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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ㅡ 오늘의 미국 시리즈 2/3
이경렬(전 주앙골라 대사)
등록일 : 2026.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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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비콘강을 건너는 시저.

 

기원전 49년 1월, 북부 이탈리아의 작은 강 루비콘 앞에 선 줄리우스 시저는 로마의 법과 관습을 등 뒤로 던져버렸다. 무장을 해제하고 평민으로 돌아와 정적들의 법적 단죄를 받으라는 원로원의 최후통첩은 곧 정치적 죽음을 의미했다. 그는 강을 건넜고 주사위는 던져졌다. 수백 년간 이어져 온 로마 공화정의 숨통을 끊는 행위였다. 그로부터 2천 년이 지난 지금, 인류는 미국에서 이와 절묘하게 닮은 풍경을 목도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는 현대 민주주의가 세워놓은 보이지 않는 루비콘 강을 수차례 건너며 국내외 질서와 시스템을 파괴하는 중이다.

 

트럼프를 시저에 비교하는 것은 시저의 이미지를 훼손하는 부적절한 처사다. 다만 닮은 점이 있다는 것이고 그 유사점이란 ‘견제 장치를 무너뜨리는 방식’이라는 얘기다. 트럼프가 2월 25일 의회 합동회의에서 108분간 행한 국정연설에서 뽑아낼 보편적인 가치란 전무하다. 그는 시저와 같은 ‘거인’을 흉내 내며 공화국의 규칙을 허무는 저급함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미니애폴리스에서는 무고한 시민들을 사살하는 한편 시위대들을 테러리스트로 몰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인류가 세워온 국제법과 윤리를 위반하며 무도하게 주권국가들을 침략하고 있다.

 

로마 공화정의 생명은 견제와 균형에 있었다. 그러나 시저는 갈리아 정복으로 얻은 군사적 권위와 대중의 열광을 동력 삼아 체제의 허점을 파고들었다. 그를 증오하던 원로원 엘리트들은 법을 무기로 그를 옥죄려 했으나, 시저는 내전이라는 극단적 수단을 통해 기성 정치권의 반대를 정면으로 돌파했다. 루비콘 도강은 단순히 지리적 경계를 넘은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법치에서 인치(人治)로, 공화정에서 제정(帝政)으로 넘어가는 변곡점이었다.

 

트럼프 역시 기성 정치권을 ‘늪’(The Swamp)이라 칭하며 헌법적 관례와 민주적 절차를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기탄없이 흔들어 놓고 있다. 대선 결과에 불복하거나 사법 시스템을 정치적 도구로 사유화하는 행위는 공화국을 지탱하던 신뢰라는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행보와 다르지 않다. 많은 이들이 이를 민주주의에서 독재 체제로 이행하는 전 단계라며 우려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유다. 트럼프는 민주주의의 빈틈에 기생해 공적 제도를 사유화하는 파괴의 정치인이다. 그는 비교할 가치조차 없는 방식으로 공화국을 훼손하고 있다.

 

시저와 트럼프를 잇는 가장 강력한 고리는 대중의 결핍을 파고드는 ‘포퓰리즘의 문법’이다. 단, 여기서도 유사성은 ‘대중 동원의 방식’일 뿐이며, 특히 트럼프의 행태는 시저의 국가 운영 비전이 아니라 개인 권력의 연장선이라는 점에서 저열하다. 시저의 대중은 70%에 달하는 평민이었고 트럼프의 대중은 20%가 안 되는 백인 노동자들이다. 시저는 원로원이 독점하던 토지를 평민과 퇴역 군인에게 재분배하고 부채를 파격적으로 감면했다. 기득권에게는 ‘폭군’이었으나 민중에게는 ‘구원자’가 된 것이다.

 

트럼프는 세계화의 그늘에 가려진 블루칼라 노동자들의 분노를 동력 삼았다. 엘리트 카르텔이 빼앗아 간 ‘미국인의 일자리’를 되찾아 주겠다는 약속으로 강력한 팬덤을 구축했다. 두 지도자 모두 대중과의 직접 소통을 중시하며 그들의 충성심을 종교적 영역으로까지 격상시켰다. 그러나 시저가 체제의 균열을 ‘정치’로 재정비했다면 트럼프는 분열을 ‘원한’으로 치환한 다음 자신에게 유리하게 무한정 증폭시키고 있다.

