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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부터 독일과 이탈리아 파시스트는 발칸 반도에 눈독을 들인다.
발칸 반도는 지리적으로 유럽대륙 남동부에 튀어나온 반도로, 지중해를 통해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아주 중요한 길목이었다. 특히 동서가 길고 남북이 짧은 지중해는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3개 대륙 가운데 있는 작은 바다였지만, 세계사에 미치는 영향력은 매우 컸다. 지중해는 그리스 문명의 발상지로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문명이 합쳐진 곳이다.
특히 지중해를 끼고 있는 발칸 반도를 거쳐 수많은 민족과 문명이 바다를 건너 동쪽에서 서쪽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했다.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만나고 섞이는 일종의 ‘용광로(Melting Pot)’였다.
또한 로마 가톨릭을 믿는 서유럽 종교문화와 그리스 정교를 믿는 동유럽 종교문화 그리고 이슬람교를 믿는 오스만제국의 종교문화까지. 서로 다른 종교와 민족이 함께 어울려진 곳이 발칸 반도였다. 그러다 보니 민족 간 분쟁이 그치지 않았고, 특히 지리적 중요성뿐 아니라 전략적 요충지로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오스만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그리고 러시아제국 간에 빼앗고 빼앗긴 전쟁터가 발칸 반도였다.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처가 세르비아의 민족주의자에 의해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하자 제1차 세계대전이 점화된다.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이를 구실로 7월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하자 러시아가 슬라브계 나라인 세르비아 편에 섰고, 독일은 같은 게르만 민족인 오스트리아 편에 서서 전쟁에 뛰어든다.
이처럼 발칸 반도는 각종 이해관계가 얽혀있어 전략상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패전국’ 독일과 ‘승전국’ 이탈리아의 파시즘
제1차 세계대전은 1917년 4월 미국 참전과 러시아 혁명으로 전쟁 양상이 크게 바뀌면서, 1918년 11월 11일 영국·프랑스·러시아 등 연합국들과 독일이 정전 협정에 서명함으로써 끝이 났다.
연합국과 패전국 간에는 1919년 6월 28일 독일과 ‘베르사유 조약’을, 9월 10일 오스트리아와의 ‘생제르맹 조약’ 등 여러 불평등한 조약을 체결한다. 특히 ‘베르사유 조약’과 ‘생제르맹 조약’은 전후 유럽 지도를 바꿨고, 독일·오스트리아·터키 동맹국은 연합국에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지급해야 했다.
이런 가혹한 전쟁배상금은 ‘패전국’ 독일을 파시즘으로 나아가게 했다. 파시즘은 개인보다는 국가와 민족의 가치를 우위에 놓는 국가통치체제로 다양성을 도외시하고 대중의 획일성을 추구하며 대중 선동과 여론 조작에 열을 올렸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파시즘은 ‘승전국’ 이탈리아에서 대두(擡頭)된다. 이탈리아는 제1차 세계대전에 연합국으로 참전했지만 제대로 보상도 받지 못하고 홀대당한다.
이때 이탈리아 사회당(Partito Socialista Italiana, PSI) 혁명 조직을 이끌며, PSI 기관지 『아반티(Avanti, 전진)』의 편집장으로 등장한 무솔리니(Benito Mussolini, 1883~1945)는 혼란의 도가니 속 대중의 불만을 파고 들어가 반제국주의 투사에서 극우로 전향한다.
1921년 무솔리니는 민주주의보다 강력한 국가주의를 내건 국가파시스트당을 조직하고, 1922년 추종자 ‘검은 셔츠단’을 이끌고, 로마로 진군하여 쿠데타를 일으킨다. 쿠데타로 모든 권력을 장악한 무솔리니는 1928년에 의회를 해산하고, 국가파시트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 활동을 전면 금지하는 일인·일당 독재체제를 구축한다.
무솔리니 집권 초기의 이탈리아는 경제가 발전했고 군사력도 강화됐다. 이때 이탈리아 해군은 지중해에서 영국과 프랑스 함대를 합친 것보다 많았다. 이후 1929년 세계 경제 대공황도 무솔리니는 잘 버텨냈다.
