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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일본과의 영유권 분쟁 지역인 쿠릴열도를 사상 처음으로 방문했다고 13일(현지시간) 러시아 국영 타스통신이 보도했다.
AFP통신에 따르면 현재 시베리아·극동 지방을 순방 중인 푸틴 대통령은 이날 쿠릴열도를 직접 방문해 러시아 태평양 함대의 기함을 시찰하고 훈련 보고를 받았다.
푸틴 대통령의 쿠릴열도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다.
8월 13일자 『연합뉴스』의 「日정부, 푸틴 쿠릴열도 방문에 “일본 고유 영토…강하게 항의”」기사이다.
“일본 정부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일본과의 영유권 분쟁 지역인 쿠릴열도를 사상 처음 방문하자 강한 항의 메시지를 발표했다.
모테기 도시미쓰 일본 외무상은 푸틴 대통령이 13일 쿠릴열도를 방문한 직후 엑스(X·옛 트위터)에 글을 올려 ‘에토로후섬을 포함한 북방영토는 역사적으로도 국제법상으로도 일본의 고유한 영토로, 일본은 이번 방문을 강하게 항의한다’고 밝혔다.
일본은 홋카이도 북쪽이자 러시아 쿠릴열도 남단에 위치한 쿠나시리·에토로후·시코탄·하보마이 등 4개 섬을 북방영토라고 부르며 러시아와 영유권 갈등을 빚고 있다.
(중략)
푸틴 대통령은 유즈노사할린스크 방문에서 ‘우리는 일본을 위협하지 않고, 일본에 대해 어떤 영유권 주장도 하지 않는다’라고도 언급했다.다카이치 사나에 총리가 이끄는 일본 내각이 집권 후 이달 초 처음 내놓은 방위백서에서 러시아와 북한, 중국의 군사적 밀착에 우려를 표한 것을 지적한 것이다.”
러시아가 실효 지배 중인 쿠릴열도는 현재 인구가 2만 명에 불과하지만, 금·은 등 광물자원과 주변 수산 자원이 풍부한 지역이다.
러시아의 쿠릴열도와 일본 영토 문제
1945년 8월 8일 소련(현 러시아)이 대일전에 참전하고 일본의 항복으로 사할린 남부와 쿠릴열도, 북방 4도(에토로후 섬, 구나시리 섬, 시코탄 섬, 하보마이 군도)를 실효 지배권을 획득했다.
이는 나치 독일의 패배와 전후 처리를 논의하기 위해 1945년 2월 연합국 간 얄타회담에서 소련의 대일전 참전 대가로 러일전쟁에서 잃은 영토를 반환한다는 비밀의정서가 채택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북방 4도는 쿠릴열도에 포함되지 않으며 홋카이도에 속한 ‘고유 영토’이므로 반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러시아는 1945년 이후 실효 지배 중이며 2차 세계대전 결과로 정당하게 획득한 영토이며 영토분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맞서고 있다.
동북아역사재단이 2011년 2월호 뉴스레터 「남쿠릴열도 분쟁」에서 정리한 내용이다.
하보마이(歯舞), 시코탄(色丹), 이투루프(択捉), 구나시리(国後) 4개 섬을 둘러싼 일본과 러시아의 관계는 1855년 2월 '러·일 통상 및 국경조약(시모드조약)'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조약에서 양국은 이투루프(択捉島)와 우르프(得撫島)를 경계로 국경을 확정하였다. 일본은 1875년 5월에 '사할린·쿠릴열도 교환조약(상트페테르브르크조약)'을 맺어 사할린을 러시아에 양도하는 대신 쿠릴열도(18개 섬) 전체에 대한 영유권을 양도받는다.
한편 소련은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대일참전의 대가로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과 쿠릴열도에 대한 영유권 양도를 약속받는다. 소련은 1945년 8월에서 9월에 걸쳐 남쿠릴열도를 점령하고 여기에 거주하던 일본인 약 17,000명을 강제로 퇴거시켰다.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에서 일본은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과 쿠릴열도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한다. 그러나 상기 4개 섬은 일본 고유의 영토로 일본이 포기한 쿠릴열도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 일본의 주장이다. 즉 일본이 강화조약에서 포기한 것은 1905년 포츠머스조약을 통해 획득한 영토로, 상기 4개 섬에 대한 영유권은 이미 1905년 이전에 획득했다는 주장이다.
