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
역사교양
-
전국노동
-
전국노동
-
전국노동
-
오피니언
-
전국노동
-
국제소식
2025년 을사년(乙巳年)은 광복 80주년이자 을미사변 130년 그리고 총칼로 맺은 을사늑약(乙巳勒約) 120년 이자 한일협약 60년이 되는 해이다.
그리고 오늘은 ‘3·1혁명’ 106주년이 되는 날이다.
‘3·1혁명’은 애국 항쟁이었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약속대로 파고다공원에 젊은 학생들이 몰려들면서, 10년간 쌓였던 총독부의 야만적인 무단통치에 맞서 ‘조선 독립 만세운동(만세운동)’이 시작된다. 일제는 무차별 폭행과 체포 작전을 펼치며 폭력적인 진압을 했다. 그러나 조선 인민은 체포되어 끌려가면서도 소리 높여 ‘조선 독립 만세’를 불렀다. 3월 1일, ‘만세운동’은 서울뿐만 아니라 사전 약속대로 평양, 의주, 안주, 원산, 진남포 등에서도 독립선언서 낭독과 시위가 전개되었다.
‘3·1혁명’ 투쟁은 야만적인 무단통치에 맞서 조선 민족의 자주독립을 되찾자는 전 민족적 반일 애국 항쟁이었다. 일제의 총검에 희생된 사람만도 최소 칠천 명이며 구속자 역시 오만 명에 육박했던 민족자주독립 애국 혁명이었다.
‘3·1혁명’이 일어나는 1910년대 세계정세는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독일 등 제국들의 식민지 쟁탈전과 러시아혁명으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 식민지 쟁탈전, 제1차 세계대전
세계는 열강들의 영토 분할 경쟁의 장으로 바뀌었고, 열강은 생산과 자본의 집적과 집중으로 독점자본주의 길을 가고 있었다.
1914년 6월 28일, 세르비아의 사라예보를 방문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Austro-Hungarian Monarchy) 왕위 계승자가 저격을 받아 암살당하자 제1차 세계대전(대전)이 발발한다. 당시 사라예보는 범슬라브주의와 범게르만주의가 일촉즉발의 긴장 속에 대치하던 ‘유럽의 화약고’였다.
세계대전의 전선은 프랑스와 독일의 서부전선과 독일·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동부전선 그리고 발칸반도, 오스만제국의 중동전선으로 전개됐다. 특히 서부전선은 독일 작가 E. M. 레마르크의 소설 『서부전선 이상 없다』라는 배경의 참호전처럼 지루한 일진일퇴 공방전이었다.
“온 전선이 쥐 죽은 듯 조용하고 평온하던 1918 10월 어느 날 우리의 (파울 보이머)는 전사하고 말았다.
그러나 사령부 보고서에는 <서부전선 이상 없음>이라고만 적혀 있을 따름이었다.”(『서부전선 이상 없다』)
이때 참호전을 타개하기 위해 독가스뿐만 아니라 전차, 비행기 등 대량살상무기가 개발되어 사용된다. 과학 발전이 인간 살육에 이용되어, 전쟁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사상자를 낳는다.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지지만, 보잉사 등 군수 기업은 호황을 누린다.
당시 중국을 넘보는 일본은 영일(英日)동맹을 빙자해 대독일 선전포고를 하고, 1914년 9월 산둥반도에 상륙해 칭다오(青岛)를 점령한다. 일본의 참전은 서구열강들이 유럽에서 전쟁 중인 혼란을 틈타서, 힘의 공백 상태에 있는 산둥반도를 침략해 중국 대륙 침략의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대전은 전쟁 3년째인 1917년 4월 미국 참전과 러시아 ‘2월 혁명’과 ‘10월 혁명’으로 전쟁 양상이 크게 바뀐다.
당시 러시아는 영국과 프랑스와 함께 삼국협상 국(國)이었고, 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 삼국동맹 국과는 대립 관계였다. 그런데 이탈리아가 삼국동맹을 탈퇴해 삼국협상에 가담했고 오스만제국은 삼국동맹 진영에 합류했다.
▶ 러시아 ‘2월혁명’과 ‘10월혁명’
러시아는 전쟁으로 인해 인민의 삶이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한다. ‘2월 혁명’은 ‘국제 여성의 날’이 중요한 계기가 되어 일어난다. 페트로그라드(독일어.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혁명 후 레닌그라드)에서 여성들은 식량 배급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면서 시위 구호로 ‘빵을 달라’고 외친다. 이후 노동자들의 가세로 ‘빵을 달라’는 구호는 ‘전제정 타도’와 ‘전쟁종식’이라는 구호로 변한다. ‘2월혁명’은 의식적인 지도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1905년 ‘제1차 러시아혁명’처럼 자발적으로 발발한 혁명이었다.
