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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 비판은 혼란스럽고 일관되지 않은 모든 논의를 뒤따라가는 게 아니라 수십 가지의 특성 중에서도 그 다양함에도 관통하고 있는 특성을 끌어냄으로써 본질적 성격을 파헤치고 비판하는 것이다. 이는 맑스주의의 추상에서 구체로 나아가는 방법론이기도 하다. 추상은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 불필요한 현상이나 우연적 요소를 지우고 핵심 개념만 도출하는 인식의 첫 단계이다.
맑스는 자본주의 세포인 상품 연구로부터 자본주의를 분석하였다. 이로부터 상품의 발전 형태인 자본과 자본이 만들어내는 가치의 실체는 노동이라는 노동가치설과 노동자들의 착취와 계급투쟁의 필연성을 밝혀냈다.
이 계급투쟁은 제국주의 지배와 식민지ㆍ반식민지에서의 민족해방 투쟁을 낳았다. 레닌은 《제국주의론》 연구를 위해 자본주의의 가장 기본에 있는 생산을 중심에 두면서 그 필연적인 발전인 독점을 가지고 그 상부구조로서의 제국주의를 분석하였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본질을 밝히기 위해 그 수많은 특성들을 다 고려할 수는 없다. 대신 비본질적 특성을 제거하고 가장 본질적인 특성, 그 기본전제와 그 전제로부터 나오는 사상 핵심을 이해하고 비판해야 한다. 포스트모더니즘 비판 역시 현학이 아니고 이 비판을 통해 이것이 가지고 있는 반혁명적 실체를 폭로함으로써 사회 변혁의 실천적 무기로 사용하는 것이다.
최일붕은 이에 대해 "그 저작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여러 층위를 지나치게 단순화"(최일붕 노동자연대 운영위원, 전국노동자정치협회의 포스트모더니즘 비판과 그 한계 —《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신좌파 다원주의 이데올로기 비판》에 대한 비판적 서평, 〈노동자 연대〉 579호 , 2026-04-07)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했듯, 과학은 다양한 현상 속에서 본질을 뽑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다양한 정치사조들이 각자 다양성과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이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공통적인 지점을 뽑아내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여러 층위를” 단순화 하여 그 사조의 기본 성격을 밝히지 않고 복잡하게 뒤따라가면 비판은 산으로 가게 되어 현학에 빠지게 된다. 이는 단순하게 “흠” 정도가 아니라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다.
최일붕 식이라면 맑스는 자본주의의 “여러 층위를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이 된다. 최일붕이 비판 근거로 사용하는 캘리니코스의 글 《포스트 모더니즘 비판》 은 역자가 후기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한 다른 논자들의 인용이 너무 과도하게 서술되어 그가 최종적으로 말하는 논지가 제대로 구별되지 못한 흠으로 남아 있다”고 평가한 것처럼, 포스트모더니즘의 본질적 특성을 단순화 하지 않고 “여러 층위를 지나치게” 복잡하게 하여 그 각각의 주의ㆍ주장들을 뒤따라가면서 살펴봄으로써 포스트모더니즘 비판인지 소개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현학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이에 따라 “비판은 해부용 칼이 아니라 하나의 무기이다. 비판의 대상은 비판의 적, 논박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절멸시키고자 하는 적이다.”(맑스, 《헤겔 법철학 비판을 위하여 서설》, 1844년)는 맑스주의 비판 정신을 잃어버리고 있다.
이는 이후에 살펴보겠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이 파시즘과 소련을 전체주의 체제로 간주함으로써 양비론에 빠지고 그에 따라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의 일환으로 빠진 핵심 지점에 대한 비판을 하지 않게 되는데, 이는 트로츠키주의 자신이 바로 포스트모더니즘과 같은 양비론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던이란 거대담론에 대한 불신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본질적인 특성은 모더니즘을 넘는 것인데 그것은 가장 먼저 거대담론, 거대 서사에 대한 부정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쉽게 말해 “하나의 절대적인 진리나 기준은 없다”는 생각이다. 즉, 세상을 하나의 방식으로만 설명하려는 시도를 의심하고, 다양한 관점과 해석이 공존할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리오타르는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을 “거대담론에 대한 불신”이라고 정의했다.
1991년 공산주의 체제의 종주국이었던 소비에트 연방이 무너져버리면서, 50년간 지속되었던 냉전체제가 끝나버리면서, 세계는 우파의 자유주의가 일방적으로 승리한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 거대담론이 소멸된 세계 즉 좌파와 우파의 대립이 무의미해진 질적으로 다른 세계 속으로 들어와 있다는 것이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 사회이론입니다.
(“리오타르와 포스트모더니즘: 거대서사의 종말과 비도덕적인 기술 사회의 도래”, 알따쏘르 블로그, 2011. 6. 18.)
복잡한 사회를 관통하는 법칙을 파악하려는 시도를 부정하고 “다양한 관점과 해석이 공존”한다고 보는 것은 사회를 총체적으로, 역사적으로 파악하여 모순을 파악하여 변혁하려는 시도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하나의 절대적인 기준”인 계급도 없는 것이 된다. 계급이 없으니 계급모순이나 계급투쟁도 없다. 이것이 다원주의다. 그러나 저마다의 “다양한 관점과 해석이 공존”한다면 이는 주관주의적이고 상대적인 것이다.
“현실의 다양성과 복잡성”은 그것을 뒤따라가며 눈에 보이는 대로 설명한다고 해서 이를 제대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현실의 복잡하고 다양한 현상 배후를 관통하는 본질을 파악해야 한다. 이것이 자연과 사회에 대한 법칙의 연구이고 이것이 변증법적 유물론이다.
나의 주관적 관점이 상대방의 주관적 관점과 불일치하고, 나의 선이 다른 사람에게는 악이 될 때 그 “공존”은 공존할 수 없는 것이다. 자본가들에게 선은 노동자를 착취하여 무한이윤을 추구하는 것이고 노동자에게 선은 착취를 제어ㆍ중단시키고 권리와 복지를 쟁취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이는 공존이 아니라 화해할 수 없이 적대적인 것이다.