1956년 10월 일소공동선언에서 양국은 평화조약 체결 후 하보마이(歯舞)와 시코탄(色丹)을 일본에 인도하는 데 합의했다. 그러나 소련은 1960년 일미안전보장조약 체결을 문제삼아 소련과 일본 사이에 영토문제는 없다고 선언한다.
1991년 4월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영토문제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후 양국 간의 교섭이 다시 진행되었지만 실질적인 진전은 없었다.
일본이 주장하는 ‘고유 영토’는 한 번도 외국 영토가 된 적이 없는 땅을 의미한다.
일본의 위험한 ‘고유 영토’ 개념
일본은 영토 문제를 ‘고유 영토’ 문제라고 한다.
‘고유 영토’라는 말은 나라마다 역사적 권리를 주장할 때 쓰는 표현이다. 일본은 한국의 독도(일본명 다케시마)와 러시아의 쿠릴열도(일본명 북방영토)를 자신들의 고유 영토라고 우기지만 한국은 독도가, 러시아는 쿠릴열도를 본래 영토라고 한다.
영토 문제는 나라마다 양쪽의 생각과 역사가 달라서 매우 풀기 어렵다. 영토 문제의 특징은 두 나라가 서로 물러설 수 없는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고 인민의 마음과 나라의 자존심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교와 법으로 해결하기 매우 어렵다.
일본은 외국이 차지한 적이 없는 원래 자기 땅을 ‘고유 영토’라 부른다.
러시아와 조선의 현대사 전문가인 와다 하루키는 『동북아시아 영토문제,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대립에서 대화로』(사계절, 2013)에서 ‘고유 영토’에 대한 의견을 밝혔다.
“‘고유영토’란 어떤 의미일까? 일반적으로 원래부터 일본 영토였던 곳, 옛날부터 일본인이 살던 곳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일본은 홋카이도·혼슈·시코쿠·큐슈를 들 수 있다. 이 네 섬은 ‘일본 본토’라고 불린다. ‘일본 본토’를 영어로 표현하면 ‘Japan proper’로 바로 ‘고유영토’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일본 본토’에 오키나와는 포함되지 않는다. 오키나와는 오랫동안 독립왕국이었고, 민족적으로도 본토의 대다수와는 혈통이 다르다. 더욱이 ‘고유의 일본’을 엄밀히 말하면 홋카이도 또한 포함되지 않는다. 홋카이도는 분명히 지시마(千島, 러시아명 쿠릴Kuril), 가라후토(樺太, 러시아명 사할린Sakhalin)와 함께 아이누·모시리, 즉 ‘아이누의 고요한 토지’였다. 선주민의 세계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일본인이 살고 있던 곳이라는 의미에서 ‘고유 영토’라는 말은 일본 자체에 대해서도 사용하기 어렵다.”
역사적으로 유럽은 오랜 역사 동안 전쟁과 강화조약(講和條約), 왕조 교체로 국경이 자주 바뀌어 고유 영토를 정하기 어렵다. 미국 역시 이주민이 원주민의 땅을 차지하며 영토를 넓혔기 때문에 전통적인 의미의 고유 영토 개념을 적용할 수 없다.
와다 하루키는 앞의 저서에서 ‘고유영토’론은 위험한 논의라고 주장했다.
“‘고유영토’는 교섭의 용어가 아니라 싸움의 용어이다. ‘고유영토’라고 말하면 ‘불법 점거’, ‘불법 점령’을 소리 높여 주장할 수밖에 없다. 듣는 측은 ‘침략자는 물러나라’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므로 ‘고유영토’론은 영토문제를 외교 교섭상의 문제로 삼을 수 없으니, 최후 통첩적인 요구, 좀 더 강해지면 군사 행동을 불러올지도 모를 주장이다.”
대한민국의 독도와 일본 영토 문제
일본은 근대 이후 주변국인 한국, 중국, 러시아와 각각 영토분쟁을 겪고 있다.
한국의 독도, 러시아의 쿠릴열도, 일본의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는 각국이 실효 지배 중이나 주변국과 영유권 갈등을 빚는 대표적 지역이다.
