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찬욱의 총반격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등록일 : 2025.04.10
인혁당.jpg
4.9 통일열사 인혁당 사건 50주기 시민대회가 “시대의 어둠이 광장의 빛으로”라는 제목으로  지난 4월 5일 2시, 대구 동대구역 광장에서 열렸다.(사진=민플러스)


올해는 4월혁명 65주년이자 4·9통일열사 50주기이다.

 

64년 전 1961년 박정희란 자가 5·16 군사쿠데타를 하면서 가장 먼저 취했던 ‘5·16 비상계엄’을, 63년이 지난 작년 윤석열이란 자가 ‘12·3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지하에 계신 4·9통일열사님!

‘비상계엄’에 무척 놀라시고 분노하셨을 줄 알고 있습니다.

 

ㅡ 1972년 ‘10·17 비상계엄’, 소위 ‘10월 유신’과 베트남전쟁

 

친일 사대주의자 박정희가 5·16 군사쿠데타 이후 망나니짓을 벌리다 민심이 돌아서니, 또 겁을 먹고 민(民)을 ‘입틀막’하기 위해 벌인 짓이 1972년 ‘10·17 비상계엄’, 소위 ‘10월 유신’이다. 

 

이후 박정희가 유신독재를 하면서 종신 집권을 획책하자, 4·9통일열사들이 유신반대와 박정희 종신 집권을 막기 위해 몸을 던져 운동한 것이, 소위 ‘인혁당재건위 사건’으로 둔갑하여 구속된다. ‘인혁당재건위 사건’은 이른바 ‘2차 인혁당재건위 사건’이라고도 불리며, 1974년에 일어났다. 

 

당시 세계정세는 냉전 시대의 최장기 열전(熱戰)인 베트남전쟁으로 미국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계륵(鷄肋) 상황으로 빠진다.

 

1970년 2월 ‘탈냉전, 군축’을 표방한 미국 대통령 닉슨이 ‘닉슨 독트린’이라는 외교 노선 변화를 꾀한다. 닉슨은 이전의 대외정책에서 정치‧군사적 개입을 축소하고, 우방국 원조를 경제 중심으로 전환한 것이다. 

 

이에 따라 중미 수교가 진행되고 아시아에선 미군 주둔 병력이 감축된다.

 

특히 1971년 2월 6일 대한민국(한국)과 미국 정부는 공동성명을 발표하여 6월 말까지 6만 3,000여 명의 주한미군을 4만 3,000여 명으로 줄이기로 합의하였으나, 미국은 3개월 앞당겨 1971년 3월 28일 주한 미 7사단을 철수한다. 

 

‘닉슨 독트린’은 한국의 주한미군 감축 문제를 넘어 중국과 ‘핑퐁 외교’ 그리고 닉슨의 중국 방문을 성사시킨다. 그리고 1971년 10월 26일 유엔 총회에서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은 가입되고, 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으로 중화민국(타이완) 대신 들어간다. 이후 타이완은 유엔 및 관련 기관에서 배제된다. 

 

미국은 1961년부터 프랑스를 대신하여 남베트남에 파견한 미군은 50여만 명(1969년) 되었지만, 베트남의 반외세 독립에 대한 열망을 꺾지 못하고 패전에 몰린다.

 

닉슨은 베트남전쟁의 수렁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중국을 이용하여, 드디어 1973년 1월 베트남과 미국은 중국의 중재를 통해 휴전, 선거를 통한 통일 정부 구성, 미국 철수 등의 내용을 담은 파리협정을 체결한다.

 

전쟁 난민 작가 출신 비엣 타인 응우옌(Viet Thanh Nguyen, 1971~)은 베트남전쟁의 참혹한 비대칭성에 관해 이야기했다.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은 초음속 전투기, 네이팜탄, 백린탄, 항공모함, 전략폭격기, 제초제 그리고 섬광과 굉음 속에서 분당 6,000발을 발사할 수 있는 소위 미니 기관총이 장착된 헬리콥터를 사용하는 괴물 같은 거대 산업과 비대칭적 전쟁을 벌였다. (중략) 
그들은 게릴라전이라는 비대칭적 방식으로 대응했다. 
(중략) 
미국은 이 전쟁에서 5만 8,000명가량의 인명 손실을 보았고, 한국은 5,000명 정도가 목숨을 잃었다. 반면에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는 공식적인 전쟁 동안 약 4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ㅡ 탈냉전과 군축 그리고 7·4남북공동성명

 

1970년 ‘닉슨 독트린’과 1971년 중국의 유엔 가입 그리고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에 이어 중국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 된다. 

