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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양
일제는 조선·만주·중국의 자원 부족을 해결하고 아시아 지배를 확대하기 위해, 대동아공영권을 부르짖으며 1941년 12월 7일 미국 진주만을 기습 공습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을 일으킨다.
일본의 하와이 진주만 기습은 미국을 제2차 세계대전의 조력자에서 전쟁의 당사자로 되게 했다. 미국은 즉각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제2차 세계대전에 본격 참전하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의 참전으로 유럽 중심이던 전선이 아프리카, 동남아시아에 이어 태평양까지 전 세계적 규모의 총력전으로 확대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막대한 군사비 지출과 ‘전시생산체체’ 덕택에 공장 가동률이 급성장하고 일자리가 늘어나면서 대공황을 탈출하게 된다.
『서울경제』 2009년 2월 9일자 「전시생산체제」 기사이다.
“1942년 2월10일, 미국 전역의 자동차 생산라인이 완전히 멈췄다. 군수물자 생산을 위한 설비교체 때문이다. 근거는 전시생산위원회의(WPB)의 '행정명령'.
초법적인 명령은 지켜졌을까. 철저하게 시행돼 미국 자동차 업계는 어떤 단일업종보다 많은 무기를 토해냈다. 370만대의 군용 지프와 트럭은 물론 항공기용 폭탄의 87%, 철모의 85%, 항공기용 엔진의 75%, 탱크의 57%, 카빈 소총의 56%, 선박용을 포함한 디젤 엔진의 47%, 기관총의 46%가 자동차 회사에서 나왔으니까.
종전까지 미국이 생산한 민수용 자동차가 단 37대에 그쳤다는 사실은 일사불란한 전시생산체제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고통은 없었을까. 있었다. 시민들은 부품부족에 시달렸다. 특히 타이어의 구멍을 수십번씩 기워서 사용하는 불편을 겪었다.
주요 생필품도 배급제에 따른 부족사태를 겪었으나 불만은 크지 않았다. 애국심이 작용한데다 근본적으로 호황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바로 이들 기업이 나중에 군산복합체로 탈바꿈하면서 이들의 로비를 받은 미국 정부가 그들의 이득과 경제위기를 극복을 위해 전 세계에 전쟁을 일으키는 범죄국가가 된다.
아이젠하워가 ‘군산복합체’ 용어를 공개적으로 처음 사용
군산복합체의 역사적 기원은 이미 19세기 말, 제국주의 시기부터 유럽에서 존재했었다. 영국, 프랑스, 독일 제국이 식민지 쟁탈을 위한 군비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민간 무기 제조사와 군부가 결탁한 사실상 초기의 군산복합체가 등장한다.
당시 독일의 크루프(Krupp), 프랑스의 슈나이더(Schneider), 영국의 비커스(Vickers) 같은 거대 방산 기업들이 국가의 예산 지원을 받으며 군사 정책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크루프(Krupp, 1881~1999)는 철강과 대포를 만드는 대표적 군수 기업으로 독일의 중공업 성장을 이끌었다. 이후 1999년 라이벌 기업인 티센(Thyssen AG)과 합병하여 대규모 다국적 기업집단인 티센크루프(ThyssenKrupp AG)로 되면서 유럽 최대 규모의 철강·공업 회사로 재탄생했다.
1836년 프랑스에서 설립된 슈나이더 일렉트릭(Schneider Electric)는 철강, 철도, 조선, 화포를 생산하는 중기계 및 군수산업 중심의 기업이었다. 1980년대 이후 전통적인 철강 및 중장비 사업을 정리하고 전력 관리와 자동화 제어 분야로 주력 사업을 완전히 전환했다.
영국 비커스(Vickers, 1828~2004)는 전함, 기관총, 전차, 군용기, 잠수함 등 다양한 무기와 산업 장비를 제작했다. 제1·2차 세계대전 동안 연합군에 핵심 군수품을 공급하는 영국의 대표적 방산업체였다. 이후 1960년에 항공사업부와 조선사업부가, 1987년에 제강부문이 국유화된다. 2004년에 BAE 시스템즈에게 인수되면서 비커스라는 이름을 계승한 기업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초기 군산복합체는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군산복합체(military-industrial complex)라는 괴물로 성장한다.
