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미국 중심 공급망 편승을 넘어 자주적 생산관계 변혁으로
정성희 (자주연합 집행위원장) 
등록일 : 2026.08.25

 

사진=SBS 뉴스.png
사진=SBS 뉴스

  
정부가 내놓은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 프로젝트’는 반도체·피지컬 AI·AI 데이터센터를 하나의 산업생태계로 묶고, 전력·용수·산업입지·교통망을 국가가 공급하여 한국의 생산능력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리겠다는 거대한 국가산업정책이다. 정부의 설명대로라면 이것은 단순한 지역개발사업이 아니라 AI를 중심으로 새로운 국가 생산 플랫폼을 구축하는 장기 프로젝트다.

 

국가가 전략산업을 육성하고 시장의 조정 실패를 보완하는 것 자체를 반대할 이유는 없다. 문제는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어떤 생산관계 위에서 생산력을 발전시키느냐​이다.

 

지금 제시된 3대 메가프로젝트는 이 질문에 답하지 않은 채 거대한 생산시설과 전력망, 용수시설부터 건설하려 한다. 더구나 그 산업전략이 미국의 대중국 공급망 재편이라는 지정학적 흐름에 지나치게 편승하고 있다면, 한국경제의 장기적 자립과 민중의 삶을 위한 산업정책이 아니라 새로운 종속적 분업구조를 확대하는 결과가 될 수 있다.

 

다극화 시대에 미국의 반중국 공급망 재편에 올라타는 것이 정답인가

 

세계경제는 미국 일극체제에서 다극화된 국제질서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미국·유럽·일본이 자국의 반도체 생산기반을 확대하는 동시에 중국 역시 반도체·로봇 등 핵심산업에 대한 투자를 강화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의 3대 메가프로젝트는 이 변화 속에서 과연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

 

한국이 자체적인 생산능력을 확대하고 핵심 소재·부품·장비와 기술을 확보한다면 산업정책으로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미국 중심의 반도체·AI 공급망 재편에 편승하여 미국 시장과 미국 하이퍼스케일러, 즉 초대형 클라우드·AI 데이터센터를 운영하는 글로벌 빅테크 기업의 수요에 한국의 대규모 생산능력을 맞추는 것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메타, 오라클 등은 AI 시대에 막대한 규모의 GPU·AI 반도체, 데이터센터, 전력, 냉각시설, 네트워크에 투자하면서 AI 산업의 핵심 수요자가 되고 있다. 한국이 AI 반도체와 데이터센터를 대규모로 건설하더라도 최종적으로 그 수요를 만들어내는 주체가 미국의 초대형 빅테크 기업에 집중되어 있다.

 

특히 국내 반도체와 데이터센터 수요의 상당 부분이 미국 하이퍼스케일러의 투자에 연동되어 있다. 미국 빅테크의 AI 투자가 예상만큼 수익을 내지 못하거나 투자 속도가 둔화할 경우 국내 팹과 데이터센터, 전력망의 가동률까지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따라서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니 우리도 반도체 생산을 확대해야 하는가”가 아니다. 한국의 생산력을 어느 국가의 수요와 공급망에 종속시킬 것인가, 아니면 다극화된 세계경제 속에서 독자적인 생산·기술·시장 기반을 구축할 것인가​가 핵심이다.

 

중국을 배제하는 공급망에 한국이 편승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경제적 자립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미국의 전략적 필요에 따라 생산거점은 한국에 두되 핵심 기술·장비·시장·금융은 외부에 의존하는 새로운 종속 구조가 고착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3대 메가프로젝트는 ‘반중국 공급망’이 아니라 다극적 세계경제와 남북 경제협력까지 고려한 장기적인 민족경제·국민경제의 생산 기반 구축이라는 관점에서 다시 설계되어야 한다.

 

AI·반도체 수요가 영원히 폭증한다는 보장은 없다

 

두 번째 문제는 더욱 근본적이다. AI가 범용기술로 확산되고 메모리와 연산수요가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현재의 수요 증가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는 가정과 수백조 원 규모의 투자가 정당화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정부는 향후 5년 안에 국내 D램 생산능력을 두 배로 확대하고, 호남에 4기의 메모리 팹을 건설하며, AI 데이터센터는 2029년까지 8.4GW, 장기적으로 18.4GW까지 확대한다는 구상을 제시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산업투자는 언제나 수요보다 앞서 생산능력을 확대하는 과잉축적의 위험을 내포한다.

