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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내가 살아 있는 동안 국가보안법이 폐지되는 그 날을 보고 싶다”던 손병선 전 사월혁명회 공동의장 1주기이다.
비극이다. 유족이나 지인으로부터 부고를 받지 못했다. 어떻든 사월혁명회 사무처장으로서 회원 관리에 부족했음을 자기 비판한다.
필자가 2023년 년 말 연신내 수색 임대아파트에 방문하고 뵌 것이, 고인과의 마지막 직접 만남이었다. 그 후 사무처장으로서 정기적 통화로 사월혁명회 소식과 건강 여부를 확인하고 여동생 손외순 여사와도 전화하면서 오빠 건강 상황 등을 공유하였다. 그런데 2024년 연말 경 비탈길에서 넘어져 뇌를 다쳐 병원에 입원하여야 한다는 고인과 필자는 마지막 통화를 나누었다. 이후 여동생으로부터 상황이 좋지 못해 요양원에 갔다는 소식을 마지막으로 필자와 가족과의 모든 연락은 끊겼다.
보통 부모가 운명했을 때 유족들은 부모의 핸드폰으로 지인들에게 부고를 알리는 데 이번은 그러질 않았다. 유족들의 무슨 사연이 있었겠지만 이런 경우가 민족민주 운동진영 원로들에게 가끔 생긴다. 구체적으로 나창순(1933~2025) 범민련 남측본부 명예의장의 운명 소식을 들은 것은 돌아가시고 난 뒤 한참 뒤였다. 혹시 그동안 가족들이 공안 탄압의 고통으로 부고를 알리는 것을 꺼렸지 않은가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인륜마저 철저히 파괴하는 악법 국가보안법과 공안탄압의 비극이다.
소년 시절, 해방공간 좌익활동가 아버지에 대한 기억
손병선 선생은 충북 영동군 매곡면 공수리에서 부친 손요근, 모친 김북술과의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인의 부친은 해방공간 치안유지법으로 45년 말에서 46년까지 1년을 살았다고 한다. 이후도 아버지는 제집 드나들 듯 잦은 옥살이를 면치 못했던 기억이 뚜렷하다고 고인은 이야기했다.
손병선은 『사월혁명회보』(제92호, 2009년 4월) ‘짧은 대화 깊은 얘기 - 통일은 나의 화두였다’에서 부친에 대해 깊이 있는 증언을 한다.
“아버지께서는 48년 2·7구국투쟁으로 다시 검거가 되시고 1년 반을 또 옥에서 살게 되셨죠.”라고 회상한다. 당시 손 선생은 초등학교 4학년. 대전형무소를 거쳐 부산형무소에서 석방되신 부친이 깊은 밤에만 잠깐 집에 들러 “보도연맹에 잡힐 것 같다”며 부산으로 먼저 몸을 피했고 이후 49년도에 가족들이 모두 부산으로 이사를 갔다.
“그때 기억으로 아버지와 부산형무소에서 같이 살던 남로당 관련된 분이 ‘곧 일이 날 것 같다’면서 가족 모두를 데리고 부산으로 옮겨라 해서 야간에 도주를 했지”
(중략)
“아버지는 부두 노동자 일을 했어요. 나는 신문팔이로 보리쌀이라도 먹고 살았는데 순사들이 서른대여섯 한창 나이였던 아버지를 군대에 잡아가려고 수시로 드나들어 결국은 부두 노동자도 못하고 피해 사는 게 일이었어요.”나이 오십이나 되는 두루마기의 노인이 손 선생의 집에 가끔 들러 며칠씩 있다 가곤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부친께 선이 닿았던 것 같아요. 부두 일을 하면서 활동을 하신 게 아닐까 싶어요. 미군 군수물자를 하역하는 부두였기 때문에 아마 스트라이크를 하지 않았나 싶고, 가끔 찾아오던 노인도 그런 전력이 있는 것 같아요.” 손 선생의 부친은 주로 마을의 젊은 층들을 포섭하는 작업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손 선생에게는 따로 해야 할 몫이 있었다. “그때 전라도에 이현상 부대가 있었잖아요. 지리산에 있는 빨치산 활동하는 사람의 형님이 살았는데 나를 그 쪽으로 보내서 아버지가 쪽지를 주면 그 노인네한테 전하는 일을 했어요.”
