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 사람을 찾아서(4·9통일열사 도예종의 아내 신동숙)
한찬욱(사월혁명회 사무처장)
등록일 : 2025.12.23

 

26e5d588-cea6-4c3b-bb56-86a18c59436e.gif

크렘린에서 독소불가침 조약에 서명하는 소련외무장관 몰로토프.  뒤줄 오른쪽  두번째   스탈린.(사진출처 : 나무위키)
"스탈린은 전쟁은 거의 불가피하다고 생각했고 어떻든 시간을 벌어야 했다. 독일뿐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도 호시탐탐 공산주의 소련을 무너뜨리려고 했다. 그리고 소련에는 또 하나의 적 일본이 동쪽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칫하면 동서 양쪽에서 독일과 일본의 협공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소련은 공산주의 혁명과 국내 안정이 급선무였다."(본문 중에서)

 
1939년 8월 23일, 독일과 소련은 독소불가침조약을 체결한다.

 

히틀러는 독일 통일을 달성한 초대 재상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 1815~1898)의 외교전략을 따랐다. 당시 비스마르크는 러시아와 협력해야만 양면 전쟁을 피하고 독일이 서쪽의 프랑스와 대결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독소불가침조약을 통해 양국은 서로 공격하지 않기로 약속하고, 또 비밀협약을 통해 동부 유럽에서 각자 관심 있는 지역을 서로 인정하기로 했다. 중앙 유럽 서쪽은 독일이, 발트 삼국인  리투아니아·라트비아·에스토니아, 핀란드, 루마니아는 소련이, 폴란드는 서로 반씩 세력권으로 인정했다. 

 

볼셰비즘은 반공을 앞세우는 나치 독일의 최대 적이었고 파시즘은 소련의 최대 적이었다. 그런데 양국은 아이러니하게도 서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 

 

스탈린은 전쟁은 거의 불가피하다고 생각했고 어떻든 시간을 벌어야 했다. 독일뿐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도 호시탐탐 공산주의 소련을 무너뜨리려고 했다. 그리고 소련에는 또 하나의 적 일본이 동쪽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칫하면 동서 양쪽에서 독일과 일본의 협공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소련은 공산주의 혁명과 국내 안정이 급선무였다.

 

히틀러 또한 동쪽과 서쪽 양쪽에서 전쟁을 수행하면 전투력이 분산되어 불리하므로 동쪽에 있는 소련과는 일단 전쟁을 피하고 서유럽으로 집중하고자 했다. 그리고 전광석화와 같은 대규모 기계화부대를 이용한 기동전으로 폴란드를 침공한다. 

 

독소불가침조약과 독일의 북유럽 침공

 

독일의 폴란드 점령은 영국과 프랑스의 유화 정책이 불러온 정치적 엄중한 대가였다. 소련도 비밀협약에 따라 폴란드 반을 차지한다. 이후 히틀러는 독소불가침조약으로 우선 서유럽을 침공하고자 했다. 

 

하지만 독소불가침조약으로 소련의 세력권에 있는 핀란드가 소련의 군사기지 할양과 군사기지 대여를 내용으로 하는 상호 원조 조약을 거절하자, 1939년 11월 30일 소련-핀란드 전쟁이 발발한다. 소련은 핀란드와의 싸움인 소위 ‘겨울 전쟁’에서 뜻밖에 고전함으로써 소련군의 취약점을 노출했다.

 

소련-핀란드 전쟁은 일명 ‘계속 전쟁’인 제2차 소련-핀란드 전쟁과 대비하여 제1차 소련-핀란드 전쟁이라고도 한다. 핀란드는 1940년 3월까지 장기전으로 버텼으나 결국 모스크바 평화 조약을 맺고, 소련에 카렐리야 동부지역을 넘겨주게 된다. 소련은 이 땅과 카렐리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 공화국을 합쳐 카렐리야-핀란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세웠다. 결국 핀란드는 이웃한 발트 삼국과는 달리 소련에 다시 흡수되는 운명은 면했다.

 

가오핑중 외 글 · 쑨샹양 외 그림 『동유럽전쟁의 발발, 그림으로 읽는 제2차 세계대전 5』에 나오는 독일의 북유럽 침공 요약이다.