이들은 착취와 억압, 제국주의는 근대의 산물이고 자본주의 과학기술 발전과 대량 소비 사회가 도래했기 때문에 이 사회는 본질적으로 변해버렸다고 주장한다.
“좌파와 우파의 대립이 무의미해진 질적으로 다른 세계”가 펼쳐짐에 따라 그들은 근대의 산물이라고 하는 민족과 민족해방, 계급과 계급투쟁, 노동자중심성과 통일전선은 의미가 없어져 버렸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더니즘의 조건》이 1979년 출간되었으니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는 거대서사의 종말이라는 그의 이론을 정당화 하는 근거로 사용됐다. 그러나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는 “거대담론이 소멸된 세계 즉 좌파와 우파의 대립이 무의미해진” 것이 아니라 그 대립의 결과였고 그에 따라 승리자인 미국 중심의 일극체제가 계속되었다.
이미 1980년에 나온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이라는 책이 주장하는 것처럼, 자본주의가 변화하면서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의 도래를 입증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 세기 동안, '프롤레타리아' 사상은 자신의 비현실성을 은폐하는 데 성공했다. 현재 그 사상은 '프롤레타리아' 자체만큼 시효가 지난 것이 되었는데, 이는 생산 노동자집단 대신 비非노동자들의 비非계급이 태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계급과 달리, 이 비계급은 자본주의에 의해 생겨나지도 않았고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들의 낙인도 지니고 있지 않다...
실제로 이 비계급은 노동의 소멸과정에 따라 생산현장을 떠나게 된 사람들 혹은 지적 노동의 산업화(즉 자동화와 정보화) 과정에서 자신의 능력에 못 미치는 일자리를 얻는 모든 사람들을 포괄한다. 이 비계급은 실제적으로나 잠재적으로, 지속적으로나 일시적으로, 완전하거나 부분적으로 실업상태에 있는 임시직의 모든 사람들을 포괄한다.(앙드레 고드, 《프롤레타리아여 안녕》)
그런데 이들이 묘사하는 변화의 실질적 의미는 무엇인가?
세상은 변화하는가? 변화한다. 변화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변화무쌍하다. 그러나 겉으로 보아서는 빠르게 변화하는 현실 그 이면에서 변화하지 않는 불변의 현실이 있다. 그것은 이 사회의 근본모순이다. 이 세상의 본질적 모순과 질곡은 변화하지 않는다. 혁명이라는 격변에 의해 다른 사회로 이행하지 않는 한 모순과 질곡은 그대로 유지된다. 비록 겉모습은 변화한다 할지라도 본질은 더 고도화되거나 세련된 모양을 취하기도 하면서 그대로 유지된다.
(《맑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신좌파 다원주의 이데올로기 비판》, 2026년 2월 11일)
앙드레 고드가 프롤레타리아에게 안녕을 고하고 “프롤레테르”라는 신계급의 등장을 예고했는데, 이는 프롤레타리아의 비프롤레타아트의로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의 대폭 확장을 의미함으로써 맑스의 주장을 더 확고하게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었다.
맑스주의를 산업노동자계급, 공장노동자계급의 사상만으로 협소하게 이해하지 않는다면, 오늘날 노동의 유연화, 저임금 불안정노동자층의 양산은 맑스가 《자본론》에서 실업의 여러 양상을 열거하면서 분명하게 밝힌 것이었다. 특수고용노동과 플랫폼 노동의 확산은 자영업자의 증가가 아니라 맑스가 소생산자의 전반적인 축소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확장에서 밝힌 바처럼, 노동자계급의 확대와 자본의 거대자본으로의 집중 현상을 분명히 한 것이다.
오늘날 거대자본은 특수고용노동과 플랫폼 노동은 자영업자라고 하지만 노동자들은 "진짜 사장 나와라", 원청 사용자성 투쟁을 통해 이러한 새로운 고용형태의 배후에 거대자본이 있다는 것을 제기하고 입증하고 있다.
외주화의 현실은 소생산의 증가의 사례가 아니라 자본이 독점화 되는 현실의 모습에 다름 아니다. 오늘날 외주화의 배후에 독점자본이 있고, “대기업에서 기간제·단시간 근로자 비중 늘었다”는 기사를 보더라도 그렇다.
그리고 또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오늘날 자본은 외주화 시키고 있고 고용규모를 계속 줄이고 비정규직 고용을 확대하고 있지만, 여전히 자동차, 조선, 철강, 반도체, 석유화학 등 대부분의 핵심 사업은 (대)공장 산업이다. 현대화된 프롤레타리아트 역시 비계급으로 전환된 것이 아니고 자본주의와 무관하게 생겨난 것도 아닌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우리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안녕을 고할 것이 아니라 저임금, 고용불안, 장시간 노동, 실업, 무권리 상태에 빠진 노동자들이 하나의 계급으로 단결하고 자본주의 착취사회를 철폐하는 투쟁에 나서도록 해야 한다.
변화상의 또 하나 근거로 제시되는 “냉전체제의 종결” 역시 신냉전의 도래로 지속되고 있다. 소비에트권 해체 이후 미국 중심의 일극 체제는 신냉전의 도래에서 보듯, 사회주의 국가와 민족해방 투쟁의 계속, 서방 중심에 일극체제에 맞서는 다극체제의 투쟁으로 새로운 조건에서 한층 더 격렬해졌다. 이 투쟁의 핵심은 제국주의와 주권을 지키기 위한 나라, 민족 간의 투쟁이었다.
쇠퇴하고 있지만 여전히 미제국주의가 중심에 있는 제국주의 체제는 자본주의의 수다한 변화상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 점령과 학살, 이라크, 시리아 침략과 이란 침공, 우크라이나에서의 대리전, 베네수엘라에서의 내전 야기와 체제전환(레짐체인지) 기도, 조선과 쿠바에 대한 제재와 적대정책, 반러, 반중 적대 등 침략성, 반동성, 야만성이라는 제국주의 모순을 깊게 만들고 있다.