선생은 6·25전쟁 시기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을 찾아다니며 과일이며 강냉이를 팔고, 이후엔 유리공장, 빵 공장을 전전하다가 나중에는 신문팔이하면서 힘들게 살았다. 고인은 1953년 7월 27일 정전되던 날에 부산은 비가 엄청나게 왔다고 했다. 선생은 그때 정전을 알리는 신문 대판을 팔았다고 증언했다.
학업을 포기하지 않았던 부산 해동고 시절과 아내 성순희 여사와의 만남
고인의 부친은 정전 이후 선이 다 떨어져 부두 일을 그만두고 부평동 시장에서 장사했는데, 선생은 아버지 일을 도우면서 야간 중학교 시험에 합격해 학교에 다니게 된다.
앞의 『사월혁명회보』(제92호)에 나오는 부친이 선생에게 한 교육에 대한 권고이다.
“부산대 의대교수들이 봉사로 운영하는 구덕중학교에 시험을 치르러 가려는데 아버지가 못 가게 해. ‘곧 통일이 될 건데 그때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아야지, 잘못된 교육을 받지 마라’하시는데 나는 도저히 기다릴 수 없어서 시험을 쳤어”
선생은 아버지의 권고를 받아들이는 것보다는 학업에 대한 열정으로 구덕중학교에 다닌다. 하지만 정전 이후라 학교 상황이 좋지 못해 폐교되어 오산중학교로 편입학을 하지만 수업료를 내지 못해 1년도 못 다니고 그만둔다.
다행히 고인은 진보당 중앙당 부위원장이었던 박기출(1909~1977) 박사가 설립한 새한중학교를 졸업하고 담임선생의 추천으로 덕원고등학교에 장학생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기독교 학교라 매일 기도를 인도해야 해 학교를 그만두고 또 해동고 야간부로 들어갔다가 주간부로 옮긴다.
『사월혁명회보』(제92호)에 나오는 선생의 해동고 학생회장 생활과 반려자 성순희 여사와의 만남 이야기이다.
“불교계였던 해동고 재단이 수업료를 다 가져가 학교에서는 야구부, 역도부, 밴드부 등 학생활동에 투자를 하지 않아 학생들의 불만이 기승을 부렸고 손 선생은 이 점을 이슈로 들고 학생들을 선동, 3분의 2가 넘는 학생들의 지지로 손 선생은 학생회장이 되고 이사장파라 불리웠던 교사 9명을 쫓아내는 스트라이크도 성공했다.
(중략)
새한중학교 1회 졸업생인 손 선생은 학업을 책임져 준 정춘달 선생의 권고로 새한중학교 동창회를 결성해 회장이 되었고 부회장으로는 후에 손 선생 평생의 동반자가 된 여학생회장 출신의 성순희가 맡았다. ‘친해보니까 내 처도 오빠 둘이 다 사로청을 하고 남로당 일을 했어요. 그러다 보니 내 처도 의식이 상당히 많이 깨여있어서 더 친밀해졌죠.’손 선생은 고등학교 2학년 시절 ‘각종 행사 장소였던 부산 야구장 쪽에 모여서 시가행진 등을 할 때면 내 처는 부회장, 나는 회장. 집으로 둘이 왔다 갔다 몇 번 했죠. 3학년이 돼서 아버지가 인정을 해주드라고. 내 처를 보고 ‘되었다. 독립된 한 인간으로 인정을 하겠다’고. 그래 둘이 공식적으로 사귀었죠.”