영유권 갈등을 겪는 근본 원인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전후 일본의 제국주의적 영토 확장 과정과 제2차 세계대전 패전과 강화조약(講和條約) 이후 국제 질서 재편이 맞물려 발생한 역사적 산물이다.
1905년 일본은 러일전쟁 시기에 독도를 강제로 자국 영토로 편입하였고, 해방 이후 대한민국이 다시 실효적 지배를 회복하면서 양국 간 영유권 갈등이 지속되고 있다. 하지만 이제 한국인은 1905년은 일본이 을사늑약을 강요한 해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2005년 3월 16일자 『한겨레』의 정병준 목포대 교수의 「[기고]일본, 100년동안의 조작」 기사이다.
“1904년 9월 시마네현 어부 나카이 요사부로는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시켜 자신에게 대여해줄 것을 일본 정부에 청원했다. 다음 해 1월28일 일본 정부는 독도를 다케시마라는 이름으로 자국령에 편입시켰고, 이를 시마네현 현보에 고시했다.
(중략)
일본은 독도에 러시아함대 감시용 망루를 세웠다. 대한제국 정부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1년 뒤 울릉군수 심흥택의 보고로 뒤늦게 사태를 파악했으나 러-일전쟁의 와중에 일본 군대가 궁성을 점령했고, 외교권은 박탈당한 상태였다. 일본이 주장하는 무주지 영토편입론의 출발이었다.2차대전에서 패했으나 일본은 영토욕심을 버리지 않았다. 식민지는 돌려주지만 19세기 이래 영토로 편입한 섬들은 차지하겠다는 의도였다.
(중략)
독도는 역사적·현실적으로 의문의 여지없는 한국의 영토다. 문제는 한국정부가 팔짱을 끼고 국민들의 정서와 요구를 탓하며 실효적 지배만을 주장했다는 점이다. 그 사이 일본은 국가·민간차원에서 대내외적 선전·홍보는 물론 조사·연구작업을 진행해왔다. 일본이 국가차원의 조작을 시작한 1905년 이후 100년이 흘러 바로 그 시마네현 의회가 독도의 날 조례를 제정했다.”
와다 하루키는 『동북아시아 영토문제,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대립에서 대화로』에서 한국의 독도 문제는 1905년 일제의 조선 강제 병합의 전조였다고 주장했다.
“독도=다케시마는 일본이 1905년 1월 이래로 1945년 8월 15일까지 40년 동안 이 섬을 영유했다는 점, 일본의 패전과 조선의 독립 후 연합국군 최고사령부가 1946년 1월 일본의 관리에서 제외했던 점, 1952년에 이승만 라인의 안쪽에 독도를 포함한 뒤 몇 차례 분쟁이 있었지만 1954년부터 한국이 경비대를 보내 확보했으며, 이후로 오늘날까지 58년 동안 실효지배를 계속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이 영유한 시간보다 긴 기간 동안 한국이 실효지배를 해 왔다.
이 한국의 실효지배는 해방 직후부터의 영유권 주장에 근거한다. 그 주장의 핵심은 1905년 1월 일본의 다케시마(독도) 영유는, 조선 침략을 시작하면서 5년 후 강압적인 한국 병합의 전조로 행해졌다는 점에 있다. 일본에서 이 주장을 논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 주장에 따른 독도 지배는 한민족이 존재하는 한,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한 절대 철회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한국이 국제사법재판소에 재소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영토분쟁은 일제의 침략과 제2차 세계대전 항복에서 비롯
일본은 동중국해에 있는 무인도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에 대해 중국과 마찬가지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일본은 센카쿠 열도를 실효 지배하고 있으며, 역사적·국제법적으로 자국 영토이므로 해결할 영유권 분쟁 자체가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반면 중국과 대만은 일본이 청일전쟁 중이던 1895년 이 지역을 자국 영토로 편입한 역사적 근거로 영유권을 강력히 주장하며 대립하고 있다.
러시아, 한국, 중국, 일본의 영토 문제는 모두 제2차 세계대전 일본의 항복과 강화조약에서 비롯된다.
와다 하루키는 앞의 저서 서문에서 한·일, 러·일, 일·중 세 나라의 영토 문제는 해결에 대해 의견을 밝혔다.