그런데 1905년 혁명과는 달리 ‘2월 혁명’에서는, 병사가 차르의 발포 명령을 거부하고 군인이 결의해서 인민과 호응하여 ‘적기’를 휘날리며 시위에 참가한다. 경찰과 정부 관리들은 체포되고, 다른 도시에서도 시위는 확산된다. 이 시위를 시발로 병사들의 혁명 참가는 급속하게 확산하는데, 전쟁이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러시아 인민과 병사는 전쟁에 너무 지쳐있었고 경제는 피폐하였다.
‘2월 혁명’의 첫 번째 이유가 빵이라면 두 번째 이유는 전쟁 그리고 세 번째 이유는 농민이었다. 농민이 전쟁에 징집되면서 농민의 불만은 매우 고조되었다. 이 세 가지 문제에 볼셰비키가 개입하면서 “빵, 평화, 토지”라는 효과적인 구호를 제시하면서 볼셰비키가 세력을 얻게 된다.
또한 스위스에 머물고 있던 볼셰비키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이 ‘밀봉 열차’를 타고 러시아에 입국한다. 레닌은 ‘소비에트’ 건설을 위해 전쟁 중단과 평화를 주장하면서 일제히 봉기해 ‘10월 혁명’을 성공시켜, ‘소비에트’ 정권을 출범시키고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한다.
독일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레닌의 최우선 과제는 전쟁 중단이었다. 레닌은 신생 소비에트 정부를 지키고 노동자·농민·병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가혹한 삼국동맹국 측의 요구인 삼국협상국 탈퇴, 발트3국 포기 그리고 우크라이나 독립인정과 배상금 60억 마르크를 받아들이며 1918년 러시아는 독일과 화친조약을 맺는다.
▶ 제1차 세계대전 종전과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제1차 세계대전은 동부전선이 정리되고, 러시아 대신 미국이 참전하면서 1918년 11월 3일 독일의 항복으로 끝이 났다.
강준만은 『미국사산책 5』(인물과사상사, 2010)에서 4년 동안의 인명 피해를 정리했다.
“4년 동안 지속된 제1차 세계대전은 독일 180만 명, 러시아 170만 명, 프랑스 140만 명, 오스트리아·헝가리 130만 명, 영국 74만 명, 이탈리아 61만 명 등 약 1,000만 명의 사망자를 냈다.
전쟁으로 인한 기아와 질병에 시달려 죽어간 사람도 1,000만 명, 불구자는 600만 명이나 나왔다.”
1919년 1월 18일부터 프랑스 파리 베르사유궁전에서 전승국인 연합국 27개국은 ‘만국강화회의’를 열고 전후 대책을 논의했다.
미국 윌슨 대통령은 1년 전인 1918년 1월 8일 선포한 14개 조항의 평화 대책으로 ‘국제연맹’의 창설을 제창했다. ‘국제연맹’ 조항에는 이른바 ‘민족자결주의’가 포함되었고, ‘모든 식민지 문제의 공평한 조치’를 규정했다.
그러나 각국 정부는 식민지 문제를 취급하는 데 통치하는 정부의 주장과 통치당하는 인민의 이익이 동등하게 취급되어야 한다는 ‘민족자결주의’보다는 자기 잇속 챙기기에 혈안이 된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은 자극을 받게 된다.
특히 몽양 여운형(1886~1947) 등 독립운동가들은 신한청년당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영어 구사가 능통한 우사 김규식(1881~1950)을 파리 ‘만국강화회의’에 보냈으나 호응을 얻지 못했다. 파리회의 자체가 서구 제국주의 국가 간의 영토 재분할이었기 때문이다.
박은식(1859~1925)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서문당, 2019)에 나오는 당시 자세한 기록이다.
“우리나라 광무제(光武帝, 고종)는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게 피살되자 저들에 대한 원한이 이미 골수에 사무쳤는데, 그 뒤에 자신도 폐위를 당하고 나라까지 합병되자 무한히 통분하였다. 그는 비록 유폐되었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때를 타서 보복하려는 생각을 버린 적이 없었다.
왜놈들은 우리 황제를 일본 배격의 우두머리로 인정하고 제거하려는 생각을 가진 지가 오래였다.