부산대 부학생회장으로 4·19혁명 주도적 참가
고인은 1958년 부산대학교 정치학과에 입학한다. 선생은 타 학과 학생들 여섯 명과 사회과학연구회를 조직하여 사회과학 서적을 학습한다. 이때 선생이 본 서적 중에는 모순론, 자본론, 막스-엥겔스 전집, 변증법적유물론, 반듀링론, 세계사교정 등이었다고 이야기했다.
1959년 3월 1일, 성순희와 결혼한 선생은 부산대학교에 다니면서 아내의 배려로 돈만 생기면 보수동 뒷골목 헌책방 골목에 가서 책을 사서 학습했다. 하지만 고인의 사회과학과 철학에 대한 궁금증은 끝이 없었다. 학교에서 사회과학 학습 내용을 교수들에게 질문하면 그냥 어물어물하다가 꽁지 빼고 다른 데로 넘어가 선생을 비롯한 학생들의 항의로 수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당시 답답함을 필자에게 토로한 적이 있었다.
1960년 4월 19일, 마산 ‘3·15 부정선거’에 대한 항거로 4·19혁명이 일어난다.
사월혁명회는 4월혁명 60주년을 맞이하여 통일뉴스와 진행한 <기획연재 - 4월혁명을 증언한다>에 나오는 “4.19와 2대 악법, 그리고 국가보안법 - 손병선 사월혁명회 공동의장”에서 나오는 4·19혁명의 생생한 증언이다.
“나는 부산대학 정치학과 3학년으로 부학생회장을 맡아 ‘지금 이 정권에서 이러고만 있을 것이냐, 우리가 나서야하지 않겠느냐, 다 같이 나서자!’라고 말하며 학생들을 이끌고 교문을 나와 서면으로 갔다.
당시는 고등학생들이 시위를 주도하면 대학생들은 따라다니는 식이었다. 시내 중심가에 있는 경남공고, 배정고교, 남성여고, 혜화여고 등 고교생들이 중심이었다. 정오께 고교생들이 ‘자유당은 해체하라!’, ‘이승만 독재정권 물러가라!’를 외치며 선도하자 거리의 부산시민도 여기에 합류 3만여 시위대로 늘어났다. 그런데 시위 군중이 서면 로터리에 이르자 경찰이 사격으로 대응하여 희생자가 생겼다.
나는 총 맞고 쓰러진 학생 둘을 메고 급히 나왔는데 아마 한 학생은 불행하게도 죽었을 거로 생각 든다. 이후 학생들은 매일 서면 로터리에 모여서 시위와 행진을 계속하였다. 행진은 부산역 광장에서 일단 집결하여 대청동 미 대사관과 남포동 국제시장을 지나 보수동 사거리를 돌아 부민동 도청, 부산의과대학을 거쳐 광복동 시청 앞을 통과하여 부산역 광장에 다시 모여, 마무리 독재정권 비판 규탄대회를 하고 해산하는 집회가 연일 계속되었다.”
이후 4월 25일, 교수 258명이 ‘이승만 하야’를 요구하는 14개 항 시국선언문을 채택하며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국회의사당 앞으로 시위하자 다음 날 독재자 이승만은 하야 성명을 발표한다.
4월 27일 허정 과도정부가 들어서고 7‧29민참의원선거를 통해 민주당의 장면 정권이 탄생하지만 4월혁명은 완수할 수 없었다.
이때부터 선생을 비롯한 학생운동진영은 본격적인 사회통일운동에 주력하게 된다.
「집회와 시위운동에 관한 법」과 「반공을 위한 특별법」 2대 악법 반대투쟁
4월혁명 공간의 3대 투쟁은 ‘2·8한미경제협정 반대투쟁’과 ‘2대악법(반공임시특별법과 데모규제법) 반대투쟁’ 그리고 ‘남북학생회담 성사투쟁’이다. 그중에서 2대악법 반대투쟁은 4·19혁명 후 최대 규모의 반정부투쟁으로 다른 투쟁과 달리 전국에 걸쳐 지속적으로 전개됐다.
