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 사람을 찾아서
한찬욱 (사월혁명회 사무처장)
등록일 : 2025.05.02
2018년 4월 11일, 망우리 묘소에서 마석열사묘역으로의 최백근선생 묘소 이장식.jpg
2018년 4월 11일, 망우리 묘소에서 마석열사묘역으로의 최백근선생 묘소 이장식.

 

“하루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좋은 사람이다. 

 

1년을 위해 투쟁하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더 좋은 사람이다.

 

여러 해 동안 투쟁하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더욱이 좋은 사람이다.

 

하지만, 평생을 두고 투쟁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절대 버릴 수 없는 사람이다.”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1956)”의 시다. 

 

황금수는 절대 버릴 수 없는 사람, 영원한 동지로 최백근, 서도원, 도예종, 이수병, 이재문 선생을 꼽는다. 

 

그분들은 출신, 학력, 나이를 불문하고 황금수를 동지로 존경하고 존대하며 인격적으로 깍듯이 예우했다고 황금수는 말했다. 그러나 최백근, 서도원, 도예종, 이수병은 박정희 정권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이재문은 전두환 정권에 의해 옥사한다. 

 

특히 황금수는 그분들이 현재 생존해 있었다면, 나라가 미국에서 벗어나 자주적으로 ‘나라다운 나라’ 그리고 남북통일에 큰 초석(礎石)이 되었을 것이라고 너무 애통해했다.

 

황금수가 존경하는 선생이자 동지인 최백근은 1961년 5·16 군사쿠데타 후 9월 14일 혁명재판소 사형 선고를 받고, 12월 21일 국가가 살인한다.
 
ㅡ 최백근(1914년~1961년) 사회당 조직부장 

 (참조: 수암 최백근 선생 60주기 추모식 열려, 민플러스 2021/12/21)

 

1934년 1월2일 조선중앙일보에 실린 최백근의 시 ‘바다의 아버지’.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반출되는 곡물을 실어 나르던 배고픈 민중들의 시대상을 담았다.(사진=매일노동뉴스).jpg
1934년 1월2일 조선중앙일보에 실린 최백근의 시 ‘바다의 아버지’.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반출되는 곡물을 실어 나르던 배고픈 민중들의 시대상을 담았다.(사진=매일노동뉴스)

 

5·16군사쿠데타 후 박정희는 미국의 주구(走狗)임을 증명하기 위해 ‘조국 통일’보다 ‘반공 국시’를 천명한다. 그리고 박정희는 4월혁명 공간의 혁신계 인사를 용공 세력으로 몰아 5월 16일부터 21일까지 6일 동안에 무려 2,014명을 체포한다. 두 달 동안 예비검속된 용공 혐의자는 모두 3,098명이나 된다. 

 

특히 최백근 사회당 조직부장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조선)과 연계되었다고,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은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와 관련되었다며 국가가 조작하여 살인한다. 

 

최백근 선생은 국가 살인을 당한 후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혔으나, 이후 뜻있는 동지들이 매년 선생의 삶과 뜻을 기리는 참배와 추모식을 개최하다가, 공개적인 추도식은 2007년 46주기 때부터 시작했다.

 

동지들이 선생이 즐겨 말씀하신 내용을 축약해서 세운 묘비명이다.

 

“사람이 사람을 억압해서는 안 되고 
사람이 사람을 수탈해서도 안 되며 
나라가 외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야 하고 
분단된 나라가 자주 민주 평화적 방법으로 통일되어야 한다.”

 

이후 2018년 4월 11일, 동지들의 노력으로 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으로 이장하면서 항일운동가이자 민족통일운동가로서 안식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특히 황금수의 두 번째 아내 안경자 여사의 경제적 지원이 결정적이었다. 
(참조: "통이 큰 여걸 안경자 여사를 추모하며", 울산함성 2023/9/22,  http://www.ulham.net/opinion/9392)

 

황금수는 ‘남민전 사건’으로 징역·자격정지 15년을 받고 1988년 12월 출소하나, 아내 지춘란은 의문사 당하였다. 특히 복역 당시 황금수는 3차 신경통으로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런 딱한 사정을 <가톨릭 평화신문> 기사로 안 안경자는 황금수 선생이 징역을 살고 나오면, 자기가 아내 노릇을 해야 하겠다고 생각한다. 안여사는 출소한 황금수를 동지로 부군으로 함께 살면서, 고귀한 노동으로 번 돈을 통일운동과 병마로 고통받는 동지들을 위해 아낌없이 통 크게 후원하였다. 

