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찬욱의 총반격
  • - 首座 명진 스님을 추모하며 -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등록일 :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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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리산 법주사에서 진행된 명진스님 다비식  (2026.8.25)


불교계의 대표적인 불교 자주화와 반외세 자주·민주·통일 인사인 명진 스님이 지난 8월 22일 제주도에서 세수 76세·법랍(출가 이후의 나이) 52년으로 입적하셨다.

 

지난 8월 25일, 서울 강남구 봉은사 대웅전 앞에서 엄수된 <首座 명진 종교시민사회장>에는 수많은 종교계, 시민사회, 학계 인사가 참가해 스님의 마지막 가는 길을 추모했다.

 

명진 스님은 남·북·해외가 함께하는 통일전문지 『민족21』 발행인을 역임했다. 필자는 2002년 『민족21』 2대 대표이사를 맡으면서 자연스럽게 스님을 알게 되었다. 

 

『민족21』은 대한민국(한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조선)이 함께 만드는 통일전문지를 표방했다. 2000년 6월 6·15 남북 공동선언 이후 언론인, 학자, 사회운동가들이 모여 발기하여 그해 8월 설립한 주식회사였다. 사업영역은 언론, 출판, 전시, 홍보, 대북사업 컨설팅이었고 통일전문 기업을 목표로 했다. 

 

2001년 3월 최초로 『민족21』은 평양에 특파원을 파견하여 최초로 남북언론교류를 성사시켰고, 2001년 3월 20일 『민족21』 창간호를 펴냈다. 이후 방북 취재, 남북 역사학자 학술대회 등을 성사시켰다.

 

필자는 회사 일로 몇 번 명진 스님과 함께 국내 인사, 재일 교포 등과의 식사 자리에서 스님에 대한 인품과 인격을 일부 알게 되었다. 이후 필자는 『민족21』을 그만두고 사월혁명회에서 사무처장으로 활동하면서 여러 운동 현장에서 명진 스님을 보면서 수행자로서 힘없고 어려운 사람들 곁에 항상 계신 것을 더욱더 알게 됐다.

 

전두환 군부의 5·18 광주학살과 불교 10·27법난 

 

전두환과 5공 신군부는 1980년 5·18 광주학살을 저지른다.

전두환과 신군부는 공수부대를 투입해 무고한 광주 시민과 학생들을 총칼로 무참히 학살하고 수많은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헬리콥터 기총 사격과 집단 발포를 자행했으나 끝까지 발포 책임을 부인했다. 그뿐 아니라 광주항쟁을 ‘폭도들의 반란’과 조선 연계설로 조작하여 여론을 심각하게 왜곡했다. 특히 전두환과 노태우는 죽을 때까지 발포 진실 고백과 사과 없이 은폐로 일관했다.

 

5·18 광주항쟁 이후 신군부의 무자비한 총칼 앞엔 종교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때 신군부의 종교탄압에 명진 스님은 전 불교도가 반외세 민족자주화의 대열에 참여하자는 촉구 강연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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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7법난"이란 1980년 10월 계엄사령부의 합동수사본부 합동수사단이 불교계 정화를 명분으로 대한불교조계종의 승려 및 불교 관련자를 강제로 연행·수사하고, 포고령 위반 수배자 및 불순분자를 검거한다는 구실로 군·경 합동으로 전국의 사찰 및 암자 등을 수색한 사건을 말한다. ( 출처=나무위키)
사진출처 =  '역사저널 그날 '  2022년5월8일. 화면캡쳐 

 

월간 『말』 제9호 1986년 12월 31일자 기사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산하 20여개 사찰소속 승려와 민불련 등 불교단체회원 250여 명은 10월 26일, 27일 양일간에 걸쳐 서울 봉은사에서 「10·27법난 규탄 및 불교자주쟁취대회」를 열고 가두시위를 벌였다.

승려들과 불교단체회원들은 10월 26일 오후 2시 30분경부터 봉은사 대웅전 앞에 모여 대회의 전야제를 열고 법난에 대한 경과보고, 명진스님(해인사, 불교악법철폐위 공동의장)의 강연순으로 진행하였다.