히틀러는 권력을 장악하기 전 무솔리니를 추종하고 이탈리아의 파시즘 체제를 따르려고 했다.
극우에서 전향한 무솔리니는 침략적 파시즘으로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1895~1896) 패배에 따른 굴욕을 만회하고자 1934년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를 국제법을 무시하고 침공하려고 한다.
파시즘을 『철학대사전』(한국철학사상연구회 편, 동녘, 1989)에서 정의한 일부이다.
파시즘은 정치적 도적 행위, 도발 및 정치적 모험을 감행하는 통치 체제로서 외국과의 관계에서도 모든 국제법을 거침없이 무시한다.
무기력하고 무능한 국제연맹
1935년 10월 이탈리아는 베르사유 조약에서 금지된 독가스를 사용하며 에티오피아를 침공하자, 에티오피아의 마지막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Haile Selassie, 1892~1975)는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 LN)에 호소한다. 국제연맹은 경제제재를 가하려고 했으나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무솔리니는 일제가 만주 침공 후 국제연맹에서 탈퇴했음에도 제재를 가하지 못하는 것을 악용해 국제연맹을 비웃듯이 탈퇴한다.
국제연맹은 평화를 수호한다는 명분을 창설했지만, 아무런 조처를 하지 못하고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만 비난한다.
파시스트 무솔리니의 국제법을 무시한 도발 행위는, 마치 올해 새해 벽두 1월 3일 새벽, 날강도 트럼프가 베네수엘라에 침공해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 부부를 미국으로 납치·감금한 것과 유사하다.
유엔헌장 2조는 ‘모든 회원국의 주권평등 원칙에 기초 (중략) 다른 국가의 영토보전이나 정치적 독립에 대하여 또는 국제연합의 목적과 양립하지 아니하는 어떠한 기타 방식으로도 무력의 위협이나 무력 행사를 삼간다'고 명시돼 있다.
그런데 트럼프는 무솔리니의 에티오피아 침공과 마찬가지로 주권국가인 베네수엘라의 영토와 정치적 독립을 부인하고 무력행사를 했다.
또한 트럼프는 “내겐 국제법 필요 없다…내 도덕성만이 나를 멈출 수 있어”라고 말하면서 66개 국제기구를 탈퇴한 것도 파시스트 무솔리니와 닮았다.
1933년 히틀러는 선거에서 다수당을 차지하면서 총리로 지명된다. 1934년에는 대통령 힌덴부르크(Paul von Hindenburg, 1847~1934)가 죽자 히틀러는 대통령 권한도 위임받으면서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다.
1935년 독일은 영국과 해군조약을 맺으면서 베르사유 조약의 파기와 재군비 선언을 인정한다. 이어서 1936년 3월 7일 독일 육군 병력을 라인란트(Rheinland)로 진주시킨다.
원래 라인란트는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 직후인 1919년부터는,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독일군의 병력을 주둔시킬 수 없었는데 히틀러는 이를 정면으로 위반한다. 하지만 국제연맹과 영국, 프랑스는 사실상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방관한다.
마치 트럼프의 베네수엘라 침공 이후 베네수엘라 사태를 논의하기 위해 소집된 유엔 안보리 긴급회의에서 미국의 군사작전에 관한 반대 의사를 표명한 것이 전부다.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중국과 러시아도 미국을 강도 높게 비판했지만, 겨우 마두로 대통령 부부를 석방할 것을 촉구만 했다.
전략적 요충지 발칸 반도
파시즘은 항상 전쟁을 잉태(孕胎)했다.
결국 파시즘은 제1차보다 더 큰 재앙인 제2차 세계대전을 유발(誘發)한다. 그리고 무능한 국제연맹의 위상은 무너지고 제1차 세계대전은 사실상 끝나지 못한 전쟁이 되고 만다.
제2차 세계대전은 제1차 세계대전과 마찬가지로 열강의 각축장이 된다.