“지식은 판매되고 소비되기 위해 생산”하는 자본주의는 포스트 모던의 “질적으로 다른 세계”의 도래가 아니라, 맑스ㆍ엥겔스가 일찍이 《공산당선언》에서 강조한, “부르조아지는 인간을 ‘타고난 상하관계’에 묶어 놓는 잡다한 봉건적 끈을 가차없이 끊어버렸으며, 그외의 모든 인간의 관계를 적나라한 이기심, 냉혹한 '현금지불관계'로만 만들어 놓았다...또 개인의 존엄성을 교환가치로 용해시켜 버렸”다는 주장이 더 냉혹하게 현실적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지식조차도 자본은 독점자본의 손아귀에 장악했으며 지식은 순수지식이 아니라 오직 자본의 이윤을 위해 판매되고 소비될 때만 의미가 있는 사회가 되었다.
착취와 억압, 계급과 계급투쟁, 제국주의 지배와 예속에 맞서는 민족, 계급의 투쟁은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세상 속에서도 “세계거대담론이 현실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충분히 설명”하는 과학적 수단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1980년대 사회구성체, 사회성격 논쟁은 여전히 다원화된 세계, 변화무쌍한 세계의 본질을 총체적이고 과학적으로 인식하고 변혁하는 수단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파시즘과 소련이 다 ‘전체주’의라는 양비론을 공유하는 포스트모더니즘과 트로츠키주의
거대서사, 거대담론을 부정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은 “절대적인 진리나 기준은 없다”는 인식에서 나온다.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불가지론에서 나오는 것으로 절대적 진리를 부정하고 상대적이고 다원주의를 옹호하는 특성으로 나타난다. 이 포스트모더니즘의 두 번째 본질적 특성은 계몽주의와 그 발전으로 들어선 이성과 과학에 대한 부정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이 본질적인 두 가지 특성들은 어디서 나왔는가? 그것은 이성과 계몽주의가 야만을 낳았다는 것이다. 인간 이성과 합리성을 강조하는 계몽주의는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노동자와 자본가의 계급투쟁이 발전하면서 과학성을 잃어버리고 자본주의 착취를 옹호하는 부르주아 변호론으로 발전했다. 이성과 과학은 오로지 진보적 계급인 노동자계급과 노동자 투쟁을 옹호하는 사상에서만 온전하게 발전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사회주의고 맑스주의는 공상에서 과학을 옹호하는 가장 진보적인 사상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계몽사상 초기의 진보성을 상실하고 반동 부르주아지의 이념은 자유경쟁 자본주의에서 독점자본주의로 발전하면서 배외주의적이고 인종주의적인 파시즘을 낳았다. 노동자계급은 이 파시즘의 반동성과 사회전반의 후퇴에 맞서 인류의 진보를 지킨 마지막 보루였다. 파시즘을 격멸한 중심 주체는 소비에트와 민족해방투쟁이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은 파시즘과 소련을 위시한 사회주의를 공히 전체주의 야만체제로 보았다.
이로써 포스트모더니즘 근저에 깔려있는 핵심 방법론은 파시즘도 스탈린주의도 반대한다는 양비론이다. 그런데 이들의 양비론은 자본주의 수호노선으로 바뀌었다. 이들은 파시즘을 독점자본주의의 가장 배외적이고 인종주의적인 권력이라는 코민테른의 정의를 부정한다. 이들은 파시즘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부정이지만 자본주의로부터 나온다는 성격을 부정함으로써 파시즘은 반대한다고 하지만 민주적인 권력은 반대하지 않는다.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주의나 프랑스의 구조주의자들이 그렇다. 이들은 파시즘을 반대한다면서도 미국 같은 서방의 민주주의 국가들은 반대하지 않는다.
대신 이들은 스탈린의 소비에트와 현실 사회주의를 독일 파시즘과 동류에 있는 전체주의로 반대한다. 현실 사회주의를 적대하면서도 자본주의를 타도하지 않고 인정, 수용하기 때문에 이들의 양비론의 종착역은 결국 반공주의다.
이들은 소련 사회주의와 현실 사회주의가 파시즘과 같은 전체주의로 변모한 것은 이성이 다다른 결론, 이성의 가장 높은 단계인 사상, 맑스주의 사상이 현실에서 실현된 결과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성과 합리주의를 반대하고 객관진리는 인식할 수 없다고 보는 포스트모더니즘은 객관진리를 인식한다는 것은 당을 무오류의 중심으로 인정하는 사회주의의 문제를 낳는다고 본다. 이로 인해 이들은 총체적 인식을 거부하고 진리의 상대주의, 다원성을 옹호한다. 이는 오늘날 유행하는, 특히 청년들에게 유행하는 정의론, 공정론과 다를 바 없다. 이 정의론, 공정론은 나의 공정이 다른 이의 불공정으로 귀결되는 주관주의, 상대주의인데 과학적 개념인 계급과 계급투쟁을 부정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계급과 집단과 집단주의 대신에 개인과 개별을 전면에 내세운다. 이들의 인식은 포스트맑스주의 운운하며 맑스주의를 부정하는 흐름과도 맞닿아 있다.
신이라는 확고한 기반 위에서 작동했던 중세에서 빠져 나와 근대의 세계를 창조한 근대인들은 자신의 이성 능력에 대해 확신에 찬 신념을 갖고 있던 주체였다. 세계를 설명하거나 건설하는데 더 이상 신은 필요하지 않았다...
인간이 주체인 것은 인간에게 이성(사유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당이 이성의 화신인 이유는 당이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유물론이라는 과학적 사회주의 이론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민 의지의 뇌하수체'로서 '수령'은 이미 이런 스탈린주의적 정식화 속에 내재되어 있었다. 테제1_이성적 사유 주체로서 당.