 

1990년 11월4일. 황금수 선생과 안경자 여사 산상 결혼, 사회를 보고 있는 권오헌 선생.jpg
1990년 11월4일.  황금수 선생과 안경자 여사 산상 결혼, 사회를 보고 있는 권오헌 선생

 

그동안 최백근 선생의 추모식은 그간 몇몇 지인과 동지만이 해오던 것을 사월혁명회, 추모연대, 4·9통일평화재단이 격식을 차려 민족·통일운동 관련 인사들이 참가한 가운데 계속 추모하고 있다. 

 

2021년 12월 18일 60주기 참배식에서 생존해 있는 사회당 당무부장 김영옥과 사회당 노동부장 황금수의 추모사 일부이다.

 

“4월혁명 공간 당시 남북대학생회담을 제안하고 외쳤던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이라는 구호에 민족자주성과 반외세가 빠졌다면서 선생이 그 구호 앞에다 ‘이 땅이 뉘 땅인데 오도가도 못하느냐’를 넣었다.(김영옥)

 

그 시절 최백근 선생은 참으로 걸출한 지도자셨습니다. 박정희는 그야말로 미국의 주구(走狗)로, 1979년 10월 26일 부하의 손에 죽을 때까지 국가보안법으로 저지른 학살 만행을 결코 민중은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미국이 발악하는 소리, 무너지는 소리가 신음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시기에 한반도에 평화와 통일이 곧 도래할 것이니 줄기차게 싸웁시다.(황금수)”

 

ㅡ 소위 1, 2차 ‘인혁당재건위사건’과 국가살인 그리고 2007년 1월 23일 무죄 판결

 

1964년 8월 중앙정보부가 ‘6·3 한일회담 반대 시위’의 배후세력으로 구속시킨 ‘1차 인혁당 사건’ 피고인들이 재판을 받고 있다.jpg
1964년 8월 중앙정보부가 ‘6·3 한일회담 반대 시위’의 배후세력으로 구속시킨 ‘1차 인혁당 사건’ 피고인들이 재판을 받고 있다

 

황금수가 절대 버릴 수 없는 선배 동지인 서도원, 도예종 그리고 후배 동지인 이수병은 이른바 ‘2차 인혁당사건’으로 국가로부터 죽임을 당한다. 

 

이른바 1, 2차 ‘인혁당사건’에 대해, 필자가 2006년 7월에 기고한 양심수후원회의 「후원회소식(통권177호) ‘인혁당 재심 4차공판을 보면서….’」의 일부이다.

 

“대부분의 군사독재시절 공안사건이란 것이 반독재민주화운동이 광범하게 확산되는 시기를 전후하여 그 열기를 잠재우기 위해 사건을 터뜨렸다. 인혁당 사건은 그 대표적인 사건이라 말 할 수 있다. 

 

1차 사건은 한·일협정반대투쟁이 가열되었던 1964년 6·3항쟁을 진압하기 위해 2차는 유신반대투쟁이 한참 진행되던 1974년에 일어났다.

 

1차 인혁당 사건은 1964년 대학생들의 한·일회담 반대투쟁을 주도했던 학생운동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적발하였다. 도예종 외 41명을 체포하여 북한의 지령을 받아 학생들의 시위를 배후조정하고 사회전복을 노렸다고 중앙정보부는 발표하였다.

