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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단계에서 자본주의 전쟁을 『철학대사전』(한국철학사상연구회 편, 동녘, 1989)에서 정의한 일부이다.
“제국주의 단계의 자본주의에서 전쟁은, 독점 부르주아지가 이미 분할된 세계를 때때로 자본주의의 불균등한 정치 경제적 발전으로 인해 끊임없이 바뀌는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의 세력 관계에 따라 새로이 분할하고, 이미 제국주의의 예속으로부터 해방되어 자립적인 국가 발전의 길(이것이 사회주의든 비사회주의이든간에)을 걷는 제 민족을 다시금 예속시키는 수단이 된다.
세계사에서 가장 파괴적인 전쟁은 금세기 독일 제국주의가 세계를 새로이 분할하려는 목적으로 일으킨 양차 세계 대전이며, 이 전쟁으로 6천 5백만의 인명이 희생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서막은 1930년대 세계 경제 대공황의 위기가 자본주의를 강타하면서 시작된다. 결코, 세계대전이 벌어진 것은 우연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불균등한 정치 경제적 모순 때문이었다. 이에 더해 제국전쟁은 겉치레가 중요하지 않고, 강자가 약자를 누르는 형태이기 때문에 무자비한 학살이 자행되고 문명이 파괴됐다.
특히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 히틀러, 이탈리아 무솔리니, 일본 히로히토 그리고 스페인의 프랑코는 파시즘을 신봉하고 침략전쟁을 일으킨 ‘전쟁 범죄자’이자 ‘학살자’였다.
하지만 근·현대 제국 이전의 고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Alexandros the Great, BC 356~BC 323)과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 BC 100~BC 44) 그리고 중세 몽골의 칭기즈 칸(테무친 鐵木眞, 1155~1227) 등 대부분 제국 지도자는 우선 자국의 모순을 해결하고, 대중의 지지와 준비된 압도적인 무력으로 전쟁을 벌여 타민족을 지배하고 영토를 넓혔다. 물론 그렇다고 정정당당한 전쟁은 아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들은 침략전쟁임에도 불구하고, 인류사에서 문명 발전과 정치·경제 변화 그리고 문화교류에 공헌했기에 후세 사람들은 “영웅”이라 불렀다.
ㅡ 지도자란 용감성과 지도력뿐만 아니라 사회 모순을 해결하고 시대 요구를 선도해야 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전쟁에서 늘 선두에 서서 싸웠고,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 물론 부하들도 몸을 던져 함께 싸워,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군사 지휘관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의 승리 요인을 그의 용감성과 지도력으로만 찾아서는 부족하다.
당시 그리스와 페르시아는 쇠퇴기에 있었지만, 그리스 등 지중해 문명과 오리엔트 사이의 활발한 교역과 문화교류는 오히려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그리스 위쪽에 있는 발칸반도 남부의 작은 세력에 불과했던 마케도니아가 급성장하는 데에는, 이런 경제와 문화의 정체(停滯)를 벗어나려는 시대적 요구에 응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페르시아를 평정한 뒤, 이집트를 정벌하고 인도의 펀자브 지역까지 진격했다. 특히 그는 동쪽으로 행군하면서 수많은 신도시를 건설했고, 이들을 모두 알렉산드리아라고 명명하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폐허가 되어 위치를 알 수 없다고 한다. 이런 그의 원정으로 알렉산드로스 제국하에서 그리스 고유문화를 토대로 페르시아, 이집트, 인도 문화를 융합한 헬레니즘(Hellenism) 문화가 탄생한 것이다.
카이사르는 로마 역사상 가장 뛰어난 군사 책략가이자 정치가였다. 또한 로마제국의 최대 영토 대부분은 카이사르의 시대에 로마령이 된다.
로마는 원래 이탈리아반도의 소규모 세력이었으나, 백여 년에 걸친 세 차례 포에니 전쟁의 결과 지중해의 최강자가 된다. 그리고 지중해 연안에 있던 카르타고의 영토와 해외 영토도 얻게 된다. 로마는 평등을 중시하는 공화제(共和制)를 시행하였지만, 해외 영토 획득으로 귀족들은 어마어마한 토지와 부를 손에 넣게 되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공화제로 인한 로마의 금권 정치와 정치 부패를 해결하기 위해, 제정(帝政)을 시도하다 그는 원로원에 암살된다.