마치 12·3 내란 사태 발발 123일 만인 작년 4월 4일 ‘내란수괴’ 윤석열이 대통령직에서 파면당하는 날까지 진행된 두 개의 집회가 전국적으로 개최된 것과 같았다. 두 개의 집회는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비상행동)의 ‘윤석열 즉각퇴진! 사회대개혁! 전국행동’과 촛불승리전환행동(촛불행동)의 ‘윤석열 파면! 국힘당 해산! 촛불문화제’였다.
4월혁명 공간의 ‘2대악법 반대투쟁’도 대구, 서울, 마산, 부산, 전주, 광주, 대전 등지에서 진행됐다. 2024년 계엄과 내란 정국에서 대낮 집회 이후 야간에 ‘응원봉’을 들고 시내를 행진하는 것처럼, 4월혁명공간 당시는 ‘횃불’을 들고 시내를 돌면서 투쟁했다. 특히 대구는 전국 최초로 ‘2대악법 반대투쟁 민중 궐기대회’를 개최한 선도(先導) 지역이었다. ‘조선의 모스크바’라 불릴 정도로 대구는 진보 운동의 역사가 깊을 뿐 아니라 6·25전쟁 시기 민간인 집단학살의 아픔이 많은 곳이었다.
장면 정권은 ‘2·8한미경제협정 반대투쟁’을 보고 민중의 정치세력화와 연대투쟁에 대처하기 위해 「집회와 시위운동에 관한 법」과 「반공을 위한 특별법」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또한 내무부는 1961년 1월 19일, 대공 사찰을 강화하기 위해 「반공특별법」을 기초 중임을 언급했다.
선생은 사월혁명연구소(현 사월혁명회 전신) 『한국사회변혁운동과 4월혁명 ②』(한길사, 1990)의 「2대악법 반대운동」에서 언론에서 나온 비판 기사를 정리했다.
1961년 3월 8일과 9일, 각 신문을 통해 ‘정부는 「집회와 시위운동에 관한 법률안」을 각의해 상정하기 위해 심의중에 있으며, 내무·법무 양 장관이 「반공을 위한 특별법」을 별도로 구상중에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보도가 전해지자마자 전국의 언론, 혁신정당, 재야단체, 학생, 심지어는 보수야당의 일부까지도 일제히 비난의화살을 퍼붓기 시작했다.
「한국일보」는 3월 9일자 사설에서 ‘공산당이 아닌 사람들을 공산당으로 만들어내는 법률’이라고 비판했고, 같은 날 「대구일보」는 ‘양 법안은 헌법위반’이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민족일보」는 3월 12일자 사설에서 ‘민주주의에 도전하는 장 내각의 폭거’라고 맹공을 가했고, 같은 날 「영남일보」에서는 ‘우리 사회를 일대 공포 분위기로 몰아넣을 가능성이 크다’며 반대입장을 표명했다. 그 외에도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에서도 양 법안에 대한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특히 고인은 같은 책에서 혁신계 정당과 진보적 사회단체들이 2대악법으로 존폐의 위기에 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사회대중당, 통일사회당, 혁신당,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중립화조국통일총연맹 등은 국가보안법이 목적범에 대해서만 처벌할 수 있는데 반하여 반공입법은 목적의식에 상관없이 결과적으로 이적행위를 했다는 구실만 서면 처벌할 수 있도록 규정한 데 대하여 이는 혁신계의 정치 운동을 탄압하려는 의도가 명백하다고 판단하고 이에 즉각 성명을 발표하여 2대악법은 ‘4월혁명에 대한 배반이며 반동적 폭거’라고 규탄했다.