 

“1939년 9월, 폴란드 침공 이후 히틀러는 서유럽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고자 했다. 그해 11월, 소련-핀란드 전쟁이 발발하자 영·프는 반소련 ‘십자군’을 조직해 노르웨이, 스웨덴을 거쳐 핀란드를 지원하려 했다. 

이에 히틀러는 먼저 북유럽을 침공해 후방을 든든히 한 다음 역량을 결집해 서유럽을 치는 것으로 계획을 수정했다. 히틀러는 북유럽을 침공을 위한 ‘베저위붕 작전’을 수립하고 덴마크, 노르웨이 등 국가를 침략해 점령했다. 

북유럽 전선은 독일 파시즘 군대가 서유럽으로 진격하기 전에 치른 한차례 총연습이라고 볼 수 있다.”

 

이제 영국과 프랑스는 더 이상 독일에 대한 유화 정책을 펼 수 없었다. 프랑스와 영국은 독일이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거쳐 북프랑스로 침공한다는 1914년의 ‘슐리펜 계획(Schlieffen-Plan)’을 반복하리라 생각했다.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를 침공하기 위해 ‘슐리펜 계획’을 구상한다. 슐리펜 계획’은 프랑스가 강력한 방어선을 치고 있는 중부와 남부를 견제하고 북부의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통과하여 프랑스를 침공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결과는 독일이 패했다.

 

그러자 히틀러는 ‘슐리펜 계획’을 역이용하여 서유럽을 치는 계획을 변경해 오히려 북유럽 침공을 위한 ‘배저위붕 작전(Operation Weserübung)’을 수립하고 덴마크, 노르웨이 등 국가를 침략해 점령했다. 

 

 독일의 전격전(電擊戰)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Alexandros the Great, BC 356~BC 323), 스웨덴의 구스타브 2세 아돌푸스(Gustav II Adolf, 1594 ~ 1632),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 1815~1898)는 신속하고 치명적인 공격을 구사하는 위대한 지휘관으로 알려져 있다. 독일 또한 제1차 세계대전의 지루한 참호전의 교착상태로 패한 경험을 극복하기 위해 기갑과 항공의 ‘전격전(Blitzkrieg)’을 개발했다.

 

저널리스트인 로빈 크로스의 『세계사를 바꾼 50가지 전쟁기술』(아날로그, 2024)에 나오는 나치 독일 제4대 육군최고사령부 참모총장인 구데리안(Heinz Guderian, 1888~1954)의 ‘전격전’ 개요이다. 

 

“구데리안의 목표는 적과 정면에서 교전해 압도적인 화력으로 격파하는 것이 아니라, 신속히 적의 지휘 통제체계를 혼란에 빠뜨리는 것이었다. 고속으로 기동하며 무전기로 서로 협력하는 독립적인 기계화 제대가 전장에서 가장 중요한 한 점, 즉 ‘중점(schwerpunkt)’을 공격해 돌파구를 연다. 이 부대들은 적의 방어선을 뚫고 후방 깊숙이 침투하며, 뒤에 따라오는 보병은 살아남은 적을 여러 개의 포위망에 나눠 가둔다. 

첫 돌파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공중 포병으로서 루프트바페(Luftwaffe, 독일 공군)의 수평 및 급강한 폭격기를 이용한다.”

 

프랑스는 독일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전쟁부 장관이던 앙드레 마지노(André Maginot, 1877~1932)가 1929년부터 1938년까지 약 10년에 걸쳐 독일과의 접경지역 및 공격 예상지역에 약 750㎞의 이른바 ‘마지노선’을 구축했다. 프랑스는 북쪽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는 삼림이 울창해 기동이 제한될 것으로 판단해 독일과 직접 국경선을 접하고 있는 남쪽을 경계했다. 

 

독일은 벨기에를 침략하고 프랑스가 독일의 침공에 대비해 심혈을 기울여 구축해 놓은 ‘마지노선’을 우회해 프랑스 북부까지 치고 들어간다. 이는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을 치밀하게 연구하며 계획해 놓은 새로운 전술인 ‘전격전’이었다. 독일은 신속한 기동과 기습으로 돌파구를 열었다. ‘전격전’은 속력과 기습이 핵심이다.