명진스님은 강연을 통해  10·27법난을 자행한 현 정권의 폭력성 비정통성을 강조하고, 전불교도가 반외세 민족자주화의 대열에 참여하여 자주적인 민족종교의 역할을 다할 것을 촉구했다.

이어 ‘10·27법난을 규탄하며 불교자주 쟁취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자’라는 성명서 낭독과 촌극이 있은 뒤, 승려들과 신도들은 정근(精勤)을 하면서 가두진출을 시도, 이를 저지하던 경찰과 투석전을 전개했다. 한편 법당으로 돌아온 150여 명은 경내에서 철야농성을 벌였다.

대회 당일인 27일엔 지방에서 온 100여 명의 스님이 더 가세한 가운데 오후 1시부터 1시간 30분에 걸쳐 10·27법난 항의집회가 계속되었다. 그리고 대회 후에는 전날과 같이 정근을 하며 가두시위를 벌였다.

대회 참석자들은 명진스님을 선두로 하여 ‘불교탄압 타도하자’ 등의 구호와 노래를 부르며 봉은사 앞 6차선도로로 나오다 이를 저지하며 최루탄을 난사하는 경찰과 맞서 3시간 동안 격렬한 투석전을 벌였다. 오후 5시 경 시위를 마치고 자진해산하려던 대회참석자들은 경찰의 봉은사 주변봉쇄로 귀가하지 못한 채 밤을 새우다 28일 새별 1~5시를 기해 봉은산 뒷산을 통해 해산하였다.

한편 이번 양일간의 대회로 명진, 벽우스님등 승려 5명이 집시법 위반혐의로 구속되었다.”

 

일제의 불교 탄압, 사찰령(寺刹令)과 본말사(本末寺) 제도

 

일제는 종교가 민중에게 끼치는 강력한 영향력을 잘 알고 있었다.

 

민중은 개항에 따른 사회·경제적 혼란과 외세의 압력 속에서 민심은 서학(西學)에 대응하고 만민평등을 이념으로 하는 동학(東學)으로 집결한다. 특히 일제는 폐정개혁과 함께 왜이축멸(倭夷逐滅), 탈청반민(脫淸反閔)으로 조선반도 전체를 뒤흔든 동학농민혁명을 무엇보다 두려워했다. 이후 천도교로 개칭한 뒤에도 3·1혁명 등 항일 독립운동의 거대한 축이었기에 동학(천도교)을 비롯한 민족 종교들을 매우 경계하고 철저하게 탄압했다.

 

일제는 불교와 기독교 신도만 정식 종교로 인정하고 동학(천도교)·대종교는 ‘유사 종교’로 분류했다. 비록 불교는 종교로 인정되었지만, 일제의 식민지적 문화침탈 과정에서 종교 말살 정책으로 왜곡과 피폐화를 강요받았다. 

 

1911년 6월 일제는 불교에 대해 사찰령과 그에 따른 본말사 제도로 통제했다. 사찰은 정해진 목적 외에 사용하지 말고 병합이나 이전, 폐지 등은 반드시 총독부의 허가를 받도록 했다.

 

전국 1,300여 개의 사찰을 통폐합하여 30개의 중심 사찰 본사(本寺)와 그 아래 속한 종속 사찰 말사(末寺)로 재편했다. 본사 주지는 말사의 주지를 임명하는 주지 임명권을 장악하는 대신 조선 총독의 인가를 받아야만 취임할 수 있도록 법제화했다. 불교를 총독부의 철저한 감독 아래 두어 자주성을 박탈하고 종교적 자유를 말살했다.

 

이로 인해 권력을 쥐려는 승려들은 총독부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친일 행각을 보였다. 그뿐 아니라 사찰의 토지나 재산을 처분할 때도 총독부의 허가를 받도록 규정하여 불교의 재정적 자립과 재산 통제로 인해 친일파 주지가 양성됐다. 