특히 발칸 반도는 2차 세계대전에서도 마찬가지로 전략적 요충지였다. 만약 독일이 발칸 반도를 장악하면 지중해 지역과 북아프리카를 공략할 수 있는 발판이 될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소련을 침공하는 데 있어 남쪽 기지로 이용할 수 있었다. 독일·이탈리아 파시스트 연합은 발칸 반도 나라인 알바니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유고슬라비아, 그리스 등을 침략하려 했다.
선수(先手)는 이탈리아 무솔리니가 먼저 쳤다.
1939년 4월, 이탈리아가 먼저 반도 내 가장 작은 나라인 알바니아를 점령하고, 이를 발판으로 그리스를 침공했다. 이후 이탈리아는 국제사회를 보란 듯이 1940년 9월 동서의 파시스트 국가인 나치 독일, 일본 제국과 함께 추축국(樞軸國, Axis Powers) 동맹인 삼국동맹을 결성한다. 추축국이라는 명칭은 무솔리니가 1936년에 “유럽의 국제 관계는 로마와 베를린을 연결하는 선을 추축으로 하여 변화할 것이다.”라고 연설한 데서 유래했다.
1941년 상반기, 나치 독일은 침략전쟁을 확대하기 위해 발칸 반도 루마니아, 불가리아, 유고슬라비아를 위협해 독·이·일 추축국 군사동맹에 가입시킨다.
지리학 교수인 박찬석의 『지중해 25개국』(푸른길, 2025)에 나오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고슬라비아 상황이다.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추축국의 침략으로 유고 왕국은 망한다.
독일은 세르비아를, 이탈리아는 몬테네그로를, 볼가리아는 마케도니아를, 헝가리는 바치카(Backa)를 점령했다.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는 독일의 괴뢰정부가 되었다.
유린당한 유고는 이리떼가 뜯어먹는 한 마리의 사슴 꼴이 되었다. 다양한 민족, 다양한 언어, 다양한 종교, 다양한 식민지 문화가 접목되었다.”
그러나 유고슬라비아 민중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우지더 외 글 · 리진더 외 그림의 『전쟁의 세계화 1, 그림으로 읽는 제2차 세계대전 5』에 나오는 유고슬라비아 저항이다.
“수상이 추축국 군사동맹조약에 서명했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유고슬라비아 군중들은 수도와 기타 여러 도시에서 격렬한 반파시즘 시위행진을 벌였다. 군중들은 독일 대사의 자동차에 침을 뱉으며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전쟁을 할지언정 협정은 싫다!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 ‘협정을 체결한 매국노를 타도하자!’”
유고슬라비아 티토의 빨치산 투쟁
독일과 이탈리아 파시스트는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개시했다.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 양국 군민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추축국이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를 점령하고 지중해 수륙 통로까지 장악함으로써 침략전쟁은 더욱더 확대됐다. 그러나 유고슬라비아에는 빨치산 지도자 요시프 브로즈 티토(Josip Broz Tito, 1892~1980)를 중심으로 끝까지 저항했다.
세계 빨치산 투쟁사는 승리도 있었고 패배도 있었지만, 유고슬라비아공산당 티토는 승리했고, 스페인인민전선은 패배했다. 스페인인민전선이 패배한 원인은 불간섭 정책을 표명한 서유럽 국가 영국과 프랑스 등의 무능함이었다.
스페인 내전에서 반란군 프랑코(Francisco Franco, 1892~1975)는 독일에 손을 내밀자 독일과 이탈리아는 반란군을 지원한다. 공화국을 원조한 것은 소련과 여러 나라에서 지원한 국제여단 빨치산뿐이었다. 프랑코는 독일과 이탈리아 지원 속에 1939년 3월 3년간 전쟁을 끝내고 승리한다.
한국 빨치산처럼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유고슬라비아는 티토라는 뛰어난 빨치산 지도자와 세계적 차원의 연대 그리고 내부 통일 단결에 의해 반제·자주 반파시스트 투쟁에서 승리했다.