때마침 구라파에서는 전쟁이 끝나고 열국(列國)은 파리에서 평화회의를 개최하고, 미국 대통령(윌슨)은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였으며, 우리 민족도 용약하여 독립운동을 벌이려고 하고 있었다.
이보다 앞서 일본은 영친왕(英親王, 李垠)을 일본 여인 방자(方子)와 결혼을 시키기로 하고 기미년 1월 25일 혼례를 치른 다음, 「신혼여행」이라는 명목으로 파리의 평화회의에 맞춰 구라파 유람을 시킴으로써, 한국과 일본이 동화(同化)됐다는 증거로 보여주려고 하였다.”
▶ ‘3·1혁명’의 추진 세력은 민중이었다.
강준만은 『한국근대사 산책, 제6권』(인물과사상사, 2008)에서 ‘3·1혁명’ 2개월간 2,000회 200만 명이 참여한 시위라고 정리했다.
“3·1운동은 3, 4월 만 2개월간에 걸쳐 전국을 휩쓴 시위운동이었다.
통계로 보면, 집회 횟수 1,542회, 참가인원 수 202만 3,089명, 사망자 수 7,509명, 부상자 1만 5,961명, 검거자 5만 2,770명, 불탄 교회 47개소, 학교 2개소, 민가 715채나 되었다.
이런 수치는 파악 가능한 것만을 잡은 최하의 것으로 실제로는 그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예컨대, 총운동 횟수만 해도 2,000회 이상이었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역으로 확산한 ‘만세운동’은 ‘3·1혁명’으로 발전하면서 경찰의 총칼과 기병에 맞서 일제에 적극적으로 ‘항전’했다.
한쪽 팔이 잘리면 다른 팔로 태극기를 들어 만세를 외쳤고, 구금된 인민을 구출하기 위해 주재소와 경찰서를 습격하여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반제자주독립운동이자 혁명이었다.
또한 위의 같은 책에서 강준만은 노암 촘스키(1928~ )의 말을 인용하면서 ‘3·1혁명’의 추진 세력은 민중이라고 말했다.
“신복룡은 ‘세상사를 속속들이 알고나면 우리는 늘 마음이 쓸쓸해진다’는 노엄 촘스키(Noam Chomsky)의 말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3·1운동 지도부의 전략과 당일의 처사를 볼 때 우리는 꼭 같은 심정을 느낀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3·1운동을 영웅사관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3·1운동을 민중운동의 시각에서 볼 때 그 참된 위대함과 진면목을 이해할 수 있다.
3·1운동의 주역에는 이름 없는 사람이 더 많다.
역사의 조타수는 당대의 지식인들이지만, 역사의 추진세력은 그 시대의 민중일 수밖에 없다.’”
3·1운동 106주년을 맞는 민중의 희망 양대노총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의 입장문 일부이다.
“오늘은 역사적인 3.1운동 106주년이 되는 날이다.
일제의 총칼 앞에서도 오로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기꺼이 나선 조선 민중들의 숭고한 투쟁 정신은 지금도 전 민족의 핏줄에 깊이 아로 새겨져 있다.
그것은 제주 4.3과 4.19, 5.18, 6월 대투쟁, 촛불항쟁으로 이어져 오늘 윤석열 퇴진과 사회대개혁을 위한 전국민적 운동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는 사대매국, 파쇼탄압의 암울한 시간을 걷어내고, 역사의 수레바퀴를 피땀으로 전진시켜 온 위대한 우리 노동자·민중의 역사이다.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며, 삶과 일터를 지켜내기 위해 기꺼이 일어선 승리의 역사이다.
(중략)
굴종과 사대는 망국의 지름길이다.
이에 오늘 우리는 강제징용노동자상 앞에서 굳게 다짐한다.
우리의 힘으로 굴종과 사대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자.
윤석열 정권을 비롯한 내란, 외환 책동 세력을 우리 힘으로 심판하여 다시는 이 땅에 사대매국세력이 발을 붙일 수 없도록 하자.
기어이 일본 정부의 사죄·배상을 받아내고, 피맺힌 강제동원 피해자의 한을 풀자.
실리외교, 중립외교를 강력히 촉구하여 갈수록 높아지는 전쟁위기를 종식시키고, 항구적 평화를 정착시키자.
그 투쟁의 선두에 양대노총이 함께 할 것이다.”
[울산함성 무료구독 신청] https://t.me/+ji13hLs-vL83ZTB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