 

그러나 서울지검의 공안부 검사들까지도 고문에 의해 조작된 허구라고 주장하며 기소를 포기, 담당검사를 바꿔가며 법원에 기소했음에도 불구하고 증거 불충분으로 사건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2차 인혁당 사건은‘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라고도 불리며 1974년에 일어났다. 유신독재 반대투쟁을 주도하였던 민청학련을 배후 조종하였다는 혐의로 적발하였다. 1차 인혁당 사건 관련자를 포함하여 26명을 연행 수배하고, 이들이 북한의 지령을 받아 남한사회를 전복하려고 인혁당 재건위원회를 구성하였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공판조서까지 날조하여 대법원이 사형을 선고한 다음날 8명의 피의자를 즉각 사형시켰다. 

 

아울러 1차 인혁에 대한 보복의 성격이 강하며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은 1차 인혁시 검찰총장으로 있다가 후배 검사들에게 수모를 겪었던 인물이며, 이용택 중정 6국장은 당시에 5국의 대공과장으로 있었다. 수사관 대부분이 1차에 관여했던 인물이다.”

 

1, 2차에 걸친 소위 ‘인혁당사건’은 박정희 정권 유지를 위해 만들어진 조작 간첩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른바 ‘2차 인혁당사건’은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이 관련자들의 상고를 기각하고, 여덟 분의 사형을 확정한 뒤 다음날 9일 여덟 분의 열사들을 국가가 살인한다. 재심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은 채 무자비하게 국가가 사형을 집행한 것이다.

 

2018년 4월 28일 경남 창녕 ',서도원 선생 묘소참배',.jpg
2018년 4월 28일 경남 창녕  <서도원 선생 묘소참배>

 

유가족의 눈물 어린 피나는 진실규명운동에 호응하여 1998년 11월 9일 발족한 “'인혁당사건진상규명및명예회복을위한대책위원회(공동대표 : 이돈명, 문정현)”는 2002년 12월 10일 서울 지방법원에 재심 신청을 한다.

 

그리고, 2005년 12월 27일 법원의 재심이 결정되고, 마침내 2007년 1월 23일, 재판부는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 음모, 반공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하지만 황금수를 비롯한 4월혁명공간 함께 운동했던 동지들은 그분들은 정말 뛰어난 실천활동가이자 이론가 그리고 통일운동가였다고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말한다.

 

ㅡ 그들은 민주화운동뿐만 아니라 쉬지 않고 운동한 이론가이자 통일운동가였다. 

 

인혁당재건위 사건(2차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분들.jpg
인혁당재건위 사건(2차 인혁당 사건)  재판 장면

 

2006년 1월 23일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 위원장 하경철)는 소위 ‘인혁당재건위사건’ 관련자 16명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한다. 

 

인정결정 이유이다.

 

“ ‘인혁당재건위 사건’은 자유민주적 헌정질서를 문란하게 하고 정권의 유지를 위하여 유례없는 탄압을 자행한 유신체제에 항거한 사건으로, 관련인들은 공산혁명을 목적으로 국가변란을 기도하기 위하여 ‘인혁당재건위’를 결성하였다고 기소되어 유죄판결을 받았으나, 당시의 폭압적 상황 및 고문사실에 대한 수사관의 진술, 참고인의 진술,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결과, 국정원진실위의 조사결과 등을 종합해 볼 때 이는 수사당국의 가혹한 고문에 의하여 조작된 것으로 판단되며,

 

다수 관련인 및 참고인 진술의 일관성 및 공통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관련인들이 ‘인혁당재건위’ 결성 혐의로 탄압을 받은 것은 관련인들 전원이 과거 혁신계 활동을 한 이력을 가지고 있고, 이후 1969년 삼선개헌반대 운동, 1971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민주수호경북협의회) 참가 등 유신헌법폐기와 민주화를 위하여 활동하고 이를 위하여 회합 논의하는 등 反유신활동을 하였고, 당시 폭압적인 탄압상황 하에서 ‘민청학련’ 사건에 이르기까지 학생운동을 정신적 물질적으로 지원하고 민주화운동의 확산에 노력하는 등 지속적으로 반독재민주화운동을 주도적으로 수행하여, 이것이 독재정권을 위협하는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인 바, 이러한 권위주의정권에 대한 관련인들의 항거행위는 독재정권에 의해 침해된 민주헌정질서의 회복을 위하여 수행된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함.”