 

일본 불교처럼 승려의 결혼, 대처(帶妻)와 식육(食肉)을 유도·묵인하면서 조선 불교를 왜색화했다. 이는 조선 전통 불교의 청정 승가, 비구(比丘) 전통이 크게 훼손되면서 불교계를 세속화시켜 수행자로서의 순수성과 종교적 권위를 민중으로부터 떨어뜨려 놓았다. 

 

일제의 불교 정책은 조선 불교의 정체성을 훼손하고 종교적 순수성을 파괴하여, 불교를 식민지 지배 체제에 종속시키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황국신민화 정책과 친일 불교를 일제의 침략 전쟁과 천황제에 협력하는 수단으로 악용하면서 시국 강연회, 국위선양 기원 법회 등을 강요하며 불교계를 매판적 권력의 시녀로 묶어놓았다. 

 

일제는 서구 중심의 근대화 논리와 일제의 식민사관은 조선 불교를 미개하고 낡은 우상 숭배로 낙인찍었다. 전통문화를 열등한 것으로 치부하게 만들어 민족 자긍심을 꺾으려 했다.

 

그러나 3·1혁명 민족대표 33인 중 한용운(萬海, 1879~1944)은 정교분리(政敎分離)를 주장하며, 총독부가 종교와 정치를 분리하지 않고 불교 행정에 간섭하는 부당함을 강력 비판했다. 특히 불교계의 사찰령 폐지 운동은 일제의 식민지 불교 정책에 정면으로 저항한 항일 민족 운동이었다.

 

단독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의 「불교정화유시」로 불교탄압

 

1948년 8월 단독정부 수립 이후 개신교 국가를 노골적으로 지향했던 이승만은 1954년 5월 21일부터 같은 해 12월 17일까지 4차례에 걸쳐 ‘불교정화 유시(대처승은 사찰에서 물러나라는 명령)’라는 것을 발표한다. 대통령이 특정 종교에 대해 명령을 내린 것이다. 그 핵심은 결혼한 스님들은 사찰을 수도승들에게 돌려주고 절을 떠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매우 복잡한 정치적 의도와 이승만 권력 유지 책략이 숨어 있었다. 

 

월간 『말』 제9호 1986년 12월 31일자 「불교는 왜 자주화 민주화를 요구하나?」 해설 기사이다.

 

“대처승제도는 1954년 1월 이승만 정권의 「불교정화유시」의 빌미가 되어 20년 동안 관의 개입 아래 비구와 대처의 싸움 그리고 파벌 분쟁을 야기하였다.

이 「불교정화유시」는 김구선생 계열의 민족주의세력 그리고 그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불교혁신연맹」의 승려들을 숙청하고 난 뒤 일제의 잔재청산이라는 미명아래 내려진 것이었다. 이는 정부에 대한 불만을 다른 곳으로 유도하고 정권에 대한 불교의 예속화를 조장하며 불교 내부의 혁신세력을 응징하기 위한 것이었다.”

 

4·19혁명으로 이승만은 쫓겨나지만, 7·29민참의원 선거 압승으로 등장한 민주당은 자유당과 마찬가지로 극우 반공적이라는 점에서 별 차이가 없었다. 또한 민주당에도 이승만·자유당 정권처럼 친일파도 많았고, 검찰과 경찰 그리고 사법부를 개혁하라는 민중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불행하게도 4월혁명은 미완에  그치고 박정희가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탈취하고 비상계엄령으로 사회 전반에 걸쳐 공포정치를 펼친다. 쿠데타 주도 세력을 중심으로 국가재건최고회의를 구성해 1963년 12월 제3공화국이 출범될 때까지 입법·행정·사법권을 행사한 명실상부한 국가최고통치기관으로 사회를 엄격히 통제했다.

 

그야말로 군인들의 세상이었다.

 

특히 군부는 혁신계를 철저히 탄압했다. 쿠데타가 발생하자마자 5월 16일부터 21일까지 6일 동안에 무려 2,014명이나 검거된다. 또한 두 달 동안 예비검속된 용공 혐의자도 모두 3,098명으로 집계됐다. 혁신계는 대거 검거되었고 석방이 돼서도 계속 감시를 받았다.

