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
정치·경제
-
오피니언
-
국제소식
-
오피니언
-
전국노동
-
전국노동
-
전국노동
1938년 9월 30일, 영국의 체임벌린(Neville Chamberlain, 1869~1940) 수상과 프랑스의 달라디에(Édouard Daladier, 1884~1970) 총리는 히틀러와 독일에서 굴욕적인 ‘뮌헨 협정’을 체결한다.
그러나 협정 체결한 이튿날, 체임벌린은 런던 비행장에서 내리면서 “영광스러운 평화를 가져왔다! 금후 한 세대의 평화는 보장됐다!”라고 환호하는 군중을 향해 외쳤다. 달라디에 역시 파리로 돌아와 “달라디에 만세!”, “평화 만세!”라는 국내 타협론자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의 비타협론자는 히틀러를 신뢰할 수 없는 자라고 경고했지만 무시되었다.
‘평화’는 힘의 이중성이 철저하게 적용되는 ‘거대한 음모’이다.
국제사회에서 강자는 비슷한 힘을 가진 나라에 대해서는 ‘평화’란 명분으로 전선을 현 상태로 유지하려고 하지만, 약자에게는 틈이 보이면 ‘거대한 음모’로 바로 침공해 ‘평화’란 구실로 지배한다.
현재 트럼프가 콜롬비아, 멕시코, 베네수엘라 등 남미 정부를 공격하려는 속셈은 침략 지배이지만 마약전쟁을 구실로 즉 ‘평화’라는 ‘거대한 음모’이다.
히틀러 또한 앞에는 영국과 프랑스와는 평화협정체결로 현 전선을 유지하지만, 뒤로는 오스트리아를 병합했다.
굴욕적인 ‘뮌헨 협정’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병합 이후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할 계획을 세운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에서 분리 독립하여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와 동맹을 맺었다. 3국 동맹은 그 어느 나라도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등장했다. 또한, 체코슬로바키아는 1차대전 직전까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강철 야포, 전차, 전함의 거대한 함포를 생산하는 ‘슈코다(ˈʃkoda, 현재는 폭스바겐 그룹 산하 자동차공장)’라는 무기공장도 있었다. 그뿐 아니라 1924년 체코슬로바키아는 프랑스와 군사동맹을 맺으면서 군사 안전 보호장치도 만든다.
그러나 히틀러는 눈치 보는 프랑스가 체코슬로바키아를 위해 독일과 전쟁까지 불사하지는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히틀러는 독일·체코슬로바키아 국경 지역이자 게르만족이 350만여 명이 사는 주데텐란트(Sudetenland)를 체코슬로바키아 침략을 위한 분쟁 지역으로 만들어 침공의 명분을 삼는다.
맥세계사편찬위원회의 『독일사』에 나오는 주데텐란트 지역 독일 침공 구실을 위한 민족 분열 책동상황이다.
“1935년부터 수데텐란트(필자, 독일명 주데텐란트)의 독일당이 민족 간에 분란을 조장했다. 이 꼭두각시 정당의 지도자인 콘라트 헨라인(Konrad Henlein)은 베를린의 지시에 따라 수데텐란트를 분열시키고자 책동했다.
체코슬로바키아 내부에서 분열 책동을 시작하자 베를린의 히틀러도 이에 호응했다. 1938년 5월, 히틀러는 ‘수데텐란트 지역의 게르만족이 학대를 받고 있다. 독일은 동족을 보호할 책임이 있으며, 그들이 자유를 쟁취하도록 나서야 한다.’라고 공공연하게 민족 감정을 자극했다.
(중략)
그런데 영국과 프랑스는 동맹국인 체코슬로바키아의 편에 서지 않았다. 오히려 히틀러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전쟁에 개입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들의 입장을 밝히고,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에는 독일에 최대한 양보하라고 요구했다.”
또한 히틀러는 “주데텐란트 지역의 게르만족을 위해서라면 독일은 세계대전도 마다하지 않갰다”라고 강경한 태도를 보이며 협박한다.