 

앞의 저서에서 로빈 크로스는 독일과 프랑스 전투에 대해 요약 기록했다.

 

“1940년 5월 10일, 독일은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침공해 프랑스 국경 뒤에서 3개 집단군으로 전개한 영국과 프랑스군을 붙들어 놓았다. 여기에 속은 영불연합군이 북쪽으로 시선을 돌린 사이 독일군 전차들이 아르덴을 돌파했다. 

5월 13일, 독일군 항공기 약 700대가 뫼즈(Meuse)강에 면한 스당(Sedan) 상공에서 작전하고 있었다. 이 중 200대는 역갈매기형 날개를 가진 Ju 87 슈투카(Stuka) 급강하폭격기였다. 이들은 방어하는 프랑스군에 심한 타격을 입히고 뫼즈강을 건너갈 독일군 보병부대를 위한 교두보를 확보했다. 이날이 끝날 무렵, 독일 기갑부대는 뫼즈강을 건너 사기가 떨어져 포를 버리고 하늘에 슈투카가 나타날 때마다 소총을 땅에 던지는 프랑스군 무리를 지나쳐 갔다.

북쪽을 휩쓸고 간 독일군은 됭케르크(Dunkirk)항 주변에 포위망을 형성해 영국과 프랑스군 상당수를 가두었다. 이 포위망에서 6월 4일까지 34만 명(그중 22만 5,000명이 영국군)이 철수했다. 전투는 6월 25일에 멈췄지만 독일군 전차가 뫼즈강을 건넜을 때 프랑스 전투는 이미 독일군의 승리로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비시 프랑스와 자유 프랑스

 

독일은 6주도 안 되는 시간에 인구 약 6,000만 명, 유럽 최강의 육군을 보유한 프랑스를 점령했다. 

 

맥세계사편찬위원회의 『독일사』에 나오는 프랑스 항복 상황이다.

 

“됭케르크에서 기적이 일어났지만 프랑스 본토에서는 패배가 기정사실이 되었다. 5월 28일, 벨기에가 독일에 항복했다. 이어서 6월 10일에 이탈리아가 프랑스에 전쟁을 선포하고 이탈리아군 21개 사단이 알프스 산을 넘어서 프랑스로 진격했다. 6월 13일, 파리는 무방비 도시를 선포했다. 다음날 독일군이 샹젤리제 거리를 따라 파리로 입성했다. 6월 18일에 보르도(Bordeaux)로 퇴각한 프랑스 정부는 저항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6월 23일 오후 6시 50분,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이 항복 문서에 서명했던 파리 근교의 콩피에뉴 숲에서 프랑스는 굴욕적인 정전 협정에 서명했다. 독일은 4년 동안 이어진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결코 정복하지 못했던 상대를 불과 6주 만에 격파했다.”

 

프랑스는 독일에 항복하면서 약 6할에 해당하는 북프랑스를 나치에 빼앗기고, 나머지 남프랑스는 독일의 조정을 받는 괴뢰국 비시 정부(Vichy regime)가 된다. 하지만 앞서 런던으로 망명한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 1890~1970) 장군을 주축으로 하는 자유 프랑스군은 레지스탕스 운동으로 독일 점령군과 비시 정부에 저항한다. 그리고 드골은 프랑스 민족위원회를 수립하고 프랑스 국내와 북아프리카 식민지에서도 저항운동을 벌인다.

 

프랑스가 독일에 패하면서 정치 군사적 분열을 상징하는 두 세력 비시 프랑스와 자유 프랑스가 생긴다. 이들은 상반된 노선으로 한쪽은 나치 독일의 정책에 협력하고 한쪽은 레지스탕스로서 저항했다. 그 결과 한쪽은 괴뢰정권으로서 몰락하고 한쪽은 새로운 프랑스 정부 수립의 발판이 되어 미래로 나아갔다.