1961년 1월 17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시킨 연합군 최고사령관이자 공화당 소속 제34대 미국 대통령(재임 1953~1961)을 지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1890~1969)는 퇴임을 앞둔 고별 연설에서 군산복합체의 실상을 고발하고 그 위험성을 경고한다.
강준만의 『미국은 세계를 어떻게 훔쳤는가: 주제가 있는 미국사』(인물과사상사, 2013)에서 나오는 아이젠하워의 고별사 내용이다.
방대한 군사체제와 대규모 무기산업간의 결합은 전엔 미국인들이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현상입니다. 경제, 정치, 심지어 정신 영역에까지 침투한 그것의 전면적인 영향력은 모든 도시, 모든 주 정부, 모든 연방 정부의 사무실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군산복합체가 그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갖게 될 부당한 영향력을 경계해야 합니다.
잘못된 힘이 재앙적인 모습으로 등장할 가능성은 이미 존재하고 있고 앞으로도 지속될 것입니다. 우리는 군산복합체의 권력이 우리의 자유나 민주적 절차를 위협하는 걸 방치해선 안됩니다.
우리는 이를 당연하게 여겨선 안 됩니다. 깨어 있고 지식을 갖춘 시민들이 평화적 방법과 목표로 이 군산복합체를 통제할 때에 비로소 국가 안보와 자유가 함께 번영할 것입니다.
아이젠하워의 고별 연설로 ‘군산복합체’라는 단어가 공개적으로 최초 등장한다.
미국 전쟁 영웅 해병대 소장 메들리 버틀러의 강연집 『전쟁은 사기다』
1930년대 미국에서는 『죽음의 상인(Merchants of Death)』이라는 책이 등장하면서 군수산업과 금융자본이 전쟁을 유도하고 국가 정책에 개입하고 있는 것을 구체적으로 고발한다.
앞의 책에서 강준만은 『죽음의 상인』이라는 책을 통해 이미 1차 세계대전부터 무기 제조업자가 미국의 경제와 정치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기록한다.
1934년 헬무드 앵겔브리히트(Helmuth Engelbrecht, 1895-1939)와 프랭크 하니겐(Frank Hanighen, 1899-1964)이 출간한 『죽음의 상인(Merchants of Death)』이라는 책은 막대한 이윤을 챙기는 무기 제조업자들이 미국의 경제와 정치체제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고, 그들이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미국의 중립을 망치는 데에 기여했다고 주장했다.
이는 당시 널리 퍼져있던 생각이었기에, 미 상원위원회는 제럴드 나이(Gerald P. Nye, 1892-1971) 상원의원의 주도하에 1934년 9월부터 1936년 2월까지 청문회를 열었다. 무기 제조업자와 은행가들이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1856~1924) 대통령으로 하여금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끔 부추겼는지를 가리기 위해서였다.
군수 산업의 국유화를 목표로 삼았던 나이위원회는 혐의를 확인할 증거를 확보하진 못했지만, 연일 신문 헤드라인을 장식하면서 반전(反戰) 무드를 강화하고 이후 중립법(Neutrality Acts) 통과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또한 1935년 미국 상원위원회의 청문회가 열리고 있던 시점에, 당시 해병대 최고계급인 소장 출신의 전쟁 영웅 스메들리 버틀러(Smedley Butler, 1881~1940)는 자신의 반전(反戰) 강연 내용을 묶은 『전쟁은 사기다(War Is a Racket)』라는 책을 출간한다. 그는 군산복합체의 실상을 폭로한 『전쟁은 사기다』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전쟁은 사기다. 언제나 그랬다. 전쟁은 아마 가장 오래된 사기일 것이다. 또 쉽게 가장 큰 이득을 남길 수 있는 사기이며, 확실히 가장 사악한 사기이기도 하다. 규모로 볼 것 같으면 독보적인 국제적 사기다.
이득은 달러로 계산하고 손실은 인명으로 계산하는 유일한 사기이기도 하다. …세계대전에서 소수에 불과한 사람들이 전쟁에서 오는 이득을 챙겼다. 세계대전 중에 미국에서 적어도 2만 천명의 새로운 백만장자와 억만장자가 생겨났다.
1940년대엔 ‘영구적인 전쟁 경제(permanent war economy)’라는 개념이 등장했고, 1950년대엔 사회학자 C. 라이트 밀스(C. Wright Mills, 1916~1962)의 『파워엘리트(The Power Elite)』(1956) 등이 군산복합체의 문제를 지적하였다.