국가보안법과 첫 악연 2대 악법 반대투쟁으로 5‧16 군사쿠데타 후 구속
부산대 민족통일연구회 대표로 선생이 주도한 부산의 2대악법 반대투쟁은 3월 23일, 반민주악법반대 경남학생투쟁위원회가 부산역 광장에서 오천여 명이 참가한 ‘2대악법철회 궐기대회’를 개최하고 이후 행진과 횃불 데모를 한다. 그리고 다음 날 24일, 전날(23일) 데모 연행 학생 석방과 악법반대 요구를 하며 경남상고 학생 700여 명이 연좌데모를 한다.
그러나 정부는 1961년 3월 30일 국가보안법 개정안과 집회와 시위운동에 관한 법률안을 의결하고 국회에 제출한다. 이에 반발해서 노동계는 4월 1일 대구에서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련) 경북지구연합회에서 조합원 천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2대악법 반대 규탄대회’를 개최한다. 또한 부산에도 4월 13일, 14일 ‘4·2데모 구속자 석방과 2대악법 반대 데모’를 한다.
5‧16 군사쿠데타 후 ‘2대악법’ 반대투쟁을 벌인 선생은 전국 학생중에는 유일하게 ‘경상남도 반민주악법반대 학생공동투쟁위원회사건’이란 죄목으로 5년 형을 선고받았다.
선생이 『한국사회변혁운동과 4월혁명 ②』에서 증언한 ‘2대악법’ 반대 투쟁이다.
1961년 3월 23일 오후 3시경 부산역 광장에서 약 300여 명의 고등학생과 대학생이 참가한 가운데 ‘2대악법반대 성토 궐기대회’를 개최하였다. 나택균(필자 ; 사월혁명회 전신 사월혁명연구소 회원, 1990년 작고)이 사회를 담당하고 최석환이 ‘2대법을 제정하려 함은 이 나라 민주주의를 말살하려는 처사요 나아가서는 국가 민족을 위하여 간 4‧19의 충혼을 모독하는 처사다’라는 요지의 대회사를 했다.
저도 ‘2대법을 제정하려 함은 집권의 장기화를 꾀하려는 것이다. 내 형제 부모들은 반공이란 이름 아래 무참히 쓰러졌다. 잘살기 위해서는 우리는 2대법의 통과를 반대하여야겠다’라는 연설을 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2대악법을 철회하라. 배고파 우는 백성 악법으로 살릴소냐’, ‘학원을 좀먹는 악법을 철회하라’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하며 대청동 민주당사 앞에서 약 20분간 연좌데모를 하고 경남도청 앞을 거쳐 시청 앞에서 해산했다.
4월 13일은 부산시 중앙동 노동회관 앞 광장에서 부산공고, 경남여상고, 배정고교 등 시내 학생 약 1,500명을 동원하여, 저는 ‘2대악법은 국민의 기본권리를 박탈하는 조항이 많으므로 우리는 결사 반대한다’라는 요지의 연설을 하였다.
또한 4월 16일은 상경하여 서울 삼일당에서 ‘반민주악법반대 공동투쟁위원회’ 경남학생대표로 ‘2대악법반대’ 강연회에 참석하여 ‘2대악법’은 장기집권화를 위한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였다.
사월혁명연구소 창립과 활동
5·16 군부 쿠데타로 ‘2대악법’ 반대투쟁으로 형을 산 선생은 석방 후 부산대에 찾아갔으나 복학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학생처장이 끝끝내 반대해서 거부되어 몇 차례에 걸쳐 복학 투쟁에 나섰으나 좌절되고 만다.
결국 고인은 “니가 졸업장을 들고 와도 이젠 내가 안 받는다”라는 마음으로 복학을 접어야 했다. 이후 1964년 6·3한일회담 반대 투쟁 때 선생은 또다시 수배돼서 석 달을 피해 살았다. 그리고 1차 인혁당사건으로 또 수배된다.