 

현재 AI 열풍이 계속된다고 하더라도 기술발전으로 연산효율이 크게 향상되거나, AI 서비스의 수익성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거나, 미국 빅테크가 투자계획을 축소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하이퍼스케일러들의 장기 데이터센터 계약과 막대한 투자로 인해 수요 전망이 빗나갔을 경우 좌초자산이 발생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더구나 세계 각국이 동시에 반도체와 AI 생산능력을 확대하고 있다. 미국·유럽·일본이 생산기반을 자국으로 끌어들이고 중국 역시 투자를 확대하는 상황에서 한국만 대규모 생산설비를 앞당겨 건설한다고 해서 미래의 초과이윤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과거 중화학공업화 과정에서도 중복·과잉투자가 발생했고, 실패한 투자의 비용이 금융과 재정을 통해 사회 전체로 이전된 경험이 있다. 중요한 것은 ‘승자를 정확하게 골랐느냐’가 아니라 실패가 확인됐을 때 지원을 중단할 수 있는가이다.

 

그런데 3대 메가프로젝트는 시작하는 계획은 거창하지만 수요가 감소하고 가격이 폭락했을 때 언제 생산을 줄이고, 어떤 사업을 중단하며, 이미 건설한 전력망과 용수시설의 비용을 누가 부담할 것인지가 불분명하다. 결국 “AI가 미래산업이니까 투자한다”는 논리는 산업정책의 충분조건이 아니다.

 

미래 수요의 불확실성을 누가 부담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않은 산업정책은 외자-재벌의 위험을 국가와 국민에게 전가하는 반민중적 정책으로 전락할 수 있다.

 

노동특례는 생산력 발전인가, 저임금·장시간 노동의 부활인가

 

또 다른 심각한 문제는 노동정책이다. 3대 메가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정부가 노동시간 규제를 산업의 ‘병목’으로 간주하고 주 52시간 상한 예외, 선택적 근로시간제 확대, 기간제 사용기간 연장, 파견 확대 등을 검토하고 있다. 이러한 조치는 결국 노동자에게 배분됐던 시간과 안전을 기업의 생산 일정으로 이전하고 대량 실업 위기의 고통을 은폐하는 것이다. 

 

이것은 AI 시대의 생산력 발전 방향과도 모순된다. 진정한 AI·피지컬 AI 시대라면 노동자를 더 오래 일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노동시간으로 더 많은 생산물을 생산하는 방향, 즉 노동생산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인력이 부족하니 노동시간을 늘리고, 노동자가 부족하니 기간제를 늘리고 파견을 확대한다면 그것은 생산력 발전이 아니라 기존 생산방식의 연명에 불과하다. 

 

이미 반도체 산업 인력수요 자체가 기존 전망보다 크게 과소평가된 것으로 감사원 감사에서 지적됐다. 2022~2031년 필요인력 전망에서 퇴직 대체수요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아 실제 필요인력이 크게 늘어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답은 무엇인가. 노동자를 더 오래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AI와 자동화를 통해 노동력 부족 자체를 생산성 향상의 기회로 전환하는 것이다.

 

임금이 낮고 노동시간이 길수록 기업은 자동화에 투자할 유인이 약해진다. 반대로 노동을 보호하고 적정한 임금과 노동시간을 보장하면서 자동화와 피지컬 AI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게 만드는 것이 장기적으로 더 높은 생산력을 창출할 수 있다.

 

특구를 노동규제 완화의 공간으로 만들면 호남은 ‘저임금 생산기지’가 되고 수도권은 연구개발·기획·의사결정 중심지가 되는 새로운 공간적 분업이 고착될 위험이 있다. 비수도권에 실행 기능과 예외적 노동조건을 배치하는 한국판 불균형-불평등 산업 전략에 다름 아니다. 호남을 발전시키겠다면서 호남 노동자의 노동권을 낮추는 것은 지역균형발전이 아니다.

 

반도체를 위해 전기와 물을 희생하는 반환경 정책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메가프로젝트의 세 번째 또 다른 문제는 생태적 비용이다. 서남권 반도체 클러스터가 완전히 가동될 경우 전력 6.3GW, 하루 65만 톤의 용수가 필요할 것으로 추산된다. 6.3GW는 설비용량으로 환산하면 대형 원전 약 4.5기에 해당한다.