 

그러나 국가가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은 하였지만, 이분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분들은 민주화운동뿐만 아니라 4월혁명공간부터 쉬지 않고 운동한 이론가이자 통일운동가였다. 

 

4월혁명은 학생혁명이었지만, 혁명을 구체적으로 진전시키고자 했던 곳은 혁신정당과 청년단체였다. 특히 이분들이 참여한 청년단체인 민주민족청년동맹(민민청)과 통일민주청년동맹(통민청)은 통일운동에 적극적이었다.

 

2018년 4월 29일 경남 의령 ',이수병 선생 묘소참배',.jpg
2018년 4월 29일 경남 의령 <이수병 선생 묘소참배>

 

1961년 4월 19일 서도원과 도예종 선생이 활동한 민민청이 4·19 일주년에 발표한 “4·19의 젊은 피는 횡령당하였다.”라는 성명은 이분들의 통일 열정을 대변한다. 

 

“전체민족이 열망하는 민족통일은 반민족적 특권층에 의하여 방해되고 있는 등 「3·4월」 그날의 항쟁에서 뿌려진 「젊은 피」가 헛되이 특권보수주의자 또는 기회주의 부동층 정치배에 의하여 완전히 횡령당하였다. 

 

‘배 고파 못 살겠다’ ‘통일만이 살 길이다’고 외치는 수백만 절량민과 수백만 실업자 및 양식민족인들의 삶의 부르짖음은 차마 볼 수 없는 참상임에도 불구하고 집권자는 과거 이승민 정권의 행정적 상속자로서의 본질을 여실히 폭로하는 헛된 ‘반공’과 기만적인 ‘건설’을 앞세우고 ‘보안법 가악’과 ‘데모규제법’을 강압으로서 또는 매수로서 제정하려는 이때에 우리는 선열들의 광복투쟁과 3·4월항쟁의 그 투혼을 계승하여 동포대중들의 민족적 자각을 촉구하면서 평화와 자유와 부복이 깃드는 통일조국을 건설코자 전체동포에게 호소하는 바이다.” 

 

ㅡ 민민청 경북맹부 서도원 위원장과 도예종 간사장 그리고 경희대 민통련 위원장 이수병

(참조: 조국은 기억하리라! 4·9통일열사들의 이름과 걸어온 길을!, 통일시대, 2025/4/9)

 

서도원과 도예종 선생은 민민청 경북맹부 지도부였다.

 

서도원 선생.png
서도원 선생(1923.3~1975.4)

 

도예종 선생.png
도예종 선생(1924.12~1975.4)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의 서도원과 도예종 선생의 “민주화운동관련자 인정”에 나오는 이력이다.

 

“서도원(1923. 3. 27.생)은 대구매일신문사 기자로 종사하였고, 4.19후 대구에서 혁신계 인물 도예종, 권달섭, 강왕수 등과 함께 민족민주청년동맹(민민청) 준비위원회를 구성, 위원장으로 활동하다 1961. 12. 군재판소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았으나 1963. 12. 대통령사면으로 석방되었고, 1969. 12. 반공법위반으로 구속되었으나 무죄로 석방된 사람으로서, 1969년 대구 경북지역 등의 혁신계인물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하면서 ‘3선개헌반대투쟁위원회 경상북도지부’ 결성에 참여하고, 1971.4.22. 결성된 ‘민주수호경북협의회’에 참여하여 주도적 역할을 하는 등 지속적으로 민주화운동에 참여해왔으며,

 

- 1971. 4. 경북대학 학생써클인 ‘정진회’ 주최 학술토론대회에 사용할 반독재구국선언문을 작성하여 전달하고, 1973. 11. 경북대 반유신데모시 사용할 반독재구국선언문을 초안하여 전달하는 등 학생운동을 지속적으로 지원하였고, 1974. 초 여정남이 이철, 유인태 등 서울대학생들을 접촉하여 전국적인 학생조직을 결성하도록 지원하는 등 활동한 사실로 인하여 1975. 4. 8. 대법원에서 대통령긴급조치위반, 국가보안법위반 등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같은 달 9. 사형 집행으로 사망함.”