 

qL8aLBTh4ePp4Q4Is6fTSfnWaBN5P9hl37B8WIcx5vsfv3xY88Mg2csLqfDmlZ3XOL3T_ZMk4scsnaDu2RI3XA.webp
파리 해방 후에 샹젤리제 거리를 행렬하는 드골과 그의 측근들 (1944년) 사진출처  : 나무위키
샤를  드골( 앞줄 군복입은 사람).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운동가, 군장교이자 정치인

 

 

유럽 정치·외교·전쟁사를 연구하는 영국 엑서터 대학교 역사학과 명예 교수인 제러미 블랙은 『세상에서 가장 짧은 프랑스사』(진성북스, 2025)에서 비시 프랑스와 자유 프랑스를 평가했다.

 

“비시 정부는 ‘노동, 가족, 조국’을 표어로 내세우며 나치 이념에 부합하는 정책을 펼쳤는데, 특히 유대인 박해와 강제 노동 동원, 레지스탕스 탄압에 가담했다. 비시 정부의 이러한 행보는 정부가 독일에 전면적으로 저항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민간인 피해를 줄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결과적으로 비시 프랑스는 프랑스의 굴욕적인 시기를 상징하며 필리프 페텡을 비롯한 그의 정부는 오늘날 비굴하게 독일에 협력한 배신자로서 평가받고 있다.

독일에 협력한 비시 프랑스와는 달리 자유 프랑스는 샤를 드골의 지도 아래 독일 및 비시 정부에 맞서 싸우며 자국의 독립을 되찾으려 했던 저항 세력이다. 1940년 8월 18일 런던으로 망명한 샤를 드골은 BBC 라디오를 통해 연설하며 항전을 촉구했다. 자신이 진정한 프랑스의 대표라고 주장한 그는 영국, 미국 등과 협력하며 프랑스 본토에서 레지스탕스를 조직했다. 이들은 사보타주나 정보 수집, 연합군 지원 등을 수행했는데, 특히 영국군과 함께 북아프리카에서  추축국 세력과 맞서 싸웠다.”

 

 ‘자유 프랑스’처럼 해방을 준비한 세력과 해방 후 점령군으로 들어온 미군

 

역사에 가설은 없다고들 하지만 만일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단되지 않았다면, ‘비시 프랑스와 자유 프랑스’처럼 일제에 부역한 배신자들을 처단하고 조선도 일제에 맞선 위대한 지도자들로 구성된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어 미래로 나아갔을 것이다.

 

함석헌 선생은 “해방은 도둑같이 뜻밖에 왔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해방이 뜻밖에 온 것이 아니었다. 국외 중국과 소련 접경지역에는 항일무장 독립운동 세력이 창설되거나 싸우고 있었고, 국내에도 해방을 위해 준비해 온 세력이 있었다. 

 

국외 항일 무장세력으로는 대표적으로 김구 선생의 중경 대한민국임시정부(광복군), 김두봉 선생의 화북 조선독립동맹(조선의용군), 김일성 주석의 만주 동북항일연군 등이 있다. 

 

또한 국내에는 몽양의 건국동맹과 이재유, 이관술,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과 노동운동이 있었다. 하지만 이재유는 형 만기 이후에도 전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석방되지 않아 해방을 보지 못한 채 옥사하였고, 이관술은 지하활동을 계속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박헌영은 은신 중이었다.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항복하자 미국은 소련이 한반도 전역을 장악하는 것을 우려해,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분할할 것을 소련에 제안했다. 그리고 어이없이 38도선이 그어지며 조선은 두 동강이 났다. 

 

페이스북_큰_이미지.jpg
조선에 진주한 미군이 조선총독부 건물 앞에 걸렸던 일본 일장기를 내리고  미국 성조기 올리고있다.(1945.9.9)
사진출처 :     블로그 주권연구소

북위 38도선으로 국토가 분단되고 민족은 분열되었고 남북에 각각 미군과 소련군이 들어온다. 

 

1945년 9월 3일 오키나와를 출발한 미국 제24군단 사령관 하지 중장은 미국 장교들에게 한국인은 ‘미군의 적’이라고 말하며, “항복의 조례와 규정을 적용하라”라고 지시했다. 이는 9월 7일에 발표된 맥아더의 포고령 제1호와 2호, 3호를 통해 구체화했다. 

