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오태규 (전 한겨레 논설실장)
등록일 : 2026.01.19

신자유주의.png

 

지식인이란 누구인가? 현대적인 의미에서 '지식인'이란 개념이 생긴 것은 1898년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 때라고 한다. 이때 작가 에밀 졸라가 프랑스 대통령에게 드레퓌스 사건의 진상을 폭로하고 그의 구명을 청원하는 공개편지를 보낸 것을 계기로, 드레퓌스를 지원하는 사람들이 '지식인 선언'을 발표했다. 이때부터 '지식인'이란 단어가 시민권을 얻었다. 이런 어원을 감안해 내 나름대로 지식인을 정의하자면, 정의와 진실이 왜곡되는 것을 참지 못하고 나서는 '먹물'쯤 될 것 같다. ​

 

한국에서도 지식인이 크게 활약한 시절이 있었다. 군사 정권 시기다. 많은 대학교수, 종교인, 언론인들이 물질적·정신적 고통을 감수하며 정의와 진실의 편에 가담했다. 언론계에서는 송건호, 이영희 선생이 대표적이다. 

국제 무대에서도 정의와 진실을 위해 발언하고 행동하는 지식인들이 많다. 그중에 대표적인 사람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저명한 언어학자인 놈 촘스키(1928~) 미국 매세추세츠대학 교수를 첫손가락에 올리겠다.​

 

<누가 세계를 지배하는가?>(후타바문고, 놈 촘스키 지음, 다이지 슌·사카키바라 미나코 옮김, 2025년 7월)는 놈 촘스키가 핵무기와 기후변화, 그리고 분쟁으로 절멸의 위기에 놓인 세계에 경고를 보내기 위해 쓴 책이다. 원제는 'WHO RULES THE WORLD?'이고, 도널드 트럼프 1기 행정부 때인 2017년 5월에 미국에서 출간됐다. 아직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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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는 현재 90대 중반의 나이지만 여전히 지식인으로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다만, 2023년 6월 브라질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활동이 뜸해졌다. 그의 개인 웹사이트(The Noam Chomsky Website)에 들어가 봤더니, 2024년 9월의 활동이 마지막으로 올라와 있다. 저작은 10월에 새 책(THE MYTH OF AMERICAN IDEALISM)을 낸 것으로 나와 있다.​

 

이 책은 일본의 후타바출판사가 2017년 단행본으로 낸 것을, 2025년 문고판으로 재발행한 것이다. 일본에서 문고판은 인기가 아주 많거나 많은 사람이 읽을 가치가 있는 책으로 보면 된다. 이 책의 번역자인 다이지 슌은 문고판 역자 후기에서 "이 책은 일본의 지식인이 읽어야 할 필독서"라면서 "이 정도까지 적확하게  현대 세계를 분석한 책은 찾아볼 수 없다"라고 절찬했다. 또 "현대 세계가 '신자유주의·신식민주의' 시대라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지식인으로 실격'이라고 말했다. 이 글에서 이 출판사가 이 책을 문고판으로 발행한 이유를 알 수 있다.

촘스키가 이 책을 쓴 것은 1기 트럼프 정권이 등장하기 직전이다. 하지만 그때 이미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우크라이나 분쟁 등을 생생하게 예측했다. 미래를 내다보는 예리한 통찰력이 없다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이 책은 분량이 500쪽이 좀 넘는다. 다루는 내용도 1장(지식인의 책임, 재고)부터 23장(인류의 지배자들)까지 폭넓고 다양하다. 미국의 쇠퇴, 기후 위기, 핵전쟁 위기, 테러리즘, 신자유주의의 폐해까지 세계적으로 회자되는 주요 문제를 빠짐없이 다루고 있다.