1940년대의 ‘영구적인 전쟁 경제’란 전쟁이 끝난 뒤에도 군사비 지출을 유지해 경제를 돌리는 체제를 말한다.
미국 군벌·무기 제조업자·독점 금융자본의 중국 장제스 국민정부 지원
미국 군벌과 무기 제조업자 그리고 독점 금융자본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먹잇감을 찾기 시작한다. 군산복합체와 미국 내 극우 반공주의 세력은 결정적 먹잇감으로 중국 장제스 국민당 정권을 선택하며 중국의 내정을 간섭하며 국공 내전을 격화시킨다.
이에 중국공산당은 전쟁광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1964)와 장제스의 참모장 앨버트 웨드마이어(Albert Wedemeyer, 1896~1989) 같은 미군 고위 장성을 ‘반동적 군벌’로 규정하며 경계했다. 특히 중국공산당은 이들 군벌이 미국의 아시아 정책에서 반공·군사주의적인 실질적 발언권을 쥐고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주장했다.
중국의 대표적 한반도 문제 전문가이자 전 베이징대 김경일 교수는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 기원』에서 미국의 독점자본과 군벌이 결합하면서 3차 세계대전을 획책했다고 기록했다.
일찍이 국공내전 시기에 중국공산당은 제2차 세계대전을 치루면서 미국에서 명실상부한 군벌이 등장하게 되었고, 이들은 미국의 대외정책에서 실제로 결정적인 발언권을 가지고 있으며, 맥아더나 웨드마이어 등이 이 반동적인 군벌의 예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이들은 미국의 정치는 거대한 독점자본과 군벌이 결합되면서 제국주의 색채가 갈수록 짙어지고 있고, 미국에서 파쇼 세력이 성장하고 있다고 강조하였다. 아울러 자본과 권력을 가지고 있는 제국주의자들인 이 독점자본과 군벌들이 3차 세계대전을 획책하고 있으며, 이들은 이미 일본과 대만을 방대한 군사기지화할 방침을 확정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미국의 대중국 정책은 부패하기 짝이 없는 장개석 독재정권을 부추길 수밖에 없다고 본 것이다.
미국은 중국을 아시아의 반소, 반공 기지로 만들기 위해 일제 패망 전부터 장제스(蔣介石, 1887~1975) 국민당 정부에 막대한 자금과 군사원조를 했다. 그뿐만 아니라 미군은 중국공산당과의 내전에서 선점하기 위해 장제스의 국민당 군을 수송하여 전국 각지에 배치한다. 하지만 장제스의 국민당 군은 극심한 부정부패와 경제 파탄, 민심 이반으로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의 인민해방군에 패배한다.
신슈대학(信州大学) 인문학부 교수인 구보 도루(久保亨)는 『중국근현대사 4: 사회주의를 향한 도전(1945-1971)』(삼천리, 2013)에서 인민해방군이 월등한 군사력을 보유한 국민당 정부군을 상대로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것을 요약했다.
1946년 6월, 국민당과 공산당 양측 군대의 충돌이 전국 각지로 확대되었다. 당초 국민정부군은 430만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데에 반해 공산당군은 127만 명 정도로 알려져, 정부군이 압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확실히 내전 첫해 동안은 국민정부군이 공세를 취하고 공산당은 수세에 몰렸다.
(중략)
하지만 중국을 침공했던 일본군이 점과 선을 확보하는 데 그쳤던 것과 마찬가지로 서전(緖戰)에서 국민정부군의 우위가 그들의 최종적 승리를 의미하지 않았다. 국민정부군은 각지의 중요 도시와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병력을 분산 배치해야만 했다. 반면 공산당군은 국민정부군의 수비가 취약한 지역을 골라 거기에 병력을 집중하며 반격해 나갔다. 1948년 봄부터 여름까지 전세는 공산당군에게 유리하게 바뀌었다. 공산당군의 승리에는 군사적 측면에서 세가지 요소가 작용하고 있었다.우선 첫째로는 국민정부군이 들어오기 전에 중국 동북(東北) 지역에 병력을 집중하여 그 지역을 공산당군의 지배 아래 두기로 종전 직후에 결정했던 전략이 주효했던 것이다. (중략) 둘째로 농촌 지역의 토지혁명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어, 농민의 지지를 얻고 병사를 확보하는 데 성공한 점이다. (중략) 세 번째는 국민정부 군대에 대한 정치 공작이 효과를 거두었던 점이다. 수많은 정부군 부대가 싸우지 않고 공산당 측에 투항하여 공산당 군으로 귀속되기를 원했다.