이런 일촉즉발의 정세에서 영국의 체임벌린, 프랑스의 달라디에,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독일의 히틀러가 1938년 9월 29일에 뮌헨에 모여 체코슬로바키아를 배제한 채 주데텐란트 영유권 문제를 논의한다. 그리고 다음 날 9월 30일, 굴욕적인 ‘뮌헨 협정’을 체결하고 다시는 침략하지 않겠다고 히틀러는 약속하지만, 이는 영·프를 안심시키고 전쟁준비를 위한 ‘평화’를 가장한 정치 쇼에 불과했다.
독일의 유럽 침략 교두보,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는 ‘뮌헨 협정’으로 주데텐란트 지역과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맞댄 남부지역을 독일에 할양된다. 무려 영토 5분의 1과 전국의 절반 이상이 밀접한 공장지역을 체코슬로바키아는 빼앗기게 된다. 그런데 이것이 다가 아니었다. 히틀러는 불과 반년 후 1939년 3월 ‘녹색 작전’이라는 침략 계획을 세워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여 점령한다.
앞의 저서에서 맥세계사편찬위원회는 제2차 세계대전에 사용한 독일의 색깔 작전명을 밝혔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 총참모부는 수많은 작전 계획을 세웠는데 각 작전의 코드를 색깔로 구분했다. 예를 들어 ‘녹색 작전’은 수데텐란트 지역의 병합을 가리키고, ‘황색 작전’은 벨기에, 네덜란드, 프랑스와의 전격전을 가리키며, ‘홍색 작전’은 제2단계 프랑스 침공을 뜻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백색 작전’이다. 폴란드 침공에 관한 이 계획은 제2차 세계대전의 서막을 열었다.”
유럽대륙 동쪽에 위치한 폴란드는 18세기에 동쪽으로는 러시아, 서쪽으로는 프로이센, 남쪽으로는 오스트리아-형가리제국, 북쪽으로는 발트해와 인접해 있었다. 이런 지리적 특성으로 폴란드는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로부터 침공을 받아 영토가 세 차례에 걸쳐 나뉘었고 100여 년 동안 주권을 잃었다. 1918년 11월 11일 폴란드는 123년 만에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폴란드공화국(Republic of Poland)으로 독립한다.
이후 폴란드는 독일에 점령당했던 포모제와 포즈난 지역을 수복하고 비스와강(Vistula River)에서 발트해로 이어지는 폴란드 회랑과 항구도시 단치히(Danzig, 현재 그단스크 Gdańsk)시를 얻어냈다. 이는 영국과 프랑스가 폴란드의 세력을 키워 독일과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겁도 없이 독일의 영토를 집어삼킨 폴란드를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라고 말했다. 물론 이것은 표면에 불과한 것이었다.
맥세계사편찬위원회는 앞의 저서에서 분석한 히틀러의 야욕이다.
“히틀러가 단치히만을 노린 것은 아니었다. 폴란드는 석탄 자원이 풍부했고 기계, 조선업이 발달했다. 폴란드를 차지한다면 전쟁 준비가 수월해지고 영국과 프랑스를 동쪽에서 막아낼 수 있으므로 폴란드야말로 당시 독일에 필요한 모든 좋은 조건을 갖춘 곳이었다.”
마치 일본이 중국대륙침략을 위해 조선을 전략기지로 삼았던 것과 같이 폴란드는 독일의 유럽 침략교두보였다.
히틀러는 폴란드를 점령하면 후방에 있는 영국과 프랑스의 공격도 해소하고 동시에 폴란드를 발판 삼아 소련을 공격할 수 있다는 구상을 한다. 그래서 히틀러는 단치히를 독일에 반환하라고 압박한다.
제2차 세계대전의 서막, 독일의 폴란드 침공
히틀러의 야욕을 눈치챈 영국과 프랑스는 1939년 4월과 5월 폴란드와 군사방위상호원조협정을 체결하고 독일에 폴란드를 보호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밝힌다. 또한 영국과 프랑스는 히틀러가 폴란드의 침공 계획을 확정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영·프·소 3국이 모스크바에서 회담을 시작한다.
가오핑중 외 글 · 쑨샹양 외 그림 『동유럽전쟁의 발발, 그림으로 읽는 제2차 세계대전 3』에 나오는 회담 내용이다.