 

“도예종(1924. 12. 25.생)은 대구대학을 졸업한 후 1958. 상주고교 교원으로 근무하였고, 1960. 4.19 당시 교원노조운동에 참여하면서 같은 해 5월경 영주교육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나 민주당정권에서 발령을 내지않아 동직을 수행하지 못하였고, 1960. 10.경 당시의 혁신계활동에 참여하여 민주민족청년동맹(민민청)에 가입, 민민청 경북맹부 간사장, 1961. 4.경 민족자주통일협의회(민자통) 중앙상무집행위원회 조직부책이 되어 한미경제협정 반대, 일본경제인 입국반대, 이대악법반대 등에 주도적으로 활동하다가 5.16쿠데타 이후 당국에서 수배되었고, 1964. 소위 제1차 인혁당사건 때 인혁당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는 이유로 반공법위반으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1967. 8. 25. 안양교도소에서 만기출소하였고,

 

- 1969년 대구 경북지역 등의 혁신계인물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하면서 ‘3선개헌반대투쟁위원회 경상북도지부’ 결성에 참여, 주도적 역할을 하였고, 3선개헌반대시위에 참여하였으며, 1971.4.22. 결성된 ‘민주수호경북협의회’에 참여하여 주도적 역할을 하는 등 지속적으로 민주화운동에 참여해왔으며,

 

- 1973.-1974. ‘민청학련 사건’에 이른 학생운동과 관련하여, 혁신계 인물들과의 지속적 관계 속에서 서도원, 이수병 등과 빈번하게 회합, 여정남을 서울로 파견하여 반독재운동을 위한 전국적 학생운동을 지원하는 등 유신비판, 반독재민주화운동의 논의와 추진에 깊이 관여한 사실로 인하여 1975. 4. 8. 대법원에서 대통령긴급조치위반, 국가보안법위반(제1조 제2호) 등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같은 달 9. 사형 집행으로 사망함.”

 

그리고 마석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쓰여 있는 이수병 선생의 ‘삶과 죽음’이다.

 

이수병 선생.png
이수병 선생(1937.1~1975.4)

 

“동지의 생애는 철저히 조국과 민족에 대한 끝없는 사랑으로 일관된 것이었다. 
1960년 11월 12일 경희대 민족통일연구회를 발족시켜 수차에 걸쳐 세미나와 대강연회를 개최, 통일문제에 관한 인식을 넓혀 가는 한편 민통련(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의 전국조직 결성에 적극 참여하였다. 
1968년 4월 17일 7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석방된 동지는 엄중한 감시 속에서도 변혁운동에 뜻을 둔 동지들을 규합하기 위한 은밀한 접촉을 재개하게 된다. 
독서회, 강좌를 통하여 혁신계를 비롯 학생, 노동자, 제 민주세력의 결속을 강화하기 위한 조직활동을 전개해 나가던 동지는 민청학련 상층부로 지목된 ‘인혁당 재건위’사건으로 사형 당하셨다. 
1975년 4월 9일 이날은 국제 법학자협회에 의해 ‘사법 사상 암흑의 날’로 규정된 날이다. 이른바 인민혁명당(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로 조작된 8명이 유신정권의 철저한 조작으로 사법 살해된 날이다.”

 

ㅡ  남민전 서기 이재문
(참조: 민족해방과 자주평화통일에 몸 바친 혁명가 이재문 선생, 자주시보, 2023/10/8)

 

이재문 선생.jpg
이재문 선생(1934.7~1981.11)

 

황금수는 지춘란과 결혼 생활하면서 남민전에 가담한다.

 

남민전의 서기인 이재문 선생은 황금수가 존경한 혁명 조직 운동의 지도자로 손색이 없는 분이었다고 한다. 또한 지도자로서 모든 운동에 앞장서서 실천하고 조직하며 지도하여 후배들이 모두 존경하였다. 