카이사르는 현재 프랑스 지역인 갈리아(지중해 연안을 제외한 이베리아반도와 라인강 사이)와 이집트 등을 정복했다. 그의 갈리아 정복은 로마의 영향력이 브리타니아(Britannia, 영국)와 게르마니아(Germania, 독일)에까지 영향력이 미치게 된다. 특히 카이사르의 정복 이후 갈리아는 로마화가 이루어진다. 또한, 카이사르는 오늘날 라틴계와 게르만계의 문화와 언어를 라인강 주변을 중심으로 나뉘는 경계선을 만들었다고 역사가는 말한다.
칭기즈 칸은 유라시아 대륙의 동서를 기병으로 질주하며 세계 역사상 최대의 영역을 가진 몽골 대제국을 세운 뛰어난 군인으로 백전백승의 전투를 이끈 불패의 용사였다.
몽골족은 몽골고원의 작은 세력이었지만, 시베리아를 제외한 유라시아 대륙의 절반 이상을 지배했다. 칭기즈 칸의 몽골군이 강한 이유는 가벼운 복장과 말 안장 밑에 달린 발 받침대인 가죽 “등자”를 갖춘 기병 군대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몽골 병사는 자유자재로 말을 타면서 활을 쏘았다. 당시 다른 나라의 군대는 중장비를 갖춘 소수의 기병과 보병 대군으로 이루어져, 몽골군의 대규모 기병 속도전에 대항할 수 없었다.
그러나 유목민 국가는 가축을 주요 재산으로 여기고 이주 생활을 하는 관계로, 농경 사회의 나라와 같은 부를 축적하기 어려운 한계를 가지고 있어 제국은 단명한다. 물론 칭기즈 칸 사후 그의 자손들이 정복 활동을 계속하여 원(元)과 4한국(오고타이한국, 차가타이한국, 일한국, 킵차크한국) 등을 세웠다.
칭기즈 칸의 몽골제국은 중국, 이슬람, 유럽을 일거에 정복하면서 교통로가 정비되고 실크로드(Silk road)가 더 확장되면서 동서양 문명교류에 공헌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히틀러, 무솔리니, 히로히토 그리고 프랑코는 “영웅”이 아니라 각종 대량 살상 무기로 침략전쟁을 일으켜, 이전 전쟁과는 다른 ‘집단 학살범’이자 ‘인류 문화유산과 문명 파괴범’이었다. 특히 이들의 수하로서 침략전쟁에 적극 가담한 공범들은 반드시 ‘전범’으로 끝까지 책임을 물어야 한다.
ㅡ 스페인 인민전선(Frente Popular)과 프랑코 군사 반란 그리고 국제여단 창설
1·2차 세계대전은 자본의 집적(集積), 집중으로 독점자본주의의 길을 간 열강들의 식민지 확보와 영토 분할 경쟁 그리고 민족주의와 결합하여 일어났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은 반파시스트 이념 전쟁인 스페인 내전이었다.
1936년 2월 스페인 총선거는 스페인 사회노동당(PSOE)을 중심으로 공화주의 좌파와 지역주의 정당이 선거연합으로 연대하여 승리하면서, 세계 최초의 선거를 통한 인민전선(Frente Popular) 정부를 출범시켰다. 이후 인민전선이 토지 개혁, 교회 재산 몰수 등 개혁 정책을 실시하자, 기득권인 가톨릭교회, 지주, 자본가, 군부세력은 반발하였다.
특히 군부 프랑코(Francisco Franco, 1892~1975)는 1936년 7월 17일, 모로코에서 그가 이끄는 군대로 반란을 일으켜 스페인 내전을 일으킨다. 스페인 내전은 세계 각국의 공산주의자·무정부주의자들을 인민전선 공화파 편에, 무솔리니와 히틀러는 프랑코를 지원하는 파시스트(Fascist) 파로 뭉쳐, 20세기 이념의 격전장이 된다.
특히 스페인 내전 동안 전 세계의 청년들이 반파시즘과 인간해방을 위해 국제여단(International Brigades, 1936~1938)에 지원하며 전쟁에 참전한다.