“4월 15일 영·프·소 3국이 드디어 모스크바에서 회담을 시작했다. 영·프 대표는 일단 히틀러가 전쟁을 도발하면 소련은 반드시 영·프에 대한 원조 및 영·프 동맹국의 안전에 대해 책임이 있지만, 영·프는 소련 및 소련과 인접한 발트해 국가에 대한 원조 의무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이 때문에 양측은 합의에 이루지 못했다. (중략)
7월 유럽의 형세가 날로 위태로워지자 소련은 소·영·프 3국이 정치회담과 함께 군사회담도 진행할 것을 제의했으나 영·프 양국은 시간을 끌면서 소련의 제안을 무시했다.”
히틀러는 영·프의 동쪽과 소련의 서쪽 2개의 전선에서 전쟁을 치르지 않기 위해 줄곧 타협과 양보로 일관하는 영·프를 부추긴다. 히틀러는 소련과 영·프의 관계를 더욱 갈라놓으려는 목적으로 독소불가침조약체결을 서두른다. 스탈린은 책임 공방만 벌이는 영·프의 협상 행태에 종지부를 찍고, 독일 이탈리아 일본 파시즘과의 전쟁 준비에 대처하기 위해 1939년 8월 23일, 10년을 기간으로 독소불가침조약을 체결한다.
1939년 8월 31일, 마침내 히틀러는 독소불가침조약을 악용하여 폴란드 ‘백색 작전’을 9월 1일 새벽에 개시하라고 명령한다. 독일은 57개 사단 150만 명의 병사, 전차 2천 5백여 대 그리고 비행기 2천 3백 대를 동원해 폴란드를 기습공격했다.
폴란드와 동맹 조약을 체결했던 영국은 9월 3일 오전 11시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 6시간 뒤 프랑스도 독일에 선전포고한 데 이어 영·프 자치령도 잇달아 대독일 선전포고를 했다.
가오핑중은 앞의 저서에서 선전포고만 하고 아무런 조처도 하지 않는 영국과 프랑스의 ‘가짜 전쟁’을 기록한다.
당시 독일과 프랑스 국경 지대에 영·프 연합군은 총 110개 사단이 있었던 반면 독일군은 오직 23개 사단밖에 없었으므르 영·프 연합군이 서쪽에서 공격한다면 독일군은 앞뒤를 동시에 상대할 수 없어 심각한 위험에 빠질 수 있었다. 그러나 영·프 군대는 상황을 주시할 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폴란드 접부가 거듭 영·프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영·프 군대는 마지노 방어선 진지에 숨어 독일군 군용차가 독·프국경 지대에서 질주하는 것을 구경할 뿐 총 한 번 쏘지 않았다. 영·프연합군 총사령관 가믈랭 장군은 심지어 “반드시 적군이 먼저 공격할 때까지는 움직이지 마라”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독일의 북유럽 침공과 홀로코스트 『안네의 일기』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전쟁에 대해 군사학자들은 세계전쟁사에서 ‘기계화 부대를 이용한 전격전’의 시작이라고 했다.
맥세계사편찬위원회는 앞의 저서에서 당시 전격전을 기록했다.
“하늘에 공군 폭격기가 날카로운 기계음을 내며 비행하더니 폴란드의 다리, 철도, 도로, 비행장에 폭탄 수천 톤을 투하했다. 이 공격으로 폴란드 전투기 수백 대가 이륙도 못 해 보고 화염에 휩싸여 고철 덩어리로 변해 버렸다.
땅에서는 독일군 탱크 수천 대가 매일 수십 킬로미터 속도로 전진했고 탱크 뒤에 전차, 오토바이, 자동차를 탄 독일군이 뒤를 따랐다. 전쟁이 시작된 후 첫 일주일 동안 독일군의 기계화부대는 이미 폴란드 국경에서 수백 킬로미터를 진격했고, 폴란드 군대는 별다른 대응도 못 해 보고 혼란에 휩싸였다.
폴란드군 35개 보병사단의 절반 이상이 독일군에 포위되어 전쟁은 이미 일방적인 학살로 변했다.”