“세 나라의 영토문제는 8·15 패전에서 비롯된다. 3·11 사태(필자: 2011년 동일본 대지진)로 8·15의 상황이 과거의 것이 된다면, 서둘러 8·15에서 비롯된 미처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중략)
그러려면 지금까지의 영토문제에 대한 생각과 정책을 엄격하게 다시 돌아보고, 거짓이나 궤변이 있다면 그것을 도려내야 한다. 잘못된 점이 있다면 확실하게 바로잡아야 한다.지금은 일본의 전후(戰後)정치와 전후 체제 모두를 다시 검토해야 하며, 그 주요 대상은 영토문제이다.”
일본이 ‘고유 영토’라고 주장하는 독도(다케시마)나 쿠릴열도(북방영토) 그리고 센카쿠 열도(댜오위다오)는 지역에서 의도적으로 분쟁을 일으켜 자국의 영유권을 합리화하기 위해 만든 정치적·외교적 논리이다.
그뿐 아니라 1905년 러일전쟁 시기 등의 영토 편입을 ‘주인 없는 땅을 먼저 차지한 것’으로 포장하여 과거 제국주의 침략의 성격을 지우려 한다.
하지만 상대 국가가 실효 지배하는 지역을 ‘불법 점거’로 규정하고, 일본이 이를 되찾아야 할 때는 제국주의 힘의 논리를 세운다.
일본은 경제 침체나 사회적 갈등이 발생할 때 영토 문제를 부각해 내부 여론을 결집하고 극우세력 층을 지지 기반으로 삼는다. 또한 일본은 초중고 교과서 및 방위백서 등을 통해 자국 학생들에게 어릴 때부터 고유 영토 인식을 주입하여 주장을 고착화한다.
미국 주도 「극동국제군사재판」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일본 부활
일본은 8월 15일 연합국의 포츠담선언을 수락하고 항복했다. 사실 8월 15일은 일왕이 포츠담선언을 수락했다고 국민에게 라디오 방송한 날이다. 사토 다쿠미 교토대 교수는 일본이 8.15를 종전기념일로 삼은 것은 패자의 굴욕을 지우고 희생자 추모를 위한 날임을 강조하기 위해 정부와 언론이 조작한 것이라 주장했다. 미국과 옛 소련의 대일 전승기념일은 9월 2일이며, 러시아와 중국, 몽골은 9월 3일을 항전 승리기념일로 삼는다.
일본의 15년간 침략전쟁 기간에 일본에서 300여만 명 그리고 아시아 각지에서는 무려 2,000여만 명이 넘는 사람이 죽었다. 전쟁이 아니라 학살이었다. 그래서 일왕과 국민은 다시는 전쟁하지 않고 평화 국가의 길을 걷겠다고 맹세하며 평화헌법을 채택했다.
일본 헌법 제9조 제1항과 2항의 내용은 전쟁과 무력 행사를 영구히 포기한다는 평화헌법의 핵심 조항이다.
평화헌법 제9조
1)(전쟁의 포기) 일본 국민은 정의아 질서를 기조로 하는 국제 평화를 성실하게 희구하며, 국권의 발동에 의한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영구히 이를 포기한다.
2)(군비 및 교전권의 부인) 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육해공군 및 그 밖의 전력을 갖지 않는다. 국가의 교전권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극동국제군사재판」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일본은 미국을 등에 업고 부활한다.
1943년 11월 27일 ‘카이로 선언’은 “조선을 자유독립하는 것으로 결의를 가진다”라고 선언했다. 이어 일본이 항복하고 수락한 ‘포츠담선언’에서는 일본의 주권은 홋카이도, 혼슈 등 현재의 영토에 국한하고 일본의 전쟁 범죄를 엄히 다스리며 배상금을 지불할 것 등이 결정됐다. 그리고 이 선언의 조문을 근거로 일본의 침략 전쟁에 대한 「극동국제군사재판」을 진행했다.
「극동국제군사재판」은 영국‧미국‧네덜란드‧프랑스의 식민지, 중화인민공화국(중국)에 대한 일본군의 침략은 재판했지만, 조선‧중화민국(대만)의 식민지 지배는 심의하지 않았다.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과 그리고 추궁되지 않은 전쟁 범죄 재판은 향후 일본의 조선에 대한 인식을 크게 왜곡시켰다. 설상가상으로 전승국에 대한 배상 지불은 6·25전쟁으로 미 국무성이 ‘대일강화 7원칙(1950년 11월 24일)’을 적용해 모든 교전국의 일본에 대한 배상청구권을 포기하게 했다.