서경식의 『사라지지 않은 사람들』(돌베개, 2007)에 나오는 국제여단 설명이다.
“2차 대전의 전초전이자 파시즘과 진보적 민주주의의 국제전이던 스페인 내전(1936~1939)에서 인민전선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공화파 국제의용군.
내전 발발 3개월 후인 1936년 10월 14일 의용군 500명이 스페인 알바세테에 도착한 것을 시작으로, 국적과 언어를 넘어 총 4만여 명이 파시즘을 저지하기 위해 참가했다.
7개 여단으로 편성되어 코민테른의 지휘를 받던 이들은 프랑코군에 맞서 용감히 싸웠으나, 소련이 인민전선 정부에 대한 지원을 줄이면서 1938년에 해체되었다.
많은 작가와 지식인들도 참가해, 헤밍웨이는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와 다큐멘터리 <스페인 땅>의 대본을 썼고, 앙드레 말로는 소설 『희망』을 발표했으며, 의용군으로 참전한 조지 오웰은 르포 『카탈루냐 찬가』를 썼다.”
스페인 내전 당시 공화파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프랑코 군에 의해 암살을 당한 스페인 문학과 연극의 국민 시인이자 극작가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Federico García Lorca, 1898~1936)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강연 일부이다.
“모든 나라에서 죽음은 하나의 끝입니다.
죽음이 찾아오면, 막이 내립니다.
하지만 스페인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스페인에서는 막이 올라갑니다.
(중략)
스페인에서 죽은 이는 세상 어느 곳에서도 죽은 이로써 영원히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시인 로르카의 시집은 1975년 프랑코가 죽을 때까지 금서가 되었고, 암살의 진상은 입에 올리는 일이 금기시되었다.
ㅡ 스페인 인민올림픽과 프랑코의 대량 학살 그리고 과거사 진실규명 운동
스페인인민전선 정부는, 독일 파시스트 히틀러의 베를린 올림픽에 대항하여 인민올림픽(People’s Olympics)을 개최키로 한다. 인민올림픽은 1936년 7월 19일에서 26일까지였고, 베를린 올림픽 시작 6일 전에 끝내는 일정이었다. (관련기사: http://www.ulham.net/opinion/21624)
세계 22개국에서 6,000명의 선수가 참가할 예정이었고, 선수는 노동조합이나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 단체에서 보내진 경우가 많았다. 독일과 이탈리아 선수단은, 파시즘을 피해 정치적 망명을 떠난 사람들로 구성됐다.
그러나 인민올림픽 개최 2일 전인 7월 17일,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면서 대회는 무산된다. 하지만 경기에 참가한 선수들 가운데 200여 명이 국제여단 소속으로 스페인 내전에 빨치산으로 활약한다. (참조: 스포츠란 인간과 민족을 형성하고, 국제적 이해와 선의를 창출하는 도구, 통일시대 2024/9/9)
국제여단은 아쉽게도 2차 세계대전 발발 정세 속에 1938년 9월 28일 해산한다.
1939년 3월 28일 프랑코 군이 마드리드에 입성하면서, 프랑코는 내전에서 승리하고 이탈리아 파시즘의 영향을 받은 팔랑헤(Falange)당 독재체제를 수립한다. 그리고 영국, 프랑스, 미국이 파시스트 독재국가 프랑코 정부를 승인한다.
스페인은 내전으로 경제가 극복하기 어려울 정도여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이탈리아 등이 참전을 유도했으나 중립을 선언하고 참가하지 않는다.
서경식은 같은 책에서 프랑코 정권이 스페인 내전과 독재 기간 중 저지른 학살행위를 기록했다.
“내전 기간 중 100만여 명이 사망했으며, 프랑코 독재 시기 공화파 인사 5만 명이 처형당하고 30만 명이 해외로 추방되거나 망명했다.”
1975년 프랑코는 사망하면서 “정적에게 용서를 빌며 정적들을 진심으로 용서한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후 스페인은 1978년에 “의회 군주제와 민주적 법치 국가”와 “스페인 전역의 자치권 허용”을 골자로 하는 새로운 헌법이 통과되면서 스페인에 민주주의가 안착한다. 이후 좌·우파는 국민 화합과 발전을 위해 과거사를 파헤치지 않는다며 ‘침묵 협약(일명 망각 협약)’으로 타협한다.