 

1중국-대표단1.jpg
1971년 11월 15일 유엔 총회에 처음 참석한 중국 대표단을  기자들이 취재하고 있다

 

이런 세계정세 속에서 남북 모두는 긴장 완화를 지향하는 국제 정치의 탈냉전과 군축의 새 흐름을 지켜보며, 상대방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조선)은 1971년 4월 12~14일 최고인민회의 4기 5차 회의에서 평화적 조국통일을 위한 8개 구국 방안을 담은 호소문을 발표했다. 조국통일을 위한 8개 구국 방안에는 미군 철수, 남북 군대 감축, 미국과의 각종 굴욕적 조약 전면 폐기, 남북총선거 실시, 양심수 석방, 남북 연방제 통일, 남북 간 경제 문화 교류 활성화, 남북조선정치협상회의 소집 등이다. 

 

또한 김일성 주석은 1971년 8월 6일 캄보디아의 전 국가원수 시아누크를 환영하는 연설에서 “민주공화당을 포함한 남조선의 모든 정당, 사회단체 및 개별 인사들과 아무 때나 접촉할 용의가 있다”라고 밝혔다. 

 

당시 박정희는 학생들의 반군부독재 시위와 재야인사의 반정부 활동 그리고 경기 침체를 극복하기 위한 유화책으로 1971년 8월 12일 대한적십자사를 통하여 ‘남북이산가족찾기운동’을 조선에 제의하고, 8·15 경축사에서 평화통일을 강조했다.

 

이후 남과 북은 1971년 8월부터 1972년 6월까지 남북 적십자 예비회담을 여러 차례 개최한다. 또한 1972년엔 남북의 정부 당국자 비밀회담을 평양과 서울에서 번갈아 열었다. 

 

그리고 1972년 5월 3일 이후락 중앙정보부 부장이 특사로 평양에 파견되어, 김일성 주석과 회담하면서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조국통일 3대 원칙”에 합의한다. 

 

이와 같은 일련의 국제 환경의 변화와 남북 협상이 1972년 7월 4일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케 한다. 

 

해방 이후 최대의 통일뉴스였다. 그리고 남북 모두 통일 열기로 8·15해방을 맞을 때와 비슷하게 열렬히 환영했다. 

 

미국 국무부 또한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 지 약 30분 후에 즉각 환영 성명을 발표한다. 당시 미국의 입장은 베트남전쟁 수렁과 중미관계의 해빙을 위해 남북관계가 긴장되지 않도록 남북이 서로 체제를 인정하면서 대화하기를 원하였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ㅡ 유신의 사전 준비 작업, “7·4남북공동성명”과 ‘인혁당재건위 사건’

 

자유의 집 앞에서 악수하는 이후락과 박성철.png
자유의 집 앞에서 악수하는 이후락과 박성철

 

“7·4남북공동성명” 발표 후 후속 조치로 1972년 8~9월 남북 적십자 회담이 개최되고 11월에는 남북조절위원회가 구성되어 남북 각종 현안을 3차례에 걸쳐 논의하였다. 구체적으로 군비 경쟁 중단과 군비 축소, 상호 비방 금지, 남북교류 협력, 이산가족 상봉 등이었다. 

 

그러나 “조국통일 3대 원칙”은 조선의 기존 주장과 비슷했기 때문에, 깨어 있는 민(民)은 박정희에 대해 의구심을 가졌다. 그동안 박정희는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후 통일운동 세력을 억압했을 뿐만 아니라 통일논의 또한 금지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그해 12월 27일 제3공화국 헌법을 파괴하고 유신체제를 수립한다. “7·4남북공동성명”은 유신의 사전 준비 작업, 유신을 위한 멍석 깔기였다.