 

포고령 1호에는 “나의 지휘하에 있는 승리에 빛나는 군대는 금일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 영토를 점령한다”,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 등의 내용이 있다. 

 

그리고 포고령 2호에는 “항복문서의 조항 또는 태평양 미국육군 최고 지휘관의 권한 하에 발한 포고 명령 지시를 범한 자, 미국인과 기타 연합국인의 인명 또는 소유물 또는 보안을 해한 자 공중치안 질서를 교란한 자, 정당한 행정을 방해하는 자, 또는 연합군에 대하여 고의로 적대행위를 하는 자는 점령군 군율 회의에서 유죄로 결정한 후 동 회의의 결정하는 대로 사형 또는 타 형벌에 처함”이라는 내용도 있다. 

 

포고의 내용으로 봤을 때 미군은 군사적으로, 점령군으로 적대 지역에 진주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후 1948년 단독정부 수립으로 불행하게도 친미사대주의자 이승만이 집권한다. 이승만은 일제 관료와 친일 반민족행위자 그리고 일부 토착 지주층을 기반으로 한 관계로 민족사의 정통성이나 정당성은 거의 없었다. 따라서 지배통치체제는 인민을 공권력으로 억압하는 강권 통치일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더해 이승만의 권력 탐욕은 끝이 없었다.  

 

1954년 제1공화국 제3대 국회에서 사사오입 개헌(四捨五入 改憲)으로 이승만은 이미 종신 집권할 수 있는 길을 마련했다. 그리고 1960년 실시 예정인 제4대 정·부통령 선거에도 당시 이승만은 85세의 고령이었지만 대통령 선거에 나간다. 

 

제4대 대통령·부통령선거는 기상천외한 총체적 관권 부정선거로 곪을 대로 곪은 자유당 정권의 환부가 마침내 드러난다. 그리고 3·15 마산항쟁이 발생하여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다.  

 

 친일친미 사대주의 정권에 저항한 도예종과 4·9통일열사

 

단독정부 수립으로 조국을 분단시킨 원흉인 이승만은, 마침내 1960년 4·19혁명으로 민중으로부터 단죄받아 쫓겨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5·16 군사쿠데타로 친일사대주의자 박정희가 등장한다. 이후 일제 청산은커녕 군부독재로 한국은 엄혹한 시기를 보내야 했다.

 

신동숙 여사의 부군 도예종은 4월혁명 공간에 교원노조운동에 참여한다. 

 

이는 도예종의 직장 출발이 교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1949년 8월에 국민학교 교사 시험에 합격한 후, 1946년 12월 고향인 봉월국민학교에 교사로 취직한다. 이후 6·25전쟁이 나자 1951년 영주를 떠나 대구로 옮겨와 대구대학 경제학과 3학년에 편입하면서 대구국민학교에 다닌다.

 

도예종이 교원노조운동에 참여한 것은 교원 생활을 하면서 느낀 일제 교육 풍토와 민족 교육 그리고 교육 민주화와 교원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자주적인 단체를 만들기 위해서라고 필자는 짐작한다.

 

신동숙 여사의 도예종 선생에 대한 증언이다.

 

“한국전쟁 발발 후 이듬해(1951년) 아버지가 대구로 전근을 오셨고, 저는 교사직을 관두려다가 아버지 친구분의 도움으로 생각하지도 않게 대구초등학교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도예종 선생님도 영주에 계시다가 대구초등학교로 마침 발령을 받아서 그곳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도 선생님은 경주 계림학교를 나왔고, 부친은 한문학자이셨고, 5형제중에 막내라고 합니다. 형님들이 만주도 돌아다니면서 재산을 탕진해서, 도 선생님이 학교 다닐 쯤에는 가난했다고 합니다. 초등학교 졸업 후에는 일을 하다가, 거기서 누가 소개를 해줘서 중학교는 일본에서 다녔다고 합니다. 

그때 공부를 하면서 선배들에게 교육을 받으면서 민족적인 의식을 키운 것 같습니다. 대동아전쟁이 한창일 때 귀국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남편은 일제 강점기 때 일본 사람 지배를 받은 것도 한인데, 해방 후 민족이 분단된 것을 마음 아파하였습니다. 우리끼리 정치를 해야 하고 민족통일을 이룩해야 하며, 전통 민족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민족정신이 대단하였어요.” 