 

1961년 6월 중앙정보부(중정)를 신설해 정보 수집, 사찰, 체포 등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다.

 

이승만은 친일경찰·관료와 폭력배를 이용하여 독재체제를 유지했다면 박정희는 철저히 중정을 정치 통제의 핵심 도구로 이용했다. 중정은 박정희 체제를 유지하는 모든 문제에 개입하였기에 박정희 체제를 ‘정보·공작 정치’라 부른다.

 

박정희의 「불교재산관리법」, 「공원법」, 「문화재보호법」 등으로 불교탄압

 

1962년 5월 31일 5·16 군사쿠데타세력은 불교계의 재산을 통제하고 관장하기 위해 「불교재산관리법」(불재법)을 공포했다. 1968년 문화공보부가 발족하면서 이 법은 주지 임면권과 사찰 재산 처분권에 직접 개입할 수 있도록 규정하여, 일제강점기 불교 통제 수단이었던 조선총독부의 「사찰령」(1911년)과 일맥상통했다.

 

앞의 월간 『말』의 「불교는 왜 자주화 민주화를 요구하나?」에 나오는 5·16쿠데타 이후 불교에 대한 정부개입 기사이다.

 

“5·16이후 불교는 더욱 눈에 띠게 관의 개입 아래 파벌 분쟁과 어용화의 길을 걷게 된다.

문공부의 직접적 개입과 62년 5월 31일 일제의 「사찰령」과 그 맥을 같이 하는 「불교재산관리법」(불재법)이 공포되었다. 이 불재법은 주지의 임명을 반드시 관에 보고하여 등록하도록 하는 강제 조항을 설치, 이를 위반할 때는 해임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또한 사찰의 재산관리인을 관에서 임의적인 판단하에 임명할 수 있게 함으로써 임원 임명 등의 자율권을 적극적으로 침해하고 있다.

5·16이후 박정희정권은 불재법뿐만 아니라 「공원법」「문화재보호법」 등 불교관계법령을 5개나 제정하고, 이를 통하여 불교에 대한 적극적 통제와 종단분규를 교사하여 권력의 시녀화를 도모했다.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후반까지의 종단 내 승려들의 정통성과 주지 직을 둘러싼 싸움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 싸움들의 원인은 승려들의 내부적 혼란과 자질문제, 주도권쟁탈에도 문제가 있었지만, 보다 직접적인 원인은 불교관계법령을 통해서 이승만정권 이래 관에서 투입한 일부승려들의 권력유착과 위정자들의 직접적 개입이었다.”

 

2002년 1월 18일자 『현대불교』의 「[1.21 승려대회] 반복되는 종교편향 역사」 기사이다. 

 

“박정희 정부 기간 만들어진 조찬기도회를 통해 개신교 지도자들은 고위공직자들과 긴밀한 협조관계를 이어갈 수 있었고 이 같은 교류를 통해 개신교계는 여러 측면에서 정부의 파격적 지원을 받았다. 사실상 정부지원으로 국가조찬기도회 같은 초대형 전도집회가 여러 차례 개최됐다. 1966년 국방장관, 참모총장, 해병대사령관, 주월한국군사령관이 모두 개신교인으로 충원되면서 1970년 초반에는 세계적 유례가 없는 ‘전군신자화운동’이 실시됐다. 장병들에게 3대 종교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하는 형식이었지만 군종장교들은 대부분 개신교에 치중돼 군대 내에서 개신교세는 배타적으로 확장됐다. 이는 다른 국가기관으로도 파급됐다.

반면 불교에 대해서는 이전 정권에서 수립된 악법들을 활용해 교묘하게 통제했다. 헌법에 명시된 정교분리원칙을 위배하고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는 불교재산관리법, 자연공원법 등을 제정해 불교재산 관리주체가 불교계가 아니라 정부라고 명시했다. 1968년 사찰을 관광지화 하겠다는 발표하면서도 정작 문화재 예산은 사찰에 배정하지 않아 불교문화재는 황폐함이 더해갔다. 사회 전반적으로도 불교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낮아 쉽게 노출돼 도굴되거나 혹은 방치돼 파괴되는 경우가 많았다.”