 

1973년 8월에 김대중 납치사건이 터지면서 남북조절위원회 회담은 중단되고, 남북관계는 경색되며 남북대화는 끝난다. 

 

사실 미국의 ‘닉슨 독트린’의 대한반도 정책은 이미 한계를 드러내 놓고 있었다. 핵심은 당시 탈냉전 평화공존 상태에 남북을 끌어들여, 남측이 ‘흡수통일’할 실력을 키울 시간적 물질적 여유를 갖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남북 당국자 간의 대화가 진전되거나, 민간 교류가 활성화되면 꼭 남북관계를 파탄 내기 위해 ‘내정간섭’을 하거나 수구 정권의 집권을 위해 유리한 국면을 조성하여 방해하였다. 

 

이런 미국의 ‘내정간섭’과 ‘지지’를 눈치채고 역으로 박정희는 영구집권을 위해 ‘유신헌법’을 제정한다.

 

그러나 ‘유신헌법’ 제정에 대한 민(民)의 저항운동이 거세게 일어나며, 각계 민주인사들은 1973년 “헌법개정청원운동본부”를 발족시켜 십여 일 만에 30만 명이 넘는 서명을 이루어낸다.

 

대학생들은 이 기회를 활용해 ‘민청학련 사건’으로 알려진 유신반대 투쟁을 준비한다.

 

민청학련 사건 재판 장면.png
민청학련 사건 재판 장면

 

이렇게 유신반대 투쟁이 전국적으로 확산하자, 박정희는 또 ‘1차 인혁당’과 마찬가지로, 유신독재 반대 투쟁을 주도하였던 민청학련을 배후 조종하였다는 혐의로 소위 ‘인혁당재건위 사건’을 조작해 4·9통일열사들을 구속한다.

 

다행히 민청학련 관계자는 대부분 석방되지만,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은 ‘인혁당사건’ 관련자들의 상고를 기각하고, 여덟 분의 사형을 확정한 뒤 다음날 9일 여덟 분의 열사들을 국가가 살인한다.

 

재심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은 채 무자비하게 국가가 사형을 집행한 것이다.

 

photo_2025-04-10_08-39-13.jpg
하재완 열사,  이수병 열사, 우홍선 열사, 여정남 열사,  송상진 열사, 서도원 열사, 도예종 열사,  김용원 열사(위줄 왼쪽 부터)

 

서도원(徐道源, 1923년 3월 28일 경상남도 창녕군 출생, 당시 나이 52세, 대구매일신문 기자)
도예종(都禮鍾, 1924년 12월 25일 경상북도 대구시(현 대구광역시) 출생, 당시 나이 50세, 삼화토건 회장)
송상진(宋相振, 1928년 10월 30일 경상북도 달성군(현 대구광역시 동구) 출생, 당시 나이 46세, 양봉업)
우홍선(禹洪善, 1930년 3월 6일 경상남도 울주군(현 울산광역시 울주군) 출생, 당시 나이 45세, 한국골든스템프사 상무)
하재완(河在完, 1932년 1월 10일 경상남도 창녕군 출생, 당시 나이 43세, 건축업)
김용원(金鏞元, 1935년 11월 10일 경상남도 함안군 출생, 당시 나이 39세, 경기여자고등학교 교사)
이수병(李銖秉, 1937년 1월 15일 경상남도 의령군 출생, 당시 나이 38세, 삼락일어학원 강사)
여정남(呂正男, 1944년 5월 7일 경상북도 대구시(현 대구광역시) 출생, 당시 나이 30세, 경북대학교 총학생회장)
프로필의 직업은 체포 당시 기준이며 시신은 경상북도 칠곡군에 있는 현대공원에 안장되어 있다.
출처 : 나무위키

 

ㅡ “4·9통일 열사”들은 4월혁명 공간 이론가이자 실천활동가 그리고 통일운동가였다. 