그러나 계속된 진상규명 운동으로 2003년 11월 의회는 1936년의 프랑코 군사 행동에 대해 ‘쿠데타’로 규정한다.
이후 2004년 9월 과거사조사위원회가 구성되어 프랑코 치하에서 일어난 인권 침해에 대한 진실규명과 피해자 명예 회복에 나선다. 미침내 마드리드 거리의 프랑코 동상이 철거되는 등 과거사 회복 운동이 시작된다.
ㅡ 스페인 사회당 정부의 프랑코 잔재 완전 청산
2015년 8월 25일 YTN “스페인, 과거사 청산 박차..국립묘역에서 독재자 묘 퇴출” 방송 내용 일부이다.
“[앵커] 스페인 사회당 정부가 쿠데타로 집권해 스페인을 철권통치했던 독재자 프랑코의 특별묘지를 국립묘역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기로 했습니다. 파시스트 유산을 청산하려는 조치입니다.
(중략)
[기자] 마드리드에서 북서쪽으로 50㎞ 떨어진 곳에 있는 '전몰자의 계곡'
150m 높이의 세계 최대 십자가가 설치된 스페인 국립묘역입니다.
이 안에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유해가 높이 15m 비석이 놓인 특별묘지에 묻혀 있습니다.
프랑코는 1936년 쿠데타로 군사정권을 수립한 뒤 이에 저항하는 민병들과 내전에서 나치 독일의 지원을 등에 업고 승리해 30여 년 철권통치를 폈습니다.
그의 독재 기간에 야권 인사와 언론인 등 수만 명이 투옥돼 사망했고, 좌파 인사들의 유아 3만여 명이 납치됐습니다.
스페인 사회당 정부가 이 프랑코의 묘를 이장하기로 국무회의에서 결정했습니다.
내전 때 프랑코의 군대가 죽인 5만여 명의 넋을 기리는 곳에 학살자의 유해를 함께 둘 수 없다는 겁니다.
지난 2007년 제정된 과거사 청산법을 개정해 프랑코의 후손과 지지자들이 법적으로 대항할 여지도 없애기로 했습니다.
[카르멘 칼보 / 스페인 부총리 : 우리는 독재자의 유해가 독재 피해자들의 넋을 기리는 국립묘역에 묻혀 있는 현실을 언제 바꿀 수 있을까요?]
스페인 정부는 프랑코의 묘를 없앤 자리에 평화와 화해를 기원하는 시설을 세울 계획입니다.
이 방안은 다음 달 국회 심의에서 이변이 없는 한 승인될 전망입니다.
[페르난도 마르티네스 로페스 / 스페인 과거사 청산위원회 사무총장 : 독일이나 이탈리아가 히틀러나 무솔리니를 위한 국립 기념관을 용납하겠습니까? 분명히 아니죠.]
‘프랑코 청산’은 지난 6월 우파 국민당 내각을 실각시키고 집권한 산페드로 산체스 총리의 주요 국정과제 가운데 하나로 추진되고 있습니다.
스페인 '전몰자의 계곡'에 있는 프랑코의 묘는 유럽에서 파시스트를 기리는 국립 시설물로는 유일하게 남아 있던 것입니다.”
스페인과 마찬가지로, 한국 또한 ‘김대중 국민의 정부’ 때 2000년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한상범 위원장)를, ‘노무현 참여정부’ 때 2004년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2004~2007, 오충일 위원장), 경찰청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2004~2007, 이종수 위원장),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2005~2007, 이해동 위원장) 그리고 2005년 1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2005.~2007, 송기인 위원장)를 출범시킨다.
이때 1기 진실화해위원회는 스페인과 남아공 그리고 아르헨티나 등의 과거사정리위원회를 많이 연구했다고 한다.
ㅡ 피로 쓰인 역사를 혀로 논하는 역사로 덮을 수는 없다.