소련·러시아사에 정통한 도쿄대 명예교수인 와다 하루키의 『역사로서의 사회주의』 (창작과비평사, 1994)에 나오는 유고슬라비아의 빨치산 투쟁역사이다.
“유고슬라비아에서는 티토((J. B. Tito, 1892~1980)를 지도자로 하는 유고슬라비아공산당이 독일과 이딸리아의 점령군에 대한 빨치산투쟁을 조직하여 전국적으로 과감하게 싸웠다.
다민족적인 구성을 가진 유고슬라비아에서 독일은 쎄르비아에 군정을 펴는 한편 크로아티아독립국을 만들어 파시스트적 단체 ‘우스타샤’로 하여금 정권을 잡도록 했다. ‘우스타샤’는 역내(域內)의 세르비아인 가운데 75만 명을 학살했다고 한다.
유고슬라비아인민해방빨치산부대의 최고사령관이 된 티토는 자신이 크로아티아인이었지만 쎄르비아 공산주의자와 한덩어리가 되어 싸웠다. 민족을 초월한 인민해방위원회가 만들어져 이것이 봉기기관도 되고 해방구의 신권력기관도 되었다.
빨치산전쟁은 자력으로 침략자로부터 나라를 해방하고 유고사회주의국가를 탄생시켰다. 1943년 11월 유고슬라비아인민해방반파시스트회의는 각 민족 평등의 연방공화국 건설을 결정해 1945년 3월 티토를 수반으로 하는 유고슬라비아민주주의연방공화국 임시정부를 탄생시켰다. 11월의 총선거에서 공산당을 중심으로 하는 인민전선이 90퍼센트의 지지를 얻었다. 11월 29일 유고슬라비아연방인민공화국의 건국이 선언되었다.
이것은 빨치산의 지역적인 권력을 공산당과 티토의 권위로 묶어낸 국가였다. 우스타샤의 학살과 빨치산측의 보복이라는 민족적인 대립은 티토의 권위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봉쇄되는 형세가 되었다.”
2차 세계대전 전부터 간도 빨치산 투쟁
발칸 반도에 유고슬라비아의 빨치산 투쟁이 있었다면, 조선은 만주 간도에서 2차 세계대전 전부터 빨치산 투쟁을 하고 있었다.
재일 역사학자 강재언의 『일제하 40년사』 (풀빛, 1984)에 나오는 만주사변 후 무장집단 ‘공비(共匪)’ 즉 빨치산 투쟁 내용이다.
“만주사변 후 만주에는 다양한 무장집단이 생겨났다. 일본책에서는 이를 모두 ‘비적 (匪賊)’이라고 하고 있지만, 일본군경의 문헌에서는 구별되어 쓰이고 있었다. 그것은 ‘공비(共匪)’ 아니면 ‘병비(兵匪)’ 또는 ‘토비(土匪)’와 같이 대상에 따라서 명확하게 그 성격을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공비란 공산주의자에 의해서 수행된 빨치산 투쟁이다. 만주사변 후에도 구(舊) 장학량(張學良)군의 일부가 여전히 만주에 남아 저항을 계속하였는데 이것이 병비였다.
세력관계로 보면 만주사변 직후는 병비가 강했었다. 그러다가 이들이 쇠퇴하여 감에 따라 공비가 그들을 대신하게 된다. 토비라는 것은 이른바 비적이다. 정치도 사상도 없고 다만 부유한 집을 습격하여 인질로 삼고 금품을 빼앗는 일을 주로 하였다. (그러나 여러 기록들을 보면 항일빨치산이 무기를 입수하는 경우 토비들을 회유하여 이용할 때가 많았다). 위와 같이 그들 사이의 구분이 분명히 존재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일본측은 ‘비민분리(匪民分離)’ 정책을 고안해 내었다. 병비의 경우, 민중과의 연결은 별로 없었기 때문에 산에 쫓겨들어가 식량을 구할 길이 끊기면 대개 항복하고 말았다. 그러나 일본측에 가장 두통거리가 되었던 것은 공비였다. 민중 속의 지하 조직과 연결되어 있었으므로 그 지하조직을 통하여 식량도 병기도 조달할 수가 있었다. 게다가 민중 속에 정보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공격하는 경우에도 쉽게 일본군의 약점을 노릴 수 있었다. 이렇게 되자 일본군이 궁리 끝에 생각해 낸 것이 ‘비민분리’ 즉 빨치산 지역주변에 집단부락을 만들어 민중을 그곳에 집단수용함으로써 공비와 민중을 격리시키고자 한 정책이었다.”