장제스 패배에 대한 트루먼 행정부의 외교정책 실패 논란 - 누가 중국을 잃었는가?
중국공산당이 대륙을 석권하자 미국은 아시아 동북아 지역에서 커다란 외교적·정치적 타격을 입게 된다. 반면 한국과 대만은 미국의 동아시아전략에서 매우 중요한 지위를 갖게 된다.
냉전 시기 자연히 한국과 대만이 명실공히 미국 동아시아전략의 두 교두보로 떠 오르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맥아더 동방정책의 구도 속에 맥아더와 이승만(1875~1965), 장제스, 요시다 시게루(吉田 茂, 1878~1967)를 축으로 하는 극동 반공전선이 형성된다.
당시 미국 정계와 사회 전반은 장제스 정권의 몰락과 중국의 공산화를 마주하며 “누가 중국을 잃었는가? (Who lost China?)”라는 논쟁을 겪으며 트루먼 행정부의 외교정책 실패 논란이 일어난다.
박인규 『프레시안』 편집인의 2019년 8월 10일자 「매카시의 등장과 미국 정치의 암흑시대」 기사이다.
1950년 1월 '누가 중국을 잃었는가?(Who Lost China?)' 논쟁이 본격화된다. 보수파 언론인 조셉 알솝이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에 발표한 같은 제목의 3부작 칼럼이 기폭제였다. 요지는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패배한 것은 미국 정부가 충분히 돕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히 국무부가 국민당에 대해 적대적이었다는 것이었다. 이는 국민당 정부의 주장을 그대로 반복한 것으로 정확한 진단은 아니었다.
2차 대전 당시 중국에서 활동했던 존 페이튼 데이비스와 존 스튜어트 서비스 등 국무부 관리들은 연안의 중국 공산당과도 접촉했고 이미 1944년부터 공산당의 승리를 예견했다. 또한 민족주의 성향의 중국 공산당은 소련보다는 미국과 협력할 용의가 있다고 보고했다. 즉 마오쩌둥은 아시아의 티토가 될 수도 있으며 미국은 공산 중국과의 제휴도 고려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었다.
이후 트루먼 행정부는 1946년 마셜 장군을 특사로 보내 국민당 주도의 국공 합작을 시도했으나 결국 실패했고 1947년 초가 되면 사실상 중국을 포기한다. 국민당의 집권을 위해서는 수십만의 미 지상군을 파견해야 하는데 이는 미국의 국력으로도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즉 국무부 관리들의 중국 정세 분석은 정확했고, 중국의 공산화는 미국의 힘으로도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 미국의 중국 포기는 불가피했으며 사실 현명한 정책 판단이었다.
하지만 미국의 보수 세력은 트루먼 행정부와는 다르게 생각했다. 이들은 미국 정부가 얄타회의 때부터 소련에 지나치게 양보해 동유럽과 중국을 잃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이러한 양보는 국무부에 침투한 공산주의자들의 소행이라는 것이었다. 이른바 '얄타밀약설'이다. 보수 세력의 이러한 음모론에는 공화당 등 보수 정치인들에 대한 중국 국민당의 엄청난 뇌물 공세도 한 몫을 했다. '차이나 로비(China Lobby)'가 그것이다.
극단적인 반공주의 선풍, 매카시즘과 빨갱이 사냥
미국은 장제스 국민당 정부의 충격적인 패배로 아시아 전략을 전면 수정하며 한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반공 전선을 구축하게 된다. 그리고 1950년 1월 12일에, 미 국무장관 딘 애치슨(Dean Acheson, 1893~1971)은 알류샨 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잇는 소위 ‘애치슨 라인’을 극동 방어선으로 발표한다.
그뿐 아니라 미국은 이 패배를 미 정부 내 공산주의 첩자들의 활동으로 몰아갔다. 소위 극단적인 반공주의 선풍, 즉 매카시즘(McCarthyism)을 일으킨다.
1950년 2월 9일 미국 공화당 위스콘신주 상원의원 조지프 매카시(Joseph McCarthy, 1908~1957)는 웨스트버지니아주 휠링의 공화당 여성클럽에서 종이 몇 장을 흔들면서 소리 높여 외쳤다.