 

문제는 단순히 발전소가 몇 개 있느냐가 아니다. 발전량과 실제 소비지역에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송전능력은 다르다. 호남은 이미 재생에너지 발전량에 비해 계통 수용 능력이 부족하고 출력 제어가 발생하는 지역이다. 그런데 여기에 대규모 반도체와 AI 데이터센터를 집중시키려면 새로운 송전선과 변전소, 저장장치가 필요하다.

 

물 문제도 마찬가지다. 팹 4기의 물 사용량만 하루 약 54만8천 톤으로 추산되고 정부가 제시하는 서남권 필요량은 하루 65만 톤이다. 기존 용수의 전환과 하수재이용수 등을 통해 공급하겠다는 계획이 있지만, 가뭄이 발생했을 때 생활용수·농업용수와 산업용수를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 

 

더구나 화석연료와 원전으로 이 전력수요를 충당한다면 탄소중립 목표와 충돌한다. 3대 메가프로젝트의 전력수요를 화석연료로 충당할 경우 막대한 추가 온실가스 배출과 발전부문 감축경로의 지연 가능성이 우려된다.

 

‘반도체냐 환경이냐’의 양자택일이 아니다.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전력·물·토지·환경비용을 누가 부담할 것인가의 문제다. 거대 독점자본의 이윤은 사유화하면서 송전망·용수시설·발전시설·환경훼손 비용은 국민과 지역주민에게 사회화한다면 그것은 지속 가능한 산업정책이 아니다.

 

호남 반도체 투자가 진정한 지역균형발전인가

 

호남에 대규모 반도체 팹을 건설한다는 것 자체를 지역균형발전이라고 부르는 것도 재검토해야 한다. 지역에 공장이 들어오는 것과 지역이 산업의 중심이 되는 것은 다르다. 

 

생산시설과 운영기능은 비수도권으로 이동하더라도 전략수립, 최종 의사결정, 핵심 연구개발, 설계와 표준 설정은 수도권에 남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되면 호남은 거대한 생산기지가 되지만 고부가가치 기능과 권한은 여전히 수도권에 집중된다. 

 

호남에 필요한 것은 단순히 ‘팹 4기’가 아니다. 대학과 연구기관, 소재·부품·장비기업, 교통·물류망, 주거·교육·의료시설, 연구개발 기능, 기업의 의사결정 기능이 함께 구축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 우리는 질문을 더 크게 던져야 한다. 한반도의 미래를 남북대결과 미국·중국 간 공급망 경쟁이라는 틀 안에서만 바라볼 것인가? 

 

한반도 평화협력이 복원된다면 산업과 물류의 공간적 조건은 지금과 크게 달라질 수 있다. 남북 철도·도로 연결, 항만과 내륙 물류망의 재편, 북(조선)의 자원·에너지·노동력과 남(한국)의 기술·자본·생산설비의 결합 등 새로운 경제 공간이 열릴 가능성을 장기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의 산업투자도 단순히 미국 시장을 겨냥한 한국 내부의 생산거점 확대가 아니라 한반도 전체의 평화경제와 장기적인 민족경제 발전을 준비하는 방향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호남 역시 이런 관점에서 중요하다. 서남해안의 항만과 재생에너지, 광주·전남의 제조업 기반을 한반도 남부권의 산업·물류축으로 발전시키고 향후 남북 경제협력과 유라시아 물류망까지 연결하는 장기 구상이 필요하다.

 

지금 당장 남북협력이 가능하지 않다는 이유로 미래의 가능성까지 정책에서 지워서는 안 된다. 20년짜리 산업정책이라면 20년 뒤의 한반도도 내다봐야 한다.

 

가장 중요한 질문: AI 생산력의 성과는 누구에게 돌아가는가

 

그러나 지금까지의 논쟁에는 결정적으로 빠진 질문이 하나 있다. AI와 반도체, 피지컬 AI를 통해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한다면 그 성과는 누구에게 돌아가는가? 정부의 산업정책은 생산능력의 확대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생산능력이 발전한다고 해서 노동자와 민중의 삶이 자동으로 개선되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에서 생산력의 발전은 생산수단의 소유와 생산물의 분배를 둘러싼 생산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AI가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고 자동화가 확대될수록 이 문제는 더욱 날카로워진다. 생산력은 급속히 발전하는데 생산수단은 외국자본으로 불리는 제국주의 독점자본과 재벌 대기업, 거대 사적 자본에 집중되어 있다면 어떻게 되는가?