마찬가지로 근대의 절대적 자아, 이성적 주체이자 역사 속으로 확장된 주체인 헤겔의 정신철학은, '정통' 맑스주의 안에서 역사적 주체로서 노동자계급으로 변주되었다. 모든 존재자는 개별자이면서도 보편적인 정신으로 수렴되는 주체이다. 여기서 개별적인 주체들은 각각 독립된 개체들이 아니다. 그것은 보편자인 절대정신의 자기 운동 안에서, 절대정신이 드러나는 과정을 통해서 정립되는 주체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성적 주체로 근대적인 인간은 역사를 정립하고 만들어가는 역사적 존재로서 주체의 의미를 획득한다. 역기서 '정통' 맑스주의는 헤겔의 정신현상을 물질의 자기 운동 과정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러므로 '정통' 맑스주의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통해서 세계에 대한 총체적 세계 인식이라는 세계관을 현실적인 정치권력의 무오류성으로 바꾸어 놓았다...
과학적 사회주의에서의 과학은 이론의 독단에 기초한 지식권력의 지배를 의미한다. 스탈린주의는 관료지배체제의 이데올로기다. 관료지배체제는 이와 같은 지식 독점에 의한 지배의 구축이다. 따라서 핵심적인 해체의 지점은 '전체주의'이다.
(박영균 지음, 맑스 탈현대적 지평을 걷다, 메이데이)
“절대정신의 자기 운동”이 역사발전의 주체인 노동자계급으로 “변주” 되었다는 자칭 포스트맑스주의자의 터무니없는 주장은 맑스주의를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두뇌를 정신이상으로 해체시킨다. “변주(變奏)”는 “본질을 유지하면서 형태나 분위기를 새롭게 바꾸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폭넓게 쓰인다.
과연 관념론으로서의 헤겔의 절대정신과 생산의 중심이자 자연과 사회개조의 중심인 집단적인 물질적 존재인 노동자계급이 무슨 본질을 유지하고 있단 말인가?
포스트 맑스주의자의 솜씨가 현란한데, 이들은 여기서 이성과 계몽사상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해 헤겔 비판, 맑스주의 비판으로 그리고 스탈린과 조선의 수령론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며 현실 사회주의를 전면 부정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맑스레닌주의에서 무오류의 당개념은 어디에도 없다.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유물론은 전일적인 철학적 방법이자 이론이지만 이는 역사발전의 법칙을 확고하게 인식하고 대중 보다 앞서 투쟁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자연과 인간세계의 법칙을 인식하는 강력한 수단이지만 현실은 계급투쟁 속에서 이루어진다. 주체적 힘과 외부의 힘 간의 쟁투 속에서 무수한 오류와 자기비판 속에서 앞으로 나아간다.
스탈린은 레닌의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 을 인용하여 당의 자기비판은 인민들 앞에서 의무이고 진실한 당의 표징이라고 하였다.
자기의 오류에 대한 당의 태도 여하는 그 당의 진실성 여하와 당이 사실에 있어서 자기의 계급과 근로대중에 대하여 그가 지닌 의무를 이행하는가 안 하는가를 보여 주는 가장 중요하고 가장 확실한 규준의 하나이다. 오류를 공공연히 시인하며 그 오류의 원인들을 밝혀 내며 오류를 낳게 한 환경을 철저히 분석하며 오류를 시정할 수단을 주의 깊이 연구 토의하는 것-이것이야말로 진실한 당이라는 표징이며 이것이야말로 당이 자기의 의무를 이행하는 것으로 되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계급을, 나아가서는 또한 대중을 교양하며 훈련하는 것으로 되는 것이다.
(스탈린, 《자기비판 구호의 비속화를 반대하여》)
《레닌주의의 기본에 대하여》에서도 스탈린은 당이 무오류라는 신화와는 정반대로 이야기하고 있다.
프롤레타리아 당들이 자기비판을 하는 것, 즉 그 당들을 그 자체의 과오를 교훈으로 삼아 훈련 교양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여야만 당의 참된 간부들과 참된 지도자들을 육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이 레닌주의 방법의 기본이며 본질이다...
나는 제2 국제당의 정당들이 자기 비판을 두려워 하면서 자기 잘못을 숨기는 태도, 절박한 문제를 덮어 버리고는 만사가 잘 되어 간다는 속임수 - 이것은 생기 있는 사상을 무디게 하며 자기 잘못을 교훈으로 삼아 당을 혁명적으로 교양하는 사업을 저해한다-로 자기 부족점을 가리우는 태도, 레닌이 조소하고 치욕스러운 낙인을 찍은 이러한 태도에 대하여 서는 말하지 않겠다. 레닌은 자기의 소책자 《좌익소아병》에서 프롤레타리아 당들의 자기 비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자기의 오류에 대한 당의 태도 여하는 그 당의 진실성 여하와 당이 사실에 있어서 자기의 계급과 근로대중에 대하여 그가 지닌 의무를 이행하는가 안 하는가를 보여주는 가장 중요하고 가장 확실한 규준의 하나이다. 오류를 공공연하게 시인하며 그 오류의 원인을 밝혀 내며 오류를 낳게 한 환경을 철저히 분석하며 오류를 시정할 수단을 주의 깊게 연구 토의하는 것-이것이야말로 진실한 당이라는 표징이며 이것이야말로 당이 자기의 임무를 이행하는 것으로 되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계급을, 나아가서는 또한 대중을 교양하며 훈련하는 것으로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잘못을 드러내고 자기 비판을 하면 프롤레타리아 당의 적들이 이것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당에는 위험한 것이라고 한다. 레닌은 이런 반대 의견은 진지하지 못한 것이며 또한 전혀 옳지 못한 것이라고 인정하였다.
어디에 무오류의 당론이 있는가? 스탈린은 레닌을 인용하며 오류를 인정하고 자기비판을 통해 정정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당만이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당이 될 수 있다고 정반대로 주장하고 있지 않은가?