 

또한 세계 혁명사와 한국 혁명사를 꿰뚫고 있는 탁월한 이론가였다. 그리고 자주, 민주, 통일운동의 비사를 많이 알고 있어 전술에 많이 응용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반동의 음모에 암살되는 미국 케네디 대통령의 예이지만, 역으로 제국의 앞잡이 박정희를 제거하기 위해 암살 사례를 연구하며 실행 계획을 세우려고 한 것으로 전해온다. 당시 미국 대통령 경호처가 모든 가능한 위협에 대비해 철통같은 신변 보호와 보안 예방책을 취하고 있었지만, 결국 케네디가 암살당한 것처럼 보안 허점은 분명히 있다고 사례를 연구했다는 전설 같은 소문도 있다. 

 

이재문 선생은 ‘민족해방과 자주평화통일에 몸 바친 혁명가 이재문 열사’로 쓰인 묘비명과 같이 불꽃처럼 싸우다, 치안본부의 악랄한 고문과 안기부 공작 때문에 적십자회 병원에 나왔다가 다시 감옥에 들어가 옥사(사형집행 전인 1981년 11월 22일)한다. 

 

그러나 2022년 8월 25일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는 남민전 사건에 연루돼 서울구치소 수감 중 의문사 당한 ‘이재문 인권침해 사건’의 진실규명을 결정했다. 

 

진화위는 “법무부가 수형자에 대한 관리책임을 방기하고 안기부는 사형이 확정된 정치범이라는 이유로 외부진료를 불허해 이재문이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사망에 이르게 된 것으로 판단했다”라고 밝혔다. 

 

그리고 진화위는 ‘△수사기관(치안본부)이 이재문에게 고문과 가혹행위를 가한 점 △수형자에 대한 관리책임을 지닌 법무부가 이재문에게 적절한 치료를 받도록 조치하지 않은 점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가 이재문이 정치범이라는 이유로 외부진료를 불허한 점 △이로 인해 이재문이 국가가 관리하는 수형 시설 내에서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한 가운데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된 점’에 대해 국가가 이재문 씨와 그 가족들에게 사과하라고 권고했다.

 

마석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쓰여 있는 이재문 선생의 ‘삶과 죽음’이다.

 

“동지는 청년시절, 대구에서 신문기자로 활동하면서 4월혁명 공간 속에서 사회변혁을 위한 혁신운동, 통일운동을 하였다. 
1961년 2월 ‘민족일보’가 창간되자 정치부 기자로 활동하였으나, 5·16쿠데타로 ‘민족일보’는 폐간되었다. 
이후 ‘인민혁명당’ 사건으로 투옥되는 등 고초를 겪었으며, 박정희 유신쿠데타가 발생하기 전까지 ‘민주수호국민협의회’ 대구경북지부의 운영위원과 대변인을 역임하며 민족민주운동에 헌신하였다. 


유신 이후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으로 수배를 받아 피신생활을 하면서, 1976년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를 결성하여, 서기로서 4년 가까운 기간을 민족의 자주⋅민주⋅통일을 위해 투쟁하였다. 
1979년 유신독재에 반대하는 항쟁이 부산과 마산 등에서 솟구쳤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세력을 무차별적으로 탄압하는 와중에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서울구치소에서 수감생활 중 5·18 광주항쟁 소식을 접하고, 학살에 대한 항의단식을 하였으며, 고문과 단식 후유증으로 발병하였으나, 전두환 정권이 치료를 불허하여, 1981년 옥중에서 운명하였다.”

 

2023년 10월 7일, 마석 모란공원 ‘통일열사 이재문 42주기 및 남민전 동지 합동 추모제',.jpg
2023년 10월 7일, 마석 모란공원 ‘통일열사 이재문 42주기 및 남민전 동지 합동 추모제'

 

ㅡ  절대 버릴 수 없는 사람, 동지

 

남민전에 대한 『공안사건기록』(세계총서22 편집부 엮음, 세계, 1986)에 나오는 “동지사랑의 생활”이다. 

 

“1. 동지애는 최고의 인간애이다. 인간성을 드높이고 대중의 모범이 되자.

 

2. 동지는 나의 분신이다. 동지와는 생사고락을 같이하자.

