민중은 분단의 원흉 미국과 일본에 맞서,
우리 어깨 위에 지워진 민족해방과 민중해방의 과업을

 

민중은 결코 벗지 않고
선생이 못다 한 조국과 민족 그리고 자주민족통일의 꿈을 우리는 반드시 쟁취할 것입니다.

 

조국은 기억하리라!

 

선생님의 이름과 걸어온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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