책 내용들을 하나하나 다 소개할 수 없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몇 개 꽂히는 대목이 있다. 먼저 촘스키가 미래를 전망하는 방법이다. 촘스키는 두 가지를 제안한다. 첫째 밖에서 인류를 바라보는 것, 즉 '지구 바깥의 관찰자'라는 중립적 입장에서 지금 지구에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보자는 것이다. 둘째, 100년 뒤의 역사가라고 생각하고 현재의 상황을 바라보자는 것이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나무가 아니라 숲을 바라보는 방식, 선수가 아니라 관중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촘스키가 이 방식을 통해 도달한 지점은 지금 지구가 최대의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원자력과학자회보>가 내보내는 종말 시계로 치면, '종말 3분 전'이다. 지구를 종말로 이끄는 3대 주범은 기후 위기와 핵 전쟁 위기, 자신들의 이익만 챙기는 소수 부자들의 탐욕이다. 

세계 질서의 관점에서 보면, 1945년 2차대전의 승리로 최고의 국력을 구가했던 미국이 점차 국력이 쇠퇴하면서 노골적인 제국주의 행태를 보이고 있고, 이것이 위기의 진원이 되고 있다는 진단이다. 예를 들어, 미국은 이란이  '최대의 위협'이라고 하는데, 이란의 무력이 위협이 아니라 이란의 존재가 미국의 지배를 약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멀리는 쿠바 미사일 위기, 가깝게는 우크라이나 사태와 이-팔 전쟁, 가장 최근의 베네수엘라 침공까지 모두 쇠퇴하는 미국이 자신의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 벌이는 몸부림이다.

그는 생산성 저하로 고전하는 기업가들은 금융화와 생산 거점의 해외 이전으로 이익을 벌충하려고 한다면서, 신자유주의와 자유무역협정을 그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자유무역협정은 말만 '자유 무역'이지 실제는 기업가들의 자유로운 투자를 보장하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자유무역협정으로 손해 보는 사람은 언제나 노동자들이고, 빈부 격차는 더욱 커졌다는 얘기다.

미국 안에서는 공화당이 도널드 레이건 대통령 때부터 극소수의 부자와 대기업을 대변하는 정당으로 변했고, 덩달아 민주당도 과거의 '온건한 공화당'에도 못 미치는 위치로 이전했다. 특히 공화당은 온건 보수의 옛 지지층을 버리고 기독교 복음파, 과거 노예주였던 남부 사람들, 배외주의자들을 새로운 지지 기반으로 만들며 미국 우선주의를 주도하고 있다. 촘스키는 그 결과, 미국 공화당은 세계의 주류로부터는 멀어졌지만 최강국 주류로부터는 벗어나지 않았다면서 트럼프의 탄생은 이런 미국의 정치 흐름을 반영한다고 말했다.     

 

지금 지역적으로는 가장 위험 지역은 동아시아, 동구, 중동이다. 과거 미국의 호수 노릇을 했던 태평양 지역, 즉 동아시아에서는 중국의 거센 도전으로 격랑이 일고 있다. 한때 소련 영역이었던 동구에서는 미국이 약속을 어기고 나토(NATO)를 러시아 접경까지 확대하면서 무력 분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슬람 지역에서는 미국이 테러와 전쟁을 본격화하면서 난민을 양산하고 반미 적대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는 지금의 세계 위기는 미국을 비롯한 힘센 국가의 반성 없이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전망한다. 그는 이 책의 제목이 '누가 세계를 지배하는가?'이지만, '어떠한 원칙과 가치관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가?'로 바꿔 물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런 물음이 잘 살고 힘센 국가들의 시민 마음에 더욱 강하게 일어나 행동으로 연결되지 않으면, 선인들이 고투하며 얻어내고 후세들이 향유하고 있는 자유, 특권, 기회라는 유산은 사라질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절규한다. "지금 인류는 운명적인 선택에 직면해 있다. 이 중대한 도전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운명이 달려 있다." 그의 나이로 볼 때, 이 말이 그가 후세에 남기는 유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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