미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하워드 진(Howard Zinn)은 『미국 민중사(A People‘s History of the United States)2』(이후, 2008)에서 발췌된 내용이다.
“여기 제 손에 205명의 명단이 있습니다 - 공산당원이라는 사실이 국무장관에게 알려졌음에도 계속 국무부에서 일하면서 국무부 정책을 입안하는 사람들의 명단 말입니다.”
다음날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연설하면서는 국무부에 있는 비슷한 공산당원 57명(숫자는 계속 바뀌었다)의 명단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 직후 매카시는 국무부 충성심사 서류철에서 약 100장의 서류를 복사해서 상원 회의장에 나타났다. 이 서류들은 3년 전의 것이었고 그 사람들 대부분이 이제는 국무부에서 일하고 있지 않았지만, 매카시는 어쨌든 서류를 낭독하면서 내용을 날조하고 덧붙이고 뒤바꿨다.
예를 들자면, 매카시는 서류의 “자유주의적”이란 문구를 “공산주의에 경도된”이라고, 그리고 “적극적인 동조자”를 “적극적인 공산당원” 등으로 바꿔 읽었다.
하지만 매카시는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으며, 급기야 정부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그런데 미국은 이미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까지 공산주의자들, 이른바 빨갱이들에 대한 본격적인 사냥을 해왔다.
하워드 진의 『하워드 진 살아있는 미국역사: 신대륙 발견부터 부시 정권까지 그 진실한 기록』(추수밭, 2008)에 나오는 내용이다.
좌파는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하나의 세력을 형성했다. 공산당은 10만 명 이상의 당원을 보유한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산당은 노동조합과 예술가들, 그리고 1930년대 자본주의의 실패를 경험했던 사람들 사이에서 영향력이 있었다.
자본주의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서, 미국이 공산주의에 승리를 거둘 수 있게 해줄 지지 세력을 형성하기 위해서 정부와 기업계의 기성 세력들은 좌파를 약화시켜야 했다. 그들은 공산주의에 대한 공격으로 그 일을 가능하게 했다. 공산주의자들, 이른바 빨갱이들에 대한 사냥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져 마치 미국인들의 일상생활처럼 자리 잡았다.
1947년 해리 S. 트루먼은 미국 내에서 ‘국가에 충성하지 않는 사람들’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5년 동안 650만 명의 공무원들이 조사를 받았다. 역사학자 더글러스 밀러(Douglas Miller)와 매리언 노웍(Marion Nowack)이 공동 저술한 ≪50년대 The Fifties≫에서 그 결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약 500명의 사람이 ‘국가에 대한 충성이 의심스럽다’는 애매모호한 혐의로 파직되었지만, 단 한 건의 이적행위도 밝혀지지 않았다. 이 모든 일들이 비밀스러운 증거, 보수를 받는 비밀정보원들로 이루어졌고, 판사나 배심원도 없었다.…보수적이고 공포가 느껴지는 반동이 전국을 휩쓸고 지나갔다. 미국인들은 절대적인 안전과 기존 질서의 유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미국의 매카시즘 광기, 빨갱이 사냥과 인혁당사건
‘매카시 선풍’은 미국 역사상 가장 어이없는 인권유린과 사상·표현의 자유를 억압한 사건이다. 매카시의 광기는 몇 달 뒤 6·25전쟁으로 점점 고조된다. 그리고 미국 전역을 반공 열풍 속으로 몰아넣으면서 더욱더 미국인들을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히게 한다.
매카시즘은 확실한 증거 없이 마녀사냥식 폭로로 수많은 정계·학계·언론계 인사들을 용공분자로 몰아간다.
또한 정치적 반대파를 친공산주의자로 몰아 굴복시키는 정적 제거 수단으로도 사용됐다.
대표적인 사건이 1950년 여름에 있었던 줄리어스 로젠버그와 이설 로젠버그 부부에 대한 기소였다. 일 년 후 1951년 3월 6일 뉴욕시에서 열린 공판은 로젠버그 부부에게 방첩법을 적용, 사형을 선고했다. 수많은 탄원과 전 세계적인 사면 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후 싱싱 교도소에서 처형되었다.
하워드 진의 『미국 민중사 2』에 나오는 항의 캠페인 내용이다.