 

3. 자기보다 동지를 사랑해주고 동지의 사소한 잘못은 대중 속에서 감싸주자.

 

4. 우리는 비판과 비난을 가려서 쓰자. 비난은 적에게 사용하는 공격의 한 방법이다. 동지에 대한 비판은 우호적이고 책임있는 자세로 해결의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비판의 자리에서 변명과 논쟁은 금물이다.

 

5. 동지간에는 노소, 학력, 성별을 막론하고 존경하고 존대하여야 한다.

 

6. 동지의 죽음은 나의 죽음과 같다.”

 

물론 이 “동지사랑의 생활” 내용은 비전향장기수 고성화 선생이 『나의 비망록 (애국의 길)』(한울사, 2001)에서 해방공간 조직 강의 내용인 “나와 동지애”로 똑같은 내용이 나온다.

 

동지란 절대 버릴 수 없는 사람이다.

 

황금수는 이론과 실천을 통일하여 생활한 동지로 최백근, 서도원, 도예종, 이수병, 이재문 선생을 손꼽았다.

 

남민전 동지인 고 김남주 시인의 이재문 선생 추모시 「전사 1」 일부분이다. 

 

김남주 시인.png
김남주 시인

 

무엇보다도 그는
시간 엄수가 규율 엄수의 초보임을 알고
일 분 일 초를 어기지 않았다.

 

그리고 동지 위하기를 제 몸처럼 하면서도
비판과 자기비판에 철두철미했으며
결코 비판의 무기를 동지 공격의 수단으로 삼지 않았다.

 

조직 생활에서 그는 사생활을 희생시켰다.

 

조직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모든 일을 기꺼이 해냈다.

 

큰일이건 작은 일이건 좋은 일이건 궂은일이건 가리지 않고
그리고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먼저 질서와 체계를 세워
침착 기민하게 처리해 나갔으며
꿈속에서도 모두의 미래를 위해
투사적 검토로 전략과 전술을 걱정했다.

 

※ 격주로 연재합니다.

 

[울산함성 무료구독 신청]  https://t.me/+ji13hLs-vL83ZTBl

삭제하시겠습니까?
취소
사진 및 파일 첨부

여기에 파일을 끌어 놓거나 왼쪽의 버튼을 클릭하세요.

파일 용량 제한 : 0MB (허용 확장자 : *.*)

0개 첨부 됨 ( / )
취소

연재

지춘란(40)ㅡ 조선 입북과 프롤레타리아국제주의

: 사람을 찾아서

2025.05.29

연재

신동숙 (6회)ㅡ스페인인민전선과 프랑코 군사쿠데타 그리고 과거청산

: 사람을 찾아서(4·9통일열사 도예종의 아내 신동숙)

2025.05.14

연재

지춘란 (39)ㅡ 절대 버릴 수 없는 사람, 동지

: 사람을 찾아서

2025.05.02

연재

지춘란 (38)ㅡ 이 땅이 뉘 땅인데 오도 가도 못 하느냐!  

: 사람을 찾아서

2025.04.02

연재

신동숙 (4회)ㅡ 독일 파시즘과 일제 군국주의의 대두

: 사람을 찾아서(4·9통일열사 도예종의 아내 신동숙)

2025.03.27

연재

지춘란 (37)ㅡ 4월혁명 공간 최대 반정부투쟁‘2대악법 반대’

: 사람을 찾아서

2025.03.14

연재

신동숙(3)ㅡ 세계 경제 대공황과 일제 식민교육 속에 성장한다

: 사람을 찾아서 (4·9통일열사 도예종의 아내 신동숙)

2025.03.08

연재

초보자를 위한 시창작 강의(21)ㅡ 인접성과 유사성

2025.03.02

2

연재

지춘란 (36)ㅡ 합법 공간을 열어 더 적극적으로 운동을  

: 사람을 찾아서

2025.02.25

연재

신동숙(2)ㅡ 일제강점하 1930년에 태어나다

ㅡ사람을 찾아서(4·9통일열사 도예종의 아내 신동숙)

2025.0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