 

전두환 신군부의 10·27법난 사태 

 

불교계는 박정희 정권 몰락 이후 1980년도에 「불재법」의 개정과 자율적인 불교 개혁 의지를 표명한다. 그러나 전두환 신군부는 박정희 유신 파쇼정부의 기독교 우대와 불교 탄압 정책을 그대로 이어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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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7 법란 당시  연행되는 명진스님

 

앞의 『현대불교』의 10·27법난 기사이다.

 

“1980년 6월, 신군부는 불교계 정화 수사 계획을 수립했는데 이는 10·27법난의 계기가 됐다. 국보위의 수사지시를 받은 합동수사단은 사회정화계획에 따라 10월 27일 새벽 사찰에 진입, 스님 153명을 연행했다. 

스님들은 무자비한 구타 등 고문을 당했고 총무원장과 종회의원 스님 등은 사퇴서를 강제로 제출토록 강요받았다. 3일 후에는 3만 2000명의 군 병력이 전국 6000여 개 사찰에 진입, 원로 스님 등 1776명을 연행했다.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에 의해 10·27법난은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 월주 스님이 신군부세력이 요구한 전두환 지지표명과 문공부 자율정화지침을 거부한데서 비롯됐음이 밝혀졌다.

불교재산관리법 대신 입법된 전통사찰보존법 역시 정교분리 원칙을 위배하고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는 국가제도로 활용됐다. 군사정권은 여전히 반공 이데올로기를 필요로 했고 개신교 교회는 적극적으로 정권의 요구를 수용했다. 80년대까지 진행된 개신교 인구의 폭발적 증가와 더불어 교회의 대형화가 실현되면서 개신교 지도자들의 정치적 영향력은 더욱 강화됐다.”

 

더 구체적인 월간 『말』의 「불교는 왜 자주화 민주화를 요구하나?」 10·27법난 기사이다.

 

“불교계에서 일컫는 1980년의 10·27법난이라는 것이었다. 당시 계엄사는 불교계의 자체정화능력이 전무하다는 논리를 내세워, 전국의 사원을 총칼로 무장한 군인들을 동원 쑥밭을 만들었다. 46명의 승려가 연행되고, 수색과 연행 과정에서 폭력과 모욕적 행동, 또한 고문으로서 낙산사 주지스님이 그 후 사망하는 사례도 있었다는 것이다.

현 정권의 10·27법난이라는 사태를 현 불교계의 지울 수 없는 멍을 남겼다. 이 법난으로 일반승려들의 감정은 한껏 격앙됐고 정권과 유착되어 종단분규를 일삼던 종단내 일부 세력에게조차 간과할 수 없는 문제였다. 현 정권은 여기서 더 나아가 정책결정과정에서 계속적으로 불교계를 소외시켜 불교계의 멍을 악화시켰다.

예컨대, 초·중·고등교과서에 나타나고 있는 불교 및 전통문화에 대한 비하와 기독교적 편향, 독립기념관 앞의 조각내용이 천지창조에서 현대까지로 다분히 특정종교 지향적인 점, KBS의 기독교선교 연속극 방영과 MBC의 「임진왜란」에서 승병들의 활약을 삭제한 대신 왜승과 선교사를 대비하여 의도적으로 불교를 왜곡시킨 점, 또한 최근에는 개헌 및 지방자치제 실시를 위한 공청회에서 불교계를 소외시킨 점 등 부지기수이다.”

 

명진스님은 1986년 9월 16일 개운사에서 전두환 정권의 불교 탄압과 통제에 맞서 자주권 확보와 악법 철폐를 위해 결성된 「불교관계악법철폐공동대책위원회(불교공대위)」의 공동의장을 맡는다.