 

2002년 9월 12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인혁당 사건이 고문조작 되었다고 발표한다. 그리고 2006년 1월 23일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인혁당재건위사건 관련자 16명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공포한다.

 

인혁당사건 재심공판.jpg
2005년 12월 인혁당 재심결정 직후 열린 기자회견(사진=통일뉴스)

 

마침내 2007년 1월 23일, 서울지방법원 형사합의 23부는 여덟 분에 대해 무죄를 판결하고, 이것은 소위 ‘2차 인혁당재건위 사건’ 재판과정이 위법하고 부당하였음을 국가가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소위 ‘1·2차 인혁당 사건’은 고문 조작으로 간첩 사건으로 부풀려졌지만, 국가 살인 당한 '4·9통일열사'들은 4월혁명 공간 이론가이자 실천활동가 그리고 통일운동가였다. 

 

특히 대구의 서도원 도예종 송상진 하재완 열사들은 민주민족청년동맹(민민청)과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 핵심 일꾼이었다. 그리고 사실 대구가 민민청 중앙맹부의 역할을 도맡아 했다. 

 

‘4·9통일열사’들이 주도한 1961년 4월 19일 민민청 중앙맹부의 4·19 일주년 성명은 의미심장했다. 그 일부이다.

 

“4.19의 젊은 피는 횡령 당하였다.

 

「3·4월 민족항쟁」의 격전을 이룬 「4·19」 1주년을 맞이한 오늘날 동포대중들의 생존적 위압은 날로 증가하고 전체민족이 열망하는 민족통일은 반민족적 특권층에 의하여 방해되고 있는 등 「3·4월」 그날의 항쟁에서 뿌려진 「젊은 피」가 헛되이 특권보수주의자 또는 기회주의 부동층 정치배에 의하여 완전히 횡령당하였다. 


(중략)

집권자 및 그 주변세력들과 어용학자 및 몰지각한 일부 학생단체들은 「4·19혁명」 또는 「사월혁명」 운운으로써 동포대중을 기만하고 있다. 혁명이란 경제, 사회, 정치의 사회전반적인 변혁적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의 현실을 직시할 때 변혁된 것이 무엇이며 발전된 것이 무엇인가? 일제에서 해방된 조국을 외세에 의존하여 양심적 민족세력을 배격하고 진정한 민족지도자를 음모살해하고 소남한단독정부를 수립하여 절대주의적 전제권력체제를 영속시키려던 반민족의 원흉 이승만을 해외로 안치시키고 이승만체제에 근본적인 변혁을 가하지 않고 오히려 금일의 집권층을 4색당쟁과 흡사한 파쟁과 악랄한 강압정책과 매수행위를 감행하는 등 동포대중은 굶주림과 공포의 도탄에서 헤매리고 있는 현실이다. 

 

이것을 어떻게 혁명이라 할 것인가? 

 

3, 4월항쟁에서 뿌려진 붉은 피는 수많은 선열의 민족항쟁의 피를 이어받고 2·8투쟁과 광주학생투쟁의 그 투혼을 이어받은 「3·4월민족항쟁」이었다. 이 민족항쟁은 3·4월로서 그친 것이 아니요. 그 후에도 항진하고 있었으며,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그리하여 민족통일이 쟁취되어 민족혁명이 안수되는 날까지 줄기찬 투쟁으로 나아갈 것이다.”

 

ㅡ 조국은 기억하리라! 4·9통일열사들의 이름과 걸어온 길을!

 

2025년 4월 4일, 헌법재판관 8인은 만장일치로 ‘내란수괴’ 윤석열을 파면했다.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2025년 4월 4일 오전 11시 22분 윤석열 파면을 선고하고 있다.png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2025년 4월 4일 오전 11시 22분 윤석열 파면을 선고하고 있다

 

‘12·3 비상계엄’을 선포한 후 123일 동안 끈질기게 싸워 온 주권자, 민(民)의 승리다. 

 

주권자, 민(民)은 윤석열 검찰공화국 시대를 사는 대가로 공안 탄압과 양회동 열사 분신 그리고 이태원 참사라는 피바다를 건너야 했다.