이 사건을 둘러싸고 전 세계적인 항의 캠페인이 벌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원자탄 개발에 착수하게 만들었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로젠버그 부부에 대한 사면을 호소했고 장 폴 사르트르와 파블로 피카소, 바톨로미오 반제티의 누이 역시 이에 동참했다.
1953년 봄에 대통령직을 떠나기 직전이던 트루먼 대통령에게 호소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트루먼은 거절했다. 뒤이어 신임 대통령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에게도 호소했지만 역시 거절당했다.
마지막 순간에 윌리엄 O. 더글러스 판사가 집행유예를 승인했다. 대법원장 빈슨은 미국 각지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던 대법원 판사들을 데려오라고 특별제트기를 보냈다. 대법원 판사들은 즉시 더글러스의 집행유예를 취소시켰고 로젠버그 부부는 1953년 6월 19일에 처형됐다.
전임, 신임 대통령을 비롯한 판사들의 광기는 정부가 반역자로 빨갱이로 간주한 사람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보여준, 미국 민중들에 대한 경고였다.
이런 미국의 매카시 광기가 한국에도 들어왔다.
6·25전쟁 전 이승만 정권은 보도연맹원 및 형무소 재소자 등이 인민군에 동조할지 모른다는 광기로 이들을 집단 살해한다. 전쟁 발발 후는 적법한 절차나 재판 없이 비공개로 또 대규모 살상을 했다. 이승만 정권 12년이 자행한 국가폭력은 인류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집단학살(제노사이드)이였다. 그리고 그 학살을 묵인 방조한 배후는 미 제국이었다.
다행히 4·19혁명으로 이승만은 쫓겨나지만, 박정희가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탈취하고 1961년 중앙정보부를 설치해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인사와 청년학생들을 체포 구속시킨다.
중앙정보부(중정)는 박정희 유신독재 정권의 주구(走狗)로 1·2차인혁당 사건, 민청학련 사건 등을 조작했다. 중정은 유신 반대 시위를 주도한 학생들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학생 배후 세력을 크게 두 가지 축인 명망가와 4월혁명 공간 혁신계 자주민주통일인사들로 나누었다.
두 가지 축 중 하나는 윤보선 전 대통령, 지학순 주교, 박형규 목사, 김지하 시인 등 정치계·종교계·문화계의 명망가들이 학생들에게 자금을 대거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고 조작함으로써, 또 다른 사회 유명 인사들의 연대 확산을 막고 도덕성에 타격을 주려 했다.
나머지 하나는 4월혁명 공간 청년 전위그룹인 민민청과 통민청 그리고 전국민족통일학생연맹학생 핵심인 신동숙 여사의 부군 도예종을 비롯한 서도원, 송상진, 우홍선, 하재완, 김용원, 이수병 등을 과거 전력을 이용해 빨갱이로 몰아간다. 이들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조선)의 지령을 받아 학생들을 조종하고 공산 정부 수립을 기도했다고 고문 날조한다.
민청학련과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은 함께 구속되었지만, 재판은 따로 진행됐다.
그 결과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는 1975년 2월 15일 대통령 특별조치를 통해 대부분을 석방 조처되고 주모자로 몰려 사형을 선고받았던 이들도 얼마 안 가 전부 석방된다.
그러나 인혁당 사건 관련자 가운데 4·9통일열사 도예종(삼화토건 회장) 서도원(전 『대구매일신문』 기자) 하재완(양조장 경영) 이수병(학원 강사) 김용원(경기여고 교사) 우홍선(중소기업 상무) 송상진(양봉업) 여정남(전 경북대 학생회장) 등 8명은 군법회의에 넘겨져 사형을 선고받고 10개월 만에 대법원 확정판결이 난다. 그런데 박정희 유신 독재정권은 고문 조작이 두려운지 판결이 난 다음 날 서둘러 8명을 국가가 살인한다.
이것은 20여 년 전 냉전 시기 매카시즘 간첩 광풍으로 희생된 미국의 로젠버그 부부 사건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매카시 빨갱이 낙인이 나은 희생이다.
그러나 4·9통일열사들은 고문 조작으로 사건이 부풀려져 희생되었지만, 신동숙 여사의 부군 도예종을 비롯한 통일열사들은 4월혁명 당시 이론가이자 실천활동가였다. 그리고 희생될 때까지 몸을 던져 쉬지 않고 조국과 민족 그리고 자주·민주·통일을 위해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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