 

신동숙 여사는 도예종 선생의 영향으로 단군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필자에게 “나라는 작지만 그래도 우리는 한민족이라는 자부심이 있잖습니까? 이북에도 단군릉을 복원하는 등 민족정신에 나서고 있잖아요!”라고 자주 말하곤 하였다.

 

도예종은 교원노조운동과 함께 청년 운동인 민주민족청년동맹(민민청)에 가입하여 민민청 경북맹부 간사장으로 활동한다. 

 

JYQA8lSIL2.png
한미경제협정반대운동(1961.2.8- 1961.3.2) 가두 시위중인 시위대 . 사진출처 : 민주화운동 사전  

 

특히 1961년 ‘미국에 예속될 수밖에 없는 경제협정’이라며 각계각층이 참여하는 한미경제협정 반대하며 도예종을 위시한 혁신계는 ‘2·8한미경제협정반대공동투쟁위원회’를 조직하여 반대 투쟁을 벌였다. 

 

1961년 2월 14일 개최된 전국학생한미경제협정반대투쟁대회의 미국 정부에 보내는 메시지 일부이다.

 

“한미신경제협정 반대투젱을 일으키는 우리는 자주와 독립에의 지향을 가진 긍지있는 민족의 젊은 아들들이다. 우리는 전체의 분노한 민족의 의사를 대표하여 최근 당신들과 우리 정부간에 체결된 예속적 식민지적 불펑등협정에 결연히 반대한다. 

당신들이 이번 협정을 체결함에 당해 제시한 전조약들은 무엇인가? 

한미상호방위조약(54년 12월), 한미상호방위원조협정(50년 1월), 대한민국과 통일사령부간의 경제조정에 관한 협정(52년 5월) 등은 전시에 일체의 비판적인, 또한 진실한 의견이 봉쇄된 가운데 당신들과 이승만 일당이 체결한 것이다. 이승만 일당과 당신들 가운데 체결된 여러 가지 협정의 내용을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승만 일당은 전체민족의 손으로 추방되었거니와 도대체 당신들은 이 제불평등조약을 철폐할 생각은 않고 일보 강화하여 달려듦은 우리를 농락하는가? 조목조목 따질 필요가 없다. 한 마디로 말하여 이 협정은 식민적 불평등조약이다.”

 

※ 격주로 연재합니다.

 

[울산함성 무료구독 신청]  https://t.me/+ji13hLs-vL83ZTBl

 

삭제하시겠습니까?
취소
사진 및 파일 첨부

여기에 파일을 끌어 놓거나 왼쪽의 버튼을 클릭하세요.

파일 용량 제한 : 0MB (허용 확장자 : *.*)

0개 첨부 됨 ( / )
취소

교양

[시] 쿠팡

2026.01.23

1

연재

신동숙(15) 유럽의 화약고 발칸 반도 - 유고 빨치산과 간도 빨치산 그리고 군인들 세상에 저항하는 도예종 -

: 사람을 찾아서(4·9통일열사 도예종의 아내 신동숙)

2026.01.20

교양

[서평] '위기의 세계'에 던지는 촘스키의 경고 <누가 세계를 지배하는가>

2026.01.19

교양

[노동시] 살아있음을

2026.01.01

교양

[노동시] 성탄절과 노동자

ㅡ 노동해방 사회를 염원하며

2025.12.25

교양

[노동시] 사랑이라는 흔적

2025.12.25

연재

신동숙(14) 비시 프랑스와 자유 프랑스 - 친일친미 사대주의에 정권에 저항한 도예종과 4·9통일열사 -

: 사람을 찾아서(4·9통일열사 도예종의 아내 신동숙)

2025.12.23

역사

원풍모방 박순희, 풀은 밟혀도 다시 일어선다

2025.12.15

교양

[시] 홧팅 하시길…

노동조합에서 해고된 상근자의 열정을 보며

2025.12.09

교양

[노동시] 《전태일 기념관은 "아름다운 청년"이 아니라 "노동해방의 불 꽃" 이여야 한다!》

2025.1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