뇌수로서의 수령은 인민대중에 군림하는 관료주의성의 의미가 아니라 오직 인민대중에 의거하고 인민대중에게 복무할 때만이 그 참된 의의를 가지는 것이다. 이는 맑스레닌주의에도 마찬가지인데, 스탈린은 레닌의 말을 인용해 “‘인민이 의식하는 것을 정확하게 반영하는 것’ -이것이 바로 프롤레타리아 독재 체계 내에서의 기본적인 지도적 역량이라는 영광스러운 역할을 당에 보장하여 주는 필수 조건인 것이다.”(스탈린,《레닌주의의 제 문제에 대하여》)라고 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인민의 바다 위에서 헤엄 치고, 인민의 대지 위에서 숨을 쉬며 “광대한 인민 대중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그들의 힘과 하나가 된다”는 맑스레닌주의 당론의 핵심이다.
“무오류의 당론”은 있지도 않은, 사실과는 정반대의 주장으로 현실 사회주의의 혁명적 지도자를 중상하고 사회주의를 “관료 지배체제”로 매도하기 위한 제국주의와 이에 영합한 제국주의 주구들의 프로파간다이다. 이러한 정치적 사조는 어떤 정치의 영향을 받았는가?
호르크하이머는 현실사회주의를 ‘권위주의 국가’, ‘억압체제’, ‘총체적 관료주의’, ‘거짓의 산물’, ‘야만의 단계’와 동일시한다. 이와 같은 비판의 수사학은 후기 호르크하이머의 현실사회주의 비판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이와 같은 호르크하이머의 입장은 한편으로는 독일 공산당과 동유럽 공산당에 대한 소비에트의 관리와 통제, 권위주의 국가화된 레닌과 스탈린체제에 대한 그의 공격적인 시각의 반영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문명 비판적 역사철학적 전회의 반영이기도 하다. 인간과 자연의 상호관계에서 역사의 진보와 퇴행을 새롭게 해석하고자 한 호르크하이머에게 인간과 계급간의 갈등과 모순에 근거한 맑스의 역사철학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간과하고 인간의 문제에만 매몰된 오류를 범한 것이다.
(이하준 한남대, “호르크하이머는 맑스주의자인가?: 초기, 중기, 후기 사유에서 맑스의 이론적 위상”)
맑스주의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간과”한다는 주장은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간주하고 자연과 상호작용하며 노동을 통해 자연을 개조해 나가는 것이 맑스주의의 기본 출발점인 것을 간과하는 심각한 왜곡이다.
엥겔스는 《자연변증법》에서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자 법칙의 지배를 받지만, 동시에 법칙을 인식함으로써 자연을 변화시켜나는 주체로 인식했다. 맑스는 《자본론》에서 무계획ㆍ무정부적인 자본주의 사회, 토지를 대규모로 사유화 하는 자본주의 사회가 인구를 대도시에 집중시키고 지력을 낭비해 토지를 황폐화 시키며 물질대사를 파괴하고 있다고 폭로하였다.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은 “이성적 주체이자 역사 속으로 확장된 주체인 역사적 주체로서 노동자계급”이 “역사를 정립하고 만들어가는 역사적 존재”라는 것을 부정한다. “노동자중심성”을 부정하는 이들에게 남은 것은 원자화된 개인이고 개별이다. 집단주의는 개인주의로 대체된다. 이들 포스트맑스주의는 사실 포스트모더니즘이다.
근대성 비판과 더불어 탈post현대성, 현대성을 넘어서고자 하는 포스트적 작업은 맑스주의의 지반을 탈현대전 지반과 접목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 지형 속에서 맑스와 프로이트S. Freud(라캉K.Lacan), 맑스와 니체F.Nietzche(푸코, 들뢰즈G.Deleuze), 맑스와 스피노자B.de Spinoza(알뛰세르L.Althusserㆍ발리바르E.Balibar, 네그리A.Negi, 들뢰즈ㆍ가타리F.Guattari), 맑스와 마키아벨리N.Machiavelli(알뛰세르ㆍ발리바르, 네그리, 그람시A.Gramsci), 맑스와 베르그송H.Bergson(들뢰즈)의 결합이 시도되고 있다. 그러나 포스트적 담론은 거대 담론을 해체하고 이성ㆍ합리주의에 대한 대항전선을 구축함으로써 이성 너머의 영역으로 초월하고자 한다.
(박영균, 같은 글)
이들 포스트맑스주의주의자들은 여전히 포스트(이후)지만 이름에서는 맑스주의를 버리지는 않고 있지만 맑스와 각종 반맑스, 비맑스주의자들을 절충적으로 묶음으로써 실제로는 맑스주의에 적대하고 있다. 엥겔스는 이러한 절충주의를 잡탕 꿀꿀이죽으로 불렀는데, 이들의 사상 조류가 바로 그런 것이었다.
포스트모던 시대가 왔다는 믿음은 일반적으로 사회주의 혁명이 가능하다거나, 혹은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거부하는 입장에 동조하는 것이기도 하고, 또 혁명이 불가능하다고 인식하는 것은 포스트모던 시대가 왔다는 믿음을 널리 확산시키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
리오타르는 혁명에 대한 거부를 포스트모더니즘을 구성하는 좀더 일반적인 현상, 즉 '큰 이야기' 붕괴의 한 예로 들고 있다. 그는 큰 이야기를 특히 계몽주의, 다시 말해서, 주로 18세기 프랑스와 스코틀랜드 사상가들의 계몽주의와 연관짓고 있는데, 이들은 자신들이 17세기 과학혁명의 특징이라고 믿었던 이론적 탐구 방법을 물리적 세계에 대한 설명에서부터, 이성을 통해서 환경을 지배하려는 더욱 광범위한 인간의 시도의 일부로써 사회를 설명하는 데까지 확장하고자 했다...