 

행태의 유사성은 대외 정책에서도 발견된다. 시저는 이집트 내전에 개입해 클레오파트라를 옹립함으로써 이집트라는 거대 자원국을 자신의 ‘개인적 후원’ 아래 두었다. 국가 간 공식 조약보다 개인적 충성과 실리적 거래를 중시한 행보였다. 트럼프의 외교도 이와 닮아 보인다. 그는 나토의 다자간 동맹을 거부하고 해외 정상들과의 직접적인 ‘개인적 거래’를 선호하며 기존 국제 규범을 무력화한다. 트럼프는 외교를 시스템이 아니라 개인의 거래 감각으로 다룬다. 그는 외교를 설계가 아니라 즉흥으로, 국익이 아니라 자기 과시의 장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루비콘은 군대가 강을 건넌 사건이 아니라 돌아갈 길을 스스로 끊는 행위였다. 그러나 시저에게는 진군의 종착지에 대한 비전이 있었다. 2월 28일 미국의 대이란 공습은 정반대다. 공습은 ‘시작’을 만들었지만 ‘끝’을 자동으로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 지상군은 넣기 어렵고, 정권은 생각보다 단단하며, 확전은 원치 않으면서도 체면은 지켜야 하는 딜레마가 남는다. 돌아갈 길이 없다면 전쟁은 남 보기 민망한 굴욕으로 남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2003년 이라크처럼 ‘이긴 전쟁이 아니라 끝내지 못한 전쟁’으로 기억될 것이다.

 

시저의 독주에 맞섰던 인물들은 비극적 결말을 맞이했다. 공화정의 가치를 대변하던 키케로는 숙청되었고, 타협을 거부한 소(小) 카토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미국에서도 리즈 체니나 미트 롬니 같은 인물들이 트럼프에 반기를 들었으나, 그들은 물리적 죽음 대신 정치적 고립이라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 트럼프가 만든 정치적 광풍 앞에서 기존 공화당의 원칙을 지키려 했던 목소리들은 빠르게 지워지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생명을 잃어가며 외치는 일반 시민들의 함성 역시 공허한 메아리로 도시의 건물 사이에 매몰되고 있다.

 

트럼프의 행태는 새로운 질서의 ‘탄생’이라기보다 기존 질서의 ‘파손’이 상시화되는 국면을 가리킨다. 이 변화는 트럼프가 치밀하게 계획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발작적으로 금기를 깨뜨리며 제도의 취약함을 노출시킨 결과에 가깝다. 2월 중순 뮌헨 안보회의에서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은 “과거의 세계는 사라졌다”고 선언하며 새로운 지정학적 시대의 도래를 천명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존재해 온 것으로 믿어지던 ‘규칙 기반의 국제 질서’가 허명이었음을 알리는 일이었다. 국제든 국내든 “까불면 죽는(FAFO)” 사회가 펼쳐지고 있다.

 

트럼프가 구축하고 있는 힘 중심의 거친 질서는 그가 떠난다고 사라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부통령 밴스나 국무장관 루비오와 같은 후계자들이 이를 계승하며 트럼프주의는 하나의 확고한 체계로 고착화될 가능성도 있다. 특히 밴스는 “2020년 대선 결과를 승인하지 않았어야 했다”라면서 강경한 트럼프주의를 설파하고 있다. 밴스가 이끄는 미래 행정부 시나리오는 시저 사후 제정의 기틀을 닦은 옥타비아누스 시대를 연상시킨다. 트럼프는 문을 부수고 규칙을 망가뜨렸다. 밴스는 그 파손을 ‘정상’인 것처럼 포장하며 제도를 합리화할 것이다.

 

시저의 지지는 압도적이고 보편적이었다. 평민들은 그를 기득권으로부터 자신들을 해방한 영웅으로 추앙했다. 반면 트럼프는 미국 사회를 절반으로 나누는 양극화된 계층의 지지를 받는다. 지지층에게는 구원자이나 반대층에게는 위협인 이 분열 양상은 시저의 경우와는 다르지만 지지의 강도만큼은 결코 뒤지지 않는다. 시저의 죽음은 그가 꿈꿨던 평화를 가져오지 못했다. 브루투스의 칼날은 독재자를 제거했을 뿐 공화정을 복원하지는 못했고, 오히려 더 참혹한 내전과 아우구스투스의 제정 수립으로 이어졌다.

 

트럼프의 미래 역시 그가 권좌에서 물러난다고 끝날 사안이 아니다. 그가 건드린 미국의 분노는 이미 하나의 도도한 흐름이 되었다. 시저 사후 혼란을 거쳐 옥타비아누스가 제국을 완성했듯, 트럼프 이후에도 험한 과정을 거쳐 그의 유산을 이어받으려는 움직임은 지속될 것이다. 미국의 제국화에 동의할 수는 없지만 관찰되는 흐름은 분명 그러하다. 제국 로마가 수 세기를 지속했듯, 이러한 ‘변모’가 미국의 즉각적인 몰락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지난 80년을 한껏 누려온 ‘미국 세기’는 그만 막을 내릴 것이다. 루비콘의 강물은 멈추지 않고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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