 

생산성이 올라갈수록 노동시간을 줄이는 대신 인력 감축이 이루어지고, 자동화로 발생한 초과이윤은 자본에게 귀속되고, 노동자는 실업과 고용불안에 내몰릴 것이다. 그렇다면 AI 시대의 진정한 질문은 “AI로 얼마나 많은 GDP를 만들 것인가”가 아니다.

 

AI가 인간을 해방시키는 생산력이 될 것인가, 아니면 노동자를 대체하고 실업자를 양산하는 자본의 생산력이 될 것인가? 이것이 바로 생산관계의 문제 아니겠는가. 한국사회가 구조적으로 대외의존적이고 외자-재벌 중심의 자본주의 생산체제를 유지하는 한, AI 생산력의 발전이 절대로 전민중의 복리로 귀결되지 않는다. 

 

따라서 3대 메가프로젝트에는 산업투자 계획만 있을 것이 아니라 AI 생산력 발전의 사회적 귀속에 관한 계획이 함께 들어가야 한다. AI와 로봇으로 생산성이 올라가면 노동시간을 줄여야 한다. 자동화로 발생한 생산성 증가분은 임금과 사회적 소득, 공공서비스의 확대를 통해 노동자와 민중에게 돌아가야 한다.

 

뿐만 아니라, AI·데이터·핵심 인프라에 대한 사회적 소유와 공공적 통제를 확대해야 한다. 기업에 막대한 전력·용수·토지·세제 혜택을 제공한다면 그 대가로 사회적 배당, 고용보장, 노동시간 단축, 지역산업 육성, 기술 공유 등의 사회적 의무를 부과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국가가 내외 독점자본을 생산 조건을 마련하고 국민이 그 비용을 부담할 것이다. 

 

‘대도약’의 기준을 바꾸자

 

3대 메가프로젝트의 문제는 반도체를 육성해서도, AI를 발전시켜서도, 로봇산업을 키워서도 아니다. 문제는 생산력 발전의 방향과 그 성과의 귀속구조다. 국가가 산업정책에 복귀한 것은 오히려 중요한 변화다. 문제는 국가가 누구의 이해를 대변하며 어떤 생산관계를 전제로 산업정책을 수행하느냐에 있다.

 

미국의 대중국 공급망 재편에 편승하는 것이 아니라 다극화된 세계경제에서 자립적인 생산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현재의 AI 붐이 영원하다는 전제에서 무조건 생산능력을 확대하는 것이 아니라 수요·공급을 냉정하게 검증하고 실패할 경우 공공투자를 중단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호남에 반도체를 건설하되 노동특례를 통해 저임금·장시간 노동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대규모 전력과 용수를 소비하면서 환경비용을 지역주민에게 전가해서도 안 된다. 지역균형발전을 말하려면 단순히 공장을 지방에 옮기는 것을 넘어 연구개발·설계·의사결정·교육 기능까지 지방으로 이전해야 한다.

 

그리고 20년짜리 산업정책이라면 남북관계의 변화와 한반도 평화경제의 가능성까지 포함해야 한다. 무엇보다 AI와 자동화가 가져올 생산력의 비약적 발전을 대량실업과 빈부격차의 심화가 아니라 노동시간 단축과 전민중의 생활수준 향상으로 전환할 새로운 생산관계를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

 

첨단산업의 성공을 공장 몇 개가 완공되는 것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진정한 대도약은 반도체 팹의 숫자나 데이터센터의 GW가 아니라, 발전한 생산력이 얼마나 많은 사람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가로 평가되어야 한다.

 

기업의 생산력을 키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민중의 생산력을 키우고, 민중의 생활을 향상시키며, 생산력 발전의 성과를 민중에게 돌려주는 생산관계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미국의 공급망 재편에 끌려가는 ‘대도약’이 아니라, 다극화 시대에 한국사회가 스스로 선택해야 할 진정한 산업전환의 방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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