그러나 리오타르는 이제 모든 계몽주의 기획이 붕괴했다고 주장한다.
"진보가 실현 가능하고 필수적이라는 이러한 생각은 예술, 기술, 지식과 자유의 발달이 인류 전체에 유익하다는 확신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2세기가 지난 지금 우리는 그 정반대를 의미하는 기호들에 더욱 민감하다. 살벌했던 지난 2세기 동안 나타난 경제적ㆍ정치적 자유주의는 물론, 여러 종류의 맑스주의조차 인류에 대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혐의를 벗을 수 없다. 어떤 종류의 보편적 해방을 향한 일반적(경험적이든 사변적이든) 진보 과정에서 아우슈비츠를 지양할 수 있겠는가?"
리오타르는 그 해답으로 '사소한(trivial)' 사유를 내세운다.
(알랙스 캘리니코스, 《포스트모더니즘 비판》, 성림)
진보 과정에서 아우슈비츠는 소련의 노동교화소를 의미한다. 이는 쿨락이다. 이제 사회주의에서 노동을 통한 인간교화라는 노동교화소는 히틀러 파시즘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같은 파쇼 인민학살 기구로 전락했다.
거대 서사에 대한 거부는 실제로는 “혁명에 대한 거부”였다. 그러나 캘리니코스는 이를 전면 비판하는 것을 책의 중심 기조로 삼지 않는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주장하는 “스탈린주의는 관료지배체제의 이데올로기다.”라는 정식은 트로츠키주의의 정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비운의 북한 황태자’ 김정남이 이복동생의 치명적 경계심으로 마침내 비명에 갔다...참으로 대단한 집안이다. 그런데 김정은이 이런 잔인한 짓을 한 때가 남한에서 반정부 운동이 한창이라는 사실이 시사적이다.”(최일붕, 스탈린주의란 무엇인가?,〈노동자 연대〉 198호, 2017-02-24)에서도 “전면적(관료적) 국가자본주의”로 정의하고 있다.(여기서는 참으로 비운의 ‘맑스주의자’인 최일붕의 조선사회주의에 대한 조선일보급의 저급한 반공주의 인식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
파시즘이나 스탈린주의 체제나 다 전체주의 체제이기에 “핵심적인 해체의 지점은 ‘전체주의’”라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양비론적 인식이 여기서 나왔다. “스탈린주의와 파시즘 양자를 해체하는 탈현대성의 모색”(박영균, 같은 책)이라는 주장에서 보듯, 탈현대성, 즉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 인식은 양비론이다.
프랑스 구조주의자인 들뢰즈 역시 이러한 사고를 철학적 출발로 하고 있다.
물론 전체주의 국가라는 개념은 파시즘의 발명품이지만, 파시즘을 파시즘 자신이 발명한 개념에 의해 규정할 필요는 없다. 스탈린주의 유형 또는 군사 독재 유형처럼 파시즘 없는 전체주의 국가가 있기 때문이다.
(들뢰즈, <천개의 고원>, 새물결, 문영찬, 《세계관과 변증법적 유물론》, 노사과연)
데리다 역시 소련을 전체주의라고 규정하였다. “...마르크스적 비판의 정신을, 우리는 존재론, 철학 또는 형이상학 체계로서, 변증법적 유물론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 및 역사 유물론으로서 또는 방법으로서 마르크스주의와, 또 당의 장치들과 국가장치들로 또는 노동자 인터내셔설로 합체된 마르크스주의와 구별해 보고 싶다.”(데리다, <마르크스의 유령들>, 문영찬, 같은 책)는 데리다의 해체주의는 궁극적으로 맑스주의의 혁명적 사상을 해체시키려 하는 사상이 아닌가? 맑스주의에서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유물론, 당과 인터내셔널을 빼고 유령과 송장으로 남은 맑스주의를 과연 맑스주의라고 할 수 있는가?
이는 트로츠키주의도 마찬가지다.
소련의 보나파르트 체제는 노동계급의 세계혁명이 늑장을 부리는 바람에 등장했다. 그러나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똑같은 이유로 파시즘이 등장했다. 소련에서는 무제한적인 권력을 휘두르는 관료집단이 소비에트 민주주의를 압살하고 있으며 서방에서는 파시즘이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압살하고 있다. 이 두 현상은 동일한 원인의 산물이다. 즉 역사가 제기한 문제들을 세계 노동계급이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발생했다. 이 결론은 처음에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불가피할 뿐이다. 스딸린 체제와 파시즘 체제는 사회적 기초는 판이하지만 동일한 현상이다. 이 두 체제의 특징은 지독히 비슷하다.(트로츠키, ≪배반당한 혁명≫)
“스딸린 체제와 파시즘 체제는 사회적 기초는 판이하지만 동일한 현상이다.”라는 트로츠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이 서로 다른 사상적 기초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지독히 비슷”한 지점이 바로 이것이다. 트로츠키주의 내에서 <노동자연대>로 대변되는 국제사회주의자들이 “워싱턴도 아닌 모스크바도 아닌”이라는 국제주의 구호가 여기서 나왔다.
이들 균형감각을 자랑하는 일단의 양비론자들에게는 스탈린이 지도자로 있던 소련이 인민들 2700만이 희생당하는 사상 유례 없는 고난 속에서도 파시즘을 격퇴한 주체라는 것은 고려할 여지도 없다.
트로츠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이 서로 다른 사상이지만, 위처럼 양비론이라는 점에서는 핵심적인 본질을 공유하고 있다. 트로츠키주의 국가자본주의론이 “워싱턴도 아닌 모스크바도 아닌” 양비론이라는 비판에 대해 최일붕은 이렇게 반박한다.
노정협은 노동자연대가 “현실사회주의를 타도해야 하는 국가자본주의로 본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우리는 스탈린 치하의 소련이 1928년 이후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사회로 전환됐다고 본다. 그러나 노정협이 이를 두고 서방 자본주의 타도와 동일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심각한 왜곡이다. 1947년 이래 국제사회주의경향의 구호는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아니다”였지, “모스크바도 워싱턴도 아니다”가 아니었다.