이후 1968년 부산에 돌아와 영도에 온 가족이 모여 살게 되었다. 그때 4월혁명공간 청년운동단체 통일민주청년동맹 김배영 동생 김배균에게 배운 시클라멘트, 장미 모종을 받아 꽃을 재배하기 시작, 1969년부터 본격적인 화훼업을 시작한다. 지금 가장 유명하고 규모가 큰 양재동 꽃시장의 원조가 선생이었다.
고인은 동지로 전국민족통일학생연맹(민통련) 연락위원장이었던 김승균과는 가끔 만나 정세를 귀동냥했다고 했다. 1988년에 김승균의 부친인 김운선(1907~1988) 선생 장례식장에서 고인은 심재택, 황건, 김승균, 연현배 한테 어떤 단체라도 하나 만들자고 제안해서 만든 것이 사월혁명연구소(현, 사월혁명회)이다.
앞의 『사월혁명회보』(제92호)에 나오는 사월혁명연구소 창립 내용이다.
“장례를 치루고 본격적으로 동지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손 선생은 도강호, 김시현, 정만진, 김준기, 나택균 선생을, 황건 선생도 많은 동지를 모았고 김승균 선생은 곽태영 선생을 비롯해 가장 많이 조직화 했다.
동지들을 모아 연구소를 차리기로 하고 손 선생이 발품을 팔아 사당동 사거리 골목 동아빌딩에 조그만 2층을 빌려 시작, 초대 소장을 학자인 김진균 선생(당시 서울대 교수)을 지목했다.
그리고 6월 18일 결성식을 가지고 김진균 선생을 만나러 갔다. ‘김선생이 4·19 당시 활동했던 사람에 대한 각자의 기록을 다 남기자는 거야. 그래서 그걸 책으로 발간하자는 거야. 그래서 소장을 맡았어.’ 그리고 제대로 된 책보다는 여러 편의 논문을 모은 논문집을 발간했다. 김 선생에 대해 ‘모든 자료를 혼자 찾아야 하고 각자 활동 진술을 잘하지 못해서 불만 많았어. 그런데 결국 뜻을 못 이루고 돌아가셨어’”라며 아픈 가슴을 쓸어내렸다.
‘창립했을 때. 야! 뭔가 할 수 있는 게 있구나! 역할이 있구나 싶었어’라며 창립의 기쁨을 떠올리며 설레이는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도 마지막으로 역할을 하나 하겠구나!’라는 벅찬 기쁨으로 동지들을, 모든 힘을 다 끌어모았다. ‘모일 때 마다 친구들은 상당히 열의가 좋았어!’라며 소설가 박태순 선생을 가리켜 ‘모임만 하면 술도 한잔씩하고 그러고 나면 열변을 토하고!’ 활기찼던 때를 회상한다.
‘나로서는 그런 희망을 했었죠. 자민투, 민민투 분열들을 막아내자, 분열은 있을 수 없다! 분열해서 될 일이 아니다!’는 확신에 찼었고 손 선생의 뜻에 아무런 이견이 없었다. 선생이 가장 기뻤던 일로 생각하는 것은 역시 역할의 문제였던 것이다. 마지막 남은 힘까지 사회와 민족을 위해 온전히 쏟고자 하는 신념과 열정이다.”
하지만 냉전 시대 반공 이데올로기의 산물이자 통일운동에 대한 악법 국가보안법은 선생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1992년 두 번째 악연인 남한조선노동당 사건이 터진다.
두 번째 악연은 남한조선노동당 사건이다.
통일뉴스의 “4.19와 2대 악법, 그리고 국가보안법 - 손병선 사월혁명회 공동의장”에 나오는 국가보안법 두 번째 악연인 남한조선노동당 사건이다.