이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는 중국과 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조선)과 대한민국(한국)은 초청되지 않았다. 그리고 한국의 참가는 일본의 요시다 시게루 내각이 반대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1951년 9월 8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연합국 48개국이 일본과 태평양전쟁 전후 처리에 서명하고, 1952년 4월 28일에 발효된다. 그러나 소련은 조약에 일본의 군대 창설을 막을 장치가 없다는 점,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이 일본 침략의 주요 피해자임에도 초대받지 못했다는 점, 조약에서 일본을 미군 기지로 삼았다는 점, 일본을 소련에 대항할 미군의 연합국으로 삼았다는 점 등을 들어 반대했다.
결국 소련과 중국을 참가시키지 않고,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방측 진영만 참가한 편면강화(⽚⾯講和-교전 상태에 있던 모든 나라들과 맺은 전면강화가 아닌, 일부 나라들하고만 체결했다는 의미)를 체결한다.
또한 불행하게도 조선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 어디를 전체 조선의 대표로 하는 문제와 6·25전쟁 중이어서 초청 대상국이 아니었다.
일본의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총리 담화」 그리고 「김대중 오부치 선언」
한일관계는 굴곡이 많았지만, 김대중(1924~2009) ‘국민의 정부’는 역사적인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총리 담화」 그리고 「김대중 오부치 선언」을 성사시켜 위안부 존재와 식민지 지배 그리고 침략에 대해 일본으로부터 사죄를 받아냈다.
1993년 8월 4일, 미야자와 내각 당시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이 1년 8개월 동안의 조사를 걸쳐 발표한, “위안부 관계 조사결과 발표에 관한 고노 내각관방장관 담화(慰安婦関係調査結果発表に関する河野内閣官房長官談話)” 약칭 「고노 담화」를 발표했다.
주요내용은 ▲ 위안소와 위안부가 존재했다. ▲ 위안소의 설치, 관리 등에 군이 관여했다. ▲ 위안부가 되는 과정에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강제성이 있었다. ▲ 위안소에서 강제 사역이 이루어졌다. ▲ 모집, 이송, 관리 등은 본인들의 의사에 반해 진행된 강제성이 있었다. 담화는 이상의 5개 사실을 확인하고 “마음으로부터 사죄와 반성의 말씀을 올린다”라고 표명했다. 2007년 미국 하원에서도 일본 정부의 공식적이고 분명한 인정과 사과, 역사적 책임을 요구하는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이후 일본은 1995년 8월 15, “전후 50주년의 종전기념일을 맞아(戦後50周年の終戦記念日にあたって)” 약칭 「무라야마 총리 담화」에서 최초로 현직 일본 총리가 과거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대해 사죄했다. 「무라야마 총리 담화」는 일본의 군국주의 과거 식민 통치에 대해 “진심 어린 사과”를 하고 “깊은 반성”을 표함으로써 과거에 대한 반성의 새로운 기준을 세웠다.
또한 1998년 10월 8일 일본 도쿄를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총리가 한일 양국 간 불행한 역사를 극복하고 미래 지향적인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과거사 인식을 포함한 11개 항의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21世紀に向けた新たな日韓パートナーシップ共同宣言)” 약칭 「김대중 오부치 선언」에서 “한국 국민에게 식민지 지배로 인해 큰 손해와 고통 (중략) 통절한 반성과 진심 어린 사과”의 뜻을 밝혔다.
월트 F 해치는 저서 『전후 일본과 독일이 이웃 국가들과 맺은 관계는 왜 달랐는가』(책과 함께, 2024)에서 당시 한일관계를 기술했다.
“김 대통령은 한국의 IMF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일본으로부터 30억 달러의 원조를 제공받기로 했다. 그리고 오부치 총리는 한국 정부가 오랫동안 유지해온 일본 문화 상품(영화나 음악 등)에 대한 수입 금지 조치를 점진적으로 완화할 것이라는 약속을 확보했다. 이어진 회담에서 한일 양국은 심지어 2002년 월드컵축구대회를 공동개최하기로 합의했다.