 

불교공대위는 1986년 9월 7일 해인사 전국승려대회에서 천명한 “사회민주화운동과 불교자주화운동이 결코 둘이 아님을 거듭 확인하였고 어떠한 탄압에도 굽히지 않고 끝까지 싸워나갈 것”을 결의했다.

 

힘없고 어려운 사람들 편에 서야지요. 그게 수행자의 자리 아닙니까!

 

명진 스님은 이후 전두환 군부독재 시절 불교자주화와 자주·민주·통일을 위해 아스팔트 거리에서 함께했고, 종단개혁의 한복판에서는 승복보다 수행자의 양심을 앞세웠다. 

 

또한 명진 스님은 「대한불교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민추본)」 상임집행위원장으로 민족의 통일과 평화를 위해 헌신한 통일운동가의 모습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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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년 8월 15 ~ 21일 민족통일대축전 평양 행사 : 대한불교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

 

민추본은 부처님의 자비와 평화 정신을 바탕으로 우리 민족이 겪어온 분단과 갈등의 역사를 화해와 상생, 평화의 길로 전환하고 한반도의 평화 정착과 민족공동체 회복에 기여하고자 2000년 6월 8일 대한불교조계종에서 설립한 종령기구이다.

 

민추본은 오랜 분단의 현실을 극복하고 남북 간 신뢰와 협력의 기반을 넓혀가기 위해 남북불교교류 및 대외협력사업, 평화통일교육 및 기획사업, 조직 및 연대사업 등 다양한 활동을 추진했다.

 

불기2544(2000)년 6월 8일 대한불교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민추본) 창립선언문 일부이다.

 

“이 땅에 불교가 도래한 지 1천 6백여 년, 그동안 우리 불교는 민족의 운명과 그 궤를 같이하며 민족문화를 꽃피우고 민족성의 저변을 이루는 정신적 가르침으로 겨레의 운명을 개척해왔다. 

삼국시대에는 통일된 단일민족국가를 이루려는 노력의 정신적 배경으로 작용했고, 고려시대 숱한 외침 앞에서는 팔만대장경 판각으로 대표되는 굳건한 신앙심을 통해 이를 극복했으며, 조선시대 임진왜란을 맞아서는 서산, 사명, 처영 등 걸출한 고승들이 민족들이 당하는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풍전등화 같은 민족의 운명을 구하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근대에 이르러 우리 겨레는 외세의 간섭과 자주권 상실로 인해 분단을 맞게 되고 이 분단의 고통은 반세기를 넘어서고 있다. 남북의 분단으로 민족이 고통받는 현실을 바라보며 우리는 한국불교의 앞서간 조사스님들과 이름없는 선지식의 호국애민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만이 오늘날 한국불교가 마땅히 해야 할 사명임을 가슴깊이 자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간 우리불교는 이러한 역사적인 전통에 따라 분단으로 인한 민족의 고통을 해결하려는 우리민족의 다양한 노력에 발맞춰 역할을 다하기 위하여 노력해왔으나 남북관계의 새로운 전환점에서 불교의 역할에 변화의 필요성이 요구되고 있다. 
(중략)
불교는 남북간 이질화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제 관습을 유기적으로 결합시키는 데 있어 가장 유력하고 가능성이 큰 요소이다. 지난 1천 6백여 년 동안 계승 발전시켜 온 전통문화의 근간이 바로 불교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우리민족의 심성 속에 깊이 자리한 민족성의 모태 또한 불교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한불교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는 이러한 민족분단의 현실 앞에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자각하고 우리민족의 근간을 이루는 문화적 동질성을 바탕으로 한 교류를 통하여 민족의 역사와 동질성을 회복하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불자들로 하여금 통일보살로 나서도록 하여 7천만 민족이 공히 바라마지 않는 통일조국을 실현하는데 이바지하고자 한다.” 

 

이후 명진 스님은 2006~ 2010년까지 서울 봉은사 주지에 취임하면서 불교계 정화를 위해 봉은사 산문을 나오지 않고 1,000일 동안 하루 세 번 1,000배씩을 드렸던 불제자였다. 