영·프 양국이 말뿐인 대독일 선전포고만 하고 폴란드와의 군사방위상호원조협정에 따른 군사 행동은 하지 않아, 한 달도 채 안 돼 독일은 폴란드를 9월 27일 점령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유럽대륙에서 전면적으로 발발한 것이다.
1939년 폴란드를 침공한 나치 독일은 영·프의 우유부단한 유화 정책 상황을 이용하여 1940년 4월, 속전속결로 서부전선에 대규모 공격을 감행해 두 달 만에 북유럽의 덴마크, 노르웨이와 뒤이어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까지 점령한다. 이후 독일은 유대인들에 대한 박해를 가하기 시작한다.
이때 나치 독일이 행한 홀로코스트의 피해자인 안네 프랑크(Anne Frank, 1929~1945)의 『안네의 일기』가 시작된다. 홀로코스트(The Holocaust)는 1941년부터 1945년까지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주도하고 파시스트 협력자들이 동참하여 벌인 유대인을 향한 제노사이드를 일컫는다.
안네는 1929년 6월 12일, 유대인 거주지역이 있던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오토 프랑크(Otto Frank)로 부유한 유대인 은행가였는데,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탈취하자 재난이 닥칠 것을 예견하고 가족들과 함께 중립국인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했다. 네덜란드가 중립국이니 히틀러가 중립국인 네덜란드만큼은 결코 손을 대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고 네덜란드로 간 거지만, 1940년 5월 침략의 총부리는 네덜란드로 향한다.
서경식의 『사라지지 않은 사람들』(돌베개, 2007)에 나오는 안네의 이야기이이다.
“1942년 7월, 마침내 안네의 언니 마르코트 앞으로 ‘동방(東方) 노무동원’ 소환장이 송달된다. 그것이 죽음의 수용소행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던 아버지 오토는 미리 마련해둔 ‘은신처’에서 일가족이 모두 숨어 지내기로 결심한다. 안네가 이 ‘은신처’에서 지낸 날들을 다감하고 총맹한 소녀의 눈으로 써내려간 일기는 안네의 가족들이 연행되고 난 뒤 다행히도 쓰레기 속에서 발견되어 전쟁 후까지 보존될 수 있었다.
‘은신처’에서 보낸 나날들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고통이기만 했지만 안네에게는 하나의 모험이었다는 증언이 있다. 실제로 『안네의 일기』에 엿보이는 안네 프랑크의 초상은 활발하고 기지가 넘치며 유머와 비판 정신을 잃지 않는 지극히 매력적인 소녀의 모습이다. 그 글을 읽는 우리는 안네의 그런 모습에서 어떤 ‘희망’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 무고한 소녀는 똑같이 무고한 수백만 명의 사람들과 더불어 아무런 희망도 없는 죽음을 향해 걸어야 했다.”
나치의 ‘긴급 명령’과 유신 정권의 ‘긴급조치’
앞의 저서에서 서경식은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과 한국을 설명했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은 1970년대 말 한국에 번역되어 군사독재에 저항하던 학생들 사이에서 필독서처럼 읽히며 한국 학생운동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나치의 ‘긴급 명령’과 유신 정권이 발동한 ‘긴급조치’, 전두환 군사독재의 철권통치가 일체의 비판을 봉쇄한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해 이 책의 상황과 당시 한국의 상황을 유사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긴급조치 9호 세대들은 이 책에서 영감을 얻어 ‘반정부 페인트 낙서’라는 저항 방식을 착안하기도 했는데, 1979년 2학기 개강 직후 연세대 독수리상 기둥에서 발견된 ‘유신철폐’, ‘독재타도’라는 붉은 페인트 낙서 등이 그 예이다.”
신동숙의 부군 도예종은 반(反)유신 활동과 함께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된다. 그리고 ‘긴급 조치’ 위반으로 또다시 체포된다. 소위 2차 인혁당재건위 사건이다.
부군 도예종 선생의 당시 체포 상황과 서대문 형무소 문전박대에 대한 신동숙의 증언이다.