(중략)
이 기간에 양국 사이에 경제 및 인적교류가 빠르게 증가했다. 2005년 일본과 한국 간의 상품 무역은 720억 달러에 달했는데, 이는 10년 전보다 거의 두배 수준이었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화해의 시간은 오래 가지 않았다.
종일(從日) 종미(從美) 사대 박근혜, 윤석열과 아베의 등장으로 앞서 정권들이 힘들게 이루어 놓은 한일관계를 급속대로 뒤집어 놓았다.
또다시 전쟁의 화마에 휩쓸리지 말아야 한다
2022년 12월 16일 일본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정권은 국무회의에서 ‘반격 능력’으로 명명된 적 기지 공격 능력 보유를 공식 선언하며 안보 3문서 개정을 단행했다. 이는 일본이 오직 방어에만 치중하겠다는 전수방위 원칙을 사실상 무력화하고, 선제타격이 가능한 군사력을 갖추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본의 안보 3문서는 ‘국가안전보장전략, 국가방위전략, 방위력정비계획’을 말하며, 일본의 외교·방위 정책 방향을 규정하는 핵심 지침이다. 2013년 아베 신조(安倍晋三, 1954~2022) 정권이 처음 제정했고, 2022년 기시다 내각에서 개정되어 반격능력 보유 등을 명시하면서 체계를 갖췄다.
그런데 지난 8월 4일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일본 정부가 출범 뒤 처음 발간한 방위성 「2026 방위백서」에서 “일본을 둘러싼 엄중한 안보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외교·방위·경제·기술·정보력 등을 종합한 국력을 강화해야 한다 (중략) 정부는 올해 안 ‘안보 3문서’ 개정을 위한 검토를 진행하고 있다”고 한발 더 나아갔다.
그리고 방위백서에서 “우리나라(일본) 고유 영토인 북방영토(쿠릴열도 남단 4개 섬의 일본식 표현)와 다케시마(일본이 주장하는 독도 명칭) 영토 문제가 여전히 미해결 상태로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일본은 2005년 이후 매년 방위백서에서 독도 영유권을 22년째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일본은 ‘우리 나라 주변의 안전보장 환경’이라는 제목의 지도에는 독도 위치에 ‘다케시마를 둘러싼 영토 문제’라고 표기했다. 또 ‘우리 나라 주변 해·공역에서의 경계·감시’ 지도에서 독도 주변에 파란색 선을 그어 자국 영해로 표시했고 ‘우리 나라와 주변국·지역의 방공식별구역(ADIZ)’ 지도에서도 한국 ADIZ 내의 독도를 다케시마로 표기했다.
특히 방위백서에서 중국에 대해서는 ‘가장 큰 전략적 도전’이라는 표현을 쓰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조선)에 대해서는 “일본을 사정권에 두는 탄도미사일에 핵무기를 탑재해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한 것으로 보인다. (중략) 조선의 군사동향은 일본 안보에 한층 더 중대하고 임박한 위협”이라고 평가했다.
이러면 동아시아는 또다시 전쟁의 화마에 휩쓸리게 된다.
일본은 지난날 남의 국가를 강탈하고 일말의 반성도 하지 않은 전쟁 범죄자들이 아닌가. 너희와 전쟁을 벌인 미제국주의자를 끌어들여 평화를 부르짖는 것은 지나가는 소가 웃을 일이다.
지금 전쟁은 과거 전쟁과 다르다.
이기고 지는 전쟁이 아니다.
핵전쟁이 일어나면 살아남을 수 없다.
전 인류는 멸망이다.
일본은 오래전부터 불천지 원수요 숙적이었다.
내일이면 81주년 광복절이다.
무릇 축구나 야구 등 한일전에서 패하면 바로 감독은 경질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다가오는 8·15경축사에서 제대로 된 자주외교와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 경고와 일본의 과거사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밝혀라.
‘빛의 광장’에 응원봉을 들고 나온 민(民)의 요구이다.
이재명 국민주권정부 또한 마찬가지임을 명심해야 한다!
일본은 군국주의 부활 음모 중단하고 전쟁범죄, 식민지배부터 사죄하라!
일본 국민은 평화헌법 파괴하는 정권 용서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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