 

명진 스님은 1,000일 기도 끝나던 2009년 신도들이 모아준 시주 1억 원을 들고 용산참사 현장 분향소로 찾아와 대성통곡하셨던 빈민의 고통을 함께 나누었던 스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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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2012년 한진중공업 김진숙 고공농성 지원과 쌍용차 한상균·문기주·복기성 고공농성자들을 살리기 위해 평택 공장 앞 철탑을 오르든 노동자 아픔을 함께했던 스님이었다. 

 

세월호참사 유족의 손을 잡고 고통을 함께하고 슬픔을 나누었던 큰어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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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8월 27일광화문 세월호광장에서 진행된 세월호인양 촉구문화제

 

그뿐 아니라 박근혜 퇴진 촛불 항쟁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가하였던 실천 승려였다.

 

명진 스님은 민족의 모순과 계급의 모순을 누구보다 아파하고 민족과 중생을 위해 기도하며 헌신해 온 큰스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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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2월 5일, 향린교회, 사월혁명회 202회 월례발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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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의 베트남 방문을 앞두고 한베평화재단은 1일부터 청와대 앞 사과 촉구 릴레이 1인시위를 시작했다. 명진 스님이 이날 처음 나섰다. 출처 : 통일뉴스(  2017.11.01)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신들의 전유물로 착각하고 '불법'이라는 이름으로 불교를 망치고 있는 권승들에게 한국 불교의 미래를 맡겨서는 안 된다"라고 일갈하며 온 몸을 던졌던 분이었다.

 

그리고 스님이 남기신 말씀이다.

 

내가 왜 힘 있고 돈 있고 걱정할 것 없는 사람들 편에 섭니까? 
힘없고 어려운 사람들 편에 서야지요. 그게 수행자의 자리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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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진스님 행장◆
명진스님은 1950년 충남 당진에서 출생하였습니다.
1969년에 성철스님을 은사로 해인사 백련암으로 출가했지만 이내 군에 입대하고 월남전에 참전하게 되어 1974년 다시 법주사에서 탄성스님을 출가하였습니다.
1974년 법주사에서 사미계(계사 혜정스님)를 수지하고, 1976년 쌍계사에서 구족계(계사 석암스님)를 수계했습니다.
이후 줄곧 제방의 선방을 다니며 참선수행에만 전념하던 스님에게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당시 머물던 해인사에 경북대 출신 운동권 학생들이 숨어 들어와 광주항쟁 비디오 테이프를 보여줍니다. 스님께서는 이때 이후로 소위 말하는 운동권스님이 되었습니다.
1985년에는 봉은사에서 12.7법난 규탄대회를 주도하다가 연행되어 구속되었고, 1987년에는 개운사 주지로서 불교탄압대책위원장을, 1988년에는 대승불교승가회 회장이 되어 불교자주화와 사회민주화에 전념했습니다.
1994년 종단개혁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해서 이후 종단개혁회의 상임위원, 11대 중앙종회 의원을 역임했으며, 1998년에는 민족화합불교추진위원장, 1998-2002년에는 대한불교조계종 중앙종회 부의장 등의 종단 소임을 살았습니다. 이외에도 1998-2005년에는 봉은사 선원장을, 2000년부터 2002년에는 민족공동체추진본부 상임집행위원장을 역임하며 통일운동과 불교의 사회적 역할을 확대하는 일에 매진해왔습니다.
2006년에 봉은사 주지에 취임해서 천일기도를 시작해서 두문불출하며 기도정진해서 그 힘으로 봉은사를 일신했으며, 2006년에는 유일한 개인재산이었던 개인토굴을 정리해서 지역아동센터 <달마학교>와 사회복지법인<봉인>을 설립하기도 했습니다.
2011-2014년까지 수행모임 단지불회 회주로 종단 내외부의 공식적인 이력은 더이상 없었지만 명진스님은 출가한 해부터 거의 한 해도 빼놓지 않고 봉암사, 해인사, 용화선원 등에서 50안거 이상 수행 정진을 하셨습니다.  자료출처: 수좌 명진 종교시민사회장 장의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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