“1990년 김낙중, 이우재 등과 후배들이 민중당을 만드는데 같이 참여하자고 하여 민중당에 들어가서 조국통일위원장을 맡아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당내 원로를 맡아 달라는 부탁에 원로들과 주 1회씩 모임을 하게 되었다. 거기서 회비도 많이 내고 모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이선화(이선실)와 친해졌다. 그녀는 자신은 제주 출신이고 일본에 가서 살다가 한국으로 왔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이상은 나에게 밝히지 않았는데 그녀가 북에서 왔다는 이야기는 누구의 입에서 나온 것인지 알 수가 없다.
1992년 14대 대통령선거 막바지인 9월 26일 나는 영장도 없이 끌려가 안기부 수사실에서 수사요원들로부터 숱한 고문과 구타를 당하였다. 그것이 소위 ‘남한조선노동당 사건’이다. 22일간의 고문으로 안기부 소속 의사마저도 ‘더 이상은 고문하면 죽게 된다’고 경고할 정도로 참혹한 고문을 받으며 안기부가 강요하는 대로 진술할 수밖에 없었다.
악몽과도 같은 안기부 수사가 끝나고 나는 법정에서 ‘이선실과 통일에 대한 열망으로 대화하겠다는 생각에서 만났을 뿐이며, 노동당에 가입한 사실도, 남한조선노동당이란 지하조직을 만든 적도 결코 없다’고 강변하였다.그러나 재판부는 공소사실의 진위 여부를 밝히는데 반드시 필요한 증인들의 구인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은 나의 고문 조작된 진술서와 안기부 수사의견서 그리고 검찰조서만이 유일한 증거로 인정되고 나는 또 2대악법 전신인 국가보안법에 묶여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선생은 무기수로서 1998년 석방까지 약 6년간의 옥중 생활을 하는 중, 김대중 정부의 8‧15특사 형집행정지로 풀려난다.
이후 선생은 사월혁명회 상임의장을 역임한 동지의 ‘이선실 사건’ 비판을 접수하고 장애인 아들을 데리고 울진에서 낙향해 살다가 암에 걸려 위를 전부 들어내는 수술을 받고 서울에 생활한다. 고인은 수술받기 전에는 쉬지 않고 박근혜 퇴진 촛불에 나왔고, 기초노령연금의 반을 회비로 내놓으실 정도로 사월혁명회에 대한 사랑과 창립을 주도한 분으로 책임이 강했다. 사월혁명회 회원은 박근혜 퇴진 촛불 당시 엉덩이에 얼음이 박힐 정도의 엄동설한에도 불구하고 노구를 이끌고 한 번도 쉬지 않고 23차례나 나온 대기록을 세웠다.
민족민주운동에는 ‘나라다운 나라, 자주·민주·통일’을 위해 투쟁하면서 후배를 이끌어 주신 분들이 너무나 많다, 민족민주운동단체는 그분들을 통칭 ‘원로’라 부르며 여러 가지로 관심을 갖고 소통하고 있지만, 병고에 시달려 요양병원 등에 가는 경우는 연락이 끊기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후배들이 원로를 제대로 챙기지 못하면 이것은 우리 민족민주운동의 손실이자 과오이다. ‘원로’들의 역사적 경험과 지혜는 계속 이어져야 한다. 그리고 그분들의 성공과 실패의 사례를 연구하여 더 나은 ‘나라다운 나라, 반제 자주의 나라’를 세워야 한다.
‘원로’를 챙기지 않는 것은 단순히 사람을 대접하지 않는 것을 넘어, 그분들이 가진 귀중한 역사적 자산과 지혜가 전수되지 못하고 단절되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를 기억하지 않는 운동은 미래가 없다.
앞의 『사월혁명회보』(제92호)에서 선생이 후배에게 남기는 고언이다.
“자기 인생을 끝까지 지키고 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라는 걸 후배들은 알아 줘야 되요. 인생을 살아가면서 한 일생을 사는 게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예요.
특히 우리 역사에서는 이탈하지 않고 꿋꿋하게 가는 게 어려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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