“출소 후 공직은 못 하니까 경북 영천에서 영남일보 지국 일을 합니다. 거기에서도 신문사라서 그런지 그것도 못 하게 압력과 감시를 받아 못하고, 남편 셋째 형님이 하시는 삼성토건(三盛土建) 회사를 도와드렸습니다.
나중에 형님이 연세가 많아 당신이 한다고 대구에서 회사경영을 하였는데, 형사들이 조직적으로 방해와 감시를 하여 사업이 실패합니다. 그리고 1974년 ‘인혁당재건위 사건’으로 다시 구속될 때까지 삼화건설(三和建設)에서 월급 받는 사장으로 일합니다.
1974년 4월 20일 새벽(5-6시)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 나가니, 두 분의 남자가 ‘도선생님 계십니까?’ 하기에 저자 ‘이 새벽에 누구십니까?’ 하니 ‘잠깐 무엇을 물어볼 것이 있으니 뵙자’고 했습니다. 저가 ‘지금 도선생님은 선생님을 제일 사랑하고 아끼던 시숙이 돌아가셔 장례와 삼우제까지 지내고 어제 늦게 오셔서 주무신다.’고 하니 ‘잠깐만 뵙겠다’고 해서 곤하게 자는 분을 깨웠습니다. 현관에 나가더니 남편은 ‘나 잠깐 나갔다 오겠다’면서 집을 나가셨습니다.
점심때가 되어도 소식이 없어 회사에 연락하니 연락이 없다기에, 너무 걱정되어 큰집 조카에게도 찾아가 이야기를 했더니 학생들 데모가 심하니 예비검속한 것이 아닌가 하면서 걱정을 했습니다.
서울에 붙잡혀 가신 것이 아니겠는가 하여 조카와 둘이서 서울 남산 정보부를 물어서 찾아갔더니 문지기 헌병들이 그런 사람은 모른다면서 냉대해 어쩔 수 없이 대구로 되돌아왔습니다. 집에 오니 서도원 선생님 부인이 다녀갔다 하시기에 서 선생님도 같이 가신 것으로 알게 됩니다.
그리고 누가 서대문 교도소에 계신다고 하기에 서대문 교도소 앞에서 며칠을 기다리다가 못 보고 대구 갔다가 걱정되어 또 서울로 올라가고 이런 일이 반복되었어요. 그러다가 우홍선씨가 세단차에 타고 가는 것을 보고 우선생님댁에 전화를 했더니 서울 사람들도 많이 잡혀갔다 합니다. 이후 며칠 있다 보니 이수병씨 부인과 동생이 애기를 업고 차가 다니는 곳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수병씨 부인이 교도소에 면회 신청을 하니 그런 사람은 명단도 없다고 해서, 면회는커녕 영치금도 받아주질 않았습니다. 교도소엘 매일같이 있다 보니 학생 부모님들도 와서 무슨 일인가 하고 야단들이었습니다.
한 달 가까이 지나서야 신문에 학생데모 배후 조종자이며 간첩으로 나왔습니다. 날벼락이었지만 힘없는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어 함석헌 선생님을 찾아뵙고 의논도 하고, 문동환 목사님 댁을 찾느라 하루 종일 걸어 다니기도 하였습니다. 두 분의 조언으로 명동성당, 기독교회관 등을 찾아다니면서 호소했으나 그분들도 빨갱이라면서 싫어했습니다. 저는 심장이 안 좋아 청심환과 구심약을 가방에 넣어 다니면서 수시로 먹고 다녔습니다.”
※ 격주로 연재합니다.
[울산함성 무료구독 신청] https://t.me/+ji13hLs-vL83ZTBl
신동숙(14) 비시 프랑스와 자유 프랑스 - 친일친미 사대주의에 정권에 저항한 도예종과 4·9통일열사 -
: 사람을 찾아서(4·9통일열사 도예종의 아내 신동숙)
2025.12.23
신동숙(13) 제2차 세계대전의 서막, 독일의 폴란드 침공 - 나치의‘긴급 명령’과 유신 정권의‘긴급조치’-
: 사람을 찾아서(4·9통일열사 도예종의 아내 신동숙)
2025.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