(최일붕 노동자연대 운영위원, "전국노동자정치협회(노정협)의 반박에 대한 재반박", 〈노동자 연대〉 580호, 2026-04-20)
트로츠키주의 내 토니 클리프식의 국가자본주의론과 그 추종자인 〈노동자 연대〉의 논리에 대해서는 “<노동자연대> 최일붕의 《맑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ㅡ신좌파 다원주의 이데올로기 비판》의 비판에 대해 ㅡ 국가자본주의 이데올로기 비판을 중심으로”, 2026년 4월 22일)에서 한 비판을 참고하기 바란다.
최일붕은 “스탈린주의 비판이 곧바로 반공주의와 동일하지 않다”며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노정협의 논리대로라면, 헝가리 노동자들의 봉기도 “제국주의 프로파간다”인가? 1968년 프라하의 봄도 CIA의 음모인가? 1980-81년 폴란드 솔리다르노시치도 서방의 공작인가? 이런 식으로 미국과 갈등 빚는 나라들의 노동자 저항을 모두 제국주의의 조종으로 치부하면, 노동계급의 자체 활동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계급 사회로서 소련과 동구권도 서방과 마찬가지로 위기와 계급 투쟁으로 점철됐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노동자들은 1953년 체코슬로바키아와 동독, 1956년 폴란드와 헝가리,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1980~1981년 폴란드에서 봉기했다. 1980년대 말과 1990년대에 소련과 우크라이나 탄광, 벨라루스에서의 파업은 소련 붕괴를 촉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봉기들은 외부 조종의 산물이 아니라 지배 관료가 자본 축적을 위해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을 쥐어짜면서 발생한 것이었다.(최일붕, 같은 글)
동유럽과 소련 해체에 대해 “마르크스의 사상에 충실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이 체제의 타도를 위해 진심으로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전망에서 스탈린주의의 붕괴는 애도가 아니라 축하할 일이었다.”(알렉스 캘리니코스,《마르크스의 사상》, 북막스, 13쪽)는 주장과 이를 추종하는 <노동자연대>의 양비론이 과연 레짐체인지로 사회를 붕괴시키려 기도했던 제국주의에 봉사하는 이론이 아니란 말인가?
반공주의는 가상의, 관념의 사회주의에 대한 반대가 아니다. 소련과 동유럽, 중국, 쿠바, 조선 등 현존하는 사회주의를 적대하고 반대하는 이념이자 폭력이었다. 한국에서 반공주의가 반북주의와 무관할 수 있는가?
현실 사회주의 “타도를 위해 진심으로 노력”하고, 동유럽과 소련 사회주의 해체를 “축하할 일이었다”는 자들이 아무리 맑스주의를 내걸었다고 하더라도 반공주의자들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동유럽과 소련 해체로 제국주의자들과 부르주아는 “이데올로기의 종언”이니 “자본주의의 영구번영”이니 하면서 얼마나 환호했던가? 노동자계급은 이 패배로 말미암아 얼마나 많은 혼란과 좌절, 패배를 겪어야 했던가?
과연 그런데도 “스탈린주의 비판이 곧바로 반공주의”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미국과 갈등 빚는 나라들”, 즉 리비아, 시리아, 이란 등지에서 미제의 레짐체인지 공작으로 일어난 시위에 대해 민주주의 시위라고 지지하고, 쿠바 반혁명 시위를 민주주의 투쟁이라며 적극 지지했던 <노동자연대>의 행위가 제국주의의 이해에 복무하는 이적행위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소련 붕괴를 촉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소련과 우크라이나 탄광, 벨라루스에서의 파업”이 계급투쟁이라면 그것이 과연 소련을 무너뜨리려는 제국주의자들과 여기에 부응한 내부 반혁명 세력들에 의한 반혁명의 계급투쟁이 아니란 말인가?
최일붕이 예로 든 동유럽에서의 “민중봉기”는 혁명이 아니라 사회주의를 무너뜨리려는 반혁명이었고 이는 어김없이 제국주의자들의 지지와 지원을 받았다.
뜨로쯔끼주의가 하나하나의 반혁명 운동을 편들다
쏘련공산당의 20차 당대회에서 수정주의의 승리의 여파로, 그리고 그것의 직접적 자극하에, 노동자계급 당들 내에서 부르주아-민족주의적 경향들이-교회뿐만 아니라 제국주의 대리인들과 방송매체 등과 긴밀히 협조하여 활동하는 -약간의 인민민주주의(국가-역자)들에서 표면화되었다. 수많은 곳에서-가장 유명한 것은 헝가리-이들은 반혁명적 봉기를 일으켰다. 사회주의와 노동자계급의 지배를 반대하는 방향의 이러한 격변들이 모든 곳에서, 뜨로쯔끼주의자들우 으레 예상되듯이, 제국주의, 반동, 반혁명과 성직자 파시즘clerico-facism의 편에 섰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극단적인 수정주의자들이, 두브체크 지도부하에, 자본주의 경제와 복수정당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복고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개혁’의 느린 속도를 참지 못하고 소위 프라하의 봄을 시작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목표가 “맑스주의를 쓰딸린주의적 및 관료주의적 왜곡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고 “공산주의 운동의 인간주의적 사명을 공식화하는 것”이라고 완곡하게 선언했다. 이들 외관상으로 매력적인 구호들의 의미는 1989년 기간-그 시기까지 폴란드와 헝가리에서 공산당들의 청산이, 그들 나라에서 경제의 사회주의적 계획으로서 남아있는 것들의 해체가, 그리고 자본주의와 부르주아 민주주의로의 돌입이, 제국주의와 그것의 정신적 무기인 바티칸의 부드러운 자비하에서 명확하게 되었다-동안에 모두 명확하게 드러났다...