또한 서경식의 『사라지지 않은 사람들』(돌베개, 2007)에는 간도의 조선 항일무장투쟁을 기리는 시를 소개한다.
“「간도 빨치산의 노래」(間島パルチザンの歌)라는 장편서사시가 있다. 그 첫머리는 이렇다.
추억은 나를 고향으로 데려간다
백두의 고개를 넘고 낙엽송 숲을 넘어
갈대 뿌리 검게 얼어붙은 늪의 저편
붉게 탄 땅거죽에 거뭇한 오두막들이 이어지는 곳
고려꿩이 골짜기에 우는 함경의 마을이여
(중략)
간도에는 19세기 말부터 많은 조선 농민들이 이주해 살기 시작했으며, ‘한일합병’ 이후 조선인 이주자가 급증해 1920년대에는 민족주의자들이, 1930년대 들어서는 중국공산당과 손잡은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이 간도를 무대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했다.그 투쟁의 선두에 선 조선 청년들의 참된 마음을 노래한 「간도 빨치산의 노래」 는 1932년 『프롤레타리아 문학(プロレタリア文学)』 4월 중간호에 발표되었다. 그러나 이 시의 작자는 조선인이 아니다. 마키무라 고우(槇村浩)라는 일본인이었다.
(중략)
1933년 3월 30일 간도의 왕칭에서 이다 스케오(伊田助男)라는 일본군 병사가 탄약을 가득 실은 트럭을 몰고 탈주해 김일성 유격대와 접촉을 기도한 사건이 있었다.「간도 빨치산의 노래」가 발표된 이듬해의 일이었는데, 그가 이 시를 읽었는지는 알 수 없다. ”
군인들의 세상에 저항한 도예종과 4·9통일열사
한국에도 빨치산이 있었다.
해방 이후 6·25전쟁 전까지 흔히 산사람, 야산대(野山隊)라 불리던 ‘구빨치산’이 있었다. ‘구빨치산’은 1946년 10월 인민항쟁 이후, 미군정의 체포령으로 합법적인 정치 활동을 할 수 없는 사람과 폭정을 피해, 일종의 피신처로 입산한 사람을 시발로 본다.
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관 김상숙은 『1946년 10월 대구, 봉인된 시간 속으로 10월 항쟁』, (돌베개, 2016)에서 10월 항쟁은 야산대·빨치산 형성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기록했다.
“1946년 10월 항쟁은 한국전쟁 전 민간인 집단학살의 출발점이 된 사건이기도 하다. 항쟁 후 항쟁 참여자들은 군경의 탄압을 피해 팔공산, 지리산, 태백산 등으로 들어가서 야산대를 형성했다. 야산대가 발전한 유격대는 군경과 대치하며 ‘작은 전쟁’이라 불리는 지역 내전을 벌였고, 지역민들은 ‘낮에는 군경, 밤에는 빨치산’이라는 이중권력 아래에 생활했다. ”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신빨치산’이 편성된다. 이후 1953년 7월 27일 정전까지 제2 전선으로의 유격전 활동을 펼친다. 그리고 정전 이후부터 1955년 5월23일까지 토벌대의 마지막 공세와 지하활동을 위해 나오다가 거의 희생되거나 체포되면서 빨치산은 6·25전쟁과 함께 소멸된다.
조정래 작가는 『태백산맥』(해냄, 2016) 3부 제7권 21장(구빨치 그리고 신빨치)에서 구빨치산과 신빨치산을 자세히 소개했다.