신동숙은 부군 도예종 선생이 국가로부터 살인 당한 뒤, 남편과 동지들의 억울한 죽음을 알리는 일을 최우선에 놓고, 진상규명에 한평생 몸 바쳤다. 그리고 남편을 포함한 피해자들의 누명을 벗기고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 서울과 대구를 오가며 진상규명을 위한 활동을 줄기차게 그녀는 벌였다. 그뿐 아니라 인혁 4·9통일열사 유족들도 진상규명을 위한 활동과 호소를 적극적으로 벌여 1기 진실화해위원회는 인혁당사건 등을 조사하고 규명케 한다.
마침내 인혁당재건위 사건은 2006년 1월 23일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 의해 ‘인혁당재건위’ 사건 관련자 16명이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신동숙은 필자와 몇 년간 정기적으로 한 달에 한 번 대구 자택에서 만날 때마다, 부군 도예종 선생의 억울한 죽음과 인혁당에 대해 여러 번 울분을 토한 적이 있다.
“인혁당재건위 사건, 사법살인 사건은 상상하기도 싫고, 2007년 1월 23일에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생각하면 분노로 가슴이 떨립니다.
나라에서 보상한다고 돈을 받았지만, 그 돈이 생명하고 바꿀 수 있습니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국가가 공식적으로 유족들에게 사과하고, 학생들에게 나라가 잘못을 저지른 교육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내란 수괴’ 윤석열의 2기 진실화해위원회는 그동안의 진실규명 활동의 번복과 위원장들의 망언으로 파행을 겪었다.
특히 윤석열이 작년 정부 산하 국내 3대 역사기관인 한국학중앙연구원장에 김낙년(『반일 종족주의』의 저자)을 7월에,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에 허동현(박근혜 정부 역사교과서 국정화 참여)을 5월에,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에 박지향(『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의 공동 저자)을 1월에 임명했다.
삼척동자도 알다시피 이들 역사기관의 주요 역할 중 하나는, 일본 식민 지배 만행을 밝혀내고 일본의 역사 왜곡에 대항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내란 수괴’ 윤석열은 이들 기관의 수장에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며 일본의 강제동원과 일본군 ‘위안부’ 강제성을 공공연히 부정해왔던 뉴라이트 성향 인사들을 버젓이 임명했다.
작년 필자는 윤석열의 이런 만행을 보고 4·9통일열사들을 부관참시(剖棺斬屍)할지 모른다고 두려워했다. 다행히 광복회 이종찬 회장이 작년 광복절 기념사에서, 윤석열을 준엄하게 경고하는 것을 보고, 필자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광복회 이종찬 회장의 광복절 기념사 일부이다.
“준엄하게 경고합니다.
피로 쓰인 역사를 혀로 논하는 역사로 덮을 수는 없습니다.
자주독립을 위한 선열들의 투쟁과 헌신 그리고 그 자랑스러운 성과를 폄훼하는 일은 국민들이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번영의 근간을 왜곡하는 일에는 반드시 단죄가 있을 것입니다.”
또한 필자가 2006년 7월에 기고한 양심수후원회의 후원회소식(통권177호) ‘인혁당 재심 4차공판을 보면서….’ 내용 일부이다.
“최근 5·31 제4대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의 압승에 편승해서 사회의 보수적 흐름이 보이는 가운데 지난달 25일 친북반국가행위 진상규명위원회라는 시대를 역행하는 해괴망측한 단체가 나타났다.
1차적으로 남민전 사건과 인혁당 및 인혁당재건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 활동을 과거 공안 전문가, 전직 언론인 등으로 전문위원단을 구성하여 과거사위의 조사내용을 검증하겠다고 한다.
살인을 한 자가 감히 누구를 검증한다니 정말 소가 웃을 일이다.”
스페인 예에서 보듯이 집단학살과 인권 침해 등 과거사 정리는 단순히 진영이나 정파 문제가 아니다.
이번 21대 대통령 선거는 ‘12·3 비상계엄’을 시도한 ‘내란 수괴’ 윤석열의 역사적 엄중한 단죄와 함께 역사의식과 민족 정체성 그리고 인권을 재확립하고 바로잡아야 한다.
“피로 쓰인 역사를 혀로 논하는 역사로 덮을 수는 없다”
※ 격주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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