뜨로쯔끼주의자인 피터 울은 반공산주의적인 77헌장의 가장 활동적인 성원 중의 한 사람이었다. 1988년 10월 15일에 77헌장의 지도자들과 다른 반대파 그룹들은 시민적 자유를 위한 운동의 선언Manifest of the Movement for civil Liverty-특히, “경제적 및 정치적 복수주의”, “중앙집중화된 관료주의의 멍에”로부터 사업을 자유화할 것, “상업, 수공업, 중소규모의 사업에서 ... 사적인 기업의 완전한 재설립”, 그리고 “노동의 국제적 분업에 기초하여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체코 경제를 ... 세계경제로 통합하는 것”을 요구하는-즉 자본주의 복고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위한 선언에 서명을 했다. 스스로 벨벳 반혁명의 이러한 선언에 동정적이라고 선언하면서도 울은 그것에 서명하는 것이 시의적절한 것인지 판단하지 못하고 심지어 그것을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그리고 “전체주의”라고까지 비난하였다.
결론은? 그것을 탄핵하고 그리고 스스로를 그것으로부터 분리하는 대신에 그는 그 선언을 환영했는데, 왜냐하면 그것 안에 “대기업에서 노동자 통제를 위한 요구”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요구는 제국주의 나라들에서 주식소유 민주주의라는 사기가 넘쳐나는 그러한 종류의 것이었다.
(하르팔 브라르, 《트로츠키주의인가 레닌주의인가?》, 문영찬 옮김, 노사과연)
바츨라프 하벨(1936∼2011) 전 체코 대통령은 반체제 극작가에서 탈공산화 이후 첫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력이 말해주듯 조국만큼이나 곡절 많은 삶을 살았다.
부르주아 가문 출신이었던 하벨은 체코슬로바키아가 소련의 영향권에 들면서 인문학 고등교육을 받지 못했다. 스무살 무렵부터 글을 쓰기 시작한 그는 공산주의 독재에 날을 세우는 작품들을 발표하며 정부의 요시찰 인물로 낙인찍혔다.
1968년 '프라하의 봄'은 정치에 직접 뛰어드는 계기가 됐다. 반체제 록그룹 탄압에 반발한 1977년의 이른바 '77헌장'을 주도한 뒤 4년 가까이 투옥됐다. 이미 체코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 된 그는 1989년 공산정권이 무너진 직후 대통령이라는 어색한 옷을 입게 됐다. 비폭력 무혈혁명을 뜻하는 '벨벳 혁명'이라는 용어는 당시 그의 연설에서 나왔다.
(“'체코 벨벳혁명' 바츨라프 하벨이 말하는 정치와 도덕”, 연합뉴스, 2016-05-23)
하벨과 마찬가지로 반혁명 운동을 주도하고 사회주의 해체 이후 1990년 폴란드 대통령이 된 인물은 바웬사였다.
로마 교황청은 바웬사와 연대노조 운동에 전폭적 지지를 보냈다.
특히 그의 가톨릭 신심은 평화적 자유화 투쟁 노선을 견지하게 됐다.
그는 연설하는 장소마다 반드시 벽에 십자가를 내걸었고 중요한 모임에 나갈 때마다 십자가를 챙긴 것으로 유명하다. 이것은 가톨릭교회에 대한 헌신을 드러내는 것이었으며 또한 노조운동을 통해 폴란드를 소생시키겠다는 강한 의지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81년 초 그가 로마를 방문했을 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의 용기와 신중함 그리고 온건노선에 찬양을 보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바웬사, 그는 누구인가", 가톨릭신문, 2017-07-07)
반공 극우들이 바웬사에게 찬사를 보내는 것은 당연하다.
바웬사는 쉽지 않은 전환기에 뽈스까를 이끌면서 경제 개혁의 길을 확실히 택했습니다. 그는 '충격요법'이라 불리는 엄격한 개혁 정책과 구조 조정을 추진해 뽈스까의 공산주의 중앙계획 경제를 사유화시켜 현대적인 자유시장 경제로 변화시켰습니다. 전환기는 뽈스까 사람들에게 쉽지 않은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충격요법' 덕분에 뽈스까는 결국 성공했습니다.
(그렉 스칼라튜 ∙ 미국 북한인권위원회 사무총장, "폴란드 자유노조의 유산", 라디오 프리 아시아, 2021.09.21.)
'충격요법'은 바로 동유럽과 소련해체 과정에서 나타났던 국유기업의 대대적인 사유화와 대규모 정리해고와 복지체제의 해체 같은 재앙이었다.
나는 1980년에 체코슬로바키아에서의 헌장77운동과 1981년 폴란드에서의 연대노조 운동에 대한 지원을 시작했다. 나는 1984년에 내 조국인 헝가리, 1986년 중국, 1987년 쏘련, 1988년 폴란드에서 따로 기금을 설립했다. 나의 업무는 쏘비에트 체제 붕괴를 가속화하도록 했다 … 그러나 나는 나찌즘이나 공산주의처럼 같은 범주에서 자본주의를 자유방임주의로 두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전체주의 이데올로기는 의도적으로 열린사회의 붕괴를 추구한다.(조지 소로스, “자본주의의 위협”, Atlantic Monthly, Volume 279, No. 2, February 1997)>
조지소로스의 열린사회재단이 미국 CIA와 미국민주주의재단(NED)과 결탁해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조지 소로스는 대놓고 "체코슬로바키아에서의 헌장77운동과 1981년 폴란드에서의 연대노조 운동"을 지원하여 레짐체인지 공작을 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조지 소로스 역시 나찌즘이나 공산주의를 전체주의라 반대하는 양비론으로 무장하고 반공주의를 했다.
이것이 바로 "워싱턴도 아닌 모스크바도 아닌" 양비론의 반공주의 실상이다. 카톨릭의 이름을 내걸었든, 전체주의 반대 이름을 내걸었든, 맑스주의 이름을 내걸었든 그 정치적 실상은 제국주의에 봉사하는 것이었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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