“'구빨치'는 전쟁 전부터 야산투쟁을 전개해 온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인데, 그들 사이에는 어떤 자격이나 능력을 구분 짓는 뜻을 포함시켜 일상어로 쓰이고 있었다. 그 말은 '구빨치산'을 줄인 것이었고, '구'라는 글자는 구닥다리나 쓸모없음이란 의미는 전혀 없고 오히려 '혁혁한 투쟁경력'이나 '산 경험의 혁명전사'라는 뜻으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번 후퇴와 함께 새로 입산한 사람들은 자연히 '신빨치'일 수밖에 없었다.”
이후 이남은 빨치산과 같은 무장투쟁이 아닌 1960년 3·15마산항쟁과 4·19혁명으로 조국 분단 원흉인 이승만을 단죄한다. 그러나 4·19혁명 후 등장한 보수 장면 정권은 9개월 만에 총과 탱크를 앞세운 5·16 군사쿠데타에 정권을 빼앗긴다. 그리고 친일사대주의자 박정희가 등장하면서 일제 청산은커녕 군부독재로 한국은 엄혹한 시기를 보내야 했다.
박정희와 한 무리의 군인들은 민주주의와 통일보다는 반공이라는 구호로 무장하며 추운 ‘겨울 공화국’ 시대를 만들어 간다. 4대 의혹 사건을 비롯한 쿠데타 주체들의 부정부패는 구악(舊惡)을 빰친 신악(新惡)이었다. 그리고 이것을 덮기 위해 철권 공안 정치를 휘두른다.
4월혁명 공간에서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려고 했던 신동숙 여사의 부군 도예종과 민민청·통민청 청년단체 성원들은 군인들의 세상을 민중의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쉬지 않고 노력한다. 베트남과 같은 밀림이 없다 보니 빨치산은 못 하지만, 동지를 규합하여 인(人)의 밀림을 만들고자 하였다.
통민청 출신 황금수의 동지 도예종의 사람 사업에 대한 증언이다
도예종은 절대 버릴 수 없는 사람, 영원한 동지입니다. 또한 최백근, 서도원, 이수병, 이재문과 함께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도예종은 출신, 학력, 나이를 불문하고 저를 동지로 존경하고 존대하며 인격적으로 깍듯이 예우했습니다.
그리고 도예종은 신동숙과 같은 학교에 근무하면서 이런 일을 뒷바라지할 수 있는 반려자로 신동숙을 결정하고, 그는 신동숙 아버지를 설득해서 허락을 받는다. 신동숙은 ”도 선생은 사람을 사로잡는 마력이 있는 분으로 그와 함께 대화를 나누면 얼마 안 지나 설득당한다“라고 하였다.
“도 선생은 나중에 알고 보니 결혼도 했는 사람이어서 우리 집에서는 적극적으로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도 선생이 아버지를 찾아뵙고 ‘우리나라는 지금 미국의 식민지, 일제시대나 마찬가지인데 우린 독립을 해야 한다.’ 이렇게 도 선생이 의견을 아버지께 말씀하시면서 ‘이런 일을 해야 하는데 좀 뒷바라지를’ 하면서 설득해요.
아버지도 일제 강점기 가족이 있으니 독립운동을 못 했잖아요. 그러면서 ‘남자 결혼 한 번 했는 거는 흠이지만’ 하면서 뜻있는 일을 하려는 분이라 결혼을 허락하시대요.
저도 사실은 도 선생이 대구대학 야간 다니면서 동료 간에 머리가 비상하다는 소리도 들었고, 또 교원 생활하면서 교장하고도 이론적으로 다투었던 것도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큰 뜻을 하는 사람이면 여자가 뒷바라지하는 그것도 뜻이 있는 일이다 해서 저도 허락을 했죠.”
※ 격주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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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숙(15) 유럽의 화약고 발칸 반도 - 유고 빨치산과 간도 빨치산 그리고 군인들 세상에 저항하는 도예종 -
: 사람을 찾아서(4·9통일열사 도예종의 아내 신동숙)
2026.01.20
신동숙(14) 비시 프랑스와 자유 프랑스 - 친일친미 사대주의에 정권에 저항한 도예종과 4·9통일열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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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