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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동권과 건강권 없는 자동화는 소비 없는 성장을 낳는다 —기계화 시대, 인간을 위한 재분배 설계가 먼저다
문귀영(노동운동가)
등록일 : 2026.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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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물류 창고 안에서 인공지능(AI)을 탑재한 로봇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다. (사진=gettyimagesbank)

 

인공지능이 콜센터 상담원의 자리를, 법률보조원의 서류 작업을, 은행 창구 직원의 업무를 하나둘 대신하고 있다. 최근 환구망이 보도한 영국 전문가들의 진단처럼, 표준화되고 반복적인 업무일수록 AI로 대체되기 쉽고 전문적 판단·인간관계·돌봄이 필요한 직무는 상대적으로 살아남는다는 분석은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 진짜 질문은 "어떤 직업이 살아남는가"가 아니라 "그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을 때, "그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을 때, 사회는 무엇으로 지탱되는가" 이다.

 

자본은 스스로를 소비하지 못한다


자본주의 경제의 기본 원리는 단순하다. 노동자가 임금을 받아야 그 돈으로 물건을 사고, 그 소비가 다시 기업의 매출이 되고, 매출이 다시 임금으로 순환한다. 기계가 아무리 정교해져도 기계는 소비하지 않는다. 로봇은 자동차를 사지 않고, AI는 아파트를 임대하지 않으며, 알고리즘은 자녀를 병원에 데려가지 않는다.

 

노동에서 밀려난 인구가 늘어날수록 이 순환 고리는 끊어지고, 생산은 넘치는데 살 사람이 없는 기이한 풍요의 마비가 찾아온다. 20세기 대공황이 과잉생산과 구매력 붕괴의 조합에서 비롯됐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AI로 인한 대량 실업이 단순한 개인의 불운이 아니라 체제 전체의 위기로 번질 수 있다는 경고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노동권 없는 효율화는 결국 부메랑이 된다


기업 입장에서 AI 도입은 인건비 절감이라는 단기적 이익을 안겨준다. 그러나 그 이익이 사회 전체로 확산되지 못하고 소수 자본과 주주에게만 집중된다면, 장기적으로는 기업 자신의 시장도 축소된다. 노동권 확보란 단순히 해고를 막는 소극적 방어가 아니라, 자동화로 발생한 생산성 향상의 과실을 노동자와 사회가 함께 나누도록 하는 적극적 설계여야 한다.

 

노동조합이 AI 도입 협상 과정에 참여할 법적 권리를 보장받고, 자동화로 절감된 비용의 일부가 재훈련 기금이나 전환수당으로 돌아가는 구조를 제도화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유럽연합의 AI법이 노동자 영향평가를 일부 규정에 포함시킨 것이나, 할리우드 작가·배우 노조가 AI 사용에 관한 단체협약을 이끌어낸 것은 각기 다른 산업이지만 같은 문제의식—인간의 노동이 기계에 밀려나는 속도를 사회가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을 공유한다.

 

건강권은 노동권과 분리될 수 없다


일자리를 잃는다는 것은 소득만의 문제가 아니다. 많은 나라에서 의료보험, 정신건강 지원, 산업재해 보상 등이 고용 상태와 직결돼 있다. 실직이 곧 건강권의 상실로 이어지는 구조에서는, AI로 인한 구조조정이 단순한 경제 통계가 아니라 개개인의 생존과 존엄의 문제가 된다. 특히 실직과 소득 불안이 만성 스트레스, 우울, 자살률 증가와 상관관계를 보인다는 것은 여러 나라의 역학 연구가 반복적으로 확인해온 사실이다.

 

따라서 노동시장 정책과 공공의료 정책은 더 이상 별개로 설계될 수 없다. 고용과 무관하게 기본적인 의료 접근권을 보장하는 사회안전망—전 국민 건강보험이든 최소한의 공공의료 인프라든—이 AI 시대의 사회적 완충장치로 재조명받아야 하는 이유다.

 

경제 활성화, 결국 사람에게 투자하는 문제


기본소득, 로봇세, 노동시간 단축 등은 저마다 논쟁적이다. 기본소득이 노동 의욕을 꺾는지, 로봇세가 혁신을 저해하는지에 대해 경제학자들의 견해는 여전히 갈린다. 그러나 이런 정책들이 공유하는 공통된 통찰은 분명하다. AI가 만들어내는 생산성 향상의 이익이 소수에게만 머무르지 않고 사회 전체의 구매력으로 재순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재교육과 평생학습에 대한 공공투자를 늘리는 것, 노동시간을 단축해 그 여유를 여가와 재교육에 쓰도록 하는 것, 자동화로 인한 세수 감소를 새로운 방식의 과세로 메우는 것—이 모두는 결국 "인간이 계속 소비할 수 있는 조건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라는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된다.


기술의 진보를 막을 수는 없고, 막아서도 안 된다. 그러나 그 진보의 방향을 인간의 노동권과 건강권, 그리고 경제 순환의 지속가능성에 맞춰 설계하는 일은 전적으로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AI가 인간을 대체하는 시대가 아니라, AI가 인간을 위해 일하는 시대를 만드는 것—그것이 지금 정부와 기업, 그리고 사회가 함께 풀어야 할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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