 

또한, 민(民)은 윤석열 시대를 살면서 국격은 무너지고, 도덕이 땅에 파묻히고, 거짓말이 사실인 양 난무하는 조국을 보았다.

 

그러나 민(民)은 수 없는 아픔과 눈물의 강을 건너 “빛의 혁명”으로 “윤석열 파면”을 쟁취했다.

 

필자는 윤석열의 ‘12·3 비상계엄’ 이후, 모든 것이 되살아나는 희망을 보았다.

 

역설적으로 윤석열에게 감사(?)했다.

 

photo_2025-04-04_06-10-49.jpg

 

2030 세대뿐만 아니라 여의도, 남태령, 한남동, 광화문 광장에 나온 민(民)은 역사와 민족민중운동을 진일보시켰다.

 

그뿐 아니라 민(民)은 현재 처지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을 “윤석열 파면”을 위해 바쳤다.

 

마치 일제 강점 시절 힘 있는 자는 힘으로!, 돈 있는 자는 돈으로!, 지식 가진 자는 지식으로! 그들은 행동했다.

 

힘 있는 자는 집회와 행진에 참여했고, 돈 있는 자는 여의도·남태령·한남동·광화문 난방 버스 대절과 간식 그리고 핫팩 등으로, 지식 가진 자는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트위터 등 다양한 SNS 선전 홍보와 무료 의료단에 참가하였다.

 

4·9통일열사들이 꿈꾸었던 “나라다운 나라” 그리고 “아무도 흔들 수 없는 새 나라”가 “빛의 혁명”으로 세워지고 있다.

 

그러나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내란은 끝나지 않았다! 

 

내란 종식과 민(民)이 꿈꾸는 세상은 “빛의 광장”, “혁명의 광장”에 나온 만큼 전진한다!!

 

존경하는 ‘4·9통일열사님’!!!

열사들은 가셨지만 우리는 열사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열사들의 조국과 민족 그리고 자주·민주·통일에 대한 신념은 우리들의 가슴속에 살아있고 영원히 불타오를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4·9통일열사들이 못다 한 꿈을 우리는 반드시 쟁취할 것입니다.

조국은 기억하리라!

 

4·9통일열사들의 이름과 걸어온 길을!


[울산함성 무료구독 신청]  https://t.me/+ji13hLs-vL83ZTBl

삭제하시겠습니까?
취소
사진 및 파일 첨부

여기에 파일을 끌어 놓거나 왼쪽의 버튼을 클릭하세요.

파일 용량 제한 : 0MB (허용 확장자 : *.*)

0개 첨부 됨 ( / )
취소

오피니언

[전국노동자정치협회] 조기대선에 대한 입장

전국노동자정치협회

2025.04.16

오피니언

우원식 개헌 소동을 통해 본 개헌 실패 사례와 대안

김장민(정치경제학연구소 프닉스)

2025.04.13

오피니언

격동하는 국내외 정세 변화 속에 우리사회 근본변혁의 단초를 어디에서 마련할 것인가?

백철현 (전국노동자정치협회)

2025.04.12

오피니언

국유기업과 자본시장의 통제: 사회주의와 시장경제의 융합 사례

김정호 (울산함성 편집위원)

2025.04.10

오피니언

국민의힘 당사를 포위 해체하자!

김장민(정치경제학연구소 프닉스)

2025.04.10

한찬욱의 총반격

조국은 기억하리라! 4·9통일열사들의 이름과 걸어온 길을!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2025.04.10

오피니언

한덕수, 내란 옹호 의심 '이완규'를 헌법재판관으로 임명

김장민(정치경제학연구소 프닉스)

2025.04.09

오피니언

한발 물러선 유럽과 꼿꼿이 맞서는 중국

김정호 (울산함성 편집위원)

2025.04.08

오피니언

국민의힘 해체와 대선승리를 위한 민중들의 투쟁방향

김장민(정치경제학연구소 프닉스)

2025.04.05

한찬욱의 총반격

‘제주 4‧3’집단학살 원흉은 이